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신부 맞절-

신랑신부는 마주보고 서세요. 이 시간 이후 일심동체가 되어 서로 존경하며 살자는 의미로 인사를 하겠습니다. 신랑신부 인사.....

 

주 례 사

만물이 소생하는 화창한 춘삼월인 오늘 하늘의 뜻으로 새 가정을 이루게 된 신랑 신부와 두 가정에 먼저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주말인데도 양가의 경사를 축하해 주기 위해 참석하신 하객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신랑 김정훈 군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군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후 국내 유망 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는 유능한 인재이고,

신부 송미란 양 역시 중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대기업에서 대리로 근무하는 총망 받는 인재입니다.

예로부터 부부의 인연을 불교에서는 삼세의 인연이라 해서 두 사람은 현세에 뿐만 아니라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왔고 내세에도 이어지는 인연이라 했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짝지어 주신 것을 인간이 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이란 그 무엇보다도 신성하고 엄숙한 계약이요 약속인 것입니다. 그 약속을 지켜 나가기 위해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의 좋은 점만 보였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단점도 함께 보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가 간혹 실수를 하더라도, 서로 사랑으로 감싸주고 어루만져 준다면 그 상처는 곧 치유될 것입니다.

 

둘째 인내해야 합니다.

百忍堂中有泰和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백번 참는 집안에는 큰 화목이 있다”. 라는 뜻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교육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더 큰 보람과 행복이 찾아 올 겁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로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을 때, 서로 이해와 사랑으로 보듬어 준다면, 그 사랑의 힘으로 더욱 용기를 내어,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오더라도 무난히 헤쳐 나갈 것입니다.

 

셋째는 효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효도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 두 분이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가꾸어 나아가서 양가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효도요, 지금까지 길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양가의 부모님을 잊지 말고, 항상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가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실 때 자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바로 효도입니다.

 

끝으로 두 분에게 백락천의 장한가 중에 한구절을 소개 하겠습니다. 在天願作比翼鳥在地願爲連理枝란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에 있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 자라는 연리지(連理枝)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比翼鳥는 날개도 하나요, 다리도 하나요, 눈도 하나인 새입니다. 이 새는 암수가 짝을 만나 서로 몸을 합치면 천리를 날 수 있다는 전설의 새처럼 부부가 일심동체가 되면 만사형통 한다는 뜻이고,

連理枝는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인데, 그 가지가 서로 붙어서 두 나무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라는 나무로서, 부부가 정성을 다해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라는 뜻입니다. 이 내용을 작품으로 써 드렸으니 이처럼 다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양가 부모님께 인사-

 

먼저 신부 부모님께 인사를 ....

 

지금까지 따님을 훌륭하게 키워주신데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과 앞으로 행복하게 살겠다는 마음으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부모님께 인사......

 

다음은 신랑 부모님께 인사를.....

 

앞으로 저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행복한 가정을 가꾸어 가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부모님께 인사....

 

-하객 여러분께 인사-

 

양가의 부모님께서도 함께 나오셔서 하객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저희 양가의 경사에 참석하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는 뜻으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하객 여러분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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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 刊 辭

麟社漢詩學會同人誌 麟社集 辛卯吟(第五刊) 上梓自祝하면서 感懷一端을 밝히고자 한다.

國字漢字에서 한글로 바뀌는 20世紀 初를 지나, 所謂 現代式 敎育制度定着으로 敎育舞臺書堂에서 學校로 바뀌는 過程을 거치면서, ‘雪上加霜으로 한글專用文敎政策漢文學退步惹起하여 이로 하여 三綱五倫頹廢하고 西洋風俗橫行하여 斯道沈滯되었다. 그런 渦中에서도 漢文 讀解可能하다 해도 作詩하는 사람은 히 드물다. 近體詩가 가지는 平仄問題, 詩的修辭, 詩文上倒置等詩想難題가 있기 때문이다.

詩作人生에 있어서 事物을 낳는 큰 神靈作用이다. 없는 世上이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理論을 밝히는 學問를 깨닫는 宗敎들도 産靈인 것이나, 는 그 어느 것보다도 큰 産靈인 것이다.

孔子不學詩無以言 不學禮無以立이라 했다. 이는 로서 民心風俗을 바로 잡고 로서 人間關係 改善道德體系를 바로잡으려고 弟子敎育重點을 두었던 것이다. 漢代 劉向說苑에서 詩可得味 不可得解라 했으며, 蘇東坡讀書萬卷始通神이라 읊었으며, 朱熹讀書百篇義自見이라 하였으니 解釋重點을 두지 말고 多讀重點을 두면서 공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嚴羽滄浪詩話에서 詩禪一致說主張하며 大抵禪道惟在妙悟 詩道亦在妙悟라 했으니 壁面七年無念無想으로 어느 날 문득 得道하는 것이나, 를 배우고자 하는 는 먼저 五俗(俗體, 俗意, 俗句, 俗字, 俗韻)을 제거하고 四不(不怒, 不露, 不暗, 不疎)警戒해야 한다고 했으니 一脈相通하지 않는가?

賈島獨行潭底影이요 數息樹邊身이라.’라고 짓기를 3년이나 고심한 끝에 얻고서 말하기를 二句三年得 一吟雙淚流 知音如不賞 歸臥故山秋라 했으니, 과연 詩人 다운 觀照의 소리가 아니던가.

우리 麟社集 丁亥吟 創刊號筆頭庚寅吟에 이르기 까지 初代 勤齋 金承善, 二代 雨仟 金仁燾會長님의 功勞感謝드리며 不肖菲才愚鈍淺學受任 後 누를 끼치지 않을까 戰戰兢兢하는 가운데 多幸인 것은 玄岩先生님의 名聲에 힘입어 合勢하는 社友濟州道를 비롯 京鄕各地에서 繁滋하고 詩格 또한 日新又日新하는 것으로 慰安으로 삼을 뿐이다. 斯界中樞的役割實踐하시고 敎學相長精神으로 日淺麟社會員들을 明快講義引導하시는 玄岩 蘇秉敦先生님의 勞苦에 다시 한번 頓首 深謝드리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素潭 許甲均 總務님과 모든 文友들의 協助感謝드린

20122月 日

麟社漢詩學會長 章石 徐明澤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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跋 文

 

한국서예가 명단을 便覽해 볼 때마다 우연히 同姓에 관심이 더하여 紙上에서 竹玄 徐東亨先生銜字와 작품을 감상하며 眼福을 누렸었는데, 向日 麟社漢詩學會에서 手人事를 나누다가 相互 宗親임을 확인하여 그 기쁨이 倍加 되었다.

 

그 후 每月 玄岩書堂 瓊筵에서 以文會同하여 濁酒를 기우리며 三更을 넘겨가며 詩語하고 覓句를 거듭 할수록 선생의 깊은 學文驚歎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經綸類推해 보니 學部에서는 敎育學專攻하고 進學하여 文學博士履修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書聖 金生의 고향인 中原 忠州에서 三十餘年 前 海東書塾을 열었고 .唐楷를 깊이 穿鑿하며 金生書法班主宰하여 그 을 이으며 후진 양성에 邁進하였다.

 

또한 中原吟社를 결성하여 마침내 蘂城 忠州漢詩基盤을 마련하여 全國 漢詩 白日場連年 擧行하고 있다. 이러한 刻苦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한국 詩壇에 서서히 頭角을 나타내는가 싶더니 금년 ㅇㅇㅇㅇ漢詩白日場에서 壯元登第 御史花冕旒冠을 쓰고야 말았으니 참으로 光榮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淸代 王昱인품이 세워진 사람은 필묵 이외에 일종의 광명정대한 기개가 있다.”(立品之人 筆墨外自有一種正大光明之槪)하였고. 明代 項穆書法雅言에서 학술이나 경론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니 그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움직이는 것이 모두 사악해 진다. 유공권이 말하기를 마음이 바르면 붓도 바르게 된다(學術經論 皆由心起 其心不正 所動悉邪. 柳公權曰 心正則筆正)라 했으니 이미 ,,에 능한 竹玄先生.間架古朴無垢하면서도 虛實, 向背, 挪讓, 大小, 長短, 寬窄, 斜正等攄得하여 萬毫齊力氣韻生動遒勁骨法內在되었다.

 

姜夔續書譜에서 말했듯이 서로 읍하고 등지며, 왼쪽에서 자세를 취하면 오른쪽에서 같이 응하며 위에서 일어나면 아래에서 엎드리게 하여 점과 획 사이를 각각 이치에 맞게 베풀어 놓은 듯하다”.(相揖相背 發於左者應於右 起於上者伏於下 大要點劃之間 施設各有情理) 또한 鄧石如藝舟雙輯에서 字劃이 성근 곳에서는 말을 달리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하고 밀 한곳에서는 바람도 통할 수 없게 채워 쓰고 항상 을 재어서 을 놓을 때에 훌륭한 멋이 나온다 (字畫疏處可以走馬 密處不使透風 常计白以當黑 寄趣乃出)하였으니 여기에 上梓한 작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朱和羹臨池心解에서 楷書 쓰는 법과 行草를 쓰는 용필법은 같은 이치이다. 해서를 쓰는데 행초의 필법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전혀 혈맥이 없어지고 행초서에 해서의 필법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모두 시작과 끝이 사라지게 된다(楷法與作行草 用筆一理 作楷不以行草之筆出之 則全無血脈 行草不以作楷之筆出之 則全無起訖)고 하였고, “인품이 높은 사람은 한점 한획이 저절로 맑고 강하면서도 우아하고 바른 기운이 있다. 인품이 낮은 사람은 비록 변화가 있고 누르고 꺾어서 엄숙하며 볼만하여도 강하고 사나움이 함부로 넘쳐 종이 밖으로 드러남을 면치 못 한다(品高者 一點一畫 自有淸剛雅正之氣 品下者 雖激昻頓挫 儼然可觀 而縱橫剛暴 未免流露楮外)하였다. 죽현선생이 驅使한 행초를 보면 體勢가 끊어지는 듯 이어졌으니 이 筆意張芝로부터 시작하여 王獻之가 이어받아 성숙시킨 一筆書能熟運用 했음이라.

 

이러한 筆致는 그간 수양한 인품에서 發露한 것이 確然한 것이요, 文字香 書卷氣博學多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또한 章法現在, 未來를 넘나드니 斯界牽引한다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며, 후학들에게 範本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屢次 辭讓에도 不拘하고 愚鈍 菲才族弟에게 麟社首長이란 名目으로 감히 跋文의 기회를 준 竹玄先生에게 감사드리며, 自由自在率意書寫獨步的인 이번전시가 開幕成市하여 海內禮讚聲聞을 바랄 따름이다.

