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변혁의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에 제자백가로 알려진 일군의 학인들에 의해 새로운 사상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국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적인 학문 집단에 의해서 전개된 최초의 지적운동이었다. 제자백가의 사상 가운데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유학이다. 유학 = 유가 = 유교 = 공교(孔敎) 춘추전국시대 공자(BC 551 ~ 479)에 의하여 창시되었고 전국시대의 맹자와 순자에 의하여 사상적 체계가 정립되었다. 유가사상의 최고이념은 仁이며 효와 제를 바탕으로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지배사상으로 이어온 유학의 전래과정과 발전형태를 검토하고 유학이 성리학으로서의 토착화 과정을 탐구하고자 한다.
1. 중국의 유학 1) 훈고학의 성행 秦(진)이 중국을 통일하자 유학은 분서갱유의 대탄압을 받아 한때 크게 침체하였다. 한무제때 동중서와 공손홍의 건의에 의하여 유학은 관학이 되어 제자백가를 누르고 그 지위를 굳혔다. 한 대의 유교는 오경을 위주로 하는 경학중심의 학풍으로 이루어졌으며 전한시대의 금문경학과 후한시대의 고문경학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 대에는 유교경전에 대한 자구해석에만 주력한 훈고학이 성행하였으며 이 흐름은 당(唐)대에 까지 계승되었다.
2) 신유교로의 발전 한,당의 유학이 오경에 대한 해석을 주로 하는 훈고학으로 일관되자 더욱이 당태종은 <오경정의>를 편찬케 하여 오경에 대한 해석을 통일, 획일화 함으로써 유교는 지식인 관심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공백은 불교와 도교에 의해 채워졌으며 따라서 위,진 남북조와 수,당 시대의 사상계를 불교와 도교가 주도했다. 송대에 이르러 시민사회의 발달과 함께 유교에 대한 자유롭고 비판적인 유교에 대한 재해석의 분위기가 형성 됨으로써 ①유학의 근본원리를 파악하고 ②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밝혀 ③인간정신을 수양하고 실천하려는 학풍이 대두되었다.북송의 주돈이는 도가의 사상과 유가의 음양오행설을 조화시켜 태극도설로 정리하였으며 정호, 정이 형제는 理一元論을 장재는 氣一元論을 주장하였다. 이를 다시 남송의 주희는 이기이원론으로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한편 육구연은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여 주희의 「性卽理」에 반대하고 「心卽理」를 주장, 명대의 왕수인이 이룩한 「양명학」의 기초가 되었다.
3) 유교의 쇠퇴 송,명대의 주지주의적 관념론과 달리 청대에 이르러 명확한 근거로써 사실을 파악하는 실사구시의 실증주의적 고증학이 대두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유교는 아편전쟁을 계기로 쇠퇴하기 시작 서구열강의 침략과 청조의 부패정치를 개혁하려는 공양학파인 강유위 등의 변법자강책 마저 실패하고 유교는 서구의 근대과학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으로 유교는 봉건체제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이유로 한때 쇠미하였으나 전통문화의 기본요소론의 가치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화로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 유교의 전래와 삼국시대의 유학 한국유교의 기원 1) 장지연 : 기자동래설(단군말년 은의 귀족인 기자가 주나라를 피하여 들어와서 유교의 도로 동방을 교화) 한국은 유교의 種祖國
2) 이병도 : 기자동래설 부인 낙랑연원설 : 한군현 설치로 유교사상과 문화 유입
3) 일반학설 : 확실한 사실적 기록에 의한 접근 삼국사기 : 고구려 소수림왕 2년 (AD 372) 태학 설립 영양왕 11년 (AD 600) 태학박사 이문진 신집5권 편찬 신라 신문왕 2년 (AD 682) 국학 건립 진흥왕 6년 (AD 545) 거칠부 국사편찬 백제 고이왕 52년 (AD 285) 왕인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 근초고왕 박사 고흥 서기 편찬 당시 유학의 목표 : 관리 양성 사부와 문장 능력 대표적 유학자 : 설총, 최치원, 강수, 김대문 9경해석 계원필경 화랑세기
3. 고려시대의 유학과 주자학의 수용 광종 : 과거제 (AD 958) - 고급 관리의 공정한 등용 성종 : 최승로의 시무책 (AD 982) 중앙집권강화, 지방군벌약화, 충효사상고취 (무에서 문으로) 문종 , 인종 : 경서보급 => 경학의 발달 => 최충의 구제학당 (私學) 훈고학적 경학의 최 전성기 주자학으로 변모하는 전환기 충렬왕 : 성리학의 도입 (안유, 백이정) - 주자학 예종 , 인종 : 유교적 통치체제 , 사상적으로는 불교신봉
충렬왕 충선왕 : 유교장려 정책 충숙왕 과거에서 성리학 채택
이제현,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정도전, 권근 => 성리학을 학문 뿐 아니라 정치사상의 배경
4. 성리학의 발달과 논쟁 1)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 고려말 신흥사대부의 등장 => 조선 (관학으로서 통치이념) 정도전, 권근, 조준 정도전 => 「불씨잡변」 「심이기편」 : 불교의 폐해 , 배척 권근 => 「입학도설」 : 불교와 대립하지 않으면서 순수한 성리학 연구 관학 중심의 훈구파 학자의 종조 => 현실적 , 부 추구 길재 => 주자학의 정통계승과 이상정치 추구 : 경상도 중심의 사림파 이병도 : 훈구파 (정인지) - 실질적 학문인 전례, 사장에 능통, 경세의 학문 절의파 (김시습) - 절의를 지켜 조선조에 출사 거부 영남파 (김종직) - 대의, 의리, 명분 중요시 영남사림파, 도학 청담파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황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
서경덕 : 「기일원론」 => 主氣論의 선구자 - 이이 이언적 : 「주리파」의 선구자 - 이황 이황(퇴계) : 「조선의 주자」 - 이기이원론(주리파) : 이와기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의존적 이는 기를 움직이는 근원적 법칙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학적 존재로 이의 법칙에 따라 구체화 인간의 순수이성은 절대선 => 德 => 인의예지신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유성룡, 김성일, 정구, 허목 등이 계승 (영남학파) 이이 : 「주기설 확립」 - 「이기일원적 이원론」 확립 만물존재의 근원은 기에 있으며 모든 현상은 기가 움직이는데 따라 나타나는데 이는 기의 작용에 내재하는 보편적 원리. 모든 현상의 변화, 발전을 기의 작용으로 이해 => 실천적 윤리, 기질중시 「성학집요」 「인심도심설」 김장생, 정엽, 이귀, 조헌 등이 계승 (기호학파) 퇴계학파 = 영남학파 = 주리파 (장현광, 정경세, 이현일, 이상정) 율곡학파 = 기호학파 = 주기파 (김장생, 송시열, 권상하, 송준길, 김창협)
3) 인성물성에 대한 호락논쟁 ① 예송에 따른 당쟁 이병도 : 16세기 성리학 융성기 임진왜란 이후 실학이 대두되기전 예학기 (17C 전후)
예학이 성행한 이유 : 성리학의 심화과정 예의수행 강조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결과 사회질서와 윤리의 재건 김장생(사계) 정구(한강) : 예학의 학술적 기초 => 예송과 당쟁을 야기
② 실학과 양명학의 대두 예송과 당쟁 => 실학파의 대두 (실사구시의 학문) 유형원, 이익, 안정복, 정약용, 박지원 등 양명학 : 윤휴, 박세당 : 반주자학적 자주적 사상 명의 왕수인 「지행합일설」 주장 15C말 전래, 주자학파의 반대 장유, 최명길, 정제두
③ 호락논쟁 洛下 (서울) , 湖西 (충청) -> 인성과 불성(짐승)의 본성이 같은가 ? 同一 : 락파(이간) - 인간과 사물은 태극으로 말미암아 생겼다 相累 : 호파 (한원진) - 性은 인간에게만 있고 사물에게는 없다.
