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옛부터 文人들이 餘暇를 利用하여 一筆法의 四君子를 즐겨 그렸는데, 四君子란 본래 繪畵에서 사용하였던 것이 아니라 人物을 가리킨 용어로 才質과 德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즉 戰國時代에 맹상군(孟常君), 평원군(平原君), 춘신군(春信君),신릉군(信陵君)등 학문이 높은 네 사람의 德望을 높이 받들기 위한데서 기인한 것으로梅, 蘭, 菊, 竹이 高潔하고 志操높은 氣槪가 있어 네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것이다.

   梅花는 雪寒風에도 꿋꿋하게 피어나므로 꽃 중에서 가장 高潔하여 절개있는 선비들이 좋아하였고,은 그 淸楚함이 다른 植物에 비해 빼어나고 아름다워 높은 志氣의 선비들이 좋아했다. 菊花는 찬 서리와 눈에도 그 志操를 지켜 늦가을까지도 피어있으므로 志操높은 선비들이 좋아했으며, 대나무는 君子의 志操와 여자의 貞操를 대표하는 標本이 되었다.

   梅花, 蘭, 菊花, 竹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植物들로 花鳥畵의 일부로 發達하기 始作하다가 文人畵와 水墨畵의 발달로 하나의 독립적인 美術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梅, 蘭, 菊, 竹의 순서는 春夏秋冬의 순서를 맞춘 것이다. 四君子는 그 상징성 외에도 書藝의 技法을 그대로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 士大夫선비들에게는 魅力的인 素材였다. 細密한 筆體와 熟練된 실력을 요구하는 山水畵보다는 비교적 簡單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筆劃자체가 선비의 人品을 반영한다고 보았기때문에 四君子는 人性을 갈고 닦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書畵同源의 脈絡에서 많은 작가들의 연구와 함께 새로운 여러 가지 새로운 方法을 試圖하고 있다.

  梅花, 蘭草, 菊花, 대나무의 네 가지 植物을 素材로 해서 水墨으로 그리는 四君子 그림은 文人畵家들에 의해서 많이 그려졌는데, 그 理由는 이들 素材가 含蓄하고 있는 象徵性 때문이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梅花는 맑은기상을,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향기를 퍼뜨리는 난초는 고결함을, 가을의 찬 서리에도 굽히지 않고 늦게까지 피는 국화는 정절을, 그리고 곧은 줄기에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는 변함없는 절개 등으로 참다운 삶의 求道者인 君子의 精神에 比喩되었다.

  四君子 그림은 이러한 象徵性 뿐만 아니라, 종이, 먹, 붓, 벼루와 최소한의 도구만 있으면 場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그릴 수 있기 때문에 폭넓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글씨를 쓰는 도구에 書藝의 線을 應用하여 그리는 技法的 親近感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四君子 그림이 水墨畵를 배우는 데의 基礎라 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蘭 잎에서 線의 變化, 대나무 줄기에서 筆力, 매화 가지에서 構成, 菊花 꽃잎에서 먹 色의 濃淡의 能力을 배울 수 있는 適切한 素材이기 때문이다.

  옛부터 東洋人들은 德性과 知性을 兼備한 最高의 人格者를 가리켜 君子라 하였다.당시 知的 엘리트였던 文人 士大夫들은 人生의 窮極的 指標를 君子라 設定하고 積極的으로 추구했었다. 四君子 그림은 바로 이러한 文人들의 삶을 擴充, 高揚시키고 그 마음의 뜻을 表現하기 위한 매체로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四君子 그림은 知識層을 中心으로 갖추어야 할 藝術的 敎養의 하나로 여겨지면서 詩文, 書藝와함께 일상생활화 되었다.

  君子에 대한 認識은 그 身分性 보다는 고매한 품성에 의한 人格的 가치로서 尊敬되었기 때문에 四君子를 그릴 때도 대상의 외형보다 그 자연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더 중시되었다.  그래서 文人 士大夫들은 四君子의 형상 너머에 있는 정신과 뜻을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시를 짓는 기분으로 추상적인 구도와 모든 색을 함유하고 있다는 水墨의 표현적인 붓놀림을 통해 진솔하게 그리는 境地를 높게 여겼다. 이와 같이 四君子 그림은 東洋畵와 水墨畵의 中心 思想과 核心的 意味를 지니고 있는 寫意畵의 精髓이면서 東洋 繪畵의 주종을 이루었던 文人畵의 代表的  화목으로서 크게 盛行했으며, 마음을 修養하고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媒體로 널리 다뤄졌다.

  四君子는 일반적으로 매난국죽의 순서로 소개되는데,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의 배열에 맞춘 것이고, 기법의 습득 단계는 전통적으로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난초(蘭)에 대하여                                   

   世上에 수많은 나무와 꽃이 있지만 '君子'로 불리우는 것은 오직 梅, 蘭, 菊, 竹뿐이다. 氣質이 하나같이 꼿꼿한 선비를 닮았다 하여 明나라때 진계유가 '四君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四君子중에서도 蘭은 빼어난 姿態와 品位로 말미암아 安貧樂道를 즐기는 선비들의 조촐한 삶의 반려가 되곤 했다. 請託이나 誘惑이 있을 때면 말없이 蘭 花盆을 내어 놓음으로써 拒絶을 표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한 고고함을 두고가람 이병기 선생은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淨한 모래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微塵도 가까이 않고 雨露받아 사느니라."고 노래한 바 있다.

   千里를 간다는 蘭香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蘭의 美德이다. 風浪에 漂流중이던 中國人들이 어디선가 풍겨오는 香氣에 의지해 뱃머리를 돌렸더니 작은 섬의 언덕에 春蘭이 지천으로 피었더라는 傳說이 있을 정도이다. 蘇東波가 이르기를 "春蘭은 美人과 같아서 꺾지 않아도 스스로 香氣를 바친다."라고 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官公署나 企業體의 인사철이나 각종 展示會, 會員展등에 값비싼 蘭花盆이 깡그리 동이 난다는 것은 蘭의 品位와 香氣가 여지없이 嘲弄 당하는 느낌이다.

  蘭은 아름다움과 香氣로 인하여 貴하게 여기는 風習이 있으며, 煩雜하지않고 곧게 뻗은 잎의 氣勢와 단촐하면서도 고고한 姿態는 선비의 忠誠心과 절개의 상징이었다. 四君子중에서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간단한 筆致로 그릴 수 있어 四君子를 처음 그릴 때에는 대개 蘭그리는 法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蘭草는 예부터 깊은 골짜기에서 홀로 고고하게 香氣를 품고 있는 모습이 世俗의 利慾과 功名에 超然하였던 高潔한 선비의 마음과 같다고 하여 幽谷佳人(유곡가인), 幽人등으로 불리었다. 蘭草의 象徵性은 楚나라의 詩人이며 忠臣이었던 屈原이 蘭의 高潔한 姿態를 거울로 삼았다고 읊었듯이 이미 오래 前부터 形成되었다. 蘭草가 그림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때부터였으며 처음에는 화조화(花鳥畵)의 일부로 그려지다가 미불에 의해 水墨法에 의한 獨立된 畵題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다. 元나라때는 松雪體로 유명한 조맹부와 雪窓등에 의해 산뜻하고 단아한 모습의 墨蘭이 流行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의 부인인 菅道昇의 맑고 수려한 蘭花는 馬守卓, 薛素素(설소소)등의 女流 畵家들에게 많은 影響을 주어 이들을 閨秀傳神派(규수전신파)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墨蘭은 高麗 末期에 傳來되어 朝鮮 初期부터 그려지다가 秋史 김정희에 이르러 大成되었고, 그 傳統이 近代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墨蘭은 그 은은한 먹 香氣와 秀麗한 曲線美와 淸楚한 雰圍氣를 통해 高潔한 이념미가 역대의 뛰어난 文人畵家들에 의해 繼承, 發展되어 오면서 四君子 그림과文人畵의 發達에 重要한 구실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四君子 그림을 배울때 이러한 전통과 상징성을 지닌 묵란을 제일 먼저 시작하는 것은 난초의 생김새가 漢字의 體와 닮은 점이 가장 많다는 데 있다. 蘭葉을 그리는 것을 잎을 그린다고 하지 않고 삐친다고 하는 것도 글씨에서 삐치는 법을 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김정희는, "난초를 치는 법은 隸書를 쓰는 법과 가까워서 반드시 文字香과 書券氣(서권기)가 있은 뒤에 얻을 수 있다" 고 하여 理論的으로 書體 訓練이 繪畵技術의 基礎가 되고 있음을 말한 바 있다. 이 점은 묵란화가 문인 墨客들이 즐겨찾던 主題의 하나로서 詩, 書, 畵에 능한 三絶, 특히 書藝에 뛰어난 사람들에 의해 주로 그려졌던 사실로도 알 수 있다.  蘭草의 種類는 상당히 많지만 묵란화에서는 주로 春蘭과 建蘭이 주로 다루어진다.  春蘭은 草蘭, 獨頭蘭, 幽蘭이라고도 하는데 잎의 길이가 각각 달라서 길고 짧으며 한 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것으로 청의 鄭板橋(정판교) 와 朝鮮 末期의 김정희, 대원군, 金應元 등이 잘 그렸다. 建蘭은 雄蘭, 駿河蘭, 民蘭 이라고도 했으며,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여 곧게 올라간다.  福建지방이 명산지인 이 난은 청의 오창석과 조선 말기의 閔泳翊(민영익)이 특히 잘 그렸다.

春蘭은 한줄기에 한송이의 꽃이 핀다하여 一莖單花라 하고, 建蘭은 한줄기에 아홉 송이의 꽃이 핀다하여 一莖九花, 一莖多花 또는 蕙라고도 한다.

 

                 대나무(竹)에 대하여                                      

    대나무는 모든 植物의 잎이 떨어진 추운 겨울에도 싱싱한 푸른 잎을 계속 維持한다. 君子의 人品에 비유될 수 있는 이러한 特性들 때문에 대나무는 剛直性과 志操와 절개라는 象徵性을 갖게 되었으며 四君子중에서 제일먼저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나무는 그 뛰어난 실용성 때문에 예로부터 生活과 藝術에서 必須的인 存在로 인식되어 왔다. 本來는 松竹圖, 石竹圖, 花鳥圖등의 一部로 그려졌으나 그 象徵性과 技法의 特殊性 때문에 文人들이 즐겨 그리게 되어 漸次 文人들의 墨畵에서 脚光을 받게 되었다.

   대나무는 文人 士大夫들의 가장 많은 愛好를 받으면서 四君子의 으뜸으로 뽑혀온 것이다. 그것은 대나무의 변함없는 淸節한 姿態와 그 情趣를 志操있는 선비와 墨客들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늘 푸르고 곧고 강인한 줄기를 가진 이러한 대나무는 忠臣烈士와 烈女의 절개에 비유되기도 한다. 대나무가 그림의 素材로 등장한 것은 三國時代부터였으나, 水墨畵의 技法과 密着되어 文人 士大夫들의 화목으로 발달시킨 사람은 北宋의 蘇東波와 文同이었다. 蘇東波는 특히 그리고자 하는 대나무의 本性을 作家의 直觀力으로 體得하여 나타낼 것을 주장한 胸中成竹論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문동은 湖州竹派를 형성하여 墨竹畵의 盛行에 크게 기여하였다.

   竹을 그리는데 基本은 墨竹으로 一般化 되었으나 墨竹 이전에 寫竹과 彩色竹의 方法이 있었음을 記錄을 통해 엿볼 수 있다.  寫竹은 寫生에 의한 대나무의 描寫方法이고 彩色竹은 윤곽을 線描로 두르고 안에 칠을 하는, 이른바 鉤勒塡彩(구륵전채)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나무는 水墨法과 結付됨으로써 비로소 東洋 繪畵의 中心的 創作 思想이라고 할 수 있는 氣運과 精神의 主觀的 表現이 可能하게 되었던 것이다. 墨이란 線으로 作用할 뿐 아니라 色彩를 대신한 면으로서도 作用한다. 문동이나 소동파에 의해 처음 試圖된 墨竹은 바로 대상물의 외형적 寫生을 떠난 傳神의 實踐的 方法으로 竹을 그린 것이 되며, 이때의 墨은 현상 세계 너머의 調和力을 暗示하는 것으로 墨線이나 墨面모두 그 氣運을 담는 형식으로 存在하고 있는 것이다. 墨竹과 東洋繪畵가 지니고 있는 寫意 精神은 이러한 創作 思想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墨竹도 墨蘭과 마찬가지로 書法과 密接한 關係가 있다. 예찬은 書法 없는 墨竹은 병든 대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으며 明代의 왕불은 書法과 竹法을 同體라고 하였다. 그러나 墨蘭이 짧고 긴 曲線의 反轉을 통해 豊富한 變化를 보이는데 비해 墨竹은 直線이 위주이며 그 구도에서도 보다 다양한 것이 그리는데도 절차와 방법이 있는데, 줄기와 마디, 가지와 잎마다 그리는 순서가 있다. 먼저 줄기를 그리고 다음에 가지를, 이어서 방향과 筆法을 변화시켜 잎을, 마지막으로 마디를 그리는 것이 청대 이후 확립된 竹畵法이다. 이 순서는 詩에서의 起承轉結과 같다. 이러한 붓의 흐름은 四君子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지만 그 중에서도 竹의 경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매화(梅)에 대하여                                    

   梅花는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다. 이런 理由에서 梅花는 일찍부터 淸楚한 아름다움과 굽힐 줄 모르는 선비정신의 象徵으로 많이 쓰였다. 墨梅畵가 나오기 以前에는 花鳥畵의 一部로서만 쓰이다가 文人畵의 發達과 함께 四君子畵로서의 墨梅畵가 發展하였다.

   梅花는 추위를 이기고 눈 속에서 피는 强忍하면서도 高貴한 韻致를 그 特性으로 한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풍기는 梅花의 香氣는 맑고 깨끗한 人品으로, 눈 속에서도 아름다운 姿態는 봄을 알려주는 先驅者的인 뜻으로 表現되고 있으며, 이러한 梅花를 가리켜 雪中君者, 淸香, 玉骨, 淸客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梅花가 水墨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北宋 때였으며 창시자는 禪僧인 仲仁이었다. 뒤이어 같은 禪僧(선승)인 妙高(묘고)에 의해 理論的 體系化가 試圖되었으며, 北宋 南宋 때에는 꽃잎의 윤곽을 그리는 圈法(권법)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墨梅의 이러한 傳統은 元代에 와서 王冕(왕면), 吳太素 등에 의해 크게 盛行되었으며, 構圖에서 北方式인 菱形式(릉형식)보다 남방식인 橫貫式(횡관식)이 더 流行하였다. 明代에 와서 畵譜 등의 出現으로 다소 形式化 되었지만, 청대에 이르러 金農등의 個性派 畵家들에 의해 보다 淡彩가 곁들여진 華辭한 모습으로 變化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梅花는 墨竹과 함께 高麗 中期부터 그려졌으며 朝鮮時代에는 각 時期마다 構圖와 技法을 달리하면서 獨特한 樣式으로 展開되었다. 조선 초,중기에는 선비들의 기상과 밀착되어 高談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後期에는 文人畵의 淡白한 雰圍氣가 강조되다가, 末期에 이르러 趙熙龍(조희룡)에 의해 봄의 華辭한 季節的 情趣와 함께 보다 繪畵性을 짙게 나타내었다.