2012415

 

心眼齋에서 麟社會長 徐明澤 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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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례         사

 

  오늘같이 좋은 날,

입춘을 며칠 앞두고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소생을 준비하는 이 때에 하늘의 뜻으로 새가정을 이루게 된 신랑신부와 양가에 먼저 축하를

드리고 주말인데도 양가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귀한 걸음을 해주신하객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신랑 김학민군은 인제의대를 졸업하고 부산 백병원에서 비뇨기과 전문의 수련과정을 밟고 있는 본 주례자의 사랑하는 제자입니다.

의과대학 재학중이나 수련과정중에서 항상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성품과 자세로 동료들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신부 남주미양은 인자하고 자상하신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반듯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부산 동의대 예술대학 미술학과에서 동양미술을 전공하고 각종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대학원에서 계속 정진하고 있는 학구파 규수입니다.

 

 늘 아픔과 고통으로 찌푸린 환자의 얼굴을 대하고 어렵고 힘든 평생 의술연마의 길에 오른 의사에게 예술적 감각을 지닌 신부야말로

너무도 훌륭한 반려자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예로부터 남녀의 결합을 불교에서는 삼세의 인연이라고 해서 두 사람의 만남이 현세에서 뿐만 아니라 전생에서부터 맺어왔고 내세에서도 소멸할 수 없는 인연이라고 했고,  기독교에서는하느님의 섭리 또는 은총으로 하느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인간이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정배필, 하늘이 정한 배필로 두 사람만의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나 힘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결혼이란 그 무엇보다도 신성하고 엄숙한 계약이요 약속인 것입니다.   그 약속을 잘 지켜 나가기 위해 몇가지 당부를 

드립니다. 

 

 

   첫째,  진실성 있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부부는 한 마음입니다.  부부간에 결코 거짓이나 위선이 있어 서는 안됩니다. 매사를 서로 털어놓고 진솔한 대화를 통해 풀어 나가면서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서로에게 솔직하고 믿음을 주는 사이가 되어야 떳떳하고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부부가 됩니다.

 

두번째로 서로 존중하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의 이쁘고 좋은 점만 눈에 띄었지만 앞으로 많은 단점과 실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점없고 실수 안하는 사람

있겠습니까.  단점을 서로 꼬집기 시작하면 상처만 더 커지지요.서로 감싸주고 어루만지며 치유시키는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세번째로는 서로에게 봉사하고 희생하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양쪽에 타고 있는 촛불과 같이 자신을 태워서 빛을 발하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은 무었보다도 숭고한 사랑의 정신입니다.

서로 배려하고 상대방 입장에서 헤아린다면 우선 좀 손해보는 것 같아도 분명 더 큰 기쁨과 보람이 상으로 되돌아 올 겁니다.

 

마지막으로 인내성 있는 부부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교육과 경험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이 같을 수 있으며 어떻게 상대방 마음에 속 들게만 살 수 있겠

습니까.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로 힘들고 아쉬움이 많더라도 참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다보면  나중에 더 큰 보람과 즐거움이 찾아 올

겁니다.

 

이제 지금까지 낳아 길러 주시고 가르치고 짝지어 주신 양가의 부모님들께도 더 높은 차원의 효도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하면 웃 어른을 편하고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하시기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 마다 항상 오늘 맹세하고 다짐한 사랑을생각하면서 예쁘고 슬기롭게 살아가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일까요. 바로 지금 신랑신부가 서로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 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아낌없이 마음을 주고 받으며 함께하는 소중하고 값진 결혼, 인생에 있어 이보다 더 고귀한 순간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간직하며 베풀수록 아름다운 것입니다. 흔히들 결혼을 하는 두 사람에게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살라고 하는데 저는 검은머리가 대머리가 될 때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세치 혀를 빌어 “사랑한다” 라는 말보다 죽을힘을 다해서 「밀고 당기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가족과 이웃, 그리고 국가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 좀 쓰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머리가 뽑혀 대머리가 되도록 부부사랑을 하다보면 아이도 많이 낳고 금슬도 좋아질 것이라 생각해서 특별히 주문합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지 불행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단1%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이 51%이고 불행이 49%라고 할 때 행복과 불행을 저울에 올려놓으면 49%인 불행 이 51%인 행복 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의 조건은 1%만 더 가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도 누가 1%의 「행복기울기」를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화목과 행운이 찾아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와 같은 「행복기울기 1%」를 만드는데 필요한 몇 가지 방법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그 감사함을 잊지 말고 효도함에 게을리 하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다 커서 결혼을 시켰어도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로 보인 답니다. 밥이나 제때에 해먹는지, 감기라도 안 걸렸는지 하는 생각들이 자식 멀리둔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부모님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두 번째의 「1%행복기울기」는 존경과 인내입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보면 말을 쉽게 놓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좋은 상황에서는 괜찮을 수 있지만, 화나고 마땅치 않을 때에는 놓고 지내는 말 습성 때문에 서로의 존경심을 잃게 되어 결국에는 막다른 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되도록 존대어를 써서 늘 처음 만났던 마음을 간직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내는 마음의 벽을 쌓지 않습니다. 평소 하는 말과 행동이 인내심 없이 나오다 보면 부부금슬에 벽이 생기게 되어 씻기 어려운 상처가 남게 마련입니다. 인내심은 우리가 위험에 닥쳤을 때 찾아 쓸 수 있는 보험처럼 차곡차곡 모아두는 것과 같습니다. 당황스럽거나 낙심이 생겼을 때 참아내는 인내의 지혜를 갖기를 바랍니다. 결혼은 인내와 희생으로 출발하는 장거리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의 「1%행복기울기」는 건강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육체와 정신이 건강할 때 남을 배려도 할 수 있고,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는 자기만족도 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두 사람의 긴 인생여정에는 돌풍도 만날 것이고 때로는 높은 파도와 같은 피하기 힘든 고난이 뒤따를 것입니다. 이럴 때마다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하기위해서 남자는 백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전한 사고력과 신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주고, 여자는 과분이 넘칠때는 닦아주고, 모자람이 있을 때는 채워주는 모성애 같은 친밀함과 이해심을 발휘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 드립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극복의 동반자가 되고, 기쁨과 행복이 넘칠때는 나누어 갖는 슬기로움과 배려할 줄 아는 지성인이 되길 바랍니다.

신랑 김경일군, 신부 김민지양, 저와 함께 오늘 이 행복의 순간이 영원히 기억되는 자리가 됩시다.  축하합니다.

 

 

 

 

 

주 례 사

 

오늘 이렇게 화창한 날씨에 양가의 부모님과 친척 그리고 많은 하객을 모시고 신랑 이재ㅇ 군과 신부 심은ㅇ 양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조성린입니다.

제가 결혼식장을 다니면서 들은 주례사 중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스님이 주례를 보시는데 “ 여자치마와 주례사는 짧을수록 좋아들 한다.” 고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몇 마디만 하고자합니다.

 

저는 열흘 전에 저희 결혼 33주년을 지냈습니다.

돌이켜 보면 빈주먹으로 출발하여 세명의 아이를 낳아 이제 모두 대학을 나오고 큰아이는 직장에 다니다 결혼하여 엄마가 되었고 두 아이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신랑, 신부에게 몇 마디 하겠습니다.

첫째 상대방의 결점을 보완해 가며 사십시요. 저도 연애할 때는 서로 좋아하니까 같이 살면 꿈만 같을 줄 알았는데 막상 살아보니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짐 보따리를 쌌다 풀었다를 몇 번 했는지 모릅니다.

부부가 아니라 원수 같기도 하고 왜 내가 저런 사람하고 결혼을 해 가지고 이렇게 고생을 하나 하면서 결혼 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위험한 고비도 여러번 있었지만 참고 지내다 보니 이제는 서로 그래도 당신과 결혼 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연애할 때야 모든 게 좋아보였는데 막상 살아보니 왜 그리 결점이 많이 보이는지 참 갑갑하더라고요.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세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이것저것 따져보면 완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 남편, 내 아내가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서로 결점을 보완해 가면서 살다보면 닮아갑니다.

 

두 번째는 건강을 챙기는 일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든걸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창고에 금은보화가 가득하여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서로 건강을 챙겨주고 시간이 나면 손잡고 동네라고 한바퀴 돌며 대화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욱 깊어질 겁니다.

 

세 번째는 항상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학교를 마치면 공부를 안 합니다. 요즈음이야 인터넷도 있으니 본인만 노력하면 싸게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습니다. 항상 공부하여 자기 전공분야에서 1인자가 되십시오.

저는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계속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나이 먹어서도 공부하는 아버지를 보고 아이들이 알아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저 자신도 어디가든 다른 사람과 대화에 동참할 수 있어 기분이 좋고 직장에서도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넷째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공부시켜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가 부모님이 연로하셔서 거동하시는 데나 경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면 자식의 도리를 다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계신 분들 중에 결혼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누구나 경험하셨겠지만 결혼 생활이 기쁠 때도 있고 슬플 때도 있습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같이 즐겁게 지내고 슬픈 일이 있으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여 거대한 풍파를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양가 부모님께 말씀드립니다. 이제 오늘로 두 사람은 부모의 곁을 떠나 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습니다. 부부사이는 촌수가 없으나 부모와 자식 사이는 1촌이므로 부부 사이가 더 가까운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엊그제 까지 안 그랬는데 결혼하더니 애가 변했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며칠 전에도 어떤 분이 아들이 결혼하더니 지 마누라, 지 새끼만 챙긴다고 서운해 하시기에 걔네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 기대하지 않는게 맞는 것 아니냐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집값도 너무나 비싸고 교육비도 많이 들어서 맞벌이를 해도 참 어렵습니다.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을 도와주셔야지 키워주고 공부시켜 주었으니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라고 이런 설명을 드린 겁니다.

 

또 친척과 친구분들 그리고 하객 모든 분께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새 출발을 하는 두 사람이 화목하고 즐거운 결혼생활을 하도록 축하해 주시고 행복하게 살도록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 들이라 여러 가지로 실수하는 것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셔야지 쟤는 어쩌니 저쩌니 하면 참 힘들어 할 겁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흉보지 마시고 살며시 충고하여 바른길로 가도록 인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드리고 양가 어르신들에게도 축하를 드립니다. 또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하객 분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상으로 주례사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향기로운 세상
글쓴이 : 白 雲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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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書藝敎育問題點과 그 診斷

-서실 지도경험을 바탕으로-

 

 

徐明澤(경희대 교육대학원 서예문인화과정 지도교수)

 

 

 

 

 

. 들어가며 . 韓國書藝活性化 方案

. 韓國書藝問題點 1. 漢文敎育活性化

1. 書藝敎育不實 2. 公募展 文化再定立

2. 漢文敎育不在 . 마치며

3. 書藝文化歪曲

 

. 들어가며

 

서예는 동양의 문학 역사 철학의 논리적 사유위에 예술의 감성적 요소를 접목시키는 학문이며, 실제에 있어서는 문자의 조형미에서 더 나아가 인간 내면의 세계를 토로해 내는 행위예술이다.

