경민대학 문화예술아카데미 서예반 2009년 봄학기 수강생을 아래와 같이 모집 합니다.

 

모집기간 ; 2009년 1월 6일 까지 선착순

부      문 ; 한글, 한문 서예

등  록 비 ; 6개월 20만원

수      업 ; 매주 금요일 10시~14시수업

강      사 ; 장석 서명택  010-3345-9060 마감후에 상담

등록 문의 ; 경민대학 평생교육원 031-828-7122

 

 

의정부 문화원 서예반 2009년 봄학기 수강생을 아래와 같이 모집 합니다.

 

모집기간 ; 2009년 1월 8일 까지 선착순

부      문 ; 한글(화), 한문(목) 서예

등  록 비 ; 6개월 6만원

수      업 ; 매주 화, 목요일 10시~13시수업

강      사 ; 장석 서명택  010-3345-9060 마감후에 상담

등록 문의 ; 의정부 문화원 031-872-5678

 

 

 

 


#글씨체 #예쁜글씨체 #수제도장 #손글씨 #서예 #서체 #낙관 #전각 #예쁜손글씨체 #손글씨체 #글자체 #붓글씨 #붓글씨체 #판본체 #서예작품 #서예배우기 #손도장 #간판글씨체 #서예글씨체 #낙관도장 #한글서예 #켈리서체 #붓글씨교본 #붓글씨연습 #전각재료 #한문서예 #캘리그라피낙과 #서예낙관 #붓글씨배우기 #현대서예 #무한서예연습 #서예연습 #서에 #서예대회 #한글낙관 #붓글씨쓰는법 #서예자격증 #서예작가 #서예강좌 #서예독학 #서예붓추천 #한국서예 #전각만들기 #한시작법 #한시 #사서삼경강의 #한문강독


'心眼齋 > 章石갤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정부서예  (0) 2009.02.04
장석 서명택 신년휘호  (0) 2009.01.02
유종원선생시 강설  (0) 2008.12.30
만장시집 도판  (0) 2008.09.15
자음시 우음 행서작품  (0) 2008.05.24

 

 

'心眼齋 > 章石갤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석 서명택 신년휘호  (0) 2009.01.02
의정부 장석서명택 무자년 가을 작품들  (0) 2008.12.30
만장시집 도판  (0) 2008.09.15
자음시 우음 행서작품  (0) 2008.05.24
자음시 우음  (0) 2008.05.24

★ 우리나라의 서예사 ★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B.C. 2-4세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문자 자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만 전한(前漢)시대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동경(銅鏡)이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일 이 있고, 그후 낙랑군(樂浪郡)유물로서 와당(瓦當)이나 전(塼)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당초부터 중국의 직접적 인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으며,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우세남(虞世南) 등은 많은 영향을 끼친 서가들이다. 

1.삼국시대 

  1)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의 문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한인(漢人)들은 낙랑(樂浪)시대부터 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일부에서 행정을 펴고 있었고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육지로 연접되어 고구려는 문화교류가 아니면 무력적 공방으로 그들과의 접촉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면에 있어서도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唐)에 의하여 왕조(王朝)가 없어지고 문화적 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으로 전해져야 할 고구려의 역사 마져도 겨우 왕의 세계(世系) 를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대부분의 사료는 오히려 중국측 자료에 의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고구려 서법(書法)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로는 예서(隸書)로 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해서(楷書)로 묵서(墨書)한 [년두루묘지(年頭婁墓誌)]와 행서인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원비(中原碑)]와 북지(北地)에서 발굴한 고분벽서(古墳壁書) 수 점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거비(巨碑)로서 자체는 한자의 크기가 30cm에 달하며 높이 7m의 4면에 빈틈없이 꽉 차여져 있다. 이 시기는 414년으로 중국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것인 년두루묘지도 해서를 쓴 것으로 보아 역시 해서를 상용하였을 것이며 왕릉에서 예서를 쓴 것은 특별히 정중과 장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없고 고구려에서 형성된 독특한 서풍을 이룬 자체이다. 얼마전에 발견된 중원비는 글자의 짜임 해는 능비(陵碑)와 공통된 것이 많으나 자체는 해서였고, 년두루묘(年頭婁墓)의 벽서(壁書)는 필력에 박력이 넘쳐흘러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평양석각은 성벽에 있는 것으로 행서인데 자체는 육조(六朝)의 특징을 잘 살린 힘찬 명품이다. 이는 상무적(尙武的) 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2)백제(百濟) 

  백제는 서법을 살펴볼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 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2종 뿐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북조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남조와의 접촉이 많았다. 무녕왕릉비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풍이다. 그러나 사택지적비는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려하면서 기품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의 수준높은 문화 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불상명(佛像銘), 와전명(瓦塼銘) 등이 유물로 남아있다. 