    蘭草를 曲線美, 대나무를 直線美로 본다면 매화는 屈曲美에서 그 造形的 特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梅花를 그리는 데는 傳統的으로 다섯 가지의 必須的인 方法이 있다. 뿌리는 서로 얽혀야 하고 대목은 괴이해야 하고, 가지는 말쑥해야 하며, 줄기는 강건하고 꽃은 기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36가지의 병이 있다하여 한가지라도 잘못 그리면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기본 수련의 중요성과 함께 매화 역시 높은 경지에 들기가 어렵다는 점을 말해 주는 것으로, 문제는 형식의 충실한 모방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자신의 강성과 뜻을 얼마만큼 구현시킬 수 있는가에 참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국화(菊)에대하여                                     

   菊花는 늦은 가을에 첫 추위와 서리를 무릅쓰고 늦게까지 꽃이 핀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굳은 志操의 象徵으로 여겨졌다. 朝鮮時代 全般에 걸쳐 墨菊畵는 梅花, 蘭草, 대나무에 비해 훨씬 덜 그려졌으나 朝鮮中期이후의 士大夫 文人들의 作品과 朝鮮末期 畵員들의 작품이 다수 傳해진다.

   菊花는 다른 꽃들이 滿發하는 季節을 참으며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그 忍耐와 志操를 꽃피운다. 萬物이 시들고 頹落해 가는 時節에 홀로 피어나는 菊花는 現世를 외면하며 사는 隱者의 모습이나 傲霜孤節(오상고절)한 君子를 聯想케 한다. 그래서 菊花는 晩香, 傲霜花(오상화), 佳友(가우), 金華 등으로 불렸으며 菊花는 本性이 四方을 좋아하기 때문에 동쪽 울밑에 흔히 심는 것으로 되어 있어 東籬佳色이라는 別名이 생겼으며, 특히 晉(진)나라의 도연명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더욱 詩人 墨客들의 상탄의 대상이 되었다.

   菊花도 다른 사군자와 마찬가지로 北宋 때부터 그려졌으나 墨菊만을 專門으로 다룬 畵家는 매우 드물었으며, 청나라에 와서 오창석에 의해 繪 畵性이 강한 彩菊이 많이 그려졌다.

   菊花 全體 모습의 韻致는 꽃이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면서 煩雜하지 말아야 하며, 잎은 上下左右前後의 것이 서로 덮고 가리면서도 亂雜하지 말아야 한다. 꽃과 꽃술은 덜 핀 것과 활짝 핀 것을 갖추어서 가지 끝이 눕든지 일어나 있어야 한다. 활짝 핀 것은 가지가 무거우므로 누워 있는 것이 어울리고, 덜 핀 것은 끝이 올라가는 게 제격이다. 그러나 둘다 너무 심해서는 안된다. 잎의 형태는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파진 곳이 네 군데가 있어서 그리기가 어렵다. 이를 나타내는 데는 反葉法, 正葉法, 折葉法등의 畵法이 있다.

   菊花는 늦가을에 피는 서리에도 傲然한 꽃이다. 그러므로 纖細하고 華辭한 봄철의 꽃과는 特性이 다르다.  그림이 종이위에 그려졌을 때 晩節을 굳게 지켜 그윽한 香氣를 풍기는 菊花를 대하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 것이다.   

 

                文人畵에 대하여                                            

   士大夫 선비들이 趣味로 그린 그림을 文人畵라 한다. 專門的인 畵家의 그림이 아니므로 때로는 表現이 서툴러 描寫力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各自의 主觀대로 觀念의 世界를 樣式에 구애됨이 없이 그리는 것이 特徵이다. 그림을 그리는 目的은 여러사람에게 보이고 評價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內面을 깊이 있게 들여다 보기 위한 精神修養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文人畵에서는 事實보다는 그린 사람의 心性이 더 重要視된다. 따라서 판에 박힌 그림이나 事物을 있는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그림은 그다지 認定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自體로서 또 하나의 틀이 되어 觀念에 얽매인 판에 박힌 그림들도 많았다.

 

                山水畵에 대하여                                      

   韓國을 포함한 東洋에서의 山水畵는 自然의 表現인 동시에 人間이 自然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自然觀의 반영이기도 하다. 따라서 山水畵란 이 두가지 複合的인 성격을 띠고 있다. 農耕을 主로 하였던 韓國을 비롯한 東洋人들에게 있어서 自然이란 매우 所重하고 絶對的인 존재로서 認識되었다. 이 때문에 自然을 表現한 山水畵는 俗世와 對比되는 의미에서의 理想鄕을 表現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산과 계곡과 강을 그리기보다는 觀念의 世界를 表現하고자 했던 山水畵들이 많았으며 이것은 中國 山水畵의 影響에서 起因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점차 韓國의 산과 들을 사실 그대로 表現하고자 하는 畵風이 생겨나게 된다.

  韓國 山水畵의 역사는 5세기경 三國時代에 人物畵등의 背景的 要素로 그려지기 始作해서 高麗時代를 통하여 純粹 鑑賞畵로서 크게 成長하였다. 構圖나 空間槪念 각 景致의 사물들의 描寫法등에서 中國의 畵風을 攝取하고 이를 토대로 韓國 特有의 獨自的인 畵風을 이룩하였으며, 이러한 特色은 時期를 달리하여 韓國的 畵風의 形成과 展開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한국미술사상 繪畵가 가장 盛行하였던 조선시대를 통하여 山水畵는 韓國畵의 전체의 發展에 主導的인 구실을 하면서 朝鮮後期에는 韓國의 山川을 素材로 하는 實景山水의 전통을 形成하기도 하였다.

  가. 남종화

   山水畵의 2대 畵風중의 하나로 文人畵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南宗文人畵"라고도 한다. 學識과 敎養을 쌓은 文人들이 餘暇를 즐기기 위해 水墨과 淡彩를 써서 內面世界의 表出에 치중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特徵으로 北宗畵와 對比되는 槪念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文人畵家들 사이에서 發展하였으나 점차 職業畵家들에게까지 널리 파급되었다. 中國畵壇의 이 畵風은 朝鮮中期에 韓國에 傳해져 朝鮮末期에 이르러서는 큰 세력을 누리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傳統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朝鮮後期 남종화풍의 대표적인 畵家로는 심사정을 들 수 있다.

  나. 북종화

   산수화의 2대 畵風중의 하나로 주로 남종화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職業畵家들에 의하여 외면정 形寫에 치중하여 그린 기교적이고 장식적인 工筆畵계통의 그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종화에 비하여 유입이 빨라 朝鮮初期 및 中期까지 畵壇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 代表作으로 안견의 "夢遊桃園圖"와 안중식의 "도원문진도"가 있다.
 

                 花鳥畵에대하여                                     

   東洋畵에서는 山水畵, 風俗畵, 四君子등과 함께 꽃과 새, 나무와 바위등을 그린 그림들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런 그림의 特徵은 꽃만 그리거나 새만 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꽃이나 풀은 반드시 바위나 곤충과 어울려 그리게 마련이고 새가 있으면 반드시 나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느 事物 하나라도 서로 어울려 造化를 이루어야만 意味가 있다고 생각하는 東洋 特有의 美意識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의 꽃 그림은 중국의 그림과 달라서 눈부신 현란함이 없고, 담담하고 점잖은 편이다. "지나치게 정교하고자 하면 도리어 졸렬해지기 쉽다."는 韓國人의 藝術觀은 현란한 채색보다는 은은한 아름다움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화려한 彩色보다는 조금은 투박하면서 자연스럽고 생명력 넘치는 맛을 주는 것이 한국 花鳥그림의 特徵이 되었다. 호랑이, 개, 고양이, 닭등을 主素材로 해서 그린 朝鮮 後期의 動物그림은 緻密한 묘사력을 基底로하여 完璧한 事實力의 發達은 肖像畵의 發達과 함께 해 온 것이다. 成就度가 높은 朝鮮後期 動物그림의 몇가지는 면상벽의 고양이 그림과 닭그림, 김두량의 개그림, 그리고 作者未詳의 호랑이그림등을 들수 있다.                           

<참고>   한국문인화정신의 현대적 고찰 - 국립박물관
四君子에 대한 고찰 - 中央書藝硏究會
사군자에 대한 이해 - 臨池硏墨會

[출처] 사군자의 모든것|작성자

 

 

 

 

 

임진성의 四君子(梅蘭菊竹) 

 사군자 부분도

 

 

사군자(四君子)

잔설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추위를 무릅쓰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청초한 자태와 은은한 향기로 주위를 맑게 하는 난초, 늦가을 모든 꽃들이 시들어갈 때 꿋꿋이 모진 서리를 이겨내는 국화, 칼날 같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 이 네 가지 식물은 한결같이 그 생태가 군자의 그것을 닮아, 우리는 이들을 일컬어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라 부른다.

“이 사람 없이 어찌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는가(何可一日無此君耶).”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아들인 왕휘지(王徽之, 344∼388)가 하루라도 떨어져 살 수 없었던 것은 단금(斷金)의 벗도 아니요, 사랑하는 연인도 아닌 대나무였다.

그에게 대나무는 벗과 연인 모두를 아우르는 자신의 분신이자 자신을 경계하는 규범이었을 것이다. 초(楚)나라의 우국시인(憂國詩人) 굴원(屈原, B.C. 343∼278)에게는 난초가 그러하였고, 동진(東晋) 은일시인(隱逸詩人) 도연명(陶淵明, 365∼427)에게는 국화가 그러하였다.

이렇듯 고전적(古典的) 문인들에 의해 그 상징성이 배가된 사군자는 후세 문인들의 공감을 얻으며 문예(文藝)의 소재로 각광받게 된다. 문학 방면에서의 사군자에 대한 찬미는 곧 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으로 이어져 사군자를 소재로 한 그림이 출현하게 된다.

그중 가장 이른 것은 대나무로 그 기원은 당대(唐代)부터라고 하나,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북송(北宋)대 문동(文同, 1019∼1079)과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이후였다. 매화 역시 비슷한 시기에 선승(禪僧) 중인(仲仁)이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전 작품이 없어 그 자취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그의 뒤를 이은 양무구(揚无咎, 1097∼1169)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묵매(墨梅)의 기틀을 확립해간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야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원초(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0)부터였다. 그는 이민족에게 국토를 잃은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심회를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도 살아가는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국화는 사군자 중 가장 뒤늦게 발달하였다. 송대나 원대부터 그 전조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단일 소재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 이후이다.

 

이렇듯 사군자가 문인들에게 창작되고 완상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지니는 군자적 상징성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 그 기법적 특징과도 적지 않은 연관이 있다. 문인들이 일상에서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을 이용하여 약간의 형상성을 가미하면 곧바로 그림이 될 만큼 형사(形似)와 운필(運筆)에 유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송의 문인사대부들에 의해서 대나무와 매화를 중심으로 사군자가 그려지던 즈음, 고려에서도 사군자가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북송이나 고려 모두 과거제도를 통해 문인사대부층의 저변이 확대되었고,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하는 시대 분위기 또한 양자가 동궤(同軌)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에 의해서 묵죽(墨竹)이, 정지상(鄭知常, ?∼1135)에 의해서 묵매(墨梅)가 그려진 후 우리나라에서도 사군자는 크게 유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작가들로서는 고려의 정홍진(鄭鴻進), 정서(鄭敍), 안축(安軸, 1282∼1348) 등이 있었고, 조선 전기에는 강희안(姜希顔, 1417∼1464), 신잠(申潛, 1491∼1564), 유진동(柳辰仝, 1497~?) 등 문인사대부들은 물론,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인종(仁宗) 등 군왕을 비롯하여 화원이었던 안견(安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나 조선 전기 사군자는 현전하는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지금으로서는 그 기량이나 양식적 특징을 고찰할 길이 없다. 다만 조선 전기 화원들이 그린 몇몇 청화백자(靑華白磁)에 시문(施紋)된 대나무 그림에서 고려 말부터 그려지기 시작하였을 원대 이간(李, 1245~1343)의 묵죽 화풍의 유향(遺響)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실제 작품을 통해 본격적으로 사군자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은 선조(宣祖) 연간에 이르러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묵죽에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 묵매에 설곡(雪谷) 어몽룡(魚夢龍, 1566∼?)을 들 수 있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인 이정은 소재의 다양성과 복합적 운용, 소재의 특징을 명료하게 부각하는 화면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하는 조형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적절한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으로 한국 묵죽화의 전형을 확립하였고, 어몽룡 역시 압축적이고 간명한 화면구성과 빠르고 강한 운필로 매화의 강직하고 청신한 기운을 기품 있게 그려내 한국 묵매화의 기틀을 정립하였다.

한국 사군자의 비조(鼻祖)라 할 만한 이 두 사람이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고유의 이념으로 계승 발전시킨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계 문인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묵죽과 묵매의 양식적 전통은 당대는 물론 조선 후기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니, 묵죽은 위빈(渭濱) 김세록(金世祿, 1601∼1689)과 수운(岫雲) 유덕장(柳德章, 1675∼1756) 등이 이정을 계승하였고, 묵매는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 미수 허목(許穆, 1595∼1682), 오달진(吳達晉, 1597∼1629) 등이 어몽룡을 계승한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그중 오달진의 〈묵매〉는 빠르고 격정적인 필치로 강인한 매화의 상징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화면을 가로지르며 부러진 주간(主幹)은 병자호란 때 목숨을 걸고 항거했던 그의 동생 오달제(吳達濟, 1609∼1637)의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았던 절개와 충의를 연상시켜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한편 홍진구(洪晋龜, 1650년대∼?)는 비록 수묵화는 아니지만 구륵과 몰골을 적절히 구사하며 담채(淡彩)의 국화를 그려 묵국(墨菊)의 단초를 열어놓는다. 본격적으로 묵국이 그려진 것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에 의해서다. 이번 사군자전에서 우리나라 묵국의 시초에 해당되는 이 두 사람의 국화 그림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성과였다.