오늘날 물질문명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의 위기는 전통문화에 뿌리를 둔 서예학, 즉 서예의 예술 정신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서예는 동아시아의 인문정신을 인류사회에서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이자 예술이며, 이러한 學藝一致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과 창작의 사회적 응용이 요구되는 분야이다. 이러한 서예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실천적 바탕으로서의 선결 조건은 서예술의 根幹漢文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보급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작금의 현실에서 한문을 알거나 관심을 두는 국민이 극소수에 불과한 만큼 그들이 한문 해독이나, 글씨가 필요할 때 서예인 들이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학문적인 역량을 갖추는 것이 최소한의 서예지도자의 자질이라고 하겠다.

 

. 韓國書藝問題點

1. 書藝敎育不實

1945815일 광복 후 서예는 공교육의 초, 중등교육과정에 서예 시간은 극히 적게 배정되었었고, 현재는 미술교과목에 통폐합되어 거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서예 교육은 아직도 과거의 서당식 徒弟敎育형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한국서예 발전의 측면에서 본다면 서당식 도제교육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학원이나 교습소에서 서예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훈장님’(서예가)?들의 공로는 지대하다 하겠다.

이면을 살펴보면, ‘도제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그 수위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만약 가르치는 선생에게 문제가 있을 경우 학생은 자기가 지금 무엇을 어느 정도 잘못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 채 편향된 시각으로 한국의 서예문화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제교육의 편향된 문제는 한국 서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한 선생을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문중간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고, 공모전에서의 한 문중을 중심으로 하는 천편일률적인 서풍은 서단의 수평적인 발전을 저해하였다. 나아가 서예를 배우려는 사람들이나 국민들에게 불신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도제식 교육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 먼저, 대학에 서예과가 개설되어 서예에 공교육이 적용되면서 도제식 교육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門戶開放 이후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서예 학습 자료들이 들어오는 한편 그 자료의 원류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이나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서예계는 스승이 독점하고 있던 서예에 대한 정보를 학생들이 스승과 공유하거나 심지어는 스승을 능가하게 됨으로써 밀폐된 도제교육의 권위가 무너지는 전환기적 상황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학 서예과의 문제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요즘 침체되고 있는 서예과의 문제점으로 대학을 중심으로 횡행하는 서예교육 메카니즘이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도제식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도제식교육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다음으로는 공공기관에서의 사회 교육이다. 지방자치의 실시로 요즘 각 동사무소나 문화교실 등에서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서예 학습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각 지방 자치단체 담당자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소양부족 등으로 그 강의 수준이 문제시되고 있다. 특히, ‘재능기부활동의 일환으로 무보수로 강의하는 강사들의 실력은 그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고, 예산부족 등의 이유로 초빙된 서예 강사들에게 대한 처우 또한 봉사 수준 내지 무보수를 강요하다보니 전업서예가들은 강의를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수양이 일천한 강사들이 포진한 사회 교육은 말이 교육이었지 도리어 문화 수준을 하향평준화 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은 전통문화의 근간인 서예의 질적인 가치를 떨어뜨리고 서예에 흥미를 가지고 입문한 사람들이 아예 서예를 그만두거나 서예를 저급하게 인식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고도의 정보화 시대의 도래는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서예를 외면하게 만들었고,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서예지도자들은 문명의 異氣를 서예 발전의 걸림돌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서예의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필자가 서예 교습소를 시작하던 80년대 중반 까지만 해도 컴퓨터 보급은 시작 단계였다. 그래서 관공서나 학교교육의 행정을 위한 서류철이나 표지, 상장 등 주로 실생활에서 필요에 의해, 서예를 익힌 경우도 적지 아니하였다. 이후 컴퓨터 보급의 확산과 컴퓨터로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글자체가 개발되면서 붓글씨를 대신하게 되었다. 컴퓨터의 등장은 비단 서예 분야에 국한된 것은 아니며 펜글씨주산부기타자 학원 외에도 수많은 직업들이 함께 수난기를 맞거나 소멸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漢文敎育不在

해방이후 남한에는 바로 미군이 주둔하였고 모든 정책은 미군정청에 의해 수립되었다. 194511월에는 사회 각 계층의 인사 80여 명으로 朝鮮敎育審議會를 조직하고 교과서 분과위원회에서는 한자 사용을 폐지하고 초, 중등 교과서는 전부 한글로 하되, 다만 필요에 따라 괄호( ) 안에 한자를 倂記할 수 있다는 결의안을 내놓았다. 이 안이 통과되자 미군정청은 바로 이를 재가하여 각 급 학교의 교과서는 한글전용의 가로쓰기로 출간되었다. 그 후 5.16군사정변으로 탄생한 제3공화국에 이르러서는 소위 문맹퇴치라는 우민화 정책으로 인하여 한글전용 정책이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었다. 196852일 한글전용 5개년 계획안이 공표되어 초, 중등학교의 한자 교육이 완전 폐지되었다. 1977818일 당시 여론에 따라 절대적 권력자는 현실적으로 상용되고 있는 한자를 없애자는 주장도 옳지 않지만, 상용한자를 현재보다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옳지 않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후 19793월 상용한자 1,800자가 확정 발표되었으나 현실적으로는 1,800자 마저도 제대로 교육되지 못한 채 한자는 교육 현장에서 점차 멀어 지게 되었다.

우리말 중의 70%이상을 차지하는 한자어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문을 알아야만 한다. 한자교육의 폐지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점은 비단 서예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 중등학교는 물론 고등교육의 경우라도 한자를 알아야 우리의 역사언어뿐만이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하다. 진정한 민족 주체성 확립의 길은 한자 교육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게 하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일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예 창작의 매체는 한문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자에 구비된 오체의 具象性抽象性을 통하여 동시에 표현하는 예술이 서예라면, 그 주요 매체인 한자 교육이 폐기 되었으니 어떻게 서예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한국 현대서예 1세대들은 이미 어려서부터 한문에 文理가 생겨서 文字香 書卷氣를 담아낸 글씨를 남겼다 할 수 있겠지만, 이후 세대는 대부분 한문이나 시문 등 기초 학문을 다지기보다는 섣불리 붓부터 먼저 손에 쥔 세대들이다. 그들은 서예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하는 과정에서 정작 서예창작에 활용할 수 있는 古文書金石文簡札 등의 자료에 대한 해독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그 결과 작금의 현실은 서예가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한학자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서예가들은 그만큼 설 땅을 잃어버리고 글씨쟁이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자 교육의 부재 현상이 불러온 예는 수많은 공모전이나 단체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한해 수백 개에 달하는 각종 공모전이나 단체전 등에 한결같은 소재가 한시이다. 이제까지 거의 모든 작품의 소재는 고인들의 시를 빌려 쓴다. 문제는 자신의 사상이나 정감하고는 아무런 관련성도 없이 그저 보기 좋고 쓰기 좋은 것만 무작위로 쓰는 것도 문제지만, 나아가 그 내용도 알지 못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최소한 서예가라고 자칭한다면, 작품구상 단계에서부터 자신이 쓰고자하는 내용의 대강을 정하고 뜻 모를 원전을 뒤적여서라도 적당한 글을 찾아내는 성의는 있어야 한다. 공모전이나 단체전이나 규격은 대체로 비슷하고 평소 많이 보았던 어울리는 시를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 다반사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단순한 베끼기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어 자신이 쓴 작품의 해석조차하지 못한다. 또 공모전이나 전시회 뒤에는 늘 오자나 탈자시비가 심심찮게 제기된다. 건전한 서예 문화 발전이라는 공모전의 대의는 고사하고 웃지 못 할 寸劇이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서예는 단순히 베끼고 쓰는 기예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의 精神을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단순한 글쓰기 인가 아니면 서예술인가 하는 갈음의 중요한 척도는 작가의 온전한 心體의 발현에 있다. 그래서 겉모양을 제아무리 훌륭하게 모사했다고 하더라도 주체적인 가치관이 서있지 않는 작품이라면, 이미 혼이나 숨결을 느낄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체적인 가치관이 서있는 작품이 나올까? 필자는 주체적인 서예작품이란 작가의 학문 高揚과 문자와 대한 이해능력을 내면에 인지하고, 그것을 서예라고 하는 외적 형식에 조형적 미감을 불어 넣어 대중들과 소통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3. 書藝文化歪曲

