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의 명암
영조(英祖)
1694(숙종 20)∼1776(영조 52).
조선 제21대 왕.
재위 1724∼1776.
성은 이씨.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
1. 가계와 왕세제 책봉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하여지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21년 숙종에 이어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고 또 아들이 없었다. 그해 노론측 정언 이정소(李廷熽)는 경종에게 후계자를 먼저 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은 숙종의 제2계비 김대비(金大妃:仁元王后)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들 노론측은 경종이 병환이 많고 효종·현종·숙종의 3대에 해당하는 혈통(三宗血脈)은 경종을 제하고는 왕제(王弟)인 연잉군(延礽君)밖에 없음을 들어 왕제를 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왕제의 세제책봉으로 기울어지자 연잉군(延礽君)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리고 소론측인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를 비롯, 사간 유봉휘(柳鳳輝) 등도 시기상조론을 들어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 노론측 대세에 밀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2. 대리청정 문제와 노론 소론 대립
이제 왕세제로 기반을 다지게 된 노론의 입장에서는 좀더 실권을 잡기 위해서 대리청정(代理聽政)까지 들고 나오기에 이르렀다.
먼저 노론측은 집의 조성복(趙聖復)을 앞세워 왕세제의 대리청정에 대한 정당한 명분을 주장하게 하였다. 그의 주장은 경종이 병이 많고, 또 1717년(숙종 43)에 숙종이 경종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정유고사(丁酉故事)를 들어 왕세제에게도 대리청정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경종은 노론측 주장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일단 허락하였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崔錫恒), 우의정 조태구 등이 읍간으로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어 중앙조정은 물론 지방의 감사·수령·찰방과 성균관학생 및 각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청정명령을 받은 왕세제도 네번이나 청정명령의 회수를 청하였다. 그러자 노론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정청(庭請)을 베풀고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자신의 명분을 세운다는 입장에서 “나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내렸다.
그러자 노론측 여러 중신들은 대리청정이 굳어진 것으로 판단, 청정명령을 거두라는 정청의식을 파하였다. 이어 노론측은 연명으로 왕명을 좇는다는 명분으로 숙종 말년의 정유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箚書)를 급히 올렸다.
노론측의 태도가 이와 같이 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들여 일의 해결을 다시 요청하였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정유청정은 숙종이 춘추가 높은 데다가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나 지금 왕세제의 대리청정 주장은 전하(殿下:경종)의 보령이 겨우 34세이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 전하의 병환과는 형세가 판연히 다르므로 청정명령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 대신들도 다른 명분이 없게 되었다. 이에 노론의 입장에서는 전번에 올린 대리청정을 허락하여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 차서가 잘못임을 인정, 또다시 청정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청정명령을 거두라는 정청을 베풀고, 이어 다시 연명 차서로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결국, 환수의 요청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노론측의 태도 변화는 신하로서 일관된 명분을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론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고 또 그들에게 가장 큰 입지를 마련하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3. 신축옥사 임인옥사
결국 1721년 기회를 잡은 소론들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주도하였다.
이듬해 기세를 몰아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은 남인 목호룡(睦虎龍)을 시켜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소론측은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세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왕세제도 이 모역에 가담하였다는 것이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들은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명도 유배 또는 치죄를 하는 대대적인 노론 축출을 단행하였다.
이때 임인옥안에 왕세제의 혐의도 함께 기록되었다. 이무렵 김일경 등은 또 내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왕세제를 보필하던 장세상(張世相)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왕세제가 형인 경종에게 문안하러 가는 것조차 막았다.
왕세제는 자신의 지지기반이던 노론이 축출되고 신변에 위협까지 받게 되자 계모인 김대비에게 사위(辭位)도 불사하겠다고 호소하였다. 김대비는 이러한 정국(政局)을 깊이 인식,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으므로 왕세제의 간절한 사정까지 담은 언교(諺敎)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반발을 누그러뜨렸다.
1724년 경종이 죽자 영조는 무사히 등극하게 되었다.