조선 말기에 화단의 주류로 떠오른 사군자

묵국이 그려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비로소 사군자가 하나의 화목(畵目)처럼 통칭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즈음 조선 화단에는 남종화풍(南宗畵風)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화풍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사군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조(正祖)연간 예원(藝苑)의 영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정이나 그를 계승한 유덕장과는 사뭇 다른 유연한 필치로 문아(文雅)한 느낌의 난죽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16경), 수월헌(水月軒) 임희지(林熙之, 1765∼?),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 등에 계승되면서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한다.

김홍도의 〈백매(白梅)〉는 김홍도 특유의 주춤거리는 듯 출렁이는 필선과 부드러운 선염으로 등걸과 마들가리를, 그리고 그 위에 수줍게 맺혀 있는 꽃봉오리를 소담하게 베풀어놓고 있어, 강인함을 강조한 기존의 묵매와는 판이하게 차이가 있다. 어렵게 받은 그림값을 다 들여 매화음(梅花飮)을 즐기던 단원의 마음속에 있던 매화는 기세등등한 매화가 아니고 이 〈백매〉와 같이 소탈하고 정감 있는 매화였나 보다.

반면 임희지와 신위는 기존 양식을 비교적 충실히 계승하며 유려(流麗)하고 습윤(濕潤)한 느낌의 필치로 격조 높은 난죽을 그리고 있는데, 특히 신위는 이정, 유덕장과 더불어 조선 3대 묵죽화가로 평가받을 만큼 묵죽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조선 말기에 들어서는 사군자가 화단의 주류로 떠오를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여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97∼1859), 소치(小癡) 허유(許維, 1809∼1892),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등 그 문도(門徒)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청대(淸代) 문인화풍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이들은 사실성보다는 탈속한 이념미(理念美)를 추구하였다.

국망(國亡) 이후에도 사군자에 대한 애호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석촌(石邨) 윤용구(尹用求, 1835∼1939),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1856∼1932),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같이 국망의 통한을 한묵(翰墨)으로 자오(自娛)하며 지내던 많은 문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상하이(上海)에 망명해 살았던 민영익은 당시 상하이 화단을 압도한 당대 제일의 사군자 대가였다.

일제 이후에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1) 등이 방일(放逸)한 붓질로 난죽을 그려 남기고 있지만, 기법이나 양식적인 진전은 찾아보기 힘들다.

 

 

홍 매화

 

 

 

 

 

 

 한란

 

 

 

 

 황국화

 

 

 

 

 

대나무

 

 

 

 

                                                

 

 한란 

 

 

 

 

 

 

 

 

 

 

 

 

 

 

 

 

 

 

 

 

 

 

 

 

 

 

대 줄기 그리기 

 

 

 

 

혜란1

 

 

 

 

 

춘란꽃 그리기

 

 

 

 

 

춘란 꽃

 

 

 

 

 

안면도 춘란1 

 

 

 

 

 

안면도 춘란2

 

 

 

 

 

혜란2

 

 

 

 

 

 


출처 : 너에게 편지를
글쓴이 : 동산마술사 원글보기
메모 :

 

1. 김생(金生)에서 김정희(金正喜)까지

  우리나라의 서예가로는 멀리 신라시대의 김생(金生 711~791)을 비롯하여 최치원 등 많은 명필들이
있었으나 남아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그 중에는 단연 김생이 돋보이는데 김생은 해동서성(海東書聖)
으로 불릴 정도로 그의 필치는 중국에 까지 알려졌으며 송나라의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왕희지(王羲之)에 비길 만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했다고 하며
그 후로 중국 사신들은 김생의 필적을 매우 귀하게 여겨 얻어갔다고 전한다.

  고려 중기에는 우리 나라의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탄연(坦然)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비(文殊院碑)인데, 이 비는 현재 없어졌으나
  탁본이 전하여지고 있다.
   말기에는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29호)를 쓴 한수(韓脩)와
  회암사선각왕사비(檜巖寺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를 예서로 쓴 권주(權鑄)는 모두 대가들이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오면 전기에는 안평대군, 중기에 한석봉(1543~1605),
후기에는 이광사(1705~1777) 등을 거쳐 추사 김정희(1786~1856)에 이르게 된다.
  石峯 한호(韓濩)의 서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인 송설체(松雪體)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의 안본(贋本)을 임모(臨摹)해서 배운 것이나 안진경체의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원첩(原帖)과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이
결핍되었다고 한다. 또 사자관으로 오랫동안 있어 틀에 맞추려는 듯한 글씨를 만들게 되어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을 다듬는 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글씨의 짜임새가 좋고 필력(筆力)도 있어 일세를 풍미했고, 그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寫字官體:干祿體)가 생길 정도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희(金正喜)는〈완당집 阮堂集〉에서 "석봉첩(石峯帖)은 매우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극히 속된 것도 있다"고 평했다.

   다음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는 진서·초서·전서·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이룩했다.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 특히 이광사는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전서체의 작품도 남겼다.

 

▲이광사가 쓴 두보시, 35.2×23.2㎝, 18세기(왼쪽). 한호가 쓴 두보시, ‘한석봉증유여장서첩’ 中(보물 제1078호), 감지에 금니, 25.5×20㎝, 조선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소년시절부터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박제가(朴齊家)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청대(淸代)의 학예일치사상(學藝一致思想)과 금석학 등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게 되었고, 1809년 베이징[北京]에 가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을 통해 금석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서예 원류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옹방강 일파의 서론(書論)에 입각하여 처음에는 동기창체(董其昌體) 등을 익히다가 서법의 근원을
한대 예서체에 두고 이것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청조의 서예가들도 염원했던 이상적인
추사체(秋史體)를 이룩했다. 졸박(拙朴)한 이 서체는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몹시 심하고
또한 힘차면서도 거칠어서 마치 유희적(遊戱的)인 선화(禪畵)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필획들이 제각기 개성 있게 배열되어 매우 독특한 구성미를 자아낸다.
이러한 추사체는 그의 문인화풍의 근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신헌(申櫶)·이하응(李昰應)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에 의해 일세를 풍미했다.



          대팽두부(大烹豆腐) <129.5×31.9cm>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중국의 서예가들도 추사체는 중국에도 없는 독창적인 서체로 인정하여 최근 정보로는 추사를 서성(書聖)
             이라고 극찬하여 등석여(鄧石如), 조지겸(趙之謙), 오창석(吳昌錫) 등과 같은 반열에 올린다고 한다.
                                   (중국의 전문 서예지 <중국서법中國書法/Chinese Calligraphy> 2006년 6월호)

            여기서 참고가 될까하여 얼마 전 한국의 서예관련 전문가들이 실시한 평가를 아래에 옮겨다 싣는다.

          "한국 최고의 서예를 꼽는 데 총 9명의 전문가들 모두 추사의 글씨를“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隸書에 바탕을 두고 각 서체의 조형미를 융합한 데서 “돌의 거친 질감과 견고함, 강함을 느낄 수 있다”
          라는 평이다. 특히 추사체의 조형미와 글씨는 한국과 중국을 아우르는 역대의 서예사 속에서
          “모든 이상적 요소를 통합해 표출해낸 완성체”라며 추천되었다.

          왕희지의 해서체를 위시해 중국의 옛 비석 글씨를 연구, 재구성해 東國眞體라는 서풍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되는 이광사의 글씨 또한 5명의 추천을 받았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서 두보시가 최고로 꼽히고 있는데,
          “一陰一陽하는 자연의 도에 바탕했기에 의기가 횡출하고 변화가 무궁하게 되었으며,
          화려함을 함축하고 그 근골을 힘있게 했다”는 평가다. ‘석봉체’라 불리우는 한호의 글씨 역시
          “강한 필획으로 굳세고 개성적인 서체를 보여주며, 조선 고유의 색감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그의 초서는 강함과 아름다움이 잘 어우러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외에 김생의 전유암산가서, 허목의 애민우국, 양평대군의 몽유도원도 발문,
          안평대군의 소원화개첩, 최치원의 쌍계사진감선사비,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탄연 문수원기,
          신위 시고 등도 ‘훌륭한 글씨’로 거론되었다." 

          (추천해주신 분들: 박도화 문화재청, 박은순 덕성여대, 이내옥 부여박물관장, 이원복 광주박물관장,
          이태호 명지대, 정병모 경주대, 조선미 성균관대, 한정희 홍익대, 홍선표 이화여대 교수, 이상 총 9명)
                                ㅡ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2. 해방후의 서예가들

            1945년 8.15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서예가들을 기술하려면 아무래도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소전 손재형(1903~1981)은 1903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향저에서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손(孫)이자 영환(寧煥)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는데, 추사 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서예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면서 한자 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 온 서예계의 거목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1924년(당시 22세)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제 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 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번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대한민국예술원회원(’54~’81)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을 정도 화려한 경력을 과시하였다.

            그가 한 공적 중 특기할만한 몇가지를 든다면 먼저 해방후 그동안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書藝)로 할 것을 제창하여 관철시켰고 그뒤로 국내에 통용하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서법(書法), 일본의 서도에 비견하여 우리나라에는 서예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이다.
             또 한가지는 추사의 '세한도'를 대동아전쟁으로 혼란한 기간 중에 일본 동경으로 가서 당시의 소장자
            후지츠카(藤塚) 전 경성대 교수를 3개월에 걸친 끈질긴 설득 끝에 '세한도'를 찾아온 공적이다.
             물론 그는 나중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더러 오점도 남겼지만
            그의 문하에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한국 서예계의 기둥이 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낸 점도 특기할만하다고 하겠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으며, 수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전서(篆書)체를 토대로 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素筌體)'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내었고,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畵)에도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여 문인화에도 걸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원곡 김기승은 별반 나이 차이가 없었지만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산정(山丁) 서세옥(徐世沃) 등은 당시 서울대 미대 재학생으로 나중에 학남 정환섭(1930~ )
            문하에서는 초민(艸民) 박용설(1947~ 서울대 사대 출신) 등의 서예가가 배출되었고,
            서세옥(1929~ )은 수묵화법을 응용하여 동양화 추상 분야를 개척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소전 손재형과 함께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도 훌륭한 서예가였다.
            소전이 예파(藝派) 서예가를 대표한다면 검여는 그 대칭 점에 섰던 법파(法派) 서예가의
            대표격이라 하겠다. 법파도 예파와 마찬가지로 추사의 <법고창신>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였으나,
            창신에 앞서 보다 든든한 법고의 고전적 바탕과 기량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검여 유희강은 1938년~1946년 중국에 머물며 베이징의 동방문화학회와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와 서예, 금석학 등을 배웠다. 광복 후 그는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서예가로 다시 태어난다.
            검여는 1953년 제2회 국전에 서양화 <염念>과 서예 <고시古詩>를 처음으로 출품하여
          양 부문에 입선하고, 이어 1954년 제3회 국전에도 서양화와 서예 작품을 동시에 출품하였으나,
            서예 작품 <독서운생벽讀書雲生壁>만이 입선하였다. 이후 검여는 서예에만 매진한다.
            1958년까지 계속 4회에 걸쳐 특선을 차지함으로써 1958년에는 추천 작가로 올라서게 되었고,
            1959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로 국전 초대 작가가 되었다.
          검여 서예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예의 회화성>이다. 그는 육조풍의 행서를 중심으로 한
          그의 글씨가 무르익어 가고 나름의 서체가 형성되어가자 그의 예술적 지향점과 목표를
          추사체의 연구와 발전에 두게 된다. 그는 서법에 의한 필획니다 결구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한편
          1967년부터 1년 여 월전 장우성 화백과 교유하면서 사군자를 비롯한 동양화 기법을 습득하는 한편
          추사의 서화 양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검여는 스스로 별호를 소완재(蘇阮齋)라
          칭하고 고담(枯淡)하고 기준(奇峻)하며 둔중(鈍重)한 서풍으로 추사를 넘고자 하였다.
          그는 추사와 마찬가지로 위비(魏碑)를 중심한 북비의 비학파의 글씨를 수용 발전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추사를 비롯한 중국 명가들의 글씨를 두루 공부하였다.
          육조 해서의 강한 골기와 갈필의 금석기가 회화적 조형감각이 결부된 검여의 글씨는
          그 맥에 있어 추사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추사가 사군자를 비롯 문인화에 빼어났던 점에
          비추어 검여는 남종화와 서양화를 통하여 서예로 들어간 까닭에 그의 글씨도
          장법과 포치의 조형성이 뛰어났다.

          출처 : 해동연서회
          글쓴이 : 한올이연광 원글보기
          메모 :

          '心眼齋 > 書藝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낙관(落款) 과 협서(夾書)  (0) 2013.03.21
          [스크랩] 사군자의 모든 것  (0) 2012.07.30
          무송 김병환 논문  (0) 2012.07.03
          [스크랩] 조선조 어필  (0) 2012.05.08
          禪으로 가는 길  (0) 2012.03.02

           

          王羲之 書體의 特性.hwp

          王羲之 書體의 特性.hwp
          0.05MB

          '心眼齋 > 書藝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군자의 모든 것  (0) 2012.07.30
          [스크랩] 한국의 서예가와 그 작품들  (0) 2012.07.23
          [스크랩] 조선조 어필  (0) 2012.05.08
          禪으로 가는 길  (0) 2012.03.02
          왕희지아들 왕헌지(王獻之)  (0) 2011.07.09

           

          使人長智英如學 :지혜를 기름은 배움만한 것이 없고

          若玉求文必待琢 :

          經書奧旨干誰問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으랴?

          師傳宜親不厭數 :스승을 친히하여 자주 물어야 한다네.

            英祖大王御筆
           
            翼宗大王御筆
           
            仁祖大王御筆
            千門中斷楚江開:천문산 끊긴 곳에 초강이 열리고
            碧水東流至北廻:동으로 흐르는 푸를 물은 북쪽에서 돌아 흐르네.
            兩岸靑山相對出:양 언덕의 청산이 마주하여 솟았네
            孤帆一片日邊來:
            한 조각 외론 배가 태양가로 나오네.
            正祖大王御筆
           
            顯宗大王御筆 
            晩日催絃管: 저물녘에 음악을 재촉하니
            春風人綺羅: 봄바람이 비단장막에 들어오네.
            杏花如有意: 살구 꽃잎 마치 정이 있는듯 偏落舞衫多: 춤추는 소매에 많이 지네.
              孝宗大王御筆
             
              景宗大王御筆
             
              文宗大王御筆
              宣祖大王御筆
            夭桃一孕花: 온 가지에 곱게 핀 복사꽃이
            變幻三二色: 두세 가지 빛갈로 변환했네.
            植物尙如玆: 식물도 오히려 이와 같아니 人情宜反覆: 인정이 번복함은 마땅하구나.
             