1949년 제1大韓民國美術展覽會(이하 국전)가 개최된 이래, 국전은 1981년 제30회로 막을 내리고, 1982半 民展의 형태인 大韓民國美術大展이 개최되었다. 이후 1989년 서예인의 자주와 완전한 민영화를 내건 韓國書藝協會가 발족하고 곧 이어 제1大韓民國書藝大展이 개최되었다. 1993년에는 서단의 민주화와 서단의 화합을 기치로 韓國書家協會가 발족하고 大韓民國書藝展覽會가 열렸다. 각기 한국 서예의 발전을 내세운 3단체에서 개최하는 자칭? 국전이 거행되면서 서로간의 세 불리기와 허술한 협회 운영은 더욱 불신을 가중시켰을 뿐, 한국 서예 발전에 대한 비전은커녕 더욱 서예계를 혼란에 빠뜨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로 타 단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든가, 각 단체마다 심사의 불공정 등으로 매스컴의 희롱거리-서예가 선비 노름인줄 알았건만?-가 되면서 더욱 위상이 떨어졌고, 많은 국민들에게 외면을 불러왔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공모전의 난립이다. 한국 서예계의 모든 부정적인 일은 공모전의 난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공모전의 폐해는 심각한 실정이다. 2011년 한 해 동안 어림잡아 200여 종의 공모전이 개최되었으나 오히려 축소 폐지되어야 할 공모전이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런데 공모전의 개최 양상을 보면 하나 같이 千篇一律적이다. 출품자들로부터 출품료를 받아서 심사하고 전시하고 시상을 하고, 남은 돈은 주최 단체의 경상비로 활용하는, 상투적인 행사에 불과하다. 가장 권위가 있다는 이른바 서예 3단체 공모전도 그러한 양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공모전이 난립하다 보니 지금 한국 서단에는 소위 大家自稱하고 自認하는 서예가들은 넘쳐난다. 이것은 난립한 공모전에서 상을 경쟁적으로 남발하고 세 불리기와 자기 사람 심기로 인한 초대작가의 남발로 야기된 현상이다. 화려한 수상경력과 초대작가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는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유명작가 행세를 하며, 서예를 오도하는 사람들로 인해 한국 서예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고, 부정 심사의 잡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공모전이 서예 발전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모전의 정리 없이는 한국서예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근래의 각종 공모전의 운영 행태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예를 들면 출품수를 늘리기 위하여 운영위원들에게 20-30점을 출품해야만 심사위원 위촉 자격을 준다고 한다. 운영위원들은 심사위원을 위촉하기 위해 문하생들에게 출품을 강요하고, 문하생 한사람이 2-3점의 출품을 강요받다 보니 문하생이 반발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일천한 실력의 지도자에다 일천한 실력의 문하생이 언제 어떻게 다수의 작품을 만들어 내겠는가. 무슨 장인을 뽑듯이 서예 부문에서는 삼체장이나 오체장을 남발한다. 어떤 문인화 공모전에서는 의무적으로 3작품씩 출품시켜 출품수를 채운다음 그중에 1작품이 입, 특선이 되면 나머지 2작품은 낙선처리를 하다 보니 출품자 100% 전원이 입상한다. 문하생들도 그렇게 1-2년 공부하다보면 실상을 알게 되고 처음 입특선의 기쁨마저 공허해 진다. 건전한 여가 생활이라 여겼던 서예문인화가 거금의 출품료, 입상에 대한 인사치례 등으로 해야 할 공부에 오히려 환멸을 느끼거나 부담으로 인하여 그만두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수많은 공모전들은 이미 몇몇 작가들의 생존의 방편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비리와 부정, 그리고 그것에 관한 동조, 침묵, 외면의 결과 이미 너나 할 것 없이 서예인 누구도 자의반 타의반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 韓國書藝活性化 方案

1. 漢文敎育活性化

國字漢字에서 한글로 바뀌는 20세기 초를 지나, 소위 현대식 교육제도의 정착으로 교육의 무대가 서당에서 학교로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雪上加霜으로 한글전용의 문교정책이 한문학의 퇴보를 가져왔다. 또한 역사 이래로 유명한 서화가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畵 三絶을 모두 갖추고 있음을 볼 때, 화가들은 서예의 점획을 깊이 있게 연구해야 될 것이며, 서예가들은 시문에 보다 관심을 갖고, 한시와 문장의 해독은 물론 적재적소에 알맞은 문장이나 시를 짓거나 사용하여 서예 작품을 발표하고 서예 이론을 체계화하여 서예학이 정립될 때까지 모두가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전국에 크고 작은 서예학원이나 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는 서예가들은 한결같이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절반 이상이 폐원을 하거나 직업 전환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을 보면 첫째, 서예 학원이나 교습소 운영자의 교육방법 미숙과 경험부족 등을 들 수 있겠다. 둘째, 문민 정부이후 지속되어진 세계화, 정보화의 구호와 가시적인 경제 성장위주의 정책에만 치중하여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하거나 축소 운영을 다투어 시행하였다. 예컨대 시, 도 단위의 사회교육 기관에서는 문화 강좌를 대부분 폐과하고 정보나 기술교육에 집중하는 한편 가시적인 실적을 보여주기 위한 수강생들이 자격증을 획득할 수 있는 교과 과목 위주로 바뀌었다. 이는 건전한 정서함양마저도 경제 논리가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시도의 사회교육기관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젊은 어머니들이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멀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 자녀들에게도 암암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중국을 비롯한 한자 문화권이 부활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는 멀리하고, 영어 沒入 교육을 시행하면서, 그나마 예체능 교육을 지탱해 왔던 초, 중등 학생들의 예체능 분야의 경시대회 가산점 제도는 물론이고 내신 성적 평가에서 예체능 과목을 제외시켜 버렸다.

이런 최악의 환경에서 서예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물론 어려운 문제이다. 필자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가지 제안한다면 지금 남아있는 성인 교습생들에게 한문 특강을 하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우선 수강생들과 상의하여 대다수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하여 일주일에 1회 정도 이해하기 쉬운 四字小學, 推句, 啓蒙篇, 童蒙先習, 明心寶鑑, 五七言唐音, 小學, 大學, 論語, 孟子, 中庸 古文眞寶 등 순서에 따라 1-2시간씩 특강을 실시하고 그 교습생들이 점차 동양의 사상과 문화에 흥미를 갖도록 유도한다. 그들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 주위에 동참을 유도하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동양예술의 진수이자 학예일치의 전형인 서예를 건전하게 전수한다면 조금이나마 서예 활성화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고 점차 수준을 높여간다면 學行一致’ ‘敎學相長의 진정한 도제교육의 토대가 굳건해질 것이다.

우리말의 특성과 동아시아 국가 간 교류가 긴밀해지는 국제 정세 등을 고려해 한자교육을 활성화하자는 내용의 공청회가 김광림, 이강래 국회의원 공동주최로 2011224일 오후 2시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날 주제발표를 맡은 이명학 성균관대(한문교육학) 교수는 한자 교육 없는 40여년 한글 전용의 결과 사회 전 분야에서 한자 표기 오류가 생기게 됐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한글만을 국어로 규정한 국어기본법을 개정해 한자를 국어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초등학교부터 한자를 교육하여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게 해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황명식 한국일보논설위원은 同音異議語뿐 아니라 長短音 구분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소리글자가 아닌 한자어를 앞뒤 文脈에 따라 뜻을 가리려는 일은 쉽지 않다는 이유로 쓰지 않다 보면 현 세대들은 가까운 장래에 심각한 語彙 減少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주제 발표자들의 의견에 대해, ○○ 교육과학기술부 교육연구관은 학교가 자율 편성하는 현 교육과정 체계에서 교과부가 한자교육을 권장하거나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함께 쓰는 것은 관련 부서는 물론 국어 공동체 전반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답변하였다. 이 말은 한문 교육을 활성화 하지 말자는 이야기나 다름없는 말이다. 각 급 학교는 교과부의 지시에 의해서 교육과정을 편성 운영 하는데, 교과부의 고위 관료의 생각이 이러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는 요즈음 공무원들이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만약 교과부에서 공청회를 거쳐 초, , 고생들에게 한문 교육을 하자고 발표하면, 예전과 같이 한글학회의 반발이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한 언사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화예술 관련 인사 및 단체, 한문국문학자 및 관련 단체 모두가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동아시아 중심국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어문정책을 담당하는 문화체육관광부 국어민족문화과 소속 김선철 학예연구관은 한글 전용 정책은 공문서에 한정된 것이지 학교 교육의 영역까지 포괄하지는 않았다며 한자교육 활성화와 문자사용 문제를 구분하고, 한글 전용론과 국한문 혼용론 등에 대해선 각 입장을 객관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공청회를 준비한 김광림 의원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어휘의 상당수는 한자어라며 그 뜻은 엄연히 다름에도 소리가 같은 단어들이 많아 한자를 모르면 올바른 우리말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 이번 공청회를 준비한 계기였다고 설명하며 국제사회에서 한자문화권 나라들의 위상이 높아지는 만큼, 한자 공부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고 김 의원은 덧붙였다.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필자가 한문 교육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단체인 한글 학회 관련자들에게 묻고 싶다. 한글로 표현되어진 문예 작품만 국문학이란 말인가? 한문으로 쓰여진 우리 문예 작품은 국문학이 아니란 말인가?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 우리 한글이 한문의 장점을 더 많이 받아들일 때 오히려 더 발전될 것은 자명한 이치 아닌가? 주지하다시피 세계인구 4분의1이 한자문화권에 살고 있으며 한국중국일본베트남싱가포르는 한문권이며 외환보유액은 60%가량 되는 등 국제사회에서 한문 문화권 나라들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한자 교육이 없는 40년 동안에 학생들이 사회 전 분야에 한자표기 오류가 생기게 되었고, 컴퓨터기술이 발달해도 약16만개의 어휘 가운데 70%이상이 한자이고 그 대부분이 同音異義語인 것이다. 한 나라의 발전은 긴 안목으로 볼 때 경제정책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자정책이다. 학생들이 일간신문을 제대로 잃을 수가 없어 신문읽기를 기피하고 있으며, 대학생들도 국한혼용 서적을 읽을 때 한자는 거의 빼놓고 읽을 뿐 아니라, 부모님의 銜字도 한자로 쓰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자교육 실시현황을 보면, 현재 서울의 학교 수 587개 학교 중 267개 학교가 실시하고 있고, 인천은 228개학교중 62개 학교가 실시하고 있는데도, 과연 미루기만 해야 될 일인가?. 덧붙인다면 워드프로세싱을 하는 데 있어서도 간신히 한글로 타자해 넣으면 끝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한글로 초벌 입력만 하고, 즉 한글로 발음만 적고 끝날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同音異義語같은 곳에는 한자를 넣는 노력을 해야 읽는 이들을 향한 쓰는 이로서의 의무가 끝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최소한 同音異義語의 혼동을 풀어놓지 않고 글을 중도에 방치한다는 것이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고통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公募展 文化再定立

공모전은 신인들의 登龍門임에는 틀림이 없다. 때문에 건전한 공모전 개최야 말로 건전한 서예 문화 발전을 도모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따라서 공모전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능력을 인정받는 대다수의 작가들도 공모전을 통해서 세인들의 이름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실력으로 되었다고 자부할 사람이 누가 몇 명이나 되던가? 우수개 소리로 추사 아니 왕희지가 환생해도 소위 국전에는 입상이 불가하다고 한다. 더군다나 갓 서예과를 졸업하고 청운의 꿈을 품었던들 비빌 언덕이나 있던가? 한국 서단은 누가 이어갈 것인가?

필자가 수십 년간 경험한 바에 따르면 공모전 출품은 일 년에 봄, 가을로 2회 정도 참가하는 것이 적당하리라 생각 된다. 한 권의 범본을 5개월 여 연마하면 그 서체의 필획, 결구, 조형미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간 연구한 서체를 근거 삼아 작품을 한다면 서예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공모전에 응모하는 출품자들도 자기반성이 있어야 하겠다. 이미 51020년을 공부한 선배들이 간혹 입, 특선을 하면 진심으로 축하 해주는 풍토와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다음 선배들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훗날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기다림의 미덕이 부족하고 자신의 짧은 안목이나 잣대로 자신의 얕은 견문을 높게 평가하고, 상대의 연륜이나 실력을 무시하는 태도는 버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선배들 같이 작가의 반열에 오를 것이며, 大器晩成임을 반드시 기억하기 바란다.