맺음말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기까지 관학으로서 정통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정주계의 성리학이다. 그러나 성리학의 논쟁은 19C 의 격변하는 현실앞에 너무나 무기력했고 오늘날까지 공리, 공론으로 간주되는 현실이다. 그러나 한말의 주리론자인 이항노, 최익현, 김평헌, 유인석 등이 서양제국주의 위협과 일본의 침략앞에 목숨을 건 구국운동인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한 것이 성리학의 무기력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보상하였다.
대개 구름이라는 것은 뭉게뭉게 피어나 한가롭게 떠다니지. 산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 않으며 동서(東西)로 떠다니며 그 자취가 구애받는 곳이 없네. 잠깐 사이에 변화하니 처음과 끝을 헤아릴 수 없지. 뭉게뭉게 성대하게 퍼져나가는 모양은 군자가 세상에 나가는 것 같고 슬며시 걷히는 모습은 고결한 선비가 은둔하는 것 같네. 비를 내려 가뭄을 소생시키니 어짊이요, 왔다가는 머물지 않고 떠날 때는 연연해 않으니 통달한 것이네. 색이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검은 것은 구름의 본래 색이 아니네. 오직 아무런 색깔 없이 흰 것이 구름의 정상적인 색이지. 덕이 이미 저와 같고 색이 또한 이와 같으니, 만약 구름을 사모하여 배운다면 세상에 나가서는 만물에 은택을 주고 집에 머무를 때는 마음을 비워, 그 하얀 깨끗함을 지키고 그 정상에 거하겠지. 그리하여 아무 소리도 없고 색도 없는 절대 자유의 세계[無何有之鄕]로 들어가면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알 수 없을 것이네. 이와 같다면 옛사람이 얻고자 했던 실제와 가깝지 않겠는가?
♣ 공자의 생애 ♣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중국어로 취푸)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마을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태어 났어요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는데
공자 부친 숙량흘(叔梁紇)과 모친인 안징재(顔徵在)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하네요
숙량흘에게는 절친한 친구 안양(顔襄)이 있었는데 안징재는 바로 친구의 셋째딸 이었어요
숙량흘이 친구의 딸인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70대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공자가 태어 났어요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는데
가세가 몰락하여 공자의 할아버지때에 노나라로 옮겨 왔지요
그의 집안은 송나라때에는 명문 가문으로 대대로 부친 숙량흘에 이르기까지 무사집안 이었지요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 뿐이었어요
<사기>에 나오는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 했어요
3살때 아버지가 죽었는데 홀로된 어머니 안징재가 궐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지요
부친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으며 그의 몫으로 돌아온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멀어 생활 형편은 말이 아니었지요
그러다 보니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어요
19세에 (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지요
그러나 24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어요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의 부친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지요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우렸어요
공자는 어릴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지요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어요
그는 만날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지요
그러다 만난것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지요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많이 나오고 있어요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 했지요
서른살에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선 것이지요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되었지요
이때 그는 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만든 것이지요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부터 평민의 자제까지에 이르기까지
'묶은 고기'(束脩) 한 두럼을 가져온 사람들은 누구나 가르쳤어요
이때 공자는 <시경> <서경> <주역> 등의 경전을 가르쳤지요
공자는 노나라 사람이었고 노나라에서 태어 났으며 노나라에서 살았지요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지켜야 하고 또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 했지요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던 인물이었지요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하고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하지요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모두 종친들이 차지 했어요
이래서 이를보고 종법제라 했어요
그런데 공자가 장성했을때에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하게 혼란기에 있었지요
그래서 공자는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하고 노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어요
이때 공자는 회계 출납직인 위리(委吏)를 거쳐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 생활을
하였는데 공자는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 학문적으로도 많은 추앙을 받게 되었지요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였지요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어요
그런 공자가 어느날 모든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이곳 저곳 주유하였는데
주나라(周)의 낙읍(洛邑)을 돌아보고 귀국하자 그의 명망은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어요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요
그리하여 그 수가 훗날 3천명을 넘었지요
이에 공자를 눈여겨 본 노(魯)나라의 왕 소공(昭公)은 그를 가까이 두려 하였어요
그러나 공자나이 36세때(소공(昭公)25년)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지요
그래서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을 가게 되어 제(齊)나라에 갔어요
제나라로 간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학문을 펼치고 진리를 가르쳤지요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역설 했어요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공자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위태할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여 좌절되고 말았지요
제나라에서 2년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중도재(中道宰)가 되었으며
52세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지요
그러나 크고 작은일로 인해 난신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게 되었지요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은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어요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해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 당했어요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는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지요
그리하여 그는 귀국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어요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지요
이때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어요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고 하였지요
공자는 73세가 되던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공자가 세상을 떠난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지요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천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中華)'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이 되었어요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중 한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지요
공자의 죽은후 노성 북쪽(魯城北 曲阜 洙上, 현재의 산동성 곡비현 북쪽)에서 장례가 치러졌지요
그의 제자들은 증자를 상주로 하고 부모의 장례에 준하는 예로써 상복을 입고 그의 묘소 앞에서
3년상을 마친 뒤 각자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어요
이후 증자의 문인들과 증자의 제자이자 친손자인 자사의 문인들
그리고 자사학파에서 갈려 나온 맹자의 학파, 자궁의 학파
자궁의 학파에서 분파된 순자의 학파가 크게 융성하였지요
이후 유학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교육을 통해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로써 악한 본성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순자의 성악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지요
그후 당나라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으며
1008년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고
원나라에 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지요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으며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의 칭호가 수여되었어요
한편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자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지요
이때 유학서 및 다량의 공자 관련 유물 등도 무더기로 불에 타 사라지는 참화를 겪었어요
그러나 등소평 이후 후진타오 시진평에 이르러 비로서 공자사상이 다시금 각광을 받게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끝으로 공자님 부인에 대한 유머 한마디
아주 먼 옛날...
공자가 사는 마을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마침
공자 부인도 빨랫감을 안고 나타났지요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동네 아낙네들 가운데 하나가
공자의 부인에게 말했어요
" 아 ~ 그래!! 부인 께서는 요즘 무슨 재미로 사시나요?
사람 사는 재미는 애 낳고 키우며
알콩달콩 싸워가면서..사는 것인데~~
공자님하고는 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기는 하는가요? ".... ㅎㅎㅎ
그러자 공자 부인은 못들은척 하며 계속 빨래만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곁에 있던 다른 아낙네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지요
" 덕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
" 학문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 "
" 제자가 그렇게 많으면 뭘 하나 ... "
" 사람 사는 재미는.. ㅎㅎ 진짜 재미는 이불속에서 그저...히히 ㅎ^^&... "
그러거나 말거나 공자 부인은 열심히 빨래를 하였지요
이윽고 빨래를 마친 공자의 부인이
빨래를 챙겨들고 일어서며 아낙네들에게 한마디 했어요
야~~!! 이 여편네들아!
밤에도 공자인줄 알아? ㅎㅎㅎ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조 동렬(일송) *-
★ 공자의 고향 곡부 ...