              成宗大王御筆
            遠上寒山石徑斜: 멀리 가을 산을 오르니 돌길이 비껴 있고
            白雲深處有人家: 흰 구름 깊은 곳에 인가가 있구나.
            停車坐愛楓林晩
            : 저녁의 단풍 숲이 아름다우 수래를 멈추니 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잎새는 봄 꽃보다 붉구나.
              世祖大王御筆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유당(流堂) 원글보기
          메모 :

          '心眼齋 > 書藝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국의 서예가와 그 작품들  (0) 2012.07.23
          무송 김병환 논문  (0) 2012.07.03
          禪으로 가는 길  (0) 2012.03.02
          왕희지아들 왕헌지(王獻之)  (0) 2011.07.09
          章草, 今草, 狂草  (0) 2011.07.07

           

           

          2012 3월호 원고 묵향인 / 장석 서명택

           

           

          예술의 혼, 붓으로 말하다

           

          서예는 단순히 글씨의 형태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에 그치지 않는다. 한 자의 글씨를 쓰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버리고 비워내 오롯이 붓 끝에 집중해야 한다. 따라서 서예는 정신문화예술이다. 또한 선인의 글자를 무작정 따라 쓰는 것을 넘어 옛 성인의 정신과 고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글자는 예술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예는 지금까지 동양에서 전수되어지는 예술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장석 서명택 선생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서예는 논리적 사유와 감성적 요소가 결합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토로하는 행위예술이다.

          오늘은 서예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널리 떨치고자 매 순간을 묵묵히 자기와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장석 서명택 선생과 이 시간 함께해본다.

           

          의정부에 있는 선생의 집무실은 정갈하면서도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책상에서는 20여년이 넘는 오랜 시간과 고된 수련의 흔적이 보이나 그 위는 항상 말끔하다. 한쪽에 가지런히 놓은 새하얀 화선지와 잘 정돈 된 벼루, 붓 역시 그러하다. 비어있는 집무실의 모습만 보아도 붓을 잡기에 앞서 주변을 정돈하고 마음을 비워 붓 끝에 온 신경을 모으려는 선생과 그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서예에 대한 마음가짐이 전해지는 듯하다.

           

          본래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예를 통해 그 급함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는 그는 붓을 잡기에 앞서 책상 위를 한 번 더 손질하는데, 그 손끝이 붓을 잡는 것만큼 매우 신중해 보여 정말 급한 성격을 지닌 과거의 모습이 있었을까 잠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영월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학교 대신 서당에서 3년을 수학하였다. 한학에 밝으셨던 안의동 선생님 밑에서 3년간 혹독한 시간을 겪었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한시와 사서삼경을 익혔으며 덕분에 한글보다 한문을 더 빨리 읽고 한시도 직접 지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의정부에 자리를 잡고, 야간학교를 전전하다 마하 선주선 선생님 사사로 서예에 입문하게 된 그는 26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와석서예서당을 운영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이 일에 매진해왔다.

          유년시절 서당에서 수학한 것이 영향을 크게 받아서인지 지금까지 해온 작품 활동을 보면 한문자작시(한시/자음시)를 발표한 경우가 많다. 옛 성인들의 말씀이나 작품의 일부를 필사하기도 하나 서당에서 한시를 접하고 15년 이상을 한시 공부에 매진하다보니 보다 창의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 직접 한문자작시를 짓는 것이었다. 한문과 한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밑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서체에 대한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서를 주로 많이 쓰고 있으나 한문 오체, 한글 오체까지 두루 섭렵하였고 이론 실력까지 겸비한 노력하는 실력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에는 끝이 없다며 늘 정진해야함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니 작가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선생은 이 시대의 서예가들이 지녀야 할 선비정신에 대해 언급했다.

           

           

          옛 선비들은 에 능했지요. 지금의 서예가들 역시 먼저 시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문이나 한시를 하고 난 후 서예를 익히고 그 마지막 단계에 그림을 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옛말에도 전해지듯이 畵 三絶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러한 실력을 갖춘 서예가가 왕유, 추사와 같은 사람이지요. 이러한 실력을 가지고 서예에 매진한 이가 있었기 때문에 서예가 예술로서 자리매김하고 전수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요. 이는 앞으로 서예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경우를 보면 이러한 순서를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한문은 곧 기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시문(한문)이 일천하면서 쓰기에 급급하니 그 병폐가 말로 할 수 없지요.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을 모르고 다른 이가 쓴 것을 읽지 못한다면 문화의 향유와 예술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따라서 저는 서예에 임하기에 앞서 한문을 익히길 강조하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듯 한문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의 말처럼 한문을 익히지 않고 서예의 발전을 논하기란 설계도 없이 완성도 높은 집을 짓겠다고 큰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한국서예교육의 문제점과 한문교육 활성화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이것이 곧 서예의 발전을 이끌어 갈 초석이 될 것이라고 그의 논문에서도 밝히고 있다.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의정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그의 글에서는 한국서예의 문제점으로 서예 이론 교육의 부실, 한문교육의 부재, 서예문화의 왜곡을 꼽았으며 한국 서예 활성화 방안으로 한문교육 활성화와 공모전 문화 재정립을 주장하고 있다.

           

          여러 시대를 거쳐 문화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서예가 그 자리를 잃고 한문교육마저 외면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시대적 변화에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선생님의 자질에 따라 편향된 시각으로 익힐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 도제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현재 전통문화에 대한 소양이나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정보화라는 시대적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서예지도자들에 대한 문제까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공교육에서도 한문교육이 그 실효성을 잃고 외면 받고 있다. 불교/유교 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의 과거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한문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한문의 활성화는 난항을 겪고 있으며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 심해지는 악순환이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모전의 난립, 각종 부정부패 등으로 그 의도에 부합하는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이것이 곧 공모전 발전 저해를 넘어서 서예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정은 무시되고 단순히 베껴 쓰는 기예로 멸시받는 현 상황, 작가 정신이 사라진 작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악조건을 떨쳐내고 서예를 올바른 문화의 일환으로 정립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한문의 활성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이미 한문의 필요성이 다시 인식되고 있으니 이는 좋은 징조이다. 하나의 단적인 예로 현재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청소년 학교 폭력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폭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인성교육, 정서함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방편의 하나로 한문교육과 서예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 실천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명심보감부터 사서삼경 등 한문의 도덕적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익히고 서예를 통해 자신을 안정시켜 스스로 제어할 능력을 길러준다면 학교폭력을 근절시키는데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처럼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교육과정으로 편성되는 것이나 공모전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간의 진통이 예상된다. 또한 실제 서예학원 대다수가 그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폐업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기다리며 수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선생은 서예의 미래가 밝다고 믿는다며 강하게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니 도덕, 문화교육을 위해 한문이 교육과정에 필요하다는 것을 위정자들이 깊이 인식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현재 중국은 문화장려 사업을 펼치면서 서예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고 정부차원 에서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예를 장려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예 시장의 전망도 밝습니다. 서화작품이 종이황금이라고 불릴 만큼 명성이 높아졌고 옛 작가의 작품은 물론 현직 작가의 작품도 고가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이 머지 안아 우리나라로 미쳐 온다면 한국의 서예도 새로운 바람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특히 서예의 역사로 본다면 한국이 결코 동양의 어느 나라보다 뒤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한문쓰기가 습관화 되어 세필이 발달한 중국에 비해 한국은 공모전이 발달해 있어 큰 글씨에 강합니다. 그러니 초서를 제외하고 한문 오체 중 전서, 예서, 해서, 행서부분은 오히려 나은 부분이 있지요.”

           

          한국의 서예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서명택 선생은 지금 어렵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힘들겠지만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문을 두루 섭렵하고 서법 수련과 이론에 더욱 정진하여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고 훗날 서예가 부흥했을 때 서예가들이 제 실력을 갖춰 서예 발전에 앞장서야 함을 당부했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 문자의 역사가 존재하고 문자가 존재하는 한 문자의 예술은 결코 사라질 리 없다고 믿는 그는 이 문자가 예술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선 학문적 심화가 밑바탕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예의 외적인 환경을 보면 여러 가지 긍정적인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더욱 노력하여 이 땅에 서예의 바른 문화를 재정립 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선생은 오늘도 밤늦도록 법첩과 붓을 놓지 못한다.

          또한 서예의 부흥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하나씩 실천하고자 온 힘을 기울인다. 그 중 하나로 주위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문, 한시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켜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서예가를 많이 배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가 가진 한국 서예에 대한 애정과 절실함이 많은 이들에게 닿아 그가 바라는 한국 서예의 부흥기가 하루 빨리 다가오길 기대해본다.

           

          '心眼齋 > 書藝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송 김병환 논문  (0) 2012.07.03
          [스크랩] 조선조 어필  (0) 2012.05.08
          왕희지아들 왕헌지(王獻之)  (0) 2011.07.09
          章草, 今草, 狂草  (0) 2011.07.07
          [스크랩] 역대 서론 정수(歷代 書論 精粹)  (0) 2011.07.06

          왕희지아들 왕헌지(王獻之)

           

          왕헌지(王獻之, 344-386)는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이다.  자는 자경(子敬)이고, 어렸을 때의 자는 관노(官奴)였다.  중서령(中書令)이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왕대령(王大令)이라 불고 왕희지와 함께 ‘이왕(二王)’ 혹은 ‘희헌(羲獻)’이라 불다.

          기록에 의하면 왕헌지 형제 7명중 서예로 이름난 사람은 6명이다.  그러나 제대로 글씨를 썼던 사람은 왕헌지 한 사람 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헌지가 처음 글씨 연습을 할 때 진보가 더뎌한 마음에 왕희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언제쯤이면 연습을 다하여 서예가가 될 수 있나요?”  왕희지 정원 안에 있는 18개의 큰 항아리 물을 가리키며, “네가 매일 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데, 이 18개의 큰 항아리 물을 다 썼을 때 너의 글씨는 연습을 벗어난다.”  왕헌지는 그제야 안심하고 돌아가 각고의 노력을 했다.

          왕희지는 조용한 것을 좋아해 항상 방문을 닫아걸고 글씨를 연습했다.  왕헌지는 부친의 글씨 쓰는 기교를 엿보려고 몰래 누각 마루에 구멍을 뚫어 아버지가 글씨 쓰시는 것을 훔쳐보고 동작을 배웠다.  그는 누각 마루에서 손으로 획을 이리저리 그어 부친이 쓴 글씨를 모두 마음속에 암기한 후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와 연습을 해서 마침내 각종 글자체 모두 잘 쓰게 되었다.  그의 행서는 아버지의 내엽(內擫)의 필법을 고쳐 스스로 외탁법(外拓法)을 창조해서 글자의 넓은 기세를 증가시켰다.  그는 소해(小楷)도 매우 빼어나게 써서 성인의 경지에 들었으니 왕희지보다 못하지 않다.


          왕헌지는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영특했으며 서예 명문가의 훈도와 부친 왕희지의 정성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예를 매우 좋아했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대담한 창신을 했다.  일찍이 진흙을 빗자루에 묻혀 벽에 사방 한 길이나 되는 큰 글자를 썼다.  이로 인해 그는 두각을 나타내며 매우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당나라 장회관 『서단(書斷)』에 그의 해서․행서․초서․비백서를 신품에 나열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려서 부친에게 배웠고 다음에는 장지를 배웠으며 후에 양식을 개변하여

                   별도로 그의 법칙을 창조했다.  진솔한 개인의 마음은 암암리 자연의 법칙에

                   합하고 그의 초일한 뜻을 보면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다.

                   幼學于父, 次習于張, 後改變制度, 別創其法, 率爾私心, 冥合天矩, 觀其逸志,

                   莫之與京.


          장회관은 또 『서의(書議)』에서 왕헌지가 행초서 외에 새로운 서체를 만든 것에 대해 이렇게 평론했다.

            

                      행서도 아니요 초서도 아닌 것이, 흐름은 문득 초서와 같고 열어 펼침은

                      행서와 같으니 초서와 그 중간이다.  옛날 인습에 의지함도 없고 차라리

                      법칙에 구속되어 더욱 빼어나게 하였고 간단하고 쉬움에 힘썼다.  뜻은

                      달리고 정신은 방종하여 초일함이 더욱 유유자적하니 일에 임하여 마땅함을

                      만들고 뜻에 따라 적절히 편해짐이 마치 바람이 불어 비가 흩날리고 윤기

                      나는 색의 꽃이 핀 것 같다.  필법과 체세에서 가장 풍류가 있는 사람이다.

                      非草非行, 流便于草, 開張于行, 草又處其中間. 无藉因循, 寧狗制則, 挺然秀

                      出, 務于簡易. 情馳神縱, 超逸優游, 臨事制宜, 從意適便有若風行雨散, 潤色

                      開花. 筆法體勢之中, 最爲風流者也.


          이를 보면 서예사에왕희지와 더불어 ‘이왕(二王)’․‘희헌(羲獻)’이라 일컬음에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왕헌지의 서예 성취가 그의 부친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송나라 미불은 그의 『서사(書史)』에서 평하왕헌지의 천진하고 초일함을 어찌 부친과 비교할 수 있으랴[子敬天眞超逸, 岂父可比].”라고 했다.  장회관도 왕헌지는 “소해에 매우 능해 가히 미묘함을 다해 성인의 경지의 들어갔으니 근골의 긴밀함은 부친보다 못하지 않다[能極小眞書, 可謂窮微入聖, 筋骨緊密, 不減于父].”라고 했다.  그러면서 칭찬하 “정신 용맹함은 세상을 덮을 만하니 하물며 그 아버지에 대해서도 오히려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  종요와 장지에 비하면 비록 강한 상대이나 여전히 사로잡고 누를 수 있는 기세가 있다[神勇蓋世, 況之于父, 猶拟抗行, 比之鍾張, 雖勍敵, 仍有擒蓋之勢].”라고 했다.  황정견은 왕희지․왕헌지 부자의 초서가 각기 특징이 있어 문장으로 비유한다면 왕희지의 초서 『좌전(左傳)』, 왕헌지의 초서 『장자(莊子)』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왕헌지의 서예가 그의 부친만 못하다고 는데 당 태종 이세민이 가장 대표적이다.


                      왕헌지는 비록 아버지의 풍모가 있으 특별히 새롭고 교묘한 것은 아니다. 

                      그 글자의 필세를 보면 성고 파리하여 마치 엄동의 마른 나무와 같다.  그

                      붓의 자취를 보면 구속되어 마치 엄한 집안의 굶주린 노예 같다.……이 두

                      가지를 겸했으므로 서예의 병폐로다.