그렇다면 과연 200여개의 공모전은 어느 정도 폐지되거나 정리가 불가피하다. 그 숫자는 아마도 시 단위에 하나, 도 단위에 둘, 전국 단위에 네다섯이면 충분할 것 같다. 대신 중앙의 대표적인 3단체는 광역 단위의 공모전부터 통폐합에 나서야 할 것이다. 한 고을 한 집안에서 너는 어디 소속이냐? 너는 ○○도전 ○○협회 초대작가니, 나는 ○○시전 ○○협회 초대작가니, 하는 말이 어떤지 거북스럽지 아니한가? 그리고 중앙의 미술협회서예분과 초대작가니, 서예협회 초대작가니, 서가협회 초대작가니 하는 초대작가 제도를 없애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권위도 없고 온갖 오욕으로 얼룩진 공모전을 바로 새우는 길이요, 소위 전문서예가라고 자부하는 작가들의 을 분별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러면 기타 단체에서 내세우는 초대작가 제도는 자연히 虛名無實해 질 것이다. 최소한 초대작가라는 알량한 명예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자신의 역량을 평가받고자 하는 건전한 평가의 장으로써의 공모전의 역할이 부활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공모전 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고, 학습자는 여유를 가지고 차분히 공부하고, 그 과정을 거쳐 응모하고 공정하게 평가를 받아 작가로 등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엔 공정한 심사가 문제이다. 심사는 사람이 하는 일이다. 이미 3단체에서 여러 가지 제도를 도입하여 시행착오를 겪었으니,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기득권부터 내던지는 결단을 보여야 할 것이다. 다음에 범 서단적인 대의의 차원에서 여론을 수렴한 다음 장점들만 집약하고 보완한 뒤, 누구나 인정하는 심사 제도를 확정하여 수시로 변경할 수 없게 제도화 해야만 한다.

작금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대로 방치한다면, 공모전 악습의 개선은 遙遠할 것이고 서예 발전을 위한 국민적 지지나 국가적 지원은 고사하고서라도 서예를 사랑하는 애호가들을 서예 전시회나 서예 작품 시장으로부터 내쫓는 것이나 다름없게 될 것이다. 서예인들은 이미 사회적 약자가 된지 오래다.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여러 사람들이 인정하는 學問的 資産道德性 回復이 관건이다. 서예인들의 학적인 切磋와 건전한 정신을 硏磨한 다음, 그 도덕적 학문적 자산을 밑 걸음 삼아 국가의 정책적 지원을 요구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설득하고 점차 잃었던 서예의 내외적 힘을 넓혀가야 할 것이다.

 

. 마치며

한국 서예계를 되돌아보면 고질에 가까운 부정적인 일이 조금도 청산되지 않은 아쉬움이 있지만 긍정적인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이미 우리는 전 국민의 6-7할이 한자 교육에 찬성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여, 김영삼 정권 말 김대중 참여정권 초에 국회의원 과반수가 서명을 하여 漢字를 살려야 한다는 취지의 한글전용법 廢止法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법안을 分科委員會가 보류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한자교육 부활이 꼭 필요하다는 전 국민의 여망을 뚜렷하게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다. 이후 20059월 대전대학교 문과대학 서예학 전공에서는 고교에 서예 독립 교과목 설정, 서예학과에서 교직 이수한 자에게 서예교사자격 부여, 사범대학, 교육대학에 서예 교과목 편성 등을 목적으로 한국 서단의 대표적 단체인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한국서예협회한국서가협회 등 3단체와 국회위원 일부가 참여하여 각 급 학교에 독립된 서예교과 설정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05. 11. 3 국회의사당에서 서예교육 정상화를 위한 공청회를 개최한 바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지속되는 한 머지않아 한자 교육이 활성화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한국 서예도 다시금 비상의 나래를 활짝 펼 날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가오는 2012년에는 총선과 대선이 있다. 따라서 우리 서예인 들도 우리들의 여망을 한데 모아 각 대선 후보자들의 공약에 적극적으로 반영시켜야 할 것이며, 그들의 진정성을 유심히 살펴 우리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만 될 것으로 본다.

국외적으로는 서예의 종주국을 자부하는 중국에서 그 희망의 싹이 이미 돋아났다. 중국 인민정부는 2007년 광동성에서 성내의 모든 초, 중등학교에 서예를 必修 과목으로 지정하였고, 얼마 후 상해 정부에서도 모든 초, 중학교에 서예를 필수 과목으로 교육하고 있다. 최근 중국 교육부에서는 초등학교 1-3학년은 먼저 펜으로 書寫訓練을 하고, 3학년이상은 펜과 毛筆을 겸하도록 하되, 국어 과목에 포함하여 일주일에 1시간 이상을 교육 하도록 지시하였고,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서예를 선택과목으로 설치하도록 지시하였다. 현재 중국의 대학에서 서예를 졸업한 졸업생수가 점차 늘고 있어 국가차원에서 이들의 취업을 해결하기 위해 방안을 강구중이라고 한다. 현재 중국에 서예전공이 있는 대학은 예술전문대학 약 15, 종합대학 약 29, 사범대학 약 32개 등이고, 박사과정은 약 16개 대학에 개설되어 있고, 46개 대학에 석사과정이 설치되어 70여명의 석사 지도교수가 있고, 49개 대학에 서예 본과가 있다고 한다(송명신, 15회 원광서예학회 추계 학술대회 발표문, 2011. 10 참조). 우리가 한발 늦은 느낌을 지울 수밖에 없지만, 中國書法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고 漢語 즉 중국어를 영어에 버금가는 세계어로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중국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국내외의 사회 경제적 현실이 그리 녹녹하지는 않다.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 발전, 세계제일의 경제교류 국가가 되는 것은 머지않았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이다. 한류 열풍을 보지 않았는가? 한문과 서예는 동아시아 문명의 뿌리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의 알량한 자존심이던 中華意識이 지금 다시 부활하고 있다. 그런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고서화 경매 시장이다. 중국의 고서화는 종이 황금이란 별칭이 붙었다. 201164일 베이징 바오리 경매에서 북송시대의 黃庭堅의 서예작품인 砥柱銘70여회를 거듭하는 경매 끝에 43680만위안(한화725억원)에 낙찰되어 중국 미술품 경매시장의 두 번째 고가를 기록한 바 있고, 근현대의 서화가인 齊白石(1863-1957)1940년 작품인 松柏高立圖20111123일 베이징 가디언 경매소에서 4255십만위안(한화718억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현존 서예가인 沈鵬의 서예작품마저도 원화로 환산하여 약 천만 원에 거래 된다고 한다. 그 바람이 동으로 향해, 한국의 서단에도 머지않아 희망의 봄바람이 불어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문자의 역사가 존재하고 문자가 존재하는 한 문자의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자의 예술이 학문적 심화 및 예술의 발전을 이루어 낼 때 더욱 그 가치를 발하게 된다. 게다가 서예의 외적인 환경은 서예계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회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 서예인 모두가 진정으로 노력하고 공부하여, 서예계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기회를 잡음으로써 이 땅에 서예가 다시 활성화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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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신화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서의 중국은 신화 또한 천지창조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나라와 영토적으로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중국의 신화는 우리나라의 민족주의 연구가들이 우리 것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기도 한다. 가장 많이 접한 내용 중의 하나는 중국의 황제와 싸운 치우를 우리는 단군의 신하, 혹은 단군(몇대의 계보를 가진)으로 평가된다. 도덕 군자로 유명한 요, 순 임금 또한 동이족이요, 치수를 했던 우임금은 그 기술을 우리나라에서 배워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을 진실로 받아들일지는 좀 더 연구가 되어야 하겠다. 그때까지는 그 진위 판단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반고 - 천지창조
중국에서는 천지창조와 더불어 생긴 신이 반고(盤古)로 되어 있다. 반고라는 이름은 삼국시대 (서역 3세기)에 쓴 서정(徐整)의 [삼오력기(三五歷記)]라는 책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반고는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혼돈 상태에, 계란 속에서 태어나 의식없이 장장 1만 8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계속 잠만 자다가, 어느 날부터 하루에 한 길씩 키가 커지는 눈부신 성장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그는 그 체력으로 하늘과 땅을 상하로 갈라지게 떠밀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또 다시 1만 8천년, 그 성장은 극점에 도달했다. 그의 키와 힘으로 인하여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된 천지의 간격이 실로 9만 리나 되어버린 것이다.

원시의 혼돈에서 천지를 떠밀어 멀리 갈라놓고서 세계를 창조한 것을 반고의 늠름한 육체의 결과로 치는 이 설화는 근로를 숭상하고, 인력에 신뢰를 거는 고대 중국인들의 건강한 사상의 소산으로서 매우 흥미있는 얘기다.

반고가 죽음에 임했을 때, 한숨은 풍운(風雲)이 되고, 목소리는 뇌정(雷霆) 으로 화하고, 두 눈은 태양과 달로, 그리고 신체는 산악으로, 혈맥은 강하 (江河)가 되고, 근맥(筋脈)은 도로로, 살갗은 전토로, 머리카락과 수염은 성진 (星辰)으로, 피모(皮毛)는 초목(草木)으로, 치골정수 (齒骨精髓)는 금석주옥 (金石珠玉)으로, 그리고 흘러내리는 땀은 비와 이슬이 되었다


혼돈씨-인간의 작위로 파괴된 신

반고를 혼돈씨(渾沌氏)라고도 한다. 혼돈(渾沌)과 혼돈(混沌)은 같은 의미다. 천지개벽 이전의 불분명한 상태를 형용하는 말일 것이다. 장자의 [응제왕편 (應帝王篇)]의 우화에서는 그혼돈을 중앙의 천계를 지배하는 상제(上帝)의 이름으로 한다.

어느 날 남해제(南海帝) 숙과 북해제(北海帝) 홀이 중앙제(中央帝) 혼돈에게 와서 함께 있었다. 이제(二帝)는 혼돈의 환대에 아주 마음이 유쾌해졌다. 그리하여 서로 의논하였다. "인간의 얼굴에는 눈, 귀, 입에다가 코까지 합해서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보고 듣고 먹고 숨쉰단 말이거든. 그런데 혼돈씨에게는 이게 없으니까 우리 오늘 환대받은 예의에 보답해서 일곱 개의 구멍을 꿇어드릴까?"