▲ 공묘(공자를 기리는 사당), 공부(공자의 후손들이 지내던곳), 공림(공자묘)
중국 AAAAA급 최고의 관광지이지요 ...
▲ 공묘의 전문인 금성옥진방입니다
공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어요
앙성문 - 금성옥진 -영성문-태화원기방 - 성시문-벽수교를 지나
홍도문- 대중문-동문문-규문각을 지나 대성문-대성전-성석전까지 이어지지요
금성옥진의 뜻은 맹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칭송한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
▲ 공묘 제 1문인 영성문
뒤에 보이는 태화원기는 우주만물을 창조한 에너지를 표현하는 말이지요
(공자의 가르침은 천지창조의 에너지와도 같다는 의미라고 함) ...
▲ 공묘안내도를 잘보고 다녀야 하나하나 상세하게 볼수 있지요
오른쪽으로 다니면서 보고 나올때는 반대쪽으로 나오면 다볼수 있어요 ...
▲ 공묘 제4문인 대중문
금나라때 세워졌다고 하지요
청나라의 건륭제가 직접 쓴글씨라 하네요 ...
▲ 역대 황제들이 공묘를 방문할때마다 비석을 세워두었는데
이 비석들을 비바람으로 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세운 정자라 하네요 ...
▲ 이곳에서는 논어,천자문,당시집 등의 책을 팔고 있어요...
▲ 천년묵은 향나무
이 나무를 만지고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데요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 하네요 ...
▲ 돌기둥에 용을 조각해 두었어요
정말 대단한 작품이지요 ...
▲ 정말 오래된 비석 ...
▲ 대성전의 모습
공묘의 본전인데 휘종황제가 대성전이라는 친필편액을 하사하면서 대성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네요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궁전건물 ...
▲ 기둥을 전부 돌 조각으로 만든 용기둥
세계에서 두번째로 세계문화유산이 많은 나라가 중국인데
대부분 민간기업이 관리를 한다고 하네요
그러다 보니 1,000년동안 잘 관리되어오던 이곳도
민간기업이 어리석게도 대성전을 물청소를 하는바람에
단청이 벗겨지고 안료가 부풀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상실되었다 하는군요 ...
▲ 기둥의 크기를 보면 건물크기를 상상할수 있지요 ...
▲ 옛날 교과서에서 본듯한 그림이지요? ...
▲ 천년 세월의 흐름 ...
▲ 공묘에서 공부로 들어가는 문
공부(孔府)는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던곳으로
총 463칸의 방으로 되어있다고 함 ...
▲ 공부 건물 ...
▲ 공자묘 입구 비석 ...
▲ 공림(지성림) 입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묘지공원(공씨들만 묻힐수 있는곳)
3,600개의 비석과 10만여 그루의 나무가 있어 산책하기도 좋은곳 이라 하네요 ...
▲ 공자묘 가는길 ...
▲ 자공수식해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가 돌아가시고 6년동안 공자의 묘를 지켰다고 하는데
그때 자공이 심었던 나무가 지금은 죽어서 ...
▲ 공자묘 (대성지성선왕묘)
공자묘의 오른쪽에 공자의 아들묘도 있어요...
▲ 곡부 시가지 모습 ...
▲ 노나라때 만들어진 곡부성
청도에서 약 400키로 떨어진 곡부(취푸)
공자아니면 특별하게 볼것이 없는 자그만한 도시이지만 공자의 얼이 담긴 유서깊은 곳이지요
곡부에서 멀지 않은곳에 그 유명한 태산이 있어요
그래서 곡부와 태산을 함께 여행 하면 좋아요 ...
지난 연말 나는 《月刊書藝文化》의 편집주간인
정태수씨를 만나 書藝와 漢詩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정씨는 나에게 서예인들이 참고할 수 있는 한시론을
집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시를 강의하기 위해 영남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졸저《漢詩論》의 요지를 간추려 그 청탁에
응하기로 하였다. 모쪼록 서예인들의 작품창작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한시론에 대해 연재를 시작하니 독자제현께서는 참고해 주기 바란다.
Ⅰ.詩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참으로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강구되어 왔고 또 수많은 대답을 시도해 왔다. 그
대답들 가운데서 시의 實狀을 가장 간단하면서도 적절하게 간파했다고 여겨지는 몇 사람의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詩論의
源泉이 된 舜의 정의
舜은 중국 전설시대의 황제인 黃帝․ 顓頊․ 帝嚳․ 요임금[堯帝]를 계승하여 帝位에 올랐던 임금이었다1).
그는 세계문학역사상 최초로 시에 대한 개념을 정의한 바 있다. 그는 「詩는 志를 말한 것이다.」2)라고 하였다. 이 말은 漢文學史上 가장 오래된
論詩 格言이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것이기도 하지만, 詩의 실상을 통찰한 내용으로 만고불변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옛날부터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詩를 論한 문인치고 이 격언을 인용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 舜의 정의를 보충한 종영(鍾嶸)의 견해
漢文學史上 詩의 品格에 관해 처음으로 論究했던 사람은 위진남북조시대 梁나라의 종영이었다. 그는 漢代以來의 詩를 上 ․ 中 ․ 下
三等級으로 분류하여《詩品》이란 詩評書를 남겼다. 그는 《詩品》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詩의 生成原理에 관한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氣가 事物을 움직이고 사물이 사람을 感動시키기 때문에 性情이 흔들리고 들끓어 춤과 읊조림으로 형상화된다.」3)
여기서 「氣가 事物을 움직인다.」는 것은 시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만물, 즉 對象에 관한 문제이며, 「事物이 사람을
感動시킨다」는 것은 對象과 시인의 交感을 뜻함이며, 「性情이
흔들리고 들끓는다.」는 것은 대상과 자아가 교감함으로써 心像(志)이
이루어짐을 뜻함이며, 「춤과 읊조림으로 形象化한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이루어진 心像(志)을 동작이나 언어로 표현함을 이름이다. 위의 내용을
다시 연결시키면 「詩란 對象과 시인의 交感에서 얻어진 性情(志)을 言語로 표현한 것」 으로 요약할 수 있다.
종영(鍾嶸)의 이
견해는 詩의 개념을 완전무결하게 정의한 名言으로써 위로는 舜의 詩論을 보완한 동시에 아래로는 唐 ․ 宋 ․ 明 ․ 淸代를 거치면서
구체화된「情景交融論」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3) 性理學자 주희(朱熹)의 정의
朱熹(1130-1200)는
南宋의 학자로서 性理學을 集大成한 동시에 문학에 대해서도 투철명 료(透徹明瞭)한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그는 《詩經》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詩集傳》을 편술하면서 지난날 전해오던 《毛詩》의 序文을 後人의 위작(僞作)으로 단정하고 새로 《詩集傳》의 序文을 쓸 정도의 詩論家였다.
그는 그 서문에서 「詩는 어떻게 해서 지어지는가?」, 「詩란 무엇인가?」 등의 의문을 제기하고 그 의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적이 있다.
「사람이 태어날 때 고요함[靜]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性인데 그 性이 物에 감동되는 것은 性에서 일어난 欲[情] 때문이다. 대개
性에서 欲[情]이 일어나게 되면 생각[思]이 없을 수 없고, 말[言]이 있은 뒤에 말[言]으로 다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한숨과 탄식으로 나타내게
되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자연스러운 음향(音響)과 절주(節奏)가 생겨나 능히 억제할 수 없음이 있게 된다. 이것이 詩가 지어지는 까닭이다.」1)
는 「詩는 어떻게 해서 지어지는가?」(詩何爲而作也)에 대한 自答이며, 「詩는 詩人이 마음으로 事物을 感覺하여 언어로 形象化한
것」2)은 「詩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이다.