  3)신라(新羅)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과 왕래를 시작한 것은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비교적 많은 유적이 금석문(金石文)에 남 아 있다. 율주에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는 암벽 하부의 마애기(磨崖記)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인데 법 흥왕 때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진흥왕 때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3 군데의 순수비(巡狩碑) 가 있으며 진평왕 때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최근에 발견된 단양 적성비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비로서 이 비는 신라에서 한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법에 맞는 글자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이다. 문장이 병려체(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도 전중건엄(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육조풍을 띠고 있다. 신라의 서법은 자유분방하게 운필 한 가운데에도 장중하면서 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웅건강용(雄健剛勇), 백제는 우아유려(優雅流麗), 신라는 전중질실(典重質 實)함을 알 수 있다. 

2.통일신라 시대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에 의해 망하고 신라가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당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 관료의 자제들 도 많았으며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서법(書法)도 발달하여 많은 유적을 남겼다. 남북조시대는 자체가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서풍(書風)이 자유분방하며 고박(古朴)한 맛이 짙어 예술적인 풍격은 매우 높지만 자획(字劃)과 결구(結構)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초의 명가들에 해법( 楷法)의 규범이 정립되었고 서가들이 개성있는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적으로는 최근에 발견된 사본화엄경(寫本華嚴經)과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전해오는 고문서가 있을 뿐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상당수가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왕희지체가 주축을 이루었고 뒤에는 당의 구양 순체를 많이 썼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김생(金生)은 당시 서적(書蹟)으로 남은 것이 없다. 고려 초 기에 와서 그의 글씨를 집각(集刻)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김생의 글씨로 유일한 금석인데, 그의 서법의 전형은 왕희지에서 나왔다 할 것이나, 왕의 글씨는 온화한데 비하여 김생은 그 전서가 유동미(流動美)와 여율감(旅律感)이 생동하는 변화를 여러모 로 살려서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굴곡과 거세(巨細)를 달리하였다. 또한 자의 결구(結構)에 있어서도 상호조응(相互照應), 음양향 배(陰陽向背)의 묘를 마음껏 섭취하는 등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낭공비 이외에 법첩으로 전하는 전유(田遊), 엄산가서(嚴山家序), 당시첩(唐詩帖) 등이 전한다.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시문(詩文)에서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한 시기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이다. 그의 자선자서(自選 自書)인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는 구양순(歐陽詢)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비슷한 신품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에 비하여 양적으로 미치지 못할지라도 격에 있어서는 단연 우리 서예사상 결정에 달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3.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당에서 도입되었다. 제술(製述)과 명경(明鏡)이라는 두 개의 과(科)를 두었는데 제술(製述)은 시(詩), 부(賦) 등 문학작품으로 응시하는 것이지만 글씨도 따라서 선을 보이게 되므로 서학(書學)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書寫專門職)이 있어 설문(說文), 오경(五經), 자양( 字樣)의 기본과목 외에 진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의 실기과목이 있어서 그야말로 서예의 발전과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진적은 극히 드물어 금석(金石)은 비갈(碑喝)과 묘지(墓誌) 등이 많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서법은 당 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많았다. 구양순체는 자획이 방정건엄(方正健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데 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짐을 용인하지 않는 율법적(律法的)인 서법이므로, 특히 구체(歐體)가 많이 쓰인 듯하다. 고려시대의 명가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임현(林顯), 오언후(吳彦候) 등이 있고 우 세남(虞世南)에 능한 이로서 이원부(李元符), 장단설(張端說) 등이 있으며 이 외에 김원(金遠), 채충순(蔡忠順) 등이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 탄연(坦然)(1070 1159)이라는 대서가(大書家)가 출현했다. 탄연은 고승인 동시에 명필가인데 그의 법명 은 대감(大鑑)이고 속명은 손씨이다. 일찌기 유학의 경전에 통하였고 불법에 들어가서 뒤에 왕사(王師)까지 되었다.그는 고승이 었지만 서예로서 그 이름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文殊院碑)가 있는데 행서로서 왕희지의 성교서(聖敎書) 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으면서 일면 당대 이후로 전승되어 온 사경풍(寫經風)의 필법(筆法)이 합하여 새로운 일체(一體)를 형성한다. 그의 서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이 굳센 골(骨)이 있다고 하여 김생과 더불어 신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무렵의 서가로 승혜소(僧慧素)가 있는데 그는 당대로 부터 전해져 온 사경(寫經)에 바탕을 두고 세해(細楷), 대자(大字)에 모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통사(靈通寺) 대각국사비음기(大覺國師碑陰記)가 있다. 