                      獻之雖有父風, 殊非新巧, 觀其字勢疏瘦, 如隆冬之枯樹, 覽其筆蹤拘束, 若嚴

                      家之餓隸……斯兼二者, 因翰墨之病歟.


          당 태종은 그의 글씨가 마르고 파리하며 필치는 구속되었다고 했다.  남조 양나라 원앙(袁昻)은 『고금서평(古今書評)』에서 왕헌지의 글씨는 질질 끌어 “특히 견딜 수 없다[殊不可耐].”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논하면 왕헌지가 남긴 진적을 살펴볼 때 이러한 폄하는 적절치 않다.  그 필의는 으로 펼쳤으며 소쇄하고 뜻이 크다.  왕희지의 서예에 비해 더욱 자유롭고 표일한 아름다움이 있으니 그의 성취는 설령 왕희지의 높은 성취에 비교할 수 없지만 또한 감히 그의 아버지와 어깨를 견줄 만하다.  세상에 전하는 진적은 소해 <낙신부십삼행(洛神賦十三行)>를 비롯해서 행초서인 <중추첩(中秋帖)>․<압두환첩(鴨頭丸帖)>․<보모전지(保母 )>․<입구일첩(卄九日帖)>․<지황탕첩(地黃湯帖)>․<사중령첩(辭中令帖)>․<아군첩(鵝群帖)>․<수의첩(授衣帖)>․<사내첩(舍內帖)>․<동산첩(東山帖)> 등이 가장 유명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헌지는 또한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한번은 환온(桓溫)이 그에게 부채에 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는 실수로 부채 위에 붓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즉시 붓이 떨어져 더러워부분을 이용하여 한 마리의 그림을 완성했는데 매우 정묘하여 환온 매우 기뻐했다.

          '心眼齋 > 書藝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조선조 어필  (0) 2012.05.08
          禪으로 가는 길  (0) 2012.03.02
          章草, 今草, 狂草  (0) 2011.07.07
          [스크랩] 역대 서론 정수(歷代 書論 精粹)  (0) 2011.07.06
          [스크랩] 마하(摩河) 선주선(宣柱善)  (0) 2011.07.06

          章草, 今草, 狂草

          今草는 章草에 楷書를 덧붙인 것이며,

          狂草는 今草를 放縱하게 휘 갈려 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章草는 漢나라 末 時期이며, 今草는 東晋 떄이며, 狂草는 唐나라 때이다.

          章草로 有名한 書藝家는 張芝(漢 나라말), 황상(삼국시대 오나라), 삭정(서진시대), 송극(명나라 초) 등이 있으며 금초로 유명한 서예가로는 왕희지(동진시대), 왕헌지(동진시대-왕희지의 7번째아들), 지영(진, 수나라때로 왕희지의 7대후손),

          손과정(당나라) 등이 있다.

          狂草는 張旭(唐나라), 懷素(당나라) 등이 유명하다.

          ★ 초서(草書)

          고대(古代)에서 중세(中世)로 접어들면서 문자(文字)의 활동도는 크게 신장됩니다. 이에 이전의 예서(隸書)가 지닌 혁신성 역시 크게 감소되면서, 보다 실용적으로 신속하게 문자를 쓸 필요가 생겨났고, 이에 부흥해서 크게 유행하게 된 초서(草書)가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현대에도 예술적 가치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초서의 이모저모를 알아봅니다. 넓은 의미로 보면 각 시기마다 각종 형식의 초서가 있었으니, 예를 들면 초전(草篆). 초예(草隸). 고초(藁草). 장초(章草). 금초(今草). 광초(狂草) 등이 그러하다.

          좁은 의미로 보면 필획을 연결하여 간편하고 빠르게 쓰는 글자체이다. 초서의 기원은 대략 진과 한나라 사이라고 본다. 그 특징은 네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하나는 연결이다. 즉 글자의 체세는 일필로 이루어지나 우연히 연결 되지 않은 곳이 있어도 혈맥은 끊이지 않았다. 다음은 변화이니 글자마다 변화하고 필획마다 변화를 추구한다. 그 다음은 빠른 것이니 붓털을 달림에 붓 움직임이 마치 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간단함이니 번잡하고 중복 된것을 버림에 혹 필획을 감소하고, 혹 결구를 간단히하고, 혹 일종의 부호로 부수나 편방 혹은 글자의 어떤 부분을 대체하기도 한다.초서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장초로 대표적 서예가로는 최원과 두도가 있다. 다음은 금초로 대표적 서예가로는 장지와 이왕이 있다. 마지막으로 광초의 대표적 서예가로는 장욱과 회소가 있다.이 세 종류는 순서대로 변화했고 또한 초서의 발전의 세 단계를 구성한다. 서예의 이중성 특성으로 말하면 초서는 식별이 쉽지 않고 배우기도 쉽지 않아 정통하기가 어려우므로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따라 할 수 없으므로 법칙은 매우 엄하고 간편하고 쉽게 쓰도록 하면서도 여러 서체를 함유하고 있으며 뜻을 방종하기에 적합하면서 묘하게 자연에 합하기 때문에 예술화 하기에 가장 가깝다. 초서는 문자를 서사하는데에 매우 제한적이면서 또한 서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草書의 정의

            초서는 아주 거칠고 단정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초솔(草率)하다"는 의미에서 극도로 흘려서 쓴 서체라는 의미로 초서(草書)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의 단점인 서체(書體)의 복잡함과 난해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극도로 흘려서 빠르고 간단하게 쓴 서체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규격을 갖춘 서체인 예서(隸書)로부터 해서(楷書)로 발전했지만, 글자를 쓸 때 너무 복잡하고 많은 정성이 들어가 쓰는 시간도 꾀 필요한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간략하게 흘려 쓰는 초서(草書)가 생겨난 것입니다..현재 초서는 문자로서의 실용성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까지 발전하여 그 멋을 자랑하고 있지만,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간략화시켜 흘려 쓰게 된 결과 해독(解讀)의 어려움을 가져와 실용성을 상실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草書의 특징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의 규격성과 복잡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자의 윤곽이나 일부분만으로 표현하면서 전체적으로 획을 연결해서 신속하게 쓸 수 있게 발전합니다. 발생시기도 "한조(漢朝)가 흥하자 초서(草書)가 나왔다"는 《설문해자(說文解字)》서문(序文)을 보듯이 예서(隸書)가 한창 번성하던 한(漢)나라시대에 함께 등장했는데, 한나라 초기의 장초(章草)에서 동진(東晋)시대의 금초(今草)와 당(唐)나라 때의광초(狂草)까지 다양하게 발전을 하지만 실용성은 떨어지게 됩니다. ▣ 장초(章草)

          초기의 초서체로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예서체(隸書體)를 간략하게 흘려 쓰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는데, 장제(章帝)가 즐겨 써서 장초(章草)라고 합니다..초서의 일종으로 "예초"."급취"라고도 하며 진.한시대에 시작 했고 초서로 쓴 예서로 부터 변천하여 이루어졌다. 특징은 방필과  원필이 있고 사전을 겸하며 파책이 뚜렷하면서 예서의 필의를 띠고 있다. 점에 중점을 두면서 필치는 끊어져도 필의는 연결 되었다. 글자마다 분리되어 모든 글자가 같고 글자마다 독립되어 서로 연속하지 않았다. 결체는 간결하고 질박하며 글자의 간격은 고리고 필획은 평정하며 필법은 고아하다. 장초라고 한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첫째, 한 원제 때 사유가 "급취장"을 지었는데 이와 같이 서체로 썼다.       "章草者, 漢黃門令史遊所作也................"둘째, 한 장제가 두도의 초서를 좋아했다. 장제는 두도의 초서로 글을 오리 라고 하였기 때문에 장주에 쓰인 서체를 장초라 했다.셋째, 장초는 예서를 감소한 것이기 때문에 글자의 대강은 존재하고 결구는 밝게 빛나게 했다.근대 학자들은 대부분 "장해(章楷)"."장정서(章程書)"의 "章"과 같은 의미라 하였다.▣ 금초(今草)

          후한(後漢)에서 동진(東晋)시대에 장초(章草)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서체의 틀을완성해 현재까지 일반적인 초서(草書)의 틀을 의미하게 됩니다..동한시대 張芝가 集大成한 草書의 일종으로 章草가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특징은 해서 필법으로 사전(使轉)을 하고 장초의 횡세를 종세로 바꾸었으며 파세와 도법을 모두 생략했다. 형태의 연결을 중시하고 점을 획으로 만들었으며 필세는 흐르듯 했으며 위아래 글자는 호응을 이루며 사이는 갈고리로 연결한다. 부호의 사용은 많고 가로와 세로는 완곡하며 실마리에서 기울어짐이 보이면서 성글고 조밀함을 서로 섞으며 체세가 유창하다.

          이는 한나라 말에서 시작됐다. 이후 진나라 왕희지와 왕헌지가 크게 발전 시켜 완전함을 이루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왕"의 초서는 장초가 금초로 향하는 ..과도기적 서체라고도 한다. 초서는 진.한 이후 부터 증가하여 그 법이 날로 발전했다. 그러나 소초. 대초. 광초는 행필의 결체가 대게 느리고 ..분방하다는 다른 점을 제외하고 기타 용필은 장초와 금초처럼 구별이 크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금초라는 큰 유형에 속한다.▣ 광초(狂草)

          마치 미친 듯이 거의 끊어짐 없이 글자들까지 이어서 쓰는 형식의 광초(狂草)는 당(唐)나라 때 벌써 예술적 경지로 발전합니다..이를 또한 "대초"라고도 하며 초서에서 가장 방종한 서체로 금초에서 변화하여 이루어졌다. 특징은 종횡으로 달라고 자유롭게 휘호를 하며 문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갈수록 격해진다.그 필세는 빠르고 휘둘러 돌림이 자유분방하며 체는 간단하고 생략적이며 기이한 변화가 많다.위아래 글자가 연결하고 기운이 하나로 관통함을 강구하면서 기이함과 많은 변화를 준다. 이는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의 예술적 개성에 나타난다. 작품으로는 장욱의 <고시사첩>과 회소의<자서첩>이 가장 유명하다. 광초에서 "광"은 일종의 서사상태이고 이러한 서사상태가 글씨에 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이를 장초. 금초와 같은 초서와 나란히 볼 수 없다. ..

          * 大草..

          이는 "소초"와 상대적인 말이다. 이는 금초에서 형체가 비교적 크고 필획은 소초에 비해 간단하고 생략적이면서 체세는 더욱 방종하다. 대초는 순전히 초서의 필법을 쓰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어렵다. 당나라의 장욱과 회소의 광초는 가장 방종한데 혹 이를 혼용하여 대초라고도 한다. ..를 창시한 사람은 장지라고 한다.* 小草.

          이는 "대초"와는 상대적인 말이다. 이는 금초에서 형체가 비교적 작고필획을 비록 생략 하였으나 식별하기는 편하다. 글씨 크기의 지름이 작은 소초의 의미는 해서에서 소해(小楷)의 의미와 같다.●草書의 가치 몇십 번의 필획으로 사각형 네모꼴의 규격에 맞춰 정성을 들여야 하는 기존의 예서체(隸書體)나 해서체(楷書體)의 어려움을 극복한 초서(草書)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필기 형태로 인해 다양하게 발전합니다. 그러나 그 취지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지나치게 간략화 해 현대까지 예술적 대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지만, 실용적 가치를 다소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일반인들의 속성(速成) 필기체의 주축을 행서체(行書體)로 옮겨가게 합니다

          ●17첩(十七帖)  왕희지의 척독(尺牘) 29통 정도를 편집해서 한권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을 [17첩]으로 이름 붙인 것은 최초에 척독이 "17일"운운 하는 문구로 시작되는 데에기인되는 것이다.  원래부터 그 진적(眞蹟)은 이미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는 것인데, 당대 초에 관립의 학문소인 홍문관에서 학생들이 書를 배우는 교본으로 썼던 탁본이 남아 있어 진적을 상상할 수 있다. 표일(飄逸)한 가운데 장초의 신리(神理)가 보이는 생동감이 있어 역대로 초서의 범본이 되었다.

          歷代書論精粹(一)請點擊標題瀏覽相關內容 按 ▲Top傳回頭部
          01.前言 02.蔡希綜《法書論》 03.蔡邕《筆論》《九勢》
          04.陳槱《負暄野錄》 05.陳繹曾《翰林要訣》 06.成公綏《隸書體》
          07.崔瑗《草書勢》 08.董其昌《畫禪室隨筆》 09.豐坊《書訣》
          10.馮班《鈍吟書要》[節錄] 11.傅山 12.韓方明《授筆要說》
          13.韓愈《送高閒上人序》 14.何紹基 15.黃庭堅《論書》
          16.姜夔《續書譜》 17.江式《論書表》 18.康有為《廣藝舟雙楫》
          19.李華《二字訣》 20.李嗣真《書後品》 21.李煜《書述》
          22.林蘊《撥鐙序》 23.劉熙載《藝概》[節錄] 24.盧攜《臨池訣》
          25.米芾《海岳名言》《寶章待訪錄》 26.歐陽修《六一論書.試筆》 27.錢泳《書學》
          28.包世臣《藝舟雙楫》[節錄] 29.阮元《南北書派論》[節錄] 30.盛熙明 《法書考》
          31.釋亞棲 《論書》 32.釋智果《心成頌》 33.宋曹 《書法約言》
          34.蘇軾《論書》 35.孫過庭《書譜》 36.索靖《草書狀》
          37.陶弘景《與樑武帝論書啟》 38.王鐸 39.王僧虔《論書》《筆意贊》
          40.王愔《古今文字志目》 41.韋續《五十六種書》並序 42.衛恆《四體書勢》
          43.衛鑠《筆陣圖》 44.吾丘衍《學古編》 45.項穆《書法雅言》

          01:前言 ▲Top

          在中國古代文藝理論中,古代的書法理論是極其重要的組成部分,它也是我國藝術理論中的最寶貴的遺產。不認真研究我國古代的書法理論而希圖在書法上有所作為,這是難以想象的。只是古代書家去今久遠,他們的實踐和思維方式以及記錄這些方式的文字,都與今天大相區別,而且從數量上說,先秦以降,書論著作可謂汗牛充棟,一般的書法愛好者實在難以領略。為了給這些書界朋友提供必要的方便,我們擷取了在中國古代書論史上有重大影響的書論,並作簡要的評說。我們希望我們的工作能對今天的書法的創新和發展有所裨益。

