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변가화(溪邊佳話)-시냇가의 이야기 ~

 

    ♣ 공자의 생애 ♣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중국어로 취푸)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마을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태어 났어요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는데 공자 부친 숙량흘(叔梁紇)과 모친인 안징재(顔徵在)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하네요 숙량흘에게는 절친한 친구 안양(顔襄)이 있었는데 안징재는 바로 친구의 셋째딸 이었어요 숙량흘이 친구의 딸인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70대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해서 공자가 태어 났어요 공자의 조상은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는데 가세가 몰락하여 공자의 할아버지때에 노나라로 옮겨 왔지요 그의 집안은 송나라때에는 명문 가문으로 대대로 부친 숙량흘에 이르기까지 무사집안 이었지요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 뿐이었어요 <사기>에 나오는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 했어요 3살때 아버지가 죽었는데 홀로된 어머니 안징재가 궐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지요 부친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으며 그의 몫으로 돌아온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멀어 생활 형편은 말이 아니었지요 그러다 보니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어요 19세에 (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지요 그러나 24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어요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의 부친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지요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우렸어요 공자는 어릴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지요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어요 그는 만날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지요 그러다 만난것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지요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많이 나오고 있어요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 했지요 서른살에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선 것이지요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되었지요 이때 그는 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만든 것이지요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부터 평민의 자제까지에 이르기까지 '묶은 고기'(束脩) 한 두럼을 가져온 사람들은 누구나 가르쳤어요 이때 공자는 <시경> <서경> <주역> 등의 경전을 가르쳤지요 공자는 노나라 사람이었고 노나라에서 태어 났으며 노나라에서 살았지요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지켜야 하고 또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 했지요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던 인물이었지요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하고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하지요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모두 종친들이 차지 했어요 이래서 이를보고 종법제라 했어요 그런데 공자가 장성했을때에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하게 혼란기에 있었지요 그래서 공자는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하고 노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어요 이때 공자는 회계 출납직인 위리(委吏)를 거쳐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 생활을 하였는데 공자는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 학문적으로도 많은 추앙을 받게 되었지요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였지요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어요 그런 공자가 어느날 모든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이곳 저곳 주유하였는데 주나라(周)의 낙읍(洛邑)을 돌아보고 귀국하자 그의 명망은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어요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지요 그리하여 그 수가 훗날 3천명을 넘었지요 이에 공자를 눈여겨 본 노(魯)나라의 왕 소공(昭公)은 그를 가까이 두려 하였어요 그러나 공자나이 36세때(소공(昭公)25년)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지요 그래서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을 가게 되어 제(齊)나라에 갔어요 제나라로 간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학문을 펼치고 진리를 가르쳤지요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역설 했어요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되어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공자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위태할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여 좌절되고 말았지요 제나라에서 2년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중도재(中道宰)가 되었으며 52세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지요 그러나 크고 작은일로 인해 난신들과 대립하게 되면서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리고 제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게 되었지요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은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어요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해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지요 그때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 당했어요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는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지요 그리하여 그는 귀국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어요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지요 이때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어요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삼십이립(三十而立)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고 하였지요 공자는 73세가 되던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어요 공자가 세상을 떠난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지요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천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中華)'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이 되었어요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중 한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지요 공자의 죽은후 노성 북쪽(魯城北 曲阜 洙上, 현재의 산동성 곡비현 북쪽)에서 장례가 치러졌지요 그의 제자들은 증자를 상주로 하고 부모의 장례에 준하는 예로써 상복을 입고 그의 묘소 앞에서 3년상을 마친 뒤 각자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어요 이후 증자의 문인들과 증자의 제자이자 친손자인 자사의 문인들 그리고 자사학파에서 갈려 나온 맹자의 학파, 자궁의 학파 자궁의 학파에서 분파된 순자의 학파가 크게 융성하였지요 이후 유학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교육을 통해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로써 악한 본성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순자의 성악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지요 그후 당나라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으며 1008년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고 원나라에 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지요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으며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의 칭호가 수여되었어요 한편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자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지요 이때 유학서 및 다량의 공자 관련 유물 등도 무더기로 불에 타 사라지는 참화를 겪었어요 그러나 등소평 이후 후진타오 시진평에 이르러 비로서 공자사상이 다시금 각광을 받게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어요 끝으로 공자님 부인에 대한 유머 한마디 아주 먼 옛날... 공자가 사는 마을 빨래터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마침 공자 부인도 빨랫감을 안고 나타났지요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동네 아낙네들 가운데 하나가 공자의 부인에게 말했어요 " 아 ~ 그래!! 부인 께서는 요즘 무슨 재미로 사시나요? 사람 사는 재미는 애 낳고 키우며 알콩달콩 싸워가면서..사는 것인데~~ 공자님하고는 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기는 하는가요? ".... ㅎㅎㅎ 그러자 공자 부인은 못들은척 하며 계속 빨래만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곁에 있던 다른 아낙네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지요 " 덕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 " 학문이 그렇게 높으면 뭘 하나 ... " " 제자가 그렇게 많으면 뭘 하나 ... " " 사람 사는 재미는.. ㅎㅎ 진짜 재미는 이불속에서 그저...히히 ㅎ^^&... " 그러거나 말거나 공자 부인은 열심히 빨래를 하였지요 이윽고 빨래를 마친 공자의 부인이 빨래를 챙겨들고 일어서며 아낙네들에게 한마디 했어요 야~~!! 이 여편네들아! 밤에도 공자인줄 알아? ㅎㅎㅎ * 언제나 변함없는 산적:조 동렬(일송) *- ★ 공자의 고향 곡부 ...