이 두 가지 해답은 과정과 결과의 관계에 놓여지는 내용으로서 後者는 前者를 요약해
놓은데 불과한 것이다. 이 주희(朱熹)의 시에 대한 개념(槪念) 정의(定義)는 앞에서 소개한 종영(鍾嶸)의 견해와 거의 일치한다.
이상 우리는 舜 ․ 鍾嶸 ․ 朱熹 세 사람이 시의 개념에 대하여 정의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舜은 詩人의 「志」(心像)에 중심을 둔
불완전한 정의를 내렸던 것이며, 종영과 주희는 詩의 五大生成要件을 기본으로 한 「自我(詩人)와 對象(事物)이 서로 어울림(交感)에서 이루어진
心像(志)을 言語(韻語)로 形象化(表現)한 것」이란 견해는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 鍾 ․ 朱 兩氏가 내린 시의 개념
정의를 完整한 것으로 믿고 그 내용의 줄거리와 갈래를 따라 이 글을 전개해 나가기로 하겠다.
2.「漢詩」란 무엇인가?
한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시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하는 동시에 한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1)
「漢詩」는 中國歷代의 詩를 總稱하는 말이다.
「漢」은 西紀前 206年에 건국되어 西紀後 219年에 멸망한 中國歷史上에 존재했던 한
王朝의 명칭이다. 漢 以前에는 堯帝가 다스린 唐, 舜이 다스린 虞를 비롯하여 夏․ 殷․ 周․ 秦이 있었으며, 漢 以後에는 魏晉南北朝 ․ 隋 ․
唐 ․ 宋 ․ 元 ․ 明 ․ 淸 ․ 中華民國으로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 漢은 前代文化를 계승, 정비, 발전시킴으로 말미암아 중국문화의 기반을
완성시킨 왕조였으며, 漢 以後의 歷代王朝들은 漢이 이룩해 둔 문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학술, 예술 등 모든 제도를 운영해
왔다. 따라서 뒷날 사람들은 중국 역대의 문화를 총칭하여 「漢文化」라 일컫게 되었다.
「漢文學」이니 「漢詩」니 하는 말들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시는 漢代 만의 詩가 아니라 한대 이전의 시와 이후의 시를 포함한 中國歷代의 詩를 總稱함이다.
周代의
《詩經》과 《楚辭》, 漢代의 樂府詩 ․ 賦 ․ 五言古詩 ․ 七言古詩, 唐代의 五七言 近體詩, 宋代의 詞, 元代의 散曲 等을 「漢詩」란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흔희 五七言 古詩나 近體詩만을 한시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2) 「漢詩」는
漢字와 漢語와 漢詩 形式을 빌어 표현한 詩다.
비록 中國에서 中國人이 쓴 詩라 하더라도 漢字와 漢語와 漢詩形式을 응용하여 쓴 詩가
아니면 「漢詩」라 할 수 없다. 元代의 蒙古語文으로 쓰여진 중국인의 시, 淸代의 滿洲語로 쓰여진 중국인의 시가 있다면 그러한 시는 한시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한자를 빌어서 표현한 詩라 하더라도 漢語文法에 맞는 漢語와 漢詩形式을 갖추어 쓰지 아니한 시는 한시가 아니다. 新羅의
鄕歌나 高麗의 景幾體歌 등이 한시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함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漢字와 漢語와 漢詩 形式을 빌려 쓴 詩는 비록 中國人이 쓴
詩가 아니라도 「漢詩」일 수가 있다.
山僧貪月色, 산중의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幷汲一甁中. 샘에 비친 달빛을 병
속에 퍼 담았네.
到寺方應覺, 절에 와서 바야흐로 깨닫고 보니,
甁空月亦空. 병도 비고 달 또한 간 데 없다네.
예컨대 위의 시는 高麗文人 白雲 李奎報(1168〜1241)의 詩 <詠井中月>이며,
呼童烹茗一甌濃, 아이 불러 차 끓이니 한 항아리 짙은 향기,
睡起園林午後風. 잠깨어 일어남에 정원 숲엔 오후
바람.
知是落花前夜雨, 알겠다. 떨어진 꽃 지난 밤 비로 인해,
小溝添水沒鳧翁. 작은 시냇물 불음에 오리들
떠다니네.
이 시는 日本 鎌倉室時代의 僧侶文人 雪村友梅(1281〜1346)의 詩 <和友人翁字>다. 이들은 비록
漢人(中國人)이 아니라도 漢字 ․ 漢語 ․ 漢詩形式을 借用하여 이와 같이 훌륭한 漢詩를 썼던 것이다.
따라서 「漢詩」란 단순히
「漢代의 詩」, 「漢人의 詩」, 「漢字로 表現한 詩」가 아니라 「漢字와 漢語와 漢詩形式을 사용하여 지은 詩」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漢人(中國人)이 아닌 어떤 외국인도 한시를 지을 수 있고, 漢詩人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漢詩에 담겨 있는 사상이나 감정이 中國的인 것인가
그렇지 아니한가는 별개의 문제다.
3. 《漢詩論》의 敍述方法
1) 漢詩論의 類型
우리는
누구나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漢詩論의 자료들이 전해오고 있음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漢詩資料들은 편의상 格言類, 詩話類, 論著類로
구분할 수가 있다.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⑴ 格言類의 詩論
「詩는 뜻을 말한 것」(詩, 言志)1)
「詩는 志(뜻)가 指向하는 바이다. 마음에 있을 때는 志지만 말로 나타내면 詩가 된다.」(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2)
「《詩經》에 실려 있는 三百篇의 詩를 한마디 말로 요약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음이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3)
등은 「格言類」에 해당하는 詩論의 例들이다.
이 格言類의 詩論들 가운데는 詩의 本質을 예리하게 설파한
명언들이 많다. 그르나, 이러한 詩論들은 論議의 原因과 根據를 제시하지 아니한 包括的이며 直觀的이며 거두절미(去頭截尾)한 설파이므로 그 이면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란 여간 어렵지 아니하다.
그것들은 흡사 끝없는 苦行과 修道를 통해 道를 깨달은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그 제자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佛理를 깨우쳐 주기 위해 제시했던 한 송이의 연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 연꽃은
석가모니불이 체험했던 전체적인 佛理와 佛論을 암시하고 있는 꽃이었다. 이미 道를 터득한 석가모니의 입장에서 보면 佛道를 가장 간단하고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는 이 한 송이의 연꽃을 능가할 그 무엇이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연꽃을 바라본 대부분의
佛弟子들은 그것이 도대체 불리의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모두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마음으로 석가모니불만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한 송이의 연꽃을 통해서 그 오묘난측(奧妙難測)한 佛道를 일시에 깨닫는 데는 매우 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詩, 言志」 등을 통해서 詩의 전체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은 한 송이의 연꽃을 통해서 불리를 깨닫는 것만큼이나 힘이 드는 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詩를 가르치면서도 詩를 몽롱한 존재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는 詩論이다.
⑵ 詩話類의 詩論
「詩話」란 詩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수필식으로 쓴 詩論이다. 宋代 歐陽修의《六一詩
話》는 詩話의 효시다.
