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學集註跋
古者小學에 始敎八歲之蒙하니 想其爲言易知而其爲敎易入也라 三代之盛에 其法必備하여 規模條制列於職官이러니 而秦火之餘에 其書不傳하니 晦菴夫子閔人道之不立하고 嗟爲學之無本하사 遂以聖人立敎之遺意로 蒐輯經史하여 編爲小學之書하시니 由是로 小學之敎復明於天下하니 誠垂世之大訓也니라
第次輯之書出入古今하여 其精深簡奧之言이 必有訓釋然後에야 其義可明하니 此集註之說이 不得不作於後也라. 夫子(朱子)以後로 註家相踵하여 各有成書나 然이나 讀之者咸病其不盡合於經意也라.
吾友德水李侯叔獻(李珥)이 謝事而歸하여 講道海山之陽할세 造士之規를 悉擧成法하여 揭是書爲入德之門하며 而且憂註說多門하여 莫歸于正이라.
乃取諸家하여 刪繁萃要하고 集長去短하여 一以不反乎經旨하고 明白平實하며 而或詳或略이 又以互相發焉하니 可謂執群言之兩端而善於折衷者矣라.
間送于一二執友하여 與之詳訂하니 雖以渾之愚로도 亦得以反復焉이로다. 嗚呼, 聖賢之書何莫非服膺踐實之要리오마는 而小學之敎은 加之幼穉之初하여 發良知而示趍向하고 正蒙養而培本原하여 先諸事爲하여 無非家庭日用之常이니 童子受一日之敎하면 擧足之始에 已立於循蹈之地하니 非如大學之方과 兼有玩索之功하여 業廣而思深也라.
然則讀是書者는 不難於解其義라 而專於習其事요 不貴於說話鋪排라 而主於深體力行하여 要使明倫敬身之意로 浹洽於中하고 淪肌浹髓하여 日用之間事親從兄에 卽見孝悌之當然을 如着衣嚼飯하여 無待於外求면 則所謂涵養純熟根基深厚者을 可得而言也리라.
童子固宜服事純實如是오 至於過時而學하여 失序追補者하여도 尤不可以不知此意也니라
渾은 晩暮收拾에 根本不立하니 竊有感於夫子妙敬無窮之旨하여 每以嘗試責勉之工程으로 自訟於心者久矣러니 叔獻書來하여 徵跋文於余하니 旣不敢辭일세 則書其說以諗之云이로다. 昌寧成渾은 跋하노라.
循蹈之地 : 법도나 예절을 따라 행동하는 곳
趨向 : 대세를 따라감
玩索 : 글 뜻을 연구하여 찾음
叔獻 : 栗谷 李珥의 字 德水는 貫鄕
성혼(成渾, 1535년 6월 25일 ~ 1598년 6월 6일)
조선 좌찬성 직책을 지낸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 성수침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小學跋
成化間에 有淳安程氏者治河于濟하니 濟南은 多名士하여 彬彬有伏生之遺風焉이라.
因與其徒로 日講小學하여 辨質訂正하여 爲註䟽六卷하여 以畀東使之聘上國者하여 東人이 始得欣覩焉이러니 其後에 河(何士信=集成)吳(吳訥=集解)陳(陳祚=正誤,陳選=增註)氏之說이 稍稍出海外로대 而學子局於井觀하여 猶守株先入하여 崇信程說하여 殊不知諸家語有短長하여 理或抹摋하니 余嘗病之라.
妄欲參校會趣하여 以便考閱이러니 一日에 金鐵原長生이 見訪이어늘 因語及之한대 金言栗谷已先宰割하시니 子何重勞리오하고 遂以其所藏一帙見示하니 余甲管曰不亦善乎?아 儘師逸而功倍矣로다.
因續史纂入梓하여 以壽其傳하노라
都提調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効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世子傅 鰲城府院君 李恒福은 謹跋하노라.
伏生 : 『상서尙書(서경書經)』는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伏生의 기억에 의해 복원되고 전수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
成化 : 明憲宗의 年號
淳安程氏 : 小學輯說의 著者인 程愈
李恒福 : 조선선조때의문신(1556~1618). 포천 출신으로 자는자상(子常)이고호는동강(東岡), 백사(白沙), 필운(弼雲)이다. 임진왜란때병조판서를지내면서많은공적을세웠으며, 좌의정, 영의정을지냈고, 오성부원군에진봉되었다. 1617년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반대하다가1618년관직이삭탈되고함경도북청에유배되어그곳에서죽었다. 저서에 《사례훈몽(四禮訓蒙)》, 《백사집(白沙集)》, 《북천일기(北遷日記)》 등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