     

     

    ▲ 공묘(공자를 기리는 사당), 공부(공자의 후손들이 지내던곳), 공림(공자묘) 중국 AAAAA급 최고의 관광지이지요 ...

     

     

    ▲ 공묘의 전문인 금성옥진방입니다 공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사당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있어요 앙성문 - 금성옥진 -영성문-태화원기방 - 성시문-벽수교를 지나 홍도문- 대중문-동문문-규문각을 지나 대성문-대성전-성석전까지 이어지지요 금성옥진의 뜻은 맹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칭송한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

     

     

    ▲ 공묘 제 1문인 영성문 뒤에 보이는 태화원기는 우주만물을 창조한 에너지를 표현하는 말이지요 (공자의 가르침은 천지창조의 에너지와도 같다는 의미라고 함) ...

     

     

    ▲ 공묘안내도를 잘보고 다녀야 하나하나 상세하게 볼수 있지요 오른쪽으로 다니면서 보고 나올때는 반대쪽으로 나오면 다볼수 있어요 ...

     

     

    ▲ 공묘 제4문인 대중문 금나라때 세워졌다고 하지요 청나라의 건륭제가 직접 쓴글씨라 하네요 ...

     

     

    ▲ 역대 황제들이 공묘를 방문할때마다 비석을 세워두었는데 이 비석들을 비바람으로 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세운 정자라 하네요 ...

     

     

    ▲ 이곳에서는 논어,천자문,당시집 등의 책을 팔고 있어요...

     

     

    ▲ 천년묵은 향나무 이 나무를 만지고 빌면 소원이 이루어 진데요 하도 만져서 반들반들 하네요 ...

     

     

    ▲ 돌기둥에 용을 조각해 두었어요 정말 대단한 작품이지요 ...

     

     

    ▲ 정말 오래된 비석 ...

     

     

    ▲ 대성전의 모습 공묘의 본전인데 휘종황제가 대성전이라는 친필편액을 하사하면서 대성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네요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궁전건물 ...

     

     

    ▲ 기둥을 전부 돌 조각으로 만든 용기둥 세계에서 두번째로 세계문화유산이 많은 나라가 중국인데 대부분 민간기업이 관리를 한다고 하네요 그러다 보니 1,000년동안 잘 관리되어오던 이곳도 민간기업이 어리석게도 대성전을 물청소를 하는바람에 단청이 벗겨지고 안료가 부풀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상실되었다 하는군요 ...

     

     

    ▲ 기둥의 크기를 보면 건물크기를 상상할수 있지요 ...

     

     

    ▲ 옛날 교과서에서 본듯한 그림이지요? ...

     

     

     

    ▲ 천년 세월의 흐름 ...

     

     

    ▲ 공묘에서 공부로 들어가는 문 공부(孔府)는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던곳으로 총 463칸의 방으로 되어있다고 함 ...

     

     

    ▲ 공부 건물 ...

     

     

    ▲ 공자묘 입구 비석 ...

     

     

    ▲ 공림(지성림) 입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묘지공원(공씨들만 묻힐수 있는곳) 3,600개의 비석과 10만여 그루의 나무가 있어 산책하기도 좋은곳 이라 하네요 ...

     

     

    ▲ 공자묘 가는길 ...

     

     

     

    ▲ 자공수식해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가 돌아가시고 6년동안 공자의 묘를 지켰다고 하는데 그때 자공이 심었던 나무가 지금은 죽어서 ...

     

     

    ▲ 공자묘 (대성지성선왕묘) 공자묘의 오른쪽에 공자의 아들묘도 있어요...

     

     

    ▲ 곡부 시가지 모습 ...

     

     

     

    ▲ 노나라때 만들어진 곡부성 청도에서 약 400키로 떨어진 곡부(취푸) 공자아니면 특별하게 볼것이 없는 자그만한 도시이지만 공자의 얼이 담긴 유서깊은 곳이지요 곡부에서 멀지 않은곳에 그 유명한 태산이 있어요 그래서 곡부와 태산을 함께 여행 하면 좋아요 ...

     


'心眼齋 > 漢詩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학의 전래와 발달  (0) 2018.01.01
나는 구름이고 싶다.  (0) 2017.09.25
[스크랩] 한시란 무엇인가?  (0) 2017.02.18
부자가 되고 싶다면  (0) 2016.08.31
消暑八事(소서팔사) - 정약용(丁若鏞)   (0) 2016.08.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