作家 ․ 主題 ․ 風格 ․ 作法 ․ 逸話 ․ 聲律…… 등등 詩와 관련이 있는 내용이면 그 무엇이라도 詩話의 대상이 된다.
「대개
詩를 지음에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법이니 책과 관계가 있는 것만이 아니며, 詩에는 특별한 情趣가 있는 법이니 理와 관계가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지 아니하고 理를 궁구하지 아니하면 그 지극함에 이르지 못한다. 이른바 理의 길을 거치지 아니하고 說法에 빠지지 아니한 詩가
上品의 詩다. 詩란 情性을 吟詠한 것으로서 盛唐時代 詩人들은 오로지 興趣를 노래함에 있었으니 羚羊이 나무에 뿔을 걸어 잠을 잘 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음과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그 오묘함은 透徹玲瓏하여 무엇으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공중의 소리와 같기도 하고, 형상 속의
색채와도 같고, 물속의 달과 같기도 하고 거울 속에 비친 모습과도 같아서 말은 다함이 있으나 뜻은 끝나지 아니하는 것이다.」1)
이것은 詩의 情趣를 자세하게 설명한 내용이며,
「晁貫之란 사람이 杜與를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詩를 남겨 놓고 돌아왔다.
草堂不見浣溪老, 草堂을 찾았으나 浣溪 늙은이 만나지 못해,
折得靑松渡水歸. 푸른 솔가지 꺾어 물을 건너 돌아왔네.」
라는 <草堂>詩가 지어진 유래와 그 詩를
간단히 적어둔 拾遺錄이다.
이와 같이 詩話는 詩에 관한 것이면 무엇이거나 다 言及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詩論 전체에 대한
구조적인 윤곽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詩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고서도 그 이야기들이 놓여질 자리를 매겨 주지 못하고 있음이
흠이다. 흡사 끈 떨어진 구슬이나 깨어진 도자기 조각들과도 같이 혼잡하고 산만한 詩論들이다. 詩論을 얽을 수 있는 재료이긴 하나 아직 구체적인
체계를 갖춘 詩論은 아니다.
⑶ 論著類의 詩論
格言類 詩論과 詩話類 詩論에 이어서 나온 것이 論著類詩論이다.
논저류의 시론은 근래의 詩論家들이 통일된 체계와 일관된 논리에 입각하여 쓴 시론이다.
《漢語詩律學》2), 《詩詞曲格律論》3),
《塡詞名解》4), 《中國詩的神韻格調及性靈說》5), 《詩言志辨》6), 《支那詩論史》7), 《中國韻文通論》8) 등은 그러한 例에 속한다.
2) 漢詩論의 對象
漢詩論은 廣義的인 漢詩論과 狹義的인 漢詩論으로 구분될 수 있다. 광의적인 한시론은 한시에 관한
문제이기만 하면 그 무엇이든지 논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한시의 類形, 漢詩의 歷史, 漢詩의 鑑賞 등도 거기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협의적인 한시론은 주로 한시의 生成原理를 논의하는 시론이다. 그러므로 그 논의의 대상은 몇 가지 갈래로 한정되어질 수가 있다.
「詩란 自我(詩人)와 對象(事物)이 서로 엇갈림(交錯)에서 이루어진 心像(覺悟)을 詠語(韻語)로 形象化(表現)한 것」1)
은 협의적인 詩論이 무엇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의 단서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첫째,
自我(詩人)에 대한 문제; 둘째, 對象(事物)에 대한 문제; 셋째, 自我와 對象의 엇갈림(交感)에 대한 문제; 넷째, 心像(志)에 대한 문제;
다섯째, 形象化(表現)에 대한 문제는 협의의 한시론이 추구할 다섯 가지 논의의 대상이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이 바라는 바는 부귀영화(富貴榮華)입니다. 문제는 부귀영화를 바라기만 하고, 방법을 제대로 알고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 중 하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일상습관이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부자되는 습관(Rich Habits)』의
저자 토머스 콜리는 223명의 부자와 128명의 가난한 사람을 대상으로 ‘습관’을 조사했는데, 과연 부자와 빈자는 어떤 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을까요?
바로 부자들은 매일 30분 이상씩 책을 읽는다는 대답이
88%에 달한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2%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책과 공부는 세상과 자신을 바꿔 주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꿀까요?
중국의 왕안석(王安石)은 「권학문(勸學文)」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독서에는
비용이 들지 않고, / 讀書不破費 독서를 하면 만 배의 이로움이 있다. / 讀書萬倍利 책은 사람의 재능을 드러내고, /
書顯官人才 책은 군자의 지혜를 더해 준다. / 書添君子智 여유가 있거든 서재를 짓고, / 有卽起書樓 여유가 없다면 책궤라도
만들라. / 無卽致書櫃 창가에서 옛글을 보고, / 窓前看古書 등불 아래서 글 뜻을 찾으라. / 燈下尋書義 가난한 사람은 책으로
부자가 되고, / 貧者因書富 부자는 책으로 귀하게 된다. / 富者因書貴 어리석은 사람은 글을 통해 현명하게 되고, /
愚者得書賢 어진 사람은 글을 통해 이롭게 될 것이다. / 賢者因書利 글만 읽더라도 영화 누리는 것 보았지만, /
只見讀書榮 독서해서 실패한 일은 보지 못했다. / 不見讀書墜 황금을 팔아 책을 사서 읽으라, / 賣金買書讀 독서하면 황금을 사기
쉬워진다. / 讀書買金易 좋은 책은 만나기 어렵고, / 好書卒難逢 좋은 책은 참으로 만들기도 어렵다. / 好書眞難致 책 읽는
이에게 받들어 권하노니, / 奉勸讀書人 좋은 글은 마음에 기억해 두라. /
好書在心記
매일 30분의 독서습관이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는 부자와
빈자로 갈립니다. 하지만 마냥 손에 책을 들고 있다 해서 제대로 읽는 것은 아니겠지요? 숙독완미(熟讀玩味)의 깊이 있는 독서가 필요합니다.
숙독완미에서 숙독은 글의 뜻을 잘 생각하면서 차분하게
하나하나 읽음을 말하고, 완미는 시문 등의 뜻을 잘 생각하여 음미함을 말하니, 숙독완미는 익숙하도록 읽어 뜻을 깊이 음미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독서법을 가장 잘 실천하신 분이 율곡 이이
선생입니다. 율곡은 숙독 공부법에서 한 단계씩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는 것을 공부의 모범으로 삼아, 공부할 때는 단번에 무언가를 이루고자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입으로만 읽고 많은 지식을 얻고자 무분별하게 탐독하는 책 읽기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즉, 지식만을 습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게 되면
겉으로 꾸미는 말을 많이 하게 되고, 책을 읽은 것을 남에게 자랑하게 되며, 읽지 않은 책도 읽은 척하게 되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를 반드시
경계하라고 한 것이지요. 또 책을 읽어도 생각이나 행동이 조금도 바뀌지 않고 그저 지식의 축적과 습득만을 일삼는다면 올바른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며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이해하여 숙독하고, 통달하여 의문이 없을 때까지 읽는 것’이 율곡의 공부법이었습니다.
되도록 많은 책을 읽어서 폭넓게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풍요롭고 지혜로운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독서이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많은 책을 읽기만 한다면 별로 남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숙독완미의 깊이 있는 독서를 하면, 가난한 자는 책으로
인해 부자가 되고, 부자는 책으로 인해 귀해집니다. 독서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껴 보았으면 합니다.