4. 즉위 후의 탕평책
노론·소론의 당론에 처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받은 뒤 1724년에 즉위한 영조는 바로 탕평정국의 서곡인 붕당의 폐해를 하교하였다.
영조가 탕평책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아마도 세제로 책봉된 뒤부터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왕세제로 책봉된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노론·소론의 당론이 심화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거기에 휘말렸으며, 그 때문에 생명의 위협까지도 받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노론을 다시 정계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하였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내 강경세력인 준론자(峻論者)들은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등 또다시 노론·소론의 파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에는 노론내 준론세력들을 축출하였다. 곧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론·소론내 탕평세력을 고르게 등용, 초기의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이때 인사정책으로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예컨대 노론 홍치중(洪致中)을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이태좌(李台佐)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金在魯)를 맡기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宋寅命), 참의에 소론 서종옥(徐宗玉), 전랑에 노론 신만(申晩)으로 상대하게 한 것이 그것이다.
그 뒤 영조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게 되자 기초를 다진 왕권으로 쌍거호대의 방식을 극복,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정국이 본궤도에 오르자 이의 정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그 기반을 강화시켜나갔다. 이러한 정국구도에 따라 노론·소론·남인·소북 등 사색을 고르게 등용, 탕평정국을 확대시켜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위 후 을사처분으로 노론을 불러들여 왕위정통성 확보와 탕평정국을 급히 서두르다가 1728년에는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측의 반발세력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었고,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 나주에 괘서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듬해 토역과(討逆科)를 보일 때 그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남인과 노론 명분 속에 미약한 권력을 유지하여 온 소론 등이 장헌세자(莊獻世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노론측 김한구·홍계희(洪啓禧) 등이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하여 장헌세자의 비행과 난행(亂行)을 고발하게 하여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5. 형률의 완화
한편, 1725년 영조는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1729년 사형수에 대해서는 삼복법(三覆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신중을 기하게 하였으며, 1774년 사문(私門)의 용형(用刑)도 엄금시켰다.
그리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인권존중을 기하고 신문고제도(申聞鼓制度)를 부활시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6. 경제정책
또한 영조는 경제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725년 각 도의 제언(堤堰)을 수축, 한재에 대비하였고, 1729년에는 궁전 및 둔전에도 정액을 초과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과세를 시켰다. 한편 오가작통(五家作統) 및 이정(里定)의 법을 엄수하게 하여 탈세방지에 힘썼다.
그런데 영조 재위 때에 그가 시행한 경제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균역법(均役法)의 시행이었다. 이 균역법의 시행으로 양역(良役)의 불균형에 따른 일반 백성들의 군역(軍役)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균역법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영조는 우선 조현명(趙顯命) 등에게 〈양역사정 良役査正〉을 올리게 하는 한편, 1750년에는 친히 홍화문에 나가 오부방민(五部坊民)을 만나 양역개정에 대한 여론을 수집하는 의지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 균역법 시행의 가장 큰 의의는 어느 정도 전국적인 양정수(良丁數)의 파악이 실제로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실제 파악작업은 조선 건국 이래 처음 시도된 것으로 왕권과 양반신분 및 농민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군역문제 해결에 있어서 지배층의 양보를 강요하면서까지 민생을 위한 개선책을 도모하였다는 데에도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환곡분류법(還穀分類法)을 엄수하게 하는 등 환곡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1763년에는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갔던 조엄(趙曮)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한재시에 기민을 위한 구황식량을 수급하는 데 획기적인 일익을 담당하였다.
7. 사회정책
한편, 사회정책을 실시, 신분에 따른 역(役)을 더욱 명백히 하였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균역법의 시행은 물론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하였다.
1730년에 양처(良妻)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에 따르게 하여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서얼차대로 사회참여의 불균등에 의한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으로 서자도 관리로 등용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영조는 그의 생전의 신념으로 이끌었던 탕평정국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서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는 서원·사우(祠宇)의 사건(私建) 또는 사향(私享)을 금지시켰다.