그래서 하루에 한 구멍씩 뚫기 시작했다. 7일만에 공사가 끝나자 이게 웬일? 가엾게도 혼돈은 이미 숨지고 말았다. 이 숙과 홀은, 별안간 순식간 순간이란 뜻이며, 덧없는 것, 유한한 생명, 인간의 작위(作爲)등을 상징한다.

혼돈자연(渾沌自然)의 상태는 인간적인 작위가 가해짐으로써 곧 파괴되고 사멸한다는 우의(寓意)다.

그런데 홀과 숙이라는 이름을 합치면 '번개'를 뜻하는 '숙홀'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창조는 번개가 혼돈을 뚫고 지나갈 때 시작되었다라는 걸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이야기와 놀리우리만치 유사한 창조에 대한 견해가 20 세기에 과학적 이론으로 제출된 바 있다. 1934년의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헤롤드 S. 유리(Harold S. Urey)는 어쩌면 번개일지도 모르는 모종의 에너지가 지상의 원시적 대기와 작용을 일으켜 생명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고 추정했다.

실제 1953년, 유리의 제자였던 대학원생 스탠리 L. 밀러(Stanley L. Miller) 는 실험을 통해 이 이론을 검증하려 했다. 밀러는 유리로 만든 공모양의 용기를 두 개 준비했다. 하나에는 원시 시대 때 지상의 대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기체들이 들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실험 결과로 나오는 기체를 담기 위한 것이었다. 밀러는 기체들에 전압 6만 볼트의 '번개'를 가했다. 놀랍게도 두번째 구체 안에 모인 일부 물질에는 핵산의 구성 성분인 뉴클레오티드와 아미노산의 성분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성문들이 결합하면 모든 생명체의 기본 구성 단위인 DNA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뉴클레오티드가 살아 있는 유기체와 관계 없이 생성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삼황 오제

반고에 이어 가장 오래된 신화적 세계에 출현하는 세 제왕을 삼황(三皇)이라 부른다. 그런데 누구를 삼황으로 하느냐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일설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으로 치는데 이는 물론 천지인간의 성립을 의인적(擬人的)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합리적 신화다. 그 밖의 복희, 여와, 신농을 삼황으로 하는가 하면, 또 그 중 여와를 축융(祝融) 또는 수인(燧人)으로 대치하는 설도 있다. 예의 십팔사략에는 복희, 신농, 황제를 여기에 해당시킨다. 이중 여와의 인간창조, 천지보수(天地補修)의 신화는 가장 이색적이고 그 정채(精彩)에 빛나는 것이다. 그 밖의 딴 신들에게는 각각 인간의 문명생활의 창조자 및 추진자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 삼황(三皇)에 이어서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은 소호, 전욱, 제곡, 요제, 순제의 오제(五帝)다. 오제 중 소호는 황제의 아들, 전욱은 황제의 증손, 제곡은 소호의 아들, 요제는 제곡의 아들, 순제도 전욱 6세손이라고 하니까 오제는 아마도 황제일가(黃帝 一家)로 봐도 좋을 것 같다. 또 그들이 오제로서 표창(表彰)되는 것은 그들 모두 하나같이 고조(高祖)인 황제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덕이 높은 제왕이기 때문이다.

여와 - 인간창조의 신

성경에서와 비슷하게 여와는 황토를 뭉쳐서 인간을 만드는데, 풍요한 황토 지대의 중국이고 보면 재료는 풍부했을 것이다. 만들다가 싫증이 난 그녀는 인간창조를 좀더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 한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우선 물렁 물렁하게 반죽이 잘 된 흙 속에 거칠게 꼬인 새끼를 집어넣고 그것을 뒤죽박죽이 되도록 잘 휘저은 다음 적당한 때를 보아서 새끼를 획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새끼 끝에서 뚝뚝 지상에 떨어져 내리는 진흙덩이는 모두 그대로 인간을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귀찮다고 대량생산한 인간은 역시 하나하나 손끝으로 정성들여 만든 인간보다는 자연히 그 작품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 가운데 부귀한 자와 빈천한 자가 생겨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기나긴 중국의 역사를 특색 짓는 사회계급의 분화와 인구과잉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 이 얼마나 기발한 인간창조의 설화인가. 인간창조와 함께 여와가 이룩한 대사업은 보천(補天), 즉 천공을 보수하는 사업이다. 어느 날 수신(水神)인 공공(共工)과 화신(化神)인 축융(祝融)이 큰 싸움을 한 끝에 싸움에 진 공공이 너무나 속이 상해서 그만 자기 머리를 부주산(不周山)에 부딪쳤다. 부주산 꼭대기에는 하늘을 떠받드는 하늘기둥과 대지를 이어 매는 땅줄이 있었는데 공공이 난폭한 짓을 한 덕분에 하늘기둥이 부러지고 땅줄이 끊어져서 하늘은 서북으로 땅은 동남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구멍이 뚫린 하늘로부터는 큰 비가 쉴새없이 쏟아지고 하천은 대홍수로 범람하여 산림이 서식하고 맹수와 흉조들이 발악을 하며 뛰쳐나와 인간을 마구 잡아먹으려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것을 본 여와는 급히 강 속에서 오색 돌을 따서 불에 녹여 반죽을 한 다음, 하늘에 뚫린 큰 구멍을 막았다. 그리고 바다 가운데 사는 거대한 거북의 네 발을 잘라 부러진 천주의 대신으로 삼고 또 물가에 난 갈대를 베어 모아서, 그것을 태워 그 재를 쌓아 범람한 강물을 막았다. 맹수와 흉조도 모두 때려잡아 겨우 지상의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천지가 기울어진 것은 완전히 고치지 못했으므로, 지금도 중국 대륙은 서북과 동남으로 기울어진 그대로이며, 홍수가 또한 때때로 사람을 괴롭힌다고 한다.

수인 - 집과 불을 만든 신

수인씨(燧人氏)의 이름은 삼황(三皇)의 하나로 헤아려지고 있으나, 여기에 유소씨(有巢氏)를 선행시켜서 인간생활의 진보를 설명하려는 합리적 신화도 있다. [한비자]를 보면, 상고시대에는 인간이 적어서 금수충사(禽獸蟲蛇)의 해로 많은 괴로움을 받고 있었다. 이때 유소씨가 출현해서 나무 위에 집을 짓고 그 재해를 피하게 해주었다. 또한 백성이 날것으로 초목의 열매나 조개 등을 먹어서 위장을 해쳐 병에 잘 걸렸다. 수인은 다시 부싯돌을 사용하여 불을 일으키고, 먹을 것을 익혀서 비린내를 제거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말하자면 인간의 소거생활(巢居生活), 화식생활의 개시를 상징하는 신들이다.

복희 - 포락과 문자를 만든 신

수인씨는 화식하는 방법의 발명자로서 알려져 있으나, 복희씨 또한 그와 무연 하지는 않다. 그의 이름은 포희(暑羲) 또는 포희(敍羲)라고 쓴다. 이런 이름은 [희생을 길러서 포주(敍廚)에 가득 채운다]라든가 [희생을 포락(暑烙 - 굽고 지짐)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니까 인간들에게 동물의 고기를 지지고 볶고 익혀서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또한 역(易)의 8괘를 만들어 인간사회의 길흉을 점치고 문자를 발명했으며 그물을 짜서 생선이나 짐승을 잡는 기술을 고안했고 다시 여와를 아내로 삼아 둘이서 혼인의 예를 정했다고도 전한다.

신농 - 농상업과 의약의 신

신농(神農)도 삼황의 한 사람으로 헤아려진다. 즉 염제(炎帝)인 신농씨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우선 농업의 신이다. 염제 즉 태양의 신이기도 한 그는 인간들에게 괭이를 만들어서 땅을 일구는 방법을 가르쳤다. 태양의 광열에 의해서 오곡을 풍요롭게 결실시켜서 인간의 식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태양이 중천에 오르는 한낮을 눈금으로 해서 사람들을 시장에 모이게 하여 교역을 하는 길을 가르쳤다. 이 점에서의 그는 상업의 신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또 의약의 신으로서도 받들어졌다. 태양은 원래 건강의 원천이므로 태양신인 그가 건강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의약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산야를 헤메다가 신통력을 갖춘 붉은 채찍으로 약초를 때리면서 각자의 풀이 지닌 독성의 유무 라든가 각종 효능을 분별해서 인간의 병치료에 소용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후에는 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핥아보았기 때문에 장(腸)에 탈나서 그 생명을 회생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신농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운명은 서로 엄청나게 달랐다. 한 딸은 다만 [신농의 소녀]라고만 불리었을 뿐 그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비를 관장하는 관리노릇을 하다가 뒤에 지극한 수련을 닦고 선인이 된 적송자(赤松子)의 선술(仙術)에 반해서 자신도 그 뒤를 쫓아 여선인(女仙人)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딸은 여와(女와)라 했다. 나이가 아직 젊었던 그녀는 어느 날 동해에 목욕하러 나갔다가 그만 큰 파도에 쓸려 물에 빠져 죽어버렸다. 너무도 억울했던 그녀의 영혼은 정위(精衛) 라는 작은 새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발구산 (發鳩山) 이라는 산에서 살았다. 정위는 자기 명을 앗아버린 동해에 대해 원한을 품고, 가련하게도 끝까지 동해에 대한 보복에 큰 뜻을 품었다. 날마다 서쪽 산에서 조약돌이나 작은 나무가지를 입에 물고 와서는 큰 파도가 밀려오는 동해의 물결 사이에 떨어뜨리며 동해를 메워 버리려고 결심하는 것 이었다. 이것이 정위전해(精衛塡海), 즉 정위가 바다를 메우려한다는 고사이다. 일반적으로 무모한 일을 기도하여 헛된 고생을 되풀이하는, 소위 도로(徒勞)로 끝나는 일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 다른 견해로 보자면 일의 성부 (成否)를 도외시하고 오직 자신이 세운 뜻밖에 굳건히 매진하다가 죽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한다. 신농씨의 또 한 딸은 요희라고 했는데, 여와(女와)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정열적인 소녀였다. 나이가 차서 처녀티가 날 무렵, 아직 이성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즐거움을 알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고요산이라는 산 중턱에 예쁘고 가련한 노란꽃이 피어 열매를 맺었다. 이 한 그루의 요초(瑤草) 야 말로 그녀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이 풀꽃의 열매를 따먹은 자는 누구나 반드시 이성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린 나이에 죽어간 요희의 운명을 가엾이 여긴 천제가 이윽고 그녀를 사천성에 있는 무산(巫山)으로 보내어 구름과 비의 신으로 봉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아침에는 아름답고 화려한 구름으로 화하여 산마루 위를 넘나들고 저녁 무렵에는 구슬픈 비가 되어 골짜기와 산기슭을 적셨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품었던 자신의 애달픈 정열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전국시대의 말엽에 초나라 회왕(懷王)과 또 그 뒤의 그의 아들 낭왕(囊王)이 운몽택이란 연못에서 놀다가 고당대(高唐台)에서 잠시 쉬며 잠들었을 때, 그 꿈속에 환영처럼 나타난 무산의 여신 요희가 타는 듯한 정열을 바쳐 사랑을 맺었다는 이야기가 초나라의 궁정 시인 송옥(宋玉)에 의해서 세상에 전해내려오고 있다.