          中國書論源遠流長,有特色有創見有影響的論述很難一一搜求。又因為對書法藝術的欣賞評論,除了有其“客觀性”,還有很大程度的“主觀性",因“見仁見智”而流派紛呈,因此直到今天,還很難有一個人人都滿意的關於“書法"的定義,這也就給文章的選錄帶來了困難。但作為一門發展了兩千多年的獨立的藝術,對其藝術特征和創作規律,畢竟有了不少共識。根據這些共識,參照現代藝術理論的一般體系,我們從書法藝術的本質論、創作論、作品論、發展論、欣賞與批評論五個方面,對古代書論作了梳理和選擇。

          相對而言,古代書法理論的出現比書法藝術的形成要晚一些。據目前所能見到的資料,古代書論著作最早出現於漢代。西漢大學者、文學家揚雄在他的《法言·問神》中,提出了一個著名的論斷:“書,心畫也。”這裏的“書”雖不是專指書法,但它最早論述了有關中國書法理論的根本命題——書法同書法家思想感情之間的關系和書法藝術表情達性的特質等問題,對後世的書法創作和書法理論產生了深遠影響,成為中國書論史的源頭。

          漢代是我國古代書法理論的初創期。隨著書法藝術的成熟和興盛,專門研究書法的理論 著作便應運而生。最早論述書法的一篇文章是東漢書法家崔瑗的《草書勢》。崔氏在文中認 為,草書的出現正是由繁到簡的社會需要的反映,並描述、贊揚了書法的形態美和動態美。 對書法的藝術審美功能和價值作了充分肯定。繼此之後又出現了幾篇重要的書論著作,如趙壹的《非草書》、蔡邕的《篆勢》、《筆賦》、《筆論》、《九勢》等。尤其是大書家蔡 邕的《筆論》和《九勢》,在中國書論史上佔有重要地位。

          魏晉南北朝是我國古代書法理論的成熟期。這一時期,書法藝術非常興盛,出現了一大批書法名家。書法藝術的發展也帶動了書法理論的研究。西晉時,出現了一批以自然界中千 姿百態的物象、動態來描繪、比喻各種書體形態美的理論著作,如成公綏的《隸書體》、衛恆的《四體書勢》、索靖的《草書狀》、劉劭的《飛白勢》、楊泉的《草書賦》等,表現出一種“尚象”的審美趨向。東晉時,書家已不滿足於對書法外在形態的描述,而開始探求用 筆、結體和章法技巧的規律,並注意研究人的主觀意志與書法的關系。如世傳衛夫人的《筆陣圖》、王羲之的《題衛夫人筆陣圖後》、《書論》、《筆勢論》、《用筆賦》、《記白雲先生書訣》等,都是這方面的重要書論。至南北朝時,受時風的影響,開始重視對各個 書家的評論。這方面有影響的著作有羊欣的《採古來能書人名》、虞和的《論書表》、庾肩吾的《書品》等。尤其是王僧虜的《書賦》、《論書》、《筆意贊》等書論,著意探求書法創作的程序和特征,對後世書法藝術的發展影響深遠。

          隋唐是我國古代書法理論的興盛期。隋代雖立朝時間很短,但其書法上承南北朝碑刻,下啟唐楷諸家,為唐代楷書法式的建立奠定了基礎。其書論也重在探討楷書的筆法與結體,智永的《永字八法》和智果的《心成頌》是這方面的代表。隨著唐代書法藝術的達到鼎盛, 書法大家、名家輩出,流派紛呈,書法理論也興盛起來,大批成系統、有分量的書論著述陸 續問世,對細部技法的探討和對書法創作規律的剖析逐漸代替了對書法藝術總體印象的闡述 ,涉及了書法藝術的各方面,體現了唐代“尚法”的風氣。歐陽詢的《三十六法》、孫過庭 的《書譜》、張懷瓘的《書議》、《書信》、《書斷》、《文字論》、《六體書論》, 《論用筆十法》,竇臮、竇蒙的《述書賦》,徐浩的《論書》、顏真卿的《述張長史筆法十二意 》、張彥遠編的《法書要錄》等都是這一時期書論的代表作。尤其是歐陽詢的《三十六法》 、孫過庭的《書譜》、顏真卿的《述張長史筆法十二意》,在中國書法理論史上佔有重要地位。

          宋代是古代書法理論的變革期。由於各種原因,宋代的書法無法與唐代相比肩,卻能另闢蹊徑,一時帖學盛行。而且在書法理論上也有所革新和發展。宋人論書主張書法創作不應受法度的束縛,不必斤斤計較於點畫、布置等具體方法,而應重視作品中的風神意韻及書家的內在精神與氣質,自由地抒發其胸臆,力求創新。它是宋代“尚意”書風的反映。朱長文的《續書斷》、蘇軾的《論書》、《東坡題跋》、黃庭堅的《論書》、米芾的《書史》、《 海岳名言》、姜夔的《續書譜》等,都是這一時期書論的代表著作。《續書譜》尤為系統精到,為曆代書家所推祟,影響巨大。

          元明兩代的書法藝術帖學仍然盛行,尚未走出書法創作的低谷。在書論方面,由承繼晉唐之法,對宋人“尚意”書風進行否定,進而重視書法藝術的形態美,標舉魏晉風格。元代書論主要是講究法度,代表論著有鄭杓撰、劉有定注的《衍極》和陳繹曾的《翰林要訣》。明代書論則強調崇尚古雅,倡導骨力與研美兼善。陶宗儀的《書史會要》 、豐坊的《書訣》、項穆的《書法雅言》等則是其代表論著。

          清代是古代書法理論繼往開來的一個時期。從清中期開始便逐漸形成了帖學與碑學明顯分流的格局,而且帖學逐漸由盛轉衰,碑學則日漸興盛。故書法理論前期重視對筆墨技巧的 闡發,代表著作有笪重光的《書筏》和朱履貞的《書學捷要》。後期則主要是對碑學理論的 探討,阮元的《南北書派論》、《北碑南帖論》、包世臣的《藝舟雙楫》和康有為的《廣藝舟雙楫》是這方面的代表著作,並形成了一股抑帖尊碑、重北輕南的風氣。劉熙載的《藝概·書概》對南北書風的特色分別作了概括,強調他們各有所長,則顯得比較公允、客觀。不僅如此,《書概》還對中國古代書法藝術的曆史、書體演變的曆史和書法藝術的技巧 、風格等問題進行了全面、系統而精要的理論總結。這些論著在中國古代書論史上佔有重要 地位。它們對清代碑學的理論和實踐進行了全面、系統的總結,促進了清代書法藝術的發展和繁榮。並對近現代書法的發展,產生了深遠的影響。 中國古代書法理論發展的大致輪廓如前所述,我們從中不難發現以下幾個突出特點:

          首先,重視對審美風尚的總結與引導。一般說來,一個社會必然有一個社會的風尚,這種社會風尚也必然要影響社會文化的各個方面;而社會文化各方面對這一風尚的歡迎或抵制 ,又必然會直接影響到這一社會風尚的興盛與消亡。同樣,各個時代對書法藝術的審美風尚 也不一樣。如何引導這種審美風尚,使之成為這一時代審美的主導風尚,就成為各個時代書 論家們所關注和探討的問題。如漢魏時書論中的“尚象”、晉時書論中的“尚韻”、唐時書 論中的“尚法”、宋時書論中的“尚意”等等,無一不是對各個時代書法藝術實踐中審美風尚的總結,而通過總結反過來又指導書法創作的實踐,促進書法藝術的發展與繁榮。

          其次,對書法藝術的研究全面而系統。只要我們粗略翻閱一下中國古代書法理論著作,你就會看到:我國古代對書法藝術的研究和總結是全方位的,涉及到書法藝術的各個方面,而且自成體系。如果將它與中國古代畫論相比較,就更能顯示出這一特點。比如對書法發展 史的研究,自從南朝宋羊欣的《採古來能書人名》開其端,以後各個朝代幾乎都有這樣的一批著作。它們論列了從上古至清末書法發展的曆史,儲存了中國書法發展曆史的完整面貌。 又如對書體演變曆史的研究,論及了大篆、小篆、八分、楷書、行書、章草、今草等書體的 產生、發展、變化以及概念、特點等各個方面,系統而全面。再如對書法技法的研究也是極 為深人、全面,大凡用筆、用鋒、執筆、結宇、用墨、布白等等,皆有詳細而精到的研究。

          再次,重視書品與人品的關系。早在西漢時揚雄就提出了“書為心畫”的著名觀點,認為書法藝術作品是書家思想意識、德行、品藻的直接反映。這一觀點對後世產生了深遠影響 。北宋書論家朱長文在其《續書斷》中就認為,一個人書法藝術的高下與他的品格修養有很 大關系,並舉例說:“魯公可謂忠烈之臣也,……其發於筆翰,則剛毅雄特,體嚴法備,如忠臣義士,正色立朝,臨大節而不可奪也。揚子雲以書為心畫,於魯公信矣。”這實際上就是說顏氏端莊雄健的風格來自於他的高風亮節。近代書論大家劉熙載在《藝概·書概》中更明確地說:“書,如也。如其學,如其才,如其志,總之曰:如其人而已。”他認為通過書法不僅可以看出書家的“學”、“才”、“志”,而且可以想見書家其人。人品好書品必定好。

          另外,善於借助生動形象的比喻來表達評賞者的感受,以充分顯示欣賞程序中多種心理 活動交織的情狀。早在東漢蔡邕的《筆論》中,就運用豐富、美好的比喻,來強調書法創作 的體勢應融人大自然各種生動的形態。自此,曆代書論家留繼承了這一傳統。如孫過庭《書譜》中寫道:“觀夫懸針垂露之異,奔雷墜石之奇,鴻飛獸駭之資,鸞舞蛇驚之態,絕岸頹峰之勢,臨危據槁之形。或重若崩雲,或輕如蟬翼;導之則泉注,頓之則山安;纖纖乎似初月之出天崖,落落乎猶眾星之列河漢……。”在這裏,作者就運用了一系列生動形象的比喻 ——實際上是博喻,來比擬鐘繇、張芝和二王書法的神妙景象,從而使人獲得一種感性的認識,便於領會。此類例子真是舉不勝舉。

          總之,中國古代書法理論是一筆寶貴的文化遺產,值得我們認真總結和繼承。


          02:蔡希綜《法書論》 ▲Top

            餘家曆世皆傳儒素,尤尚書法。十九代祖東漢左中郎邕有篆、籀、八體之妙,六世祖陳侍中景曆,五世伯祖隋蜀王府記室君知,鹹能楷隸,俱為時 所重;從叔父右衛率府兵曹參軍有鄰,繼於八體之跡;第四兄緱氏主簿希 逸,第七兄洛陽尉希寂,並深工草隸,頗為當代所稱也。

            周宣王史籀作大篆,秦始皇程邈改為隸書,東漢上谷王次仲以隸書改為楷法,仲又以楷法變為八分,其後 繼跡者,伯喈得之極,元常或其亞。草聖始自楚屈原, 章草興於漢章帝,楷法則曹喜、師宜官、樑鵠、皇象、羅景、趙嗣、邯鄲淳、胡昭、杜度;窮草法則崔瑗、 崔寔、張芝、張昶、索靖、衛瓘、衛恆、羲、獻。宋齊 之間王僧虔、羊欣、李鎮東、蕭子雲、蕭思話、陶隱居、 永禪師;唐初房喬、杜如晦、楊師道、裴行儉、高士廉、 歐陽詢、虞世南、陸柬之、褚遂良、薛稷,其次有琅琊 王紹宗、潁川鐘紹京、範陽張庭珪,亦深有意焉。父子 兄弟相繼其能者,東漢崔瑗及寔、弘農張芝與弟昶、河 東衛瓘及子恆、潁川鐘繇及子會、琅琊王羲之及子獻之、 西河宋令文及子之愻、東海徐嶠之及子浩、蘭陵蕭誠及 弟諒,如是數公等,並遭盛明之世,得從容於筆硯。始其學也,則師資一同,及爾成功,乃菁華各擅,亦猶綠 葉紅花、長松翠柏,雖沾雨露孕育於陰陽,而盤錯森梢,豐茸豔逸,各入門自媚,詎聞相下,鹹自我而作古,或 因奇而立度。若盛傳千代以為貽家之寶,則八體之極是 歸乎鐘、蔡,草隸之雄是歸乎張、王,此四賢者,自數 百載來未之逮也。

            右軍《筆陣圖》雲:“夫三端之妙,莫先用筆。” 昔李斯見周穆王書,七日興嘆,曬其無骨;蔡書入鴻都 觀碣,十旬不返,嗟其出群。近代以來多不師古,而緣 情棄道,才記姓名。夫書匪獨不調端周正,先藉其筆力,始其作也,須急回疾下,鷹視鵬遊,信之自然'猶鱗之 得水,羽之乘風,高下恣情,流轉無礙。蔡中郎雲:“欲書先適意任情,然後書之。若迫於事,雖中山之毫 不能佳也。”次須正坐靜慮,隨意所擬,言不出口,氣 不再息,則無不善矣。凡欲結構字體,未可虛發,皆須 象其一物,若鳥之形,若蟲食禾,若山若樹,若雲若霧, 縱橫有托,運用合度,可謂之書。

            昔鍾繇與胡昭俱能為行狎書。繇初師劉德升,後傳蔡邕筆法,由是學之致妙。繇臨終,於囊中出授子會曰:“吾精思三十馀年,行坐未嘗忘此。常讀佗書,未能終盡,惟學其字,每見萬類悉書象。若之止息一處,則畫其地,周廣數步;若在寢息,則畫其被,皆為之穿。”用其功如此。

             右軍雲:“夫書之為意,取數非一。”故紙者,陣也;筆者,刀槊也;墨者,鑿甲也;水硯者,城池也;本領者,將帥也;心意者,副將也;結構者,謀略也;筆之次,吉凶之兆也;出入者,號令也;屈折者,殺僇也。若欲書,先乾研墨,凝神靜慮,預想字形大小偃仰,平直振動,令筋脈相連,意在筆前,然後作字。若平直相似,狀如算子,便不是書,但得其點畫耳。昔宋翼常作此書。翼繇外甥也,叱之。翼遂三年不敢見繇,潛心改跡,每畫一波,常三過折,每作一點,常隱鋒為之,由此而成。晉太康年,有人於許下破宋公墓,遂獲此法。審此而行,用筆之理明矣。

             右軍雲:“若作點,必須懸手而為之,若作波抑而復曳。忽一點失所,若美女之眇一目,一畫失所,如肚士之折一肱。”可謂難矣。每遼皆須骨氣雄中,爽爽然有飛動之態,屈折之狀,如鋼鐵為鉤,牽掣之蹤,若勁針直下,主客勝負,皆須姑息,先作者主也,後為者客也,既構筋力,然後裝束,必須舉措合則,起發相承,輕濃似雲霧往來,舒卷如林花間吐。每書一紙,或有重字,亦須字字意故殊。何延之雲:“右軍書《蘭亭》,每字皆措別體。”蓋其理也,時議多之。