  고려시대 후반 무신난이 일어난 뒤에는 정권이 무인(武人)의 손에 넘어 갔고 문인들은 도피하거나 무인에 붙어사는 처지로 전락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문화, 예술은 퇴보하게 되었고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충선왕은 원의 북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있을 때 당시 서가중 최고인 조맹 부와의 교류가 많아서 당시 왕을 따라 원에 간 문인들은 조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군해(李君孩), 이제현(李齊賢) 같 은 이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기의 서가로는 예서에 능한 권중화(權仲和), 한수(韓脩) 등이 있었으나 초기에는 미치지 못했 다. 

  고려 시대에는 비갈(碑喝)외에도 경판(經板), 사경(寫經)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묘지(墓誌)는 200여점을 헤아리고 있다. 연대로 는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에 걸친 모든 것이 나타나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묘지(墓誌)들은 일반 비석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행필하여 친말감을 갖게 하고 서체도 다양할 뿐 더러 공굴(工掘)의 차도 심하고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는 문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말기적 폐단을 척결하고 학자를 우우(優遇)하고 문치(文治)를 국시(國是)로 하여 서(書)의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서(書)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이 풍미하였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松雪)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다. 이는 충선왕때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서 배워온 관계도 있고 그의 진적(眞蹟)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교본이 되었고 법첩(法帖)으로 간각(刊刻)한 것도 적지 않 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 권근, 황희, 맹사성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安平 大君)이었다. 안평대군은 고려의 계승과 유습(遺習)을 새로운 기운(氣運)으로 쇄신하려는 기세와 고유한 민족기질을 농후케 하려는데 집중하고 계속적으로 서(書)의 연원을 탐구하는 한편, 진수(眞粹)를 체득하여 구현하려 하였따. 또한 안평대군은 서(書)에 만 능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도 능하였으며 박식(博識)은 고금에 통철(通徹)하고 도덕과 도량과 풍채에 뛰어났으며, 사리에 통하여 많은 이의 존경과 귀감이 되었다.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먼저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설체가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결과, 힘이 유약하고 여러가지 자형(字樣)이 판에 박은 듯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란 동안에 많은 힘을 입었던 명나라의 서풍이 많이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복고사상에 따라 왕희지의 서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차례의 모필을 겪은 것이어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기 의 서법이 현저하게 쇠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숙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 이것이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 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천록체(千祿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오랫동안 후대에 미쳐서 석봉체를 본받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서법이 쇠퇴하게 되었다. 

  후기의 서(書)를 알아보면 영조 이후에 일어난 자아각성으로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서(書)는 한국 서예의 원천으로서 또 그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백하 (白下), 윤순(尹淳)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체에 능하였고 특히 행서에서는 각 서예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서 스스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 혔다. 서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사조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청대의 학술은 다양하 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졌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완원(阮元),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 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초림 김미자의 서예이론강의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心眼齋 > 書藝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예치료 자료 모음  (0) 2009.07.06
청주 화양계곡 마애각석  (0) 2009.05.27
남원 황산대첩비 탁본  (0) 2008.07.01
영조대왕의 명암  (0) 2008.06.16
御製閣  (0) 2008.06.06

김영균님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담긴 사랑이야기'


        크리스마스 선물에 담긴 사랑이야기

        아직 돈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 한 키 작은 소녀가 보석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소녀는 윈도우에 장식된 보석을 한참 동안이나 살피고 당당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소녀는 주인 아저씨께 방긋 웃고는 자기가 결정한 목걸이를 가르칩니다. 큰 보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가격이 나가는 보석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선물할 것인데?’ 언니에게 줄 선물이예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우거든요. 언니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고 있었는데 이 목걸이가 꼭 맘이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것 같아요’ ‘그래,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지?’ ‘제 저금통을 모두 털었어요. 이게 전부예요’ 소녀는 저금통을 턴 돈을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싸왔습니다. 소녀는 돈이 담아있는 손수건을 모두 주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가엽게도 소녀는 가격에 대하여는 전혀 몰랐습니다. 소녀는 사랑하는 언니를 위하여 자기의 전부를 내 놓은 그것 밖에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가격표를 슬그머니 떼고 그 보석을 정성스럽게 포장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젊은 여인이 가게에 들어서는데 손에는 소녀에게 팔았던 목걸이가 들려있습니다. “이 목걸이, 이곳에서 판 물건 맞습니까?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 가게의 물건입니다.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팔았는지 기억 하시나요?” “물론이지요. 이 세상에서 마음이 가장 착한 소녀 였지요. “가격이 얼마지요? 주인이 보석 값을 말하자 그 여인은 몹시도 당황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런 큰돈이 없었을 텐데요?”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 할 수 없는 아주 큰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냈거든요. “ 가게를 나가는 여인 에게서도 두 눈에 감격의 눈물이 맺혔습니다. 보석가게 주인아저씨의 눈에서도 사랑함의 벅찬 감사의 눈물이 맺혔습니다. 보석보다 소녀와 언니와 가게 주인 아저씨의 아름다운 사랑이 더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세상은 사랑이 있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느 주부의 감동적인 사연

"그대를 위한 시" 란 창작 국악곡을 감상하시면서 

눈물없이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사연 읽으시면서 편안한 휴일 보내시고,

2008년 한 해 마무리 잘하시기 바랍니다.  