황제 - 황색의 제왕

염제 신농씨 이후 계속 동성(同姓)이 이은 지 520년이나 지났다. 새로 바꿔 출현한 것이 황제(黃帝) 헌원(軒轅)씨다. 황제(黃帝)란 이름은 후세에는 진(秦) 나라 시황제 (始皇帝)와 같은 현세의 황제로 나타나긴 하지만 본래 황제란 천상을 지배하는 최고 주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천상세계의 황제는 그 중앙의 천궁에 살며, 여러 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사방을 통괄하는 중앙신이다. 그 전설에 알맞게 헌원씨는 얼굴이 네 개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황색의 제왕이란 중국에 군림하는 제왕이라는 뜻도 있다. 왜냐하면 황색은 다름아닌 중국의 빛깔이기 때문이다. 넘실거리는 누런 물이 천고로부터 흘러오고 흘러가는 황해(黃海)와 그 주변에 펼쳐진 비옥한 황토의 평야로 알 수 있듯 황색은 중국의 빛깔이다. 황제는 중국의 모든 도사(道士)들을 보호하는 성인이다. 전설적인 제왕들 중 연대적으로 앞선 인물이지만 실제로 그는 마지막으로 찾아낸 인물이며 기원전 4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국의 신화에 등장했다. 그는 언제나 노자(老子)와 결부된다. 아마도 기원전 100년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열자(列子)에서는 많은 지면이 황제에게 할애되어 있다. 그의 치세는 15년만에 어지러워졌다. 신하들이 황제의 은덕을 즐거워하는 동안에 황제는 "한없이 자신의 눈과 귀를 기쁘게 하고 코와 입을 충족시켰으므로 마침내 안색은 누렇게 뜨고 감각은 무디어졌다." 다시 15년간 재위하는 동안에 무질서는 만연했으며, "얼굴은 여위어 창백해졌고, 감각은 더욱 둔화되었다." 그래서 황제는 나라의 정책 결정을 대신들에게 맡기고 측근들을 멀리했다. 그리고 일상생활을 단순화하고, "드넓은 안뜰에 암자를 짓고 그 속에 들어앉아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단식을 감행했다." 어느 날 그는 잠이 들었는데, 신비스러운 통치자 복희(伏羲)의 어머니인 화서(華胥)의 나라에 가 있는 꿈을 꾸었다. 그 왕국은 "배나 마차나 사람의 발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었다. 다만 혼(魂)만이 그 먼 곳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그곳은 이사의 나라였으며 "우두머리나 통치자가 없었다. 단순히 스스로 되어갈 뿐이었다. 그곳 백성에게는 욕구나 갈망이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그들의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를 뿐이었다. 그들은 삶에 대한 기쁨이나 죽음에 대한 혐오도 느끼지 않았고 누구나 천수를 다했다. 그들은 자기에게 집착하지도 않았고 남에게 냉담하지도 않았다. 그처럼 그들은 애정에서도 증오에서도 떠나 있었다.......그들은 단단한 땅을 걷듯이 천공(天空)을 왕래했고 침대에서 자듯이 공중에서 잠을 잤다. 구름도 안개도 시야를 막지 않았고, 벼락이 귀를 먹게 하지도 않았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마음을 혼란하게 하지도 않았고 산이나 골짜기에 발을 헛 딛지도 않았다.-그들은 다만 정신의 여행을 할뿐이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대신들을 부른 뒤에 말했다. 길 곧 도(道)는 "감각들을 통해서 추구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들에게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다시 28년간 재위를 하고 자신의 왕국이 화서의 왕국과 거의 같은 정도로 질서를 찾았을 때 불사(不死)의 존재인 선인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200년 동안이나 끊임없이 그를 추모하며 몹시 슬퍼했다. 긴 치세 기간 동안 진정한 황금시대를 이룬 경이적인 제왕의 전설은 여기서는 지혜의 예증으로 사용된다. 황제는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완전한 영역에 도달했다. 그는 또한 문화를 만들어낸 영웅이기도 하다. 무쇠 머리, 청동 이마, 칼이나 창처럼 곤두선 머리카락에 몸뚱이는 소이고 6개의 팔과 8개의 손가락을 가진 괴물인 치우(蚩尤)를 물리친 것 등 반역자를 무찌른 일들 말고도 황제는 통치제도를 도입했다. 몇몇 전승에 의하면 그는 나침판과 교환의 매개물로서 별보배조개를 대신할 화폐를 발명했고 그의 아내는 양잠과 수예에 탁월했다. 그의 가장 높은 신하가 처음으로 문자를 고안했을 때 "모든 정령들은 그 때문에 자연의 오묘한 비밀들이 폭로될 것이라며 울부짖으며 분노했다고 한다."

치우 - 동의 머리와 철의 이마를 가진 신

치우(蚩尤)를 바라보는 관점은 우리나라와 중국이 서로 다르다. 고대 우리 동이족이 한반도에 한하지 않은 거대한 중국 영토까지 세력권을 확장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그당시의 역사는 우리의 것만이 아니라 중국의 것에도 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 동이족이 그들 한족으로선 이민족이었으므로 동이족에 대한 적대감은 당연하였으리라.

우리 나라 고대사 관점에서...

치우(蚩尤) - 환웅의 신하.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 번개 구름 안개를 부르는 능력이 있었다. 칼 창 큰도끼 긴창 등을 만들어 초목 금수 벌레 물고기를 다스렸다. 그 후손들이 서남쪽의 땅에 살았는데, 지금도 묘(苗)족은 치우를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유망(楡罔)과 전쟁을 벌여 소호(少昊)와 싸웠고, 유망을 제위에서 쫓아내고 공상(空桑)에서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탁록에서 황제(黃帝)에게 패해 요서지방으로 물러났다.

중국 고대사 관점에서...

황제의 부하 중에 치우란 자가 있었다. 성격이 거칠고 포악한 신이었다. 그는 인신우제(人身牛蹄), 사목육수(四目六手), 게다라 동(銅)의 머리와 철(鐵)의 이마를 가졌다. 철석(鐵石)을 즐겨 먹는 이형이품(異形異稟)의 신이었다. 불사신(不死神) 이었고 전쟁을 잘하고 좋아하는 포악한 자였다. 이윽고 그의 형제들이며, 똑같이 동두(銅頭)를 지닌 괴이한 신 72인과 힘을 합하여 풍백(風伯 -바람의 신)과 우사(雨師 - 비의 신)도 자기들 편에 끌어들여서 황제에게 모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황제는 그 보고를 듣자 먼저 이들과 판천(阪泉)에서 싸웠다. 곧이어 그 북쪽인 탁록에서 다시 결전을 벌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치우는 풍백과 우사의 힘을 빌어 거센 바람과 비를 일으켜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둘러쳤다. 그 사이에 동두철액(銅頭鐵額)의 괴신군(怪神軍)과 요괴군들을 풀어서 황제군을 괴롭혔다. 이에는 아무리 황제라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황제는 머뭇거리는 자기편 군사를 독려하면서 예의 그 지남군(지남군)을 선두로 하여 짙은 안개 속을 뚫고 나왔다. 또한 천상으로부터 소환한 자기 딸 발(魃)이란 여신의 도움을 얻어 풍우와 농무를 소멸시키고 힘껏 싸워 쳐부셨기 때문에, 치우도 그때인 도리없이 황제의 군문(軍門)의 무릎을 꿇었다. 그리하여 겨우 천하는 평온으로 되돌아 갔다고 한다.

제준 - 태양과 달의 신

제준(帝俊)의 이름은 오제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또한 정통적인 사서 가운데서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고전에서는 이를 황제(黃帝) 또는 제곡이나 순제(舜帝)의 이칭이라고도 하나 은민족(殷民族)의 조선신(祖先神)이라고도 전해지는 것으도 보아 제곡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간주된다. 제준에게는 아황(娥皇), 희화(羲和), 상희(常羲)라는 세 아내가 있었다. 아황은 삼신국(三身國)을 낳았다고 전해지며, 희화는 태양의 여신으로서 열이나 되는 태양의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을 번갈아가며 천상에 오르게 하여 하계에 빛을 주었다. 또 상희는 달의 여신으로서 열둘이나 되는 달의 딸을 낳았다. 이 딸들이 번갈아가며 하늘에 오르게 하여 밤을 환히 밝혔다. 열의 태양과 열둘의 달이란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사상과도 결부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태양이라든가 달의 어버이 신으로서 제준(帝俊)의 존재는 주목받을 만하다.

소호 금천씨 - 새가 지배한 나라

오제의 첫째에 위치하는 소호(少昊)는 십팔사략에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즉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는 황제의 아들로 청양(靑陽)이라고도 한다. 그가 선죽 봉조(鳳鳥)가 이르매 새로써 관(官)에 기(紀)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영조(靈鳥)인 봉조의 출현은 원래 치세의 상징이며 <새로써 관에 기하다> 는 것은 그 봉조의 출현에 의미를 두어 제관의 관명을 붙였다는 뜻이겠으나 딴 고전의 참작해서 이것에다가 신화적 연역(演繹)을 붙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봉조란 세상에도 희귀한 영조이며, 좀체로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영조가 하필이면 소호의 시대에 출현했다는 것은 그가 다름 아닌 조족(鳥族)의 신이었기 때문이라는 짐작이 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가 <새로써 관에 기하다>라는 것은 실은 <새로써 벼슬에 붙었다>, 즉 그가 세운 왕국이 조족이 지배한 나라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는 먼저 봉조로 하여금 수상에 임명하고 문상(文相)에는 온순한 비둘기 방위상에는 용맹한 매 건설상에는 조직적이고 깔끔한 뻐꾸기 법상에는 준엄한 독수리 등을 적재적소에 임용해 천하를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흔한 그런 물욕과 권세욕에 물든 내각이 아니었던 만큼 그 세상도 아마 무사하게 잘 다스려졌던 모양이다.