             右軍每嘆曰:“夫書者,玄妙之伎,自非達人君子,不可與談斯道。”右軍之跡,流行於代眾矣,就中《蘭亭序》《黃庭經》《太師箴》《樂毅論》《大雅吟》《東方先生畫替文》,鹹偶得其精妙。故陶隱居雲:“右軍此數帖,皆筆力鮮媚,紙墨精新,不可復得。”右軍亦自訝焉,或佗日更書,無復似者。乃嘆而言曰:“此神助耳,何吾力能致。”又雲:“吾少學衛夫人書,將謂大能。及過江遊諸名山,見李斯、曹喜書;之許,見鍾繇、樑鵠書;又之洛,見蔡邕石經;又於從兄洽處,見張昶《華岳碑》,始知學衛夫人書,徒費年月。於是遂改本師,新於眾碑焉。”是知學成非一師之能致,非好奇博藝之士,不能存之。予頃嘗為《一體書賦》,亦略陳梗概,今復論之,用臻其理。

             夫始下筆,須藏鋒轉腕,前緩後急,字體形勢,壯如蟲蛇相鉤連,意莫令斷,乃須簡略為尚,不貴繁冗。至如稜側起伏,隨勢所立,大抵之意,圓規最妙,其有誤發,不可再摩,恐失其筆勢。若字有點處,須空中遙擲,下其勢猶高峰墜石。又下筆意如放箭,箭不欲遲,遲則中物不入。然則思於草跡,亦須時時象其篆勢。八分、章草、古隸等體,要相合雜,發人意思,若直取俗事,則不能先發於箋毫。張伯英偏工於章草,代莫過之。每與人書,下筆必為楷,則雲:“匆匆不暇草書。”何者?若不以靜思閒雅發於中慮,則失其妙用也。以此言之,草法尤難。仲將每見伯英書,稱為草聖。衛、索靖俱效於張,亦各得其妙。議者以為衛得伯英之筋,索得伯英之肉。漢魏以來,章法彌盛。晉世右軍,特出不群,穎悟斯道,乃除繁就省,創立制度,謂之新草。今傳《十七帖》是也。子敬以來,學者雖各擅其美,故亦抑之遠矣。

             邇來率府長史張旭,卓然孤立,聲被寰中,意象之奇,不有不全其古制,就王之內,彌更減省。或有百字、五十字,字所未形,雄逸氣象,是為天縱。又乘興之後,方肆其筆,或施於壁,或紮於屏,則群象自形,有若飛動。議者以為張公亦小王之再出也。旭常雲:“或問書之妙,何得齊古人?曰妙在執筆令其圓暢,勿使拘攣;其次識法須口傳手授,勿使無度,所謂筆法也;其次在布置不慢不越,巧使合宜;其次變通適懷,縱合規矩;其次紙筆精佳。五者備矣,然後能齊古人。僕嘗聞褚河南用筆如印印泥,思所以,久不悟。後因閱江島間,平沙細地,令人欲書,復偶一利鋒,便取書之,勁明麗,天然媚好,方悟前志。此藎草正用筆,悉欲令筆鋒透過紙背,用筆如畫沙印泥,則成功極致自然,其跡可得齊於古人。”

             又崔長史雲:“其為書也,推意結字,以斷天下之疑;垂明示象,以紀天下之德。山川草木,反覆於寸紙之間;日月星辰,回環於尺牘之上。”漢光武以中興之主,急在安人,乃至去上林池禦之官,廢騁望弋獵之事,其以手賜萬國者,皆一紮十行,細書成文也。靈帝時,中郎伯喈碩學多聞,經籍去聖人久,俗求正宗六經。靈帝許之,遂令伯喈丹書於碑,使工鐫刻,立於太學門外。于時晚儒後學,鹹取正焉,觀視摹寫,車乘填溢。豈惟一台推妙,十部稱賢而已哉!古之君子,夙夜強學,不寶尺璧而重寸陰,或緝柳編蒲,或聚螢映雪,寢食靡暇,冀其業廣,匪直祿取一朝,故亦譽流千祀,勉旃為之。

          [評點]蔡希綜,唐代天寶年間書法家。曲阿(今江蘇丹陽)人。希逸、希寂之 弟。希綜工翰墨。兄弟三人皆為時所重,唐《治浦橋記》即天寶十二載蔡希 綜撰並行書。
            《法書論》一卷,唐蔡希綜撰(《宋史·藝文志》作‘悰',又作‘宗'、‘琮')。自述家世及諸家授受淵源,雜採諸家論旨,而歸本於用筆。文見於《書苑菁華》十二,與《全唐文》三百六十五所收不同。


          03:蔡邕《筆論》《九勢》 ▲Top

          筆 論
            
            書者,散也。欲書先散懷抱,任情恣性,然後書之;若迫於事,雖中山兔豪不能佳也。夫書,先默坐靜思,隨意所適,言不出口,氣不盈息,沉密神採,如對至尊,則無不善矣。為書之體,須人其形,若坐若行,若飛若動,若往若來,若臥若起,若愁若喜, 若蟲食木葉,若利劍長戈,若強弓硬矢,若水火,若雲霧,若日月,縱橫有可象者,方得謂之書矣。
          [評點書家精神的好壞,對其書法創作的效果關系極大。迫於事勢。情緒不好,就是有最好的毛筆,字也不會寫的好,只有胸懷瀟散隨意,精神集中,如果工具也好,寫出的字就會佳妙。

          九 勢

            夫書肇於自然,自然既立,陰陽生焉;陰陽既生,形勢出矣。藏頭護尾,力在字中,下筆用力,肌膚之麗。故曰:勢來不可止,勢去不可遏,惟筆軟則奇怪生焉。
            凡落筆結宇,上皆覆下,下以承上,使其形勢遞相映帶,無使勢背。
             轉筆,宜左右回顧,無使節目孤露。
             藏鋒,點畫出入之跡,欲左先右,至回左亦爾。
             藏頭,圓筆屬紙,令筆心常在點畫中行。
             護尾,畫點勢盡,力收之。
             疾勢,出於啄磔之中,又在豎筆緊趯之內。
             掠筆,在於趲鋒峻趯用之。
             澀勢,在於緊駃戰行之法。
             橫鱗,豎勒之規。
             此名九勢,得之雖無師授,亦能妙合古人,須翰墨功多,即造妙境耳。
          [評點]筆勢與筆法是有區別的。筆勢指的是一種單行規則,指不同點劃須用不同的方法;筆法則是必須共同遵守的基本方法,任何一種點劃都不能違背它。所謂“九勢”,就是關於筆勢的九種方法、法則。只要學書者掌握了正確的方法,又能勤學苦練,即使沒有名師的指導,也是可以達到書法的“妙境”的。


          04:陳槱《負暄野錄》 ▲Top

           總論古今石刻

            古者金銅等器物,其款識文字皆以坯冶之後鐫刻,非若今人就範模中 徑鑄成者。餘於武陵郡開元寺鐵塔上見鐫刻經咒之屬,皆是冶鑄後為之。至於石刻,率多用粗頑石。又字畫入石處甚深,至於及寸。其鐫鑿直下,往往至底乃反大於面,所謂如蠹蟲鑽鏤之形,非若後世刻削 豐上銳下,似茶藥碾槽狀。故古碑之乏也,其畫愈肥;近世之碑之乏也,其畫愈細。愈肥而難漫,愈細而易滅。餘在漢上及襄峴間親見魏、晉碑刻如此。兼石既粗頑,自然難壞,後世石雖精好,然卻易剝缺。 以是知古人作事不苟,皆非今人所能及也。

            前漢無碑

            《集古目錄》並《金石錄》所載,自秦碑之後,凡稱漢碑者,悉是後漢。其前漢二百年中,並無名碑,但有金石刻銘識數處耳。歐陽 公《集古目錄》不載其說,第於答劉原父書嘗及之。趙明誠雲:“西 漢文字世不多有,不知何為希罕如此,略不可曉。”然《金石錄》卻 載有陽朔磚數字,故雲希罕,言不多,非無也。餘嘗聞之尤樑溪先生 袤雲:“西漢碑,自昔好古者固嘗旁採博訪,片簡只字,搜括無遺, 竟不之見。如陽朔磚,要亦非真。非一代不立碑刻,聞是新莽惡稱漢 德,凡所在有石刻,皆令僕而磨之,仍嚴其禁'不容略留。至於秦碑, 乃更加營護,遂得不毀,故至今尚有存者。”樑溪此言,蓋有所援據, 惜不曾再叩之。餘因記範石湖題虜中項王廟詩雲:“人間隨事有知音。” 新取秦,其事亦爾,可發識者一笑。近世洪景伯丞相著《隸釋》,卻有前漢哀帝元壽中郫縣一碑,或謂乃後人偽為者。(按《石湖集》有七 十二塚詩雲:“一棺何用塚如林,誰夏如公負比心。為說群胡為封土,世間隨事有知音。”注雲“在講武城外,森然彌望,北人比常增封 之”雲雲。此以為項王廟詩,恐是誤記。)

            古碑毀壞

            趙德甫謂所著《金石錄》壽於二千卷所載之碑,由今觀之,信然。石刻固易朽之物,其如隨時廢興,摧毀非一。前輩所載,元祐中,丞相韓玉汝帥長安,修石橋,督責甚峻,村民急以應期,悉皆磨石刻以代之,前人之碑盡矣。餘又聞蕭千岩雲:“蔡拱之訪求石碑,或蹊田 害稼,村民深以為苦,悉鑱鑿其文字,或為柱礎帛碪,略不容存留。” 又自亂離而來,所在城堡攻戰之處,軍兵率取碑鑿為砲石,摧毀無餘。凡此皆是時所遭,其僕壞之門,殆非一端,蓋亦碑刻之一厄會也。

            篆法總論

            小篆,自李斯之後,惟陽冰獨擅其妙,常見真跡,其字畫起止處,皆微露鋒鍔。映日觀之,中心一縷之墨倍濃,蓋其用筆有力,且直下不攲,故鋒常在畫中。此蓋其造妙處。江南 除鉉書亦悉爾,其源自彼而得其精微者。餘聞之善書者雲:“古人作篆,率用尖筆,變通自我,此是□(缺一字)法。”近世鶴山魏端明先生亦用尖筆,不愧昔人。常見今世鬻字者率皆束縛筆端,限其大小,殊不知篆法雖貴字畫齊均,然束筆豈復更有神氣!山谷雲:“摹篆當隨其□<左“口”右“咼”> 斜、肥瘦與槎牙處皆鐫乃妙,若取令平正,肥瘦相似,俾令一概,則蚯蚓筆法也。”山谷此語,直自深識篆法妙處,至於槎牙、肥瘦,惟用尖筆,故不能使之必均。但世俗若見此事,必大 曬嫌,故善書者往往不得已而徇之耳。

            章友直書

            建安章伯益友直以小篆著名,尤工作金釵體,初來京師,人有欲從之學書者,章曰:“所謂篆法,不可驟為,須平居時先能約束用筆輕重,及熟於畫方運圜,始可下筆。”人猶未甚 解,章乃對之作方、圜二圖,方為棋盤,圜為射帖,皆一筆所成,其筆畫粗細、位置疏密,分毫不差。且語之曰:“子姑歸習之,能進乎此,則篆有馀用,不必見吾可也。”其人方大駭愕,不敢復請問。蓋其筆法精熟,心手相忘,方圜不期,自中規矩。友直尤工作古文,餘嘗見其為 信州弋陽縣《□□(缺二字)峰記》,文意高絕,蓋非止以字畫名世也。伯益既下世,有女適著作佐郎 黃元者,能嗣其篆法,備極精巧。嘗書《陰符經》,字皆徑寸,勢若飛動。伯益姪孫章衡得其 本,知襄陽日,刻於郡齋,餘嘗得墨本,誠可珍玩。

            近世諸體書

            餘嘗評近世眾體書法,小篆則有徐明叔及華亭曾大中、常熟曾耆年,然徐頗好為復古篆體,細腰長腳,二曾字則圜而勻,稍含古意。大中尤喜為摹印,甚得秦、漢章璽氣象。隸 書則有呂勝己、黃銖、杜仲微、虞仲房,呂、杜、黃工古法,然雖頗勁,而其失太拙而短。虞間 出新意,波磔皆長,而首尾加大,乍見甚爽,但稍欠骨法,皆不得中。行草則有蔣宣卿、吳傅 朋、王逸老、單炳文、姜堯章、張於湖、範石湖,蔣、吳極秀媚,所乏者遒勁;逸老草法甚熟,而間有俗筆;單字法本楊少師凝式而微加婉麗;姜蓋學單而入室者;於湖、石湖悉習《寶 晉》,而各自變體。今世俗於篆則推明叔,隸則貴仲房,行草則取於湖,蓋初無真識,但見其飄逸可喜。殊不知此皆字體之變,雖未盡合古,要各自有一種神氣,亦足嘉尚。人效之者往往但得形似,非惟不及,且並失其故步,良可嘆也!