⊙ 원래 姓은 母系를 표시, 氏는 父系를 표시, 최초의 姓들은 모두 ‘女’ 부수 사용 ⊙ 周와 로마의 姓氏제도 유사, 姓은 로마의 ‘Gens’, 氏는 ‘Familia’에 해당 ⊙ 중국 史書가 최초로 기록한 법흥왕은 募씨로 되어 있어, 진흥왕순수비에도 신하들의 성씨는 보이지 않아 ⊙ 고려 이후에는 西域·東南亞 출신 귀화자 많아… 장순룡·인후 등은 정승 반열에 오르기도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黃帝가 탄생하는 모습. 황제의 어머니가 姬水에서 황제를 낳은데서, 姬라는 姓이 생겼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성씨(姓氏)’를 ‘성(姓)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예컨대, 김씨, 이씨 하는 말에서 김(金), 이(李)라고 하는 성에다 존칭으로 씨(氏)를 붙여준 것이 ‘성씨’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중국 주(周)나라 때에는 성과 씨가 별개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성의 기원(起源)을 주대(周代)에 두고 있었다. 주나라에서 혈통 표시로 일찌감치 등장한 것이 성이었다. 당시 주 왕실의 성은 희성(姬姓)이었다. 1955년에 조좌호(曺佐鎬) 동국대 교수가 펴낸 《동양사대관(東洋史大觀)》은 주대의 성씨제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존칭 ‘姬’는 원래 周나라 王室의 姓
神農氏의 姓인 姜은 그의 어머니가 姜水 가에서 신농씨를 낳은 데서 비롯되었다.
〈주의 성씨제도는 로마의 성씨제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주나라 사람의 성은 로마의 ‘Gens’에 해당한 것인데 여러 성 가운데 주 왕실에 속하는 희성(姬姓)이 가장 고귀하고 유력하였다. 성을 여러 씨(氏)로 나눴는데 씨는 주로 거주하는 지명 또는 세습하는 관명(官名)을 따서 붙였다. 씨는 로마의 ‘Familia’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귀족의 칭호는 성(姓)·씨(氏)·명(名) 세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보통 남자는 씨와 이름을 칭하고 여자는 성과 이름을 칭하였다. 가령 진(陳) 나라의 공실(公室) 성은 규(嬀)이며 씨는 진(陳)이었다. 일찍이 진나라 한 공자(公子)가 공실을 찬탈한 바가 있는데 춘추(春秋)에는 그를 진타(陳陀)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진은 씨이고 타(陀)는 이름인데 그가 남자(男子)이기 때문에 성인 규를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진에서 위국(衛國)으로 출가한 여자가 있었는데 여규(厲嬀), 재규(載嬀)라 하였다. 그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성을 규(嬀)라 하였다. 이것은 로마에서도 같은 것으로 이름(persona), 성(Gens), 씨(Famillia)를 표시한 것인데 남자는 보통 성을 생략하였다. 주 왕실의 성은 희(姬)의 성인데 여자를 모두 희(姬)라고 불렀기 때문에 뒤에 희가 일반 여자의 존칭이 되었다. 주인(周人)의 성은 결혼에서 중요한 의의(意義)를 가진 것으로 그것은 동성간(同姓間) 결혼을 금(禁)하는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씨족제도가 문란해져서 성이 사실상 소멸하고 씨와 성을 혼용한 후에도 동성불혼(同姓不婚)의 법이 실제 동씨불취(同氏不娶)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 가령 장씨(張氏)와 장씨(張氏), 이씨(李氏)와 이씨(李氏)는 아무리 혈연이 멀다 하여도 서로 결혼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주나라의 왕실 성이 희(姬)라고 하였는데 왕실에서 제후(諸侯)로, 즉 봉건국가의 군주로 나가면 동일족으로 희의 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씨(氏)를 새로 갖는 것이 주의 성씨제도였다. 이 제도는 주의 종법(宗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주의 종법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이 있었다. 대종은 종갓집과 같은 것으로 처음의 시조(始祖)를 영구히 받드는 것이었다. 소종은 분가(分家)한 계보들을 말하였다. 제후국의 군주로 봉을 받아 소종이 된 맨 처음의 사람을 시봉자(始封者)라고 하였다. 시봉자는 새로운 성을 가졌다. 그것을 ‘씨’라 했는데, 이 씨를 가지고 다시 새로이 혈통을 표시한 것이다. 소종의 시봉자 후손들은 계속 이 ‘씨’를 이어 갔다. 그러다가 그들의 후손에서도 ‘씨’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씨의 분출(分出)이다. 여기서 많은 종류의 ‘씨’가 등장하게 된다. 주나라 시대에 최초로 나타난 성들은 모두가 ‘계집 녀(女)’를 부수(部首·글자 변에 붙은 것)로 사용했다. 주나라 왕실의 성이라 하는 희(姬)를 비롯해서 강(姜), 규(嬀), 사(姒), 요(姚), 길(姞) 등이었다. ‘희’는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라는 곳에서 자식을 낳은 데서 비롯했다. ‘강’은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자식을 낳았으므로 ‘강’을 성으로 삼았다. ‘요’는 우순(虞舜)의 어머니가 요허(姚墟)에 살았으므로 이를 성으로 한 것이다. 황제, 신농씨, 우순은 모두 중국 역사가 신화적 인물로 묘사하는 조상들이다. 이들 신화 속 인물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황제는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黃河)지역을 최초로 다스린 제왕이라는 의미다. 황제의 이름은 헌원(軒轅)이었다. 황제, 신농씨, 우순 같은 신화 속 인물들의 성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비롯했다. 성은 원래 모계(母系)를 표시하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반면에 제후국의 혈통을 표시하는 ‘씨’는 부계(父系)를 표시하는 것이다. 제후국의 군주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李’씨의 유래 중국 고대 성씨의 유래를 밝혀 주는 책들이 있다. 5세기에 나온 《위서(魏書)》 〈관씨지(官氏志)〉, 12세기에 나온 《통지(通志)》가 그것이다. 남송(南宋) 때 간행한 《통지》 씨족지(氏族志)에 나타난 이(李)씨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상(商)나라 때 이정(理征)이란 고위관리가 어떤 사건으로 폭군 주왕(紂王)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때 그의 부인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정(利正)을 데리고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그 모자는 달아나면서 어느 나무 아래서 허기진 몸을 잠시 쉬었다. 이 나무는 오얏나무였다.
모자는 떨어진 오얏나무 열매로 배를 채웠다. 덕분에 모자는 허기를 면한 후에 무사히 딴 나라로 갔고 거기서 아들은 장성하였다. 이후 손자까지 두었고 그 손자는 진(陳)의 대부(大夫) 벼슬까지 올랐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준 오얏나무를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오얏나무 이(李)를 성씨로 삼았다.〉 위에 소개한 성씨의 연원을 소개한 책들을 보면, 성씨 가운데는 국명(國名), 지명(地名), 관직명(官職名) 등에서 씨의 글자, 즉 성씨가 된 것이 많았다. 정(鄭), 조(趙), 한(韓), 오(吳), 신(申), 조(曹), 정(丁), 성(成), 서(徐), 황(黃), 노(魯), 송(宋), 주(朱), 진(陣), 양(梁) 등이 나라이름에서 취한 성씨다. 백(白), 배(裵), 노(盧), 방(方), 소(蘇), 신(辛), 양(楊), 고(高), 유(劉), 원(元) 등은 식읍(食邑·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려준 지역)에서 따온 성씨다.