전욱 고양씨 - 인간 세계의 질서 확립

전욱 고양씨에 대한 설명을 보면, <남정(南正-관명)의 중(重)에게 명하여 하늘을 관장케하고 그로써 신(神)을 속하게 했다. 또한 화정(火正-관명)의 여(黎)에게 명하여 당을 관장케하고 그로써 민(民)을 속하게 하여서 서로 침법하여 모독하지 못하게끔 했다>고 되어 있다.그 신화적 연역은 다음과 같다. 그 옛날 하늘과 땅은 반고(盤古)에 의해서 상하로 떠밀려져멀어지긴 했으나, 그 후에도 천지간의 교통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러나 하늘과 땅, 그리고 신과 인간의 사이가 너무 헤이해서 우주질서의 확립을 위해서는 유해무익하다고 판단한 전욱은, 힘이 장사인 중(重)과 여(黎) 두 신에게 명하여 하늘과 땅을 힘으로 완전히 격리시켜서 신계질서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계급 사회 및 봉건 질서의 형성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딴 고전을 보면, 그가 예법을 엄정하여 남존여비 제도를 강화했다는 대목도 있다.

제곡 고신씨 - 악기와 음악의 문화 군주

제곡 고신씨(高辛氏)는 <태어나면서부터 신령하여 스스로 그 이름을 말했다> 고 써 있을 만큼 조숙한 신동이었다. 그는 갖가지 악기와 음악을 제작할 만큼 문화군주로 그 능력을 발휘했지만 그것보다도 그의 명성은 그의 아들인 요제 (堯帝)를 비롯하여 은왕조(殷王朝)의 시조인 설(契)이라든가 주왕조의 시조인 후직(後稷)을 나게 했다는 가계(家系)의 우수성으로써 더욱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사실상 계보 같은게 큰 문제될 턱은 없는 것이지만 사기나 십팔사략 같은 기록을 신용한다고 하면 제곡의 제후(諸候) 중 한 사람인 진봉씨 (陳鋒氏)의 딸을 맞아 자식을 낳은 이가 요제(堯帝)이고 두번째 부인인 간적 (簡狄)이 낳은 자식이 설(契)이다. 그리고 첫번째 부인인 강원이 낳은 아들이 주(周)의 후직(後稷)인 것이다. 제곡 고신씨(高辛氏) 시대에 만장(蠻將)인 방왕(防王)이 모반을 일으켰다. 제곡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염려하여 "만약 방왕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가 있으면 황금 천일(千鎰)과 만가(萬家)의 읍(邑)을 포상으로 주고, 또한 나의 딸을 아내로 주겠다"고 포고했다. 그러자 제곡의 애견인 반호(盤瓠)가 잠시 동안 그 모습을 감추더니 이윽고 방왕의 목을 입에 물고 나타났다. 제(帝)는 상대가 개이므로 약속의 실행을 주저했다. 그랬더니 공주가 하는 말이 " 황제이신 아바마마가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시다니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습니다"하고 스스로 자청해서 개 반호의 아내가 되었다. 그 사이에서 3남6녀의 자녀가 태어났다. 그리하여 그 자손이 점점 번성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견융(犬戎 )의 나라]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것은 일종의 이족 결혼담이며, 또한 부족신 설화이다. 반호는 천지개벽 신인 반고와 그 음이 거의 통하는 데서 양자를 관련시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요제, 순제 - 전설적인 성천자

요제(堯帝)와 순제(舜帝)라고 하면 논어, 맹자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우리들에게는 가장 낯익은 고대의 성왕이다. 물론 현대 사학의 과학적 논증으로서 말한다면 요, 순은 아직도 유사 이전의 가상전설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지만, 오랜 옛날부터 중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성천자로서의 이미지는 오늘날의 역사학자가 제 아무리 [요순말살론]을 펴보았자 결코 소멸되지는 않으리만큼 선명할 것이다. 유교경전인 오경(經)의 하나로 손꼽히는 서경의 기록도 먼저 요, 순의 사적으로부터 쓰기 시작하고 있다. 고복격양(鼓腹擊壤)의 고사를 비롯하여 요, 순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유교적 분식(粉飾)이 너무나 진한 것으로서 성천자(聖天子) 를 예찬하는 의식적인 것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이미 소박하고 건강한 신화의 테두리에서 빗나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후예 - 아홉 태양을 쏜 활의 신

후예는 천상에 사는 활의 명인인 신이다. 요제 때의 일이다. 제준(帝俊)이 낳은 열 태양이번갈아가며 천상에 올라가 있는 동안은 태평하였지만, 어느 날 그들이 서로 의논한 끝에 장난삼아서 열 태양이 한꺼번에 하늘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상은 삽시간에 염열지옥으로 변하여 농작물은 타고 초목은 말라 비틀어졌으며, 하천은 말라서 먼지가 났다. 요제의 덕으로도 이 뜻밖의 천재지변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마침내 제준에게 호소하고 나섰다. 이에 제준은 활의 명수인 후예를 하계에 파견하고 아무쪼록 온당하게 사태를 수습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솜씨를 자랑하는 후예는 지상에 내려서자마자 약간 높다란 언덕에 서서 때마침 타는 듯이 뜨거운 햇볕을 내리쏟고 있는 열 태양을 향해 활을 잡아 당겼다. 드디어 훌륭한 솜씨로 아홉 태양을 쏘아 맞춰서 떨어뜨려 버렸다. 그 뒤엔 단 하나의 태양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지상의 인간들은 다시 온화한 햇빛을 받아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예는 그 수습하는 방법이 너무 거칠었다고 해서 제준의 노여움을 사고 지상에 추방되는 운명을 감수하게 되었다.
항아(嫦娥)도 천상의 여신이다. 후예의 아내였으나 추방되어 후예와 함께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어 버렸다. 어느날 후예는 곤륜산(昆崙山) 서쪽에 사는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신이 불로불사의 약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찾아가 그 약을 얻어와 아내에게 맡겼다. 약을 맡은 아내 항아는 후예가 없는 사이에 몰래 그 약을 혼자서 삼켜 버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녀의 몸이 아주 가볍게 둥둥 공중에 뜨기 시작하더니 차츰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계에서 추방당한 신세로는 새삼 다시 천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선 월궁(月宮)에 들어가 잠시 몸을 숨기자고 결심했다. 그러나 월궁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의 몸이 이상스럽게도 점점 짤막하게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그 대신 배와 허리가 옆으로 퍼지더니 입은 크게 찢어지고 눈은 흉하게 불거져 나왔다. 살결은 검어지고 게다가 또 동전 크기만큼씩 얽어서 곰보가 되었다. 참으로 보기에도 흉칙스런 두꺼비가 되고 만 것이다. 맑게 갠 밤, 달빛에 비치는 두꺼비의 그림자는 다름 아닌 바로 이 항아의 변신인 것이다.

서왕모 - 질병의 신을 취제하는 여신

서왕모란 여신에 대한 이야기는 항아분월(嫦娥奔月)의 고사에도 약간 비친 바 있다. 그러나 서왕모의 전설은 각양각색이어서 하나로 통일되기는 어렵지만 [산해경(山海經)]이란 책에는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왕모는 중국에서도 서쪽으로 멀리 옥산(玉山)이라는 산에 살고 있었다. 그 형상은 사람과 비슷하고 표범의 꼬리에 호치(虎齒)를 지녔으며, 휘파람을 잘 불고 봉발(蓬髮)에 화승(華勝-머리장식)을 꽂고, 천려와 오잔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질병의 신을 취체하는 임무를 띤 괴수(怪獸)와 같은 모습을 지닌 여신이었다. 이를 볼 때 겨우 봉발에 화승을 꽂았다는 것쯤에서 여성 비슷한 모습을 느낄 뿐이다. 그러나 서왕모는 후세에 이르러 기품있는 여신으로서 전해 내려왔다. 그리하여 동왕공(東王公)이라는 동방의 남신(南神)과 한 쌍이 된 여신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또한 후세에는 도교(道敎)의 신으로서 민중신앙의 대상으로도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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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이름이 丘요, 字는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공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진설하며 예를 행하는 용모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季吏(창 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을 平하게 하시고, 司職吏(축산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公 元年 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가 난을 일으켜 정권 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詩書와 禮樂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공 9년 경자는 공자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가 費邑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부르자, 가고자 하였으 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의 읍재로 삼으니, 1년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아침내 司空이 되시고, 또 大 司寇가 되시었다. 10년 辛丑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와 夾谷에서 會盟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 에게서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12년 계묘에 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을 삼아 세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맹씨의 집안에서는 成땅의 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공격하 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공 14년 을사는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하여 소정묘를 베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   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와 악사를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셨다.

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顔濁鄒의 집에 主人을 정하시었다. 진나라를 가실 적에 匡땅을 지나니, 광땅    사람들은 양호라고 여겨 拘留하였었다. 풀려나자 위나라로 돌아와 남자를 만나셨다.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시니,    사마인 환퇴가 죽이고자 하므로, 또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은 등용하지 못하였다. 계환자가 죽을 적에 강자에게 유언하여 이르되 반드시    공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 하자 강자는 마침내 염구를 불러왔다. 초나라 昭王은 장차 書社의    땅을 가지고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令尹인 子西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 내 중지하였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靈公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輒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가 계씨의 장사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세우자, 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 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 11년    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
러나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서 전}과    {예기}를 敍하시고, {시}를 刪定하고 樂을 바로잡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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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生 泛虛亭集

 

聞好樣侍側 爲慰 奴輩燔瓦時 燒木專恃公等之扶 公等 若盡心相扶 吾豈

 

敢忘其恩 吾亦秋來欲下去爾 姑不具 三日起夫

 

이생의 답장

 

좋은 상태로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고 있다고 들으니 위안이 됩니다. 종 들이 기와를 구을 때에 땔감을 오로지 공들이 도와 줄 것을 믿었다. 공들이 만약 마음을 다해 서로 도와준다면 내 어찌 감히 그 은혜를 잊으리오? 나 또한 가을이 오면 내려가고자 하니 우선 이만 줄입니다.  3일날 기부(상진의 字)

 

尙震 ; 범허정(泛虛亭)

 풀이 : 조선조(朝鮮朝) 13대 명종(明宗) 때의 문신(文臣). 자는 기부(期夫), 호는 범허정(泛虛亭)ㆍ향일당(嚮日堂). 목천(木川) 사람. 11대 중종(中宗) 14(1519)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후(後), 명종(明宗) 13(1558)년에 영의정(領議政)이 됨. 15년간 상위(相位)에 있으면서 불편부당(不偏不黨)하여 무사히 지냈고 사재(史才)로도 유명(有名)함. 시호(諡號) 성안(成安). (1493~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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