    어느주부의 감동글 안녕하세요 33살먹은 주부에요.. 32살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누가 좋다고 할수있겠어요.. 그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거는 하자는 데로 다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좀 들어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적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수습하로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때 골목에서 놀고있는데 지나가던 트럭에 (큰거 말고 중간크기요)받힐뻔 한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 였는데 남편이 군제대하고도 26살때쯤 까지 놀고 먹었더랍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되세요.. 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넘으셨을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할때 집 장만해주신다고 팔으시고 지금 전세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까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전 살림하고 남편혼자 버는데 한달에 150정도 벌어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모신다고 못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합니까..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하는데... 그래서 네달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모셔왔습니다.. 첨에 아버님 오지않으시려고 자꾸 거절하시더라구요.. 늙은이 가봐야 짐만 되고 눈치보인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왔습니다.. 모셔온 첫날부터 여러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아버님... 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반찬이나 맛있는거 해드리면 안먹고 두셨다가 남편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먹으라고 일부로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하시면 바로 들고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말라고 몇번 말씀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이못난 며느리 눈치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저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쓰고 모아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수가 없더라구요... 한달전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때쯤 들어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올게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그래요..아버님 아들집에 살면서 돈한푼 못버시는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몸 이끌고 하루하루 그렇게 박스주우시면서 돈버셨더라구요.. 그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안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좋은지 아버님 찾으로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몇일전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지내시고 눈치만 보시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날따라 아버님 웃으실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때까지 엉엉 울고있었습니다.. 남편나가고 한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오히려 죄송해야 할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가서 아버님께 죄송하다며 손꼭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때문에 내가 미안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하시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 첨 만져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베인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일 하지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일 하지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낸후 세명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먹는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해져서 아버님 잠바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보여서 힘들어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아버님 심심하실까봐 케이블TV도 신청했구요...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하시는데 오늘 야구방송이랑 낚시 방송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드리는데... 보기보다 정말 왜소하시더라구요... 제가 꽉잡아도 부서질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하시며서 살아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저 평생 아버님 정말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모신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처럼 생각하시면서 대해주실때까지 정말 잘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 저 눈치 안보셔도 되요...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잖아요 ㅠㅠ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셔야되요.. 그리고 두번다시 그렇게 일 안하셔도되요...저 허리띠 쫄라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출처// 국사모

     

 

 

 

 

 마하 선생님과 선묵회원들이 우정 서화전 오픈식에 참석차 강릉 방문

 선죽교 활래정에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연못 가운데 솔

'心眼齋 > 章石photo'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묵회원 윷놀이  (0) 2009.02.07
천보산 설경  (0) 2009.02.04
무각 김종칠 개인전 오픈  (0) 2008.11.15
소요산 마지막 단풍  (0) 2008.11.10
서울 제기동 약령시장 축제 가훈써주기  (0) 2008.10.11

尾    聯

頸    聯

頷    聯

首    聯

 

 

 

 

 

 

 

 

 

 

 

 

 

 

 

 

 

 

NO

 

 

 

吟歲暮寒天

電話

姓名

    

滿

이야기와 웃음으로 취흥을 펼친다네

송구영신하며 송년회 자리에는

시 읊는 시인은 초가집에서 즐긴다네

즐겨 그리는 화가는 대숲을 엿보고

지난해의 경영한 일은 불만인체 머무르네

내년의 소망은 무난히 넘어가고

머뭇거리는 학문은 머리 속에 남아있네

쌀쌀한 섣달에 만상이 비었는데

郵便

番號

雅號

480~814

'心眼齋 > 自吟漢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춘즉경  (0) 2009.02.18
懇願己丑吟 章石徐明澤 自吟詩  (0) 2009.01.20
自吟詩 小雪卽事  (0) 2008.11.24
尾 聯頸 聯頷 聯首 聯  (0) 2008.11.12
장석 서명택 정해,무자 자음시축  (0) 2008.09.19

 

 

 

 

서도협회 오산지부 창립 및 현판 전달식 후 경기도지회 각 지부장단 연석회의  

 

 내가 평소 사랑하고 존경하는 클레식 기타리스트 이진우의 공연모습입니다. 다음은 우리 서예동아리 회원전 모습^^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