강(姜), 하(河), 임(林), 유(柳), 지(地), 천(千) 등은 지명과 관련한 성씨다. 벼슬이름, 즉 관직에서 따온 성은 장(張), 윤(尹), 최(崔), 홍(洪), 차(車), 추(秋), 사(史) 등이다. 자(字)와 시호(諡號)에서 유래한 성씨도 있는데, 이는 조상의 자나 시호에서 한 글자를 따서 성씨를 삼은 것이다. 손(孫), 문(文), 민(閔), 남(南), 공(孔), 유(兪), 전(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라는 單姓, 고구려·백제는 複姓 한국인의 성씨 기원은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알 수 있다. 물론 각 성씨의 문중들이 족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반면에 《삼국사기》는 신라의 성씨 등장에 자세한 설명이 있고, 백제와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하고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잘 알려진 6촌의 성씨가 있었다. 그들 성씨는 최(崔), 정(鄭), 이(李), 손(孫), 배(裵), 설(薛)이다. 그리고 왕족 성으로 박(朴), 석(昔), 김(金)이 있다. 현 한국인의 성씨들 중에는 신라에 등장한 성씨가 인구수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고구려나 백제계 성씨는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씨(高氏) 성이면 우리의 역사에서 먼저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을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고씨는 고구려 고씨가 아니라 탐라(제주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근래에 와서 뒤늦게 고구려 고씨에 기원을 둔다고 주장하는 고씨들이 있지만, 보학계(譜學系)에서는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가 언급한 성씨들은 대개 한 글자로 된 단성(單姓)인데 비해, 백제와 고구려인의 성은 대개 두 글자로 된 복성(複姓)이라는 점이다. 신라는 중국 당(唐)나라 성씨제도에 영향 받아 주로 단성을 사용하였다. 당나라는 세족(勢族)들의 성씨가 대부분 단성이었다. 신라의 성씨 기원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비롯해서 3대 유리왕(儒理王) 때 6촌에서 등장하였다는 성씨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설(說)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중국의 사서(史書)에 대한 검토에서 비롯한다. 신라는 23대 법흥왕(法興王·514~540) 이전 왕들의 경우에는 시호(諡號)와 성씨도 없었다고 한다.
중국의 《양서(梁書)》와 《남사(南史)》는 신라의 경우 법흥왕 때 와서 비로소 성씨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법흥왕은 성씨를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고 기록했다. 《북제서(北齊書)》는 법흥왕 다음의 왕인 진흥왕(眞興王·540~576)을 김진흥(金眞興)이라 기록했다. 신라 임금을 김씨라고 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법흥왕 이전 신라왕의 시호와 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다고 한다. 문자가 없었으면 의당 성씨도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법흥왕이니 진흥왕이니 하는 시호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법흥왕 때부터 비로소 사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였다. 법흥왕 이전의 왕들은 니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법흥왕 이후 한자 성씨 사용한 듯 ‘신라가 한자 성씨를 갖게 된 것은 법흥왕 이후’라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는 진흥왕 순수비(巡狩碑)이다. 진흥왕은 새로 정복한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기록한 신하들의 이름을 보면 성씨가 나와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경남 창녕(昌寧)에서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를 보자. 〈喙(훼) 居七智(거칠지) 一尺干(일척간) 沙喙(사훼) 心表夫智(심표부지) 及尺干(급척간) 村主(촌주) 麻叱智(마질지) 述干(술간)〉이라는 내용이 있다. 훼(喙)는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는 육부의 양부(梁部)를, 사훼(沙喙)는 최씨 성을 하사 받았다는 사량부(沙梁部)를 말한다.
촌주(村主)는 비를 세운 지역의 마을 촌장을 말하는데, 그의 이름이 마질지(麻叱智)인 것이다. 일척간(一尺干), 급척간(及尺干)은 중앙관리의 벼슬 이름이고, 술간(述干)은 지방관리의 벼슬 이름이다. 거칠부지, 심표부지, 마질지는 신라말 발음으로 표기된 신하들의 한문 글자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 비는 양부의 일척간 거칠부지, 사량부의 급척간 심표부지, 촌주 술간 마질지 3명을 공신(功臣)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진흥왕의 신하들이라면 신라 6부(六部), 즉 6촌(村) 사람들의 후예일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성씨가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결국 진흥왕 시대까지도 신라에 성씨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5대 진지왕(眞智王·576~579)과 26대 진평왕(眞平王·579~632) 때 세운 비에서도 신하들의 이름만 있었고 성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면, 신라가 박혁거세를 비롯해서 유리왕 때 6촌의 성씨, 그리고 탈해왕(脫解王)과 알지(閼智)에게 석씨(昔氏)니 김씨(金氏)니 하는 성씨가 실제로 그들 등장과 함께 나타난 것인지 의심스럽다.
濊의 同姓不婚 풍속 한반도의 성씨와 관련해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이 책은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있던 예(濊)의 풍속에 대해 언급하면서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에 동성불혼(同姓不婚) 풍속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예맥에서는 성씨가 있었다는 얘기다.
예에 구체적으로 어떤 성씨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후한서》는 중국 송(宋)나라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으로, 예뿐 아니라 부여와 초기의 고구려, 옥저(沃沮)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런데 ‘동성불혼’에 대해 언급한 것은 예가 유일하다. 예에 성씨가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 한(漢)나라가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던 한사군(漢四郡·낙랑, 진번, 임둔, 현도)을 한동안 설치한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의 성씨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예는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지역까지 남하했다. 예가 망했을 때 그 주민들은 진한(辰韓), 즉 신라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이때 그들이 사용하던 성씨가 신라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대부분 신라에서 비롯한 것이다. 여러 문중의 족보들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설사 신라 토종(土種) 성씨가 아니더라도 중국 등에서 신라로 귀화(歸化)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라 왕족의 세 성씨나 6촌의 성씨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성씨가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라가 당나라의 성씨 문화와 그 제도를 본격적으로 전래 받기 시작한 것은 통일 이후였다. 《삼국사기》의 신라 관련 기록들을 보면 문무왕(文武王·661~681) 이후의 기사에서 성과 이름을 함께 표기한 인명이 부쩍 많이 등장한다. 이를 보면 그 이전까지는 높은 신하들의 경우에도 성씨를 갖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왕실에서만 혈족의 표시를 위해 성씨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라와 당나라 간 교류가 활발했다. 당의 문물(文物)과 제도가 전파(傳播)되면서 성씨제도도 본격적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西域에서 온 歸化人들
베트남 리 왕조를 창건한 리 태조의 동상. 제공=박순교