또 1772년에는 과거시험도 탕평과(蕩平科)를 처음 시행하는 특례를 보였고, 같은해는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를 집집의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8. 국방정책
영조는 즉위한 이듬해에 주전(鑄錢)을 중지시키고 군사무기를 만들게 하였다.
1729년에는 김만기(金萬基)가 만든 화차(火車)를 고치게 하였으며, 이듬해는 수어청(守禦廳)에 명하여 조총(鳥銃)을 만들게 하여 군기(軍器)의 수급에 만전을 기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제조한 해골선(海#골16船)을 통영(統營) 및 각 도의 수영(水營)에서 만들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떨쳤던 해군력을 계승,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한편 북방 변방 및 요새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727년에는 북관군병(北關軍兵)에게 총을 복습하게 하였고, 1733년에는 평양중성(平壤中城)을 구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을 개축, 이듬해 완성하였다.
9. 문화진흥정책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 필요한 것은 널리 반포시켜 일반백성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 《감란록 勘亂錄》을 반사(頒賜)하고 이듬해 《숙묘보감 肅廟寶鑑》을 편찬시켰다. 1732년 이황(李滉)의 학문세계인 《퇴도언행록 退陶言行錄》을 간행하여 올리게 하였다.
1736년에는 조선왕조의 근본법전인 《경국대전》을 수명(修明)시킴과 동시에 여성을 위한 《여사서 女四書》를 언역(諺譯)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1742년에 《천문도 天文圖》·《오층륜도 五層輪圖》를 모성(模成)시켰으며, 이듬해에는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 良役實摠》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1754년 《소학훈의 小學訓義》·《속오례의 續五禮儀》를 편찬하였고, 《경국대전》을 수명한 뒤 새로이 제도적으로 바뀐 것을 반영하여 《속대전》을 만들었다.
1747년 《황단의궤 皇壇儀軌》를 편찬한 뒤 이듬해에는 백성들을 다스릴 때 법을 선용하라는 취지로 만든 관리들의 필독서 《무원록 無寃錄》을 필삭, 훈석을 가하게 하여 각 도에 반포하게 하였다.
1749년에는 《속병장도설 續兵將圖說》, 1753년 《누주통의 漏籌通義》를 편찬하였다. 이듬해에는 영조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는 《천의소감 闡義昭鑑》을 이룩, 이를 내외에 반포하였다.
1747년에는 《삼국기지도 三國基址圖》·《팔도분도첩 八道分圖帖》·《계주윤음 戒酒綸音》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1765년 《해동악장 海東樂章》을 만들고, 《여지도서 輿地圖書》를 인간(印刊)하게 하였으며 각 도의 읍지도 모으게 하였다.
한편 177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동국문헌비고》를 만들어 오늘날 《증보문헌비고》의 골간을 이룩하였다.
또한, 영조가 여러 권의 책을 친제(親製)하기도 하였다. 악서(樂書)의 전범(典範)인 《악학궤범》의 서문을 지었으며, 스스로를 되돌아본 《어제자성편 御製自省編》을 지었다. 그리고 1754년에는 무신들을 위하여 《위장필람 爲將必覽》을 저술, 이를 무신들에게 인반(印頒)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어제경세문답 御製警世問答》·《어제경세편 御製警世編》·《백행원 白行源》·《어제소학지남 御製小學指南》·《팔순유곤록 八旬裕崑錄》·《어제조손동보 御製祖孫同譜》·《어제효제권유문 御製孝悌勸諭文》 등이 있다. 이 당시 재야에서 실학(實學)이 확대되면서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洪大容)의 《연행록 燕行錄》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 磻溪隨錄》이 간행되었다.
또한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 道路考》도 1770년에 편찬되었다. 영조는 친히 호학하였기 때문에 신학풍에 대한 이해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당론에 휘말려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로운 탕평정국으로 이끌어나가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영주(英主)였다.
1776년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양주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영조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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