신라 6촌의 성씨를 중국인의 성씨와 비교해 보면 배씨(裵氏) 성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주류(主流)라고 하는 백가성(百家姓)에 들어갔다. 중국의 성씨관계 자료를 보면, 박씨(朴氏) 성만은 한반도에서 등장한 성씨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성씨대전(中國姓氏大全)》 기록을 보면 고려에서 원(元)나라로 귀화한 환관(宦官) 박불화(朴不花)가 중국 박씨의 선조다. 그 뒤에는 ‘조선족이 이 성을 많이 갖고 있다(朝鮮族多此姓·조선족다차성)’고 기록해 놓았다. 반면에 ‘더러는 분명하지 않은 내용으로 고대 파군(巴郡)에 있었던 소수 민족의 수령인 박호(朴胡)한테서 비롯한 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 각 성씨의 문중에서 펴낸 족보들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없는 성씨들이 신라에서 비롯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姜), 남(南), 노(盧), 라(羅), 문(文), 방(方), 변(卞), 백(白), 부(夫), 사공(司空), 서(徐), 성(成), 소(蘇), 송(宋), 신(辛), 안(安), 여(呂), 오(吳), 위(魏), 유(兪), 육(陸), 윤(尹), 임(林), 장(張), 정(丁), 제갈(諸葛), 조(趙), 조(曹), 주(周), 차(車), 홍(洪), 황(黃) 등이 그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가운데 신라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유명 인물은 왜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들 성씨의 족보 기록을 보면 대개 귀화인, 그것도 중국에서 온 귀화인들인 경우가 많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귀화자들에 대한 기록이 역사서에 많이 나타난다. 건국 초에는 외래인, 특히 여진족, 거란족 출신의 귀화자가 많았다. 한족계(漢族系), 몽고족계도 많았다. 고려 후기로 들어오면 귀화자들의 출신지가 더욱 다양해지는데, 그중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 혹은 위구르 사람도 많았다.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1247~1308) 조에 귀화한 고위관리 장순룡(張舜龍)이 바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고려사》는 그를 회회인(回回人)이라 기록했다. 그는 원(元)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원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수행해서 고려에 왔다가 귀화했다. 장순룡은 원나라에 있을 때 이름이 삼가(三哥)였다. 그는 고려에 와서 낭장(郎將·정6품) 벼슬부터 시작해서 재상 반열의 첨의참리(僉議參理·종2품) 벼슬까지 올랐다. 그가 바로 덕수 장씨의 시조다. 장순룡과 함께 제국공주를 수행해 온 몽고인도 있었다. 그는 인후(印侯)로 본시 이름은 ‘홀라대’였다. 그도 무관 벼슬인 중랑장(中郞將·정5품)을 받게 되었는데 충렬왕이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그는 대장군 인공수(印公秀)에게 “내가 당신하고 친하니, 당신 성을 빌려 썼으면 한다”고 청했다. 인후는 검교정승(檢校政丞)이란 최고 관직의 자리와 함께 공신(功臣) 칭호까지 받았다. 설손(偰遜)이란 이름의 귀화인도 있었다. 그는 위구르인이다. 원나라에 귀화해서 백료손(百遼遜)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학식(學識)과 문장이 뛰어나서 원나라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얻었고, 원의 황태자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공민왕과 즉위 전부터 알고 있던 그는 공민왕을 따라와서 고려인이 되었다. 그의 출생지인 ‘설렌’의 첫 글자를 따서 설(偰)이라는 성을 취했다. 그의 아들 설장수는 이성계 밑에서 활약하다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東南亞 출신 귀화인들
베트남 박닌성 딘방(이씨 왕조 발상지)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 이 태조의 창업을 기려 열리는 덴도 축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은 태조의 8대손이다. 제공=박순교(《화산군 이용상》저자)
동남아(東南亞) 출신으로 화산(花山) 이씨의 선조가 된 귀화인으로는 베트남 출신 이용상(李龍祥)이 유명하다. 고려 고종 때 귀화한 그는 안남국(安南國·베트남)의 왕족이었다. 당시 안남국도 한자(漢字)를 쓰고 있었고, 중국식 한자 성도 갖고 있었다. 그의 이씨 성은 고려로 귀화한 후 취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나라 왕실의 성씨였던 것이다. 동남아 출신 귀화인 중에는 27대 충숙왕 때 남만인(南蠻人) 귀화인 왕삼석(王三錫)도 있었다. 남만인은 동남아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왕삼석은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의술(醫術)에 재능이 있다고 하여 가까워졌다. 그는 아첨과 속임으로 왕의 사랑을 받아 측근 신하가 되었다. 《고려사》는 그가 성질이 경망스럽고 간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도 왕의 총애를 받아 왕실의 성을 하사받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란 고위 벼슬 자리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국적의 귀화인이 있었다. 초기에 장사도(張思道) 외 20여 명이나 귀화해 온 일이 있었다. 장사도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예빈경(禮賓卿)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관직은 종3품 고위직이었다. 세종 때 귀화한 우신(禹信)이라는 남만인이 조선 여인을 얻어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밖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국인, 자바인, 타타르인 등이 귀화한 기록이 나온다. 《세종실록》에는 특히 회회인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멀리 중동지역에서 한반도까지 육로나 해로로 많이 왔던 것이다. 지금 일본 영토가 된 오키나와에서 온 귀화인 오보야고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그는 조선 여인에게 장가들려고 하였지만 조정에서 허가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결혼 후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까 하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이 혼자 와서 정착하는 경우이면 장가드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오보야고는 계속 조선에 살겠다는 조건으로 결국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歸化 倭人들
우록 김씨의 시조인 김충선의 초상과 유물.
조선은 홀로 온 귀화인 남자가 조선의 여자와 결혼하면 세금과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었다. 글을 잘 알면 관직도 주었다. 이런 배려가 있었음에도 가정을 꾸린 뒤 본래의 제 나라로 도망가는 자들이 있었다. 《세종실록》에 보면 신하들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이도을치(李都乙赤)가 귀화해 와서 벼슬이 4품에 이르렀는데도 임금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본래의 나라로 도망하였다. 이런 불충(不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흉악한 놈이므로 그의 처자(妻子)를 모두 천인(賤人)으로 만들어 뒷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소서.〉 또한 이런 기사도 있었다. 〈귀화 왜인인 변좌(邊左)와 그의 아들 변효충(邊孝忠), 변효생(邊孝生)을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국문(鞠問)을 하였다. 변좌 등이 자신들의 직위가 낮고 녹봉이 박하다는 이유로 본토에 돌아가려 한 것이다.〉 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왜인들이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해 문제를 일으켰다. 귀화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같은 성씨를 갖겠다고 조선 조정에 청을 올린 왜인도 있었다. 일본 구주(九州)지방에 살던 의홍(義弘)이란 왜인이었다. 〈저는 백제의 후손인데 조선인과 같은 성을 갖고 싶습니다. 청컨대 부디 성을 하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에서 귀화왜인들이 취한 성은 이씨(李氏) 성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사고소우 등 15명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8년 때 있은 일이었다. 그들은 화약제조, 포 쏘는 솜씨가 있는 왜인으로, 귀화해 조선인이 됐다. 중종 때는 귀화한 왜인 박산동개(朴山同介)가 있었다. 그는 거제도에 살면서 거제에 왜인들이 침입했을 때는 앞장서서 그들을 격퇴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귀화한 일본인의 후손으로 알려진 성씨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인으로 귀화해서 본관과 함께 알려진 성씨는 김충선(金忠善)이 시조인 김해 김씨(일명 우록 김씨)뿐이다.
본명이 사야가(沙也可)인 그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참전했으나, 조선의 문물을 흠모해 휘하 병사들과 함께 귀순했다. 임진왜란은 물론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웠다. 이를 기려 선조(宣祖)는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 성을 하사했는데, 원래 있던 김해 김씨와 구별해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한다. 요즘 귀화인들은… 고려와 조선에서는 귀화인들이 우리나라의 관습과 제도를 따라 본관과 성을 만들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른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한글로 표기만 하되, 본래의 자기 성을 그대로 갖는 경우가 많다. 귀화인이 귀화국의 성씨 문화에 동화하지 않고, 원래의 성씨를 계속 유지하면 후대(後代)에게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다는 이질감을 후손에게 남겨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