            小王書

            世稱“小王書”,蓋稱太宗皇帝時王著也。本學虞永興書,其波磔加長,體尚嫵媚,然全無 骨力。方上集刊法帖時,著預校定,識鑑凡淺,不無謬誤。如列王坦之於逸少諸子間,意謂 名皆從之。殊不知坦之乃王述之子,自太原王耳,非琅邪族也。黃長睿《志》及《書苑》雲: “僧懷仁集右軍書唐文皇制《聖教序》,近世翰林侍書輩學此,目曰院體,自唐世吳通微兄弟 已有斯目。”今中都習書誥敕者,悉規仿著字,謂之“小王書”,亦曰“院體”,言翰林院所尚也。

            學書須觀真跡

            石湖雲:“學書須是收昔人真跡佳妙者,可以詳視其先後筆勢輕重往復之法,若只看碑本,則惟得字畫,全不見其筆法神氣,終難精進。又學時不在旋看字本,逐畫臨仿,但貴行、 住、坐、臥常諦玩,經目著心。久之,自然有悟入處。信意運筆,不覺得其精微,斯為善學。”

            寫大字法

            古人作大字常藏鋒用力,故其字畫從顛至末,少有枯燥處。今往往多以燥理為奇,殊不知此本非善書者所貴,惟斜拂及挈筆令輕處,然後有此,所謂側筆取妍,正蹈書法之所忌也。

            論細字說

            漢師宜官善書,大則徑丈一字,細則方寸千言。又晉衛巨山論書雲:“其大徑尋,細不容發,迫而察之,心亂目眩。”嘗觀東坡題《蓮經》前注雲;“經七卷,如筋粗。故其語雲,卷具 盈握,沙界已周。讀未終篇,目力俱廢。乃知蝸牛之角,可以戰蠻、觸,棘刺之端,可以刻彌 猴。”黃長睿跋細字《華嚴經》亦雲:“書是經者尺紙作七萬字。”餘謂七卷之軸如筋,猶或可書,至於尺紙作七萬字,誠為難事。若以宜官方寸千言概之,已為有馀。此說殊不近人情,恐決無是理,餘不敢以為然。

            總論作大小字

            昔人雲:“作大字要如小字,作小字要如大字。”蓋謂大字則欲如小書之詳細曲折,小字 則欲具大字之體格氣勢也。刊勒之工,仍有善展字,不拘字之大小,皆可遞展。其法以刀 鏨去紙存墨,就燈旁映之,去燈愈近,而其形愈大,自尺至丈,惟意所定。然後展紙於壁,模 勒其影,既小大適中,且不失體勢,亦良法也。

            論筆墨硯

            硯貴細而潤,然細則多不發墨。惟細而微有錯鍔,方其受墨時,所謂如熱熨鬥上溻<此字無法輸入,以“溻”替,應為火字旁>蠟,不聞其聲,而密相粘滯者,斯為上矣。墨貴黑光,筆貴易熟而耐久,然二者每交相為病。惟 墨能用膠得宜,筆能擇毫不苟,斯可兼盡其善。又硯忌枯燥,則易吸水;墨忌濡濕,則易昏 滯;筆忌乾捺,則毫隨膠折。故愛硯之法,當以髹匣相之,不惟養潤,亦可護塵。研墨當旋 滴水,勿使停積。昔人多用硯板,不鑿墨池,政恐膠久而凝滯也。用筆時,當先以清水濡毫 令稍軟,然後循毫理點染,仍別置洗具,用畢隨即滌濯,勿使留墨,則難禿也。藏墨當以茶蒻包之,又以綿裹而入於櫝,則蒸滃不能入。藏筆宜皂角子水調鉛粉蘸上,則不生蠹。如上諸法,留意文翰者皆能知之,今謾書示兒輩耳。如藏筆則高掛,用木匣懸於樑棟間。

            俗論筆墨

            俗論雲,善書不擇筆,蓋有所本。褚河南嘗問虞永興曰:“吾書孰與歐陽詢?”虞曰:“詢不擇紙筆,皆得如志,君豈得此!”裴行儉亦曰:“褚遂良非精墨佳筆,未嘗輒書,不擇筆 墨而妍捷者,餘與虞世南耳。”餘謂工不利器而能善事者,理所不然,不擇而佳,要非通論。又世俗評墨訣雲:“拈著輕,嗅著馨,磨著清。”此亦非真知墨者。蓋墨質貴重實,輕則不堅;色貴光黑,清則不濃。又墨之香者多使腦麝,好惡初不在此,且生蒸腐。今其所論皆非佳墨所宜,俗輩之見不明,其說不可據如此。

            論紙品

            《蘭亭序》用鼠鬚筆書烏絲闌繭紙,所謂繭紙,蓋實絹帛也。烏絲闌即是以黑間白,織其界行耳。布縷為紙,今蜀箋猶多用之。其紙遇水滴則深作窠臼,然厚者乃爾,故薄而清 瑩者乃可貴。古稱剡藤本,以越溪為勝,今越之竹紙甲於他處,而藤乃獨推□□<缺二字>清江。清 江佳處,在於堅滑而不留墨。新安玉□□<缺二字>理極膩白,然質性頗易軟弱,今士大夫多糨而後 □<缺一字>,既光且堅,用得其法,藏久亦不蒸蠹。又吳人取越竹以梅天水淋□<左“日”右“良”>,令稍乾,反覆硾之, 使浮茸去盡,筋骨瑩澈,是謂春膏。其色如蠟,若以佳墨作字,其光可鑑,故吳箋近出而遂 與蜀產抗衡。江南舊稱澄心堂紙,劉貢父詩所謂百金售一幅,其貴如此。今亦有造者,然 為吳、蜀箋所揜(同“掩”。),遂不盛行于時。外國如高麗、闍(dū)婆亦皆出紙,高麗紙類蜀中冷金,縝實而 瑩,闍(dū)婆者厚而且堅,而長者至三四丈。高麗人雲,抄時使幅端連引,故得爾長。胡人用作帷幄,修齋供財張之滿室,若有嘉會,乃更設花布及罽<原字無“廠”>蜀所為者。    

          [評點]陳槱(yǒu ),南宋紹熙年間書法家,陳幾之孫,長樂(今屬廣東)人。生平事跡不詳。
            《負暄野錄》二卷,《四庫全書總目提要》曰:舊本題陳槱撰,不著時代,卷末有至正七年王東跋。是書上卷論石刻者五則,其前漢無碑及古碑毀壞兩說,未經人道。言篆法一則,謂作篆仍宜用筆尖,持論甚詳。言諸家書格者七則。下卷言學書之法者四則,言筆墨紙硯者十二則,俱甚精到。此書《宋史·藝文志》不為著錄。此選自《知不足齋叢書》,錄十四則,不分卷次。


          05:陳繹曾《翰林要訣》 ▲Top

             第一 執筆法

             擫 大指骨下節下端用力,砍直如提千鈞。

             捺 食推著中節旁。此上二指主力。

             鉤 中指著指尖鉤筆下。

             揭 名指著指外爪肉際揭筆上。

             抵 名指揭筆,中指抵住。

             拒 中指鉤筆,名指拒定。此上二指主轉運。

             導 小指引名指過右。

             送 小指送名指過左。此上一指主來往。

             右名撥鐙法,撥者筆管著中指名指尖,圓活易轉動也。鐙即馬鐙,筆管直則虎口間如馬鐙也。足踏馬鐙淺,則易出入;手執筆管淺,則易轉動也。

             右指法。

             枕腕 以左手枕右手腕。

             提腕 肘著案而虛提手腕。

             懸腕 懸著空中最有力。(今代惟鮮於郎中善懸腕書,餘問之,瞑目伸臂曰:膽、膽、膽。)

             右腕法。

             大凡學書,指欲實,掌欲虛,管欲直,心欲圓。

             右手法。

             撮管 以撥橙指法撮管頭,大字草書宜用之,書壁尤佳。

             鏃(扌部,同促)管 以大指小指倒垂執管,促三指攢之,就地書大幅屏障。

             撚管 大指與中三指撚管頭書之,側立案左,書長幅釣字。

             握管 四指中節握管,沈著有力,書誥勅牓疏。

             右變法。

             第二 血法

             蹲 七分三折,管直心圓。

             駐 七分力到水聚。

             提 三分大指下節骨竦水下。

             捺 九分力滿。

             過 十分疾過。

             搶 各有分數,圓蹲直搶,偏蹲側搶,出鋒空搶。

             衄 三分三搖筆殺力。

             字生於墨,墨生於水,水者字之血也。筆尖受水,一點已枯矣。 水墨皆藏於副毫之內,蹲之則水下,駐之則水聚,提之則水皆入紙 矣。捺以勻之,槍以殺之、補之,衄以圓之。過貴乎疾,如飛鳥驚 蛇,力到自然,不可少凝滯,仍不得重改。

             第三 骨法

             提 竦大指下節骨下端,提尾駐飛。

             縱 和大指下節骨下臼,蹲首駐捺衄過。

             字無骨,為字之骨者,大指下節骨是也。提之則字中骨健矣, 縱之則字中骨有轉軸而活絡矣。提者大指下節骨下端小竦動也, 縱者骨下節轉軸中筋絡稍和緩也。

             第四 筋法

             藏 首尾蹲搶。(解“藏”“度”二字,則無死筆,活處在筋也。)

             度 中間空中飛度。

             字之筋,筆鋒是也。斷處藏之,連處度之。藏者首尾蹲搶是也,度者空中打勢,飛度筆意也。

             右字法。(一畫亦要藏、度,不專是斷處,連處。)

             中指下貫上,左貫右'筆中柔。

             名指上貫下'右貫左,筆中韌。

             右指法。

             第五 肉法

             捺滿。

             提飛。

             字之肉,筆毫是也。疏處捺滿,密處提飛;平處捺滿,險處提飛,捺滿即肥,提飛則肥者毫端分數足也,瘦者毫端分數省也。

             右字法。

             筆 字一寸,蹲七釐,提五釐,捺九釐,畫一分。以是為率,清勁遞減三釐。初學提活、蹲輕則肉圓,老成提緊、蹲重則肉赲趑<原字無法輸入,以“趑”代替,“次”應為“剌”>。(如萬歲枯藤赲趑<同上>也,季海筆在畫中,力出字外,用此也。)

             紙 強弱有分數'筆力臨時斟酌之。水太質則肉散'太燥則肉枯。乾研墨則濕點筆' 濕研墨則乾點筆。墨太濃則肉滯'太淡則肉薄。粗即多累'積則不勻。

             磨墨之法'重按輕推'遠行近衍。

             硯 池寬面細,每夕一洗'則水墨調勻,血肉得所。隕石惟取細澗停水'酞石惟取續澀麼墨弟之邦關寶寶,

             凡磨墨不得用硯池水,令墨滯筆沍(hù閉,塞),須以水滴伋新水臨時斟酌之。

             凡書不得自磨墨,令手顫、筋骨大強,是大忌也。

             初學須用佳紙今後不怯,須用惡筆今後不擇筆。

             有用筆分數,通論紙、墨、硯等。

             第六 平法

             偃 首搶下,尾搶上。

             仰 首搶上,尾搶下。

             平 首搶平,尾搶平。

             勒 上平中仰下偃,空中遠搶,以殺其力,如勒馬之用韁也。凡尾提處,觀其筆燥濕何如。燥則駐蹲捺而實搶以補之,其次蹲而不捺,其次駐而不蹲,其次提而不駐即實搶之。濕則提起即空搶可也。

             凡平畫忌如算子;終篇展玩,不見橫畫,始是書法。

             第七 直法

             垂露, 首搶上,尾搶上,分四停各半之。

             懸針, 首搶上,尾搶下,空出分五停,上二下一。

             向 首搶左上右,右上左,昆搶左上左,右上右,偏蹲偏駐,側搶側過,分五停,上二 下二。

             背 與向反。

             努 首搶右築鋒,尾搶上,左衄訖趯出,分七停,上一下一,藏趯亦可。

             □<亻壹> 首搶中心,上出,字分盡處空中落下,畫分盡處蹲之。尾搶上出空中,力盡止,垂露、懸針、向、背、努等筆皆有之,肥瘠以字分為稱,長短隨偏傍所宜用。

             第八 圓法

             側 點之變無窮,皆帶側勢蹲之,首尾相顧,自成三過筆。有偃、仰、向、背、飛、伏、立等勢,柳葉、鼠矢、蹲鴟、慄子等形。散水氵,上側,中偃,下仰橫,二停以四停,上內一,中外二,下自外四至內三。

             聯飛 四點相隨,偃前以後橫。(起偃煞橫。)

             烈火灬 外相向而偃,內相隨而仰。

             曾頭丷 對向貴從,上開下合。

             其腳 相背貴橫,上合下開。

             啄 點首撇尾左出微仰,如鳥喙之啄物。

             掠 點首撇尾右出微仰,如篦之掠發。

             撇 背撇,首圓蹲過,作懸針法左出。向撇,首偏蹲右顧左轉,作向豎尾懸針左出,如手前後撇物。

             波乀 從乀五停,首一中三尾一。橫乀五停,首一中二尾二。大體作仰畫不蹲,以鋒傍裹空蹲,三面力到,順指攲下,力滿微駐仰出,三過筆中又有三過,如水波之起伏。

             拔乀 先作左撇飛筆,側打鋒不蹲,順勢鼓下,力滿微駐仰出,三過筆,如手拔物。

             逴辶 上點如右足立定,取力下屈如右股三折,取勢下拔如右足之逴溝壑。

             策 重提輕蹲,圓鋒左出,勢盡仰收,如鞭之策馬,力在著物處。

             磔乀 偏蹲偏駐,疾過緩出,首尾自藏。須先作上啄,取勢如裂帛,力在裂外。

             挫 因前筆衄出,或上或下,或左或右,皆衄法也。

             打 提鋒空中打下,乃點法之長者。

             打勾 右打反趯抱腹。

             趯下 前筆末蹲鋒提趯,抱身貴短。

             背拋L 向□<亻壹>仰勒反趯,趯貴寬圓,或仰背偃,或作垂露平,或作懸針平,或作圓趯,如背手拋物。

             大背拋 仰勒衄,左努挑,或偃勒衄,右背挑,長短屈伸,各隨字形。

             挑 右背□<亻壹>,仰勒反趯,趯貴抱腹而清。

             戈 提空中斫下,勢盡 ,或仰趯抱身 ,或收趯歸腹 ,或反趯向左,大體如向右 豎,而左右顧盼反趯之,勢欲飛。有斫戈,有築戈,有反戈,有飛戈。

             勾裹 偃勒向□<亻壹>趯,或仰勒背□<亻壹>趯,勾努勒努趯,或偃向,或仰背。

             雙包乃 左先作向撇,撇尾停筆取勢,飛筆隨勢包撇,勢□<亻壹>打間對撇首,打背隨勒尾,平撇尾。

             雙裹乃 阝法與雙包同,但自撇首偏蹲取勢,勢遠則勒短裹撇。

             平方匚 上平,旁向,下偃;匚或上仰,旁背,下平。

             飛方匚 上飛平,旁飛向,下飛偃。飛者,空中飛筆,緊提轉腕疾出也。

             第九 方法

             八面 俱滿者方可提飛 。

             九宮 八面點畫皆拱中心 。

             結構 隨字點畫多少,疏密各有停分,作九九八十一分界畫均布之。先於鍾、王、虞、顏法帖上以朱界畫印,印訖視帖中字畫分數,一一臨擬。仍欲察其屈伸變換本意,秋毫勿使差失。四家字體既熟,方可旁及諸家。法帖字大,以小印分數蹙之;法帖字小,以大印 分數展之。雖以《黃庭》《樂毅》,展為方丈可也。又以朱界畫印印紙,或□<上“非”下“木”>板漆之,取許慎 《說文》偏旁字樣,一一依法區處。務要簡易精熟,外妍美而內遒健,各各自佳矣。

             均方 長者目兩減闊罒,短者罒兩減長目,小者口四減字形回,雖有長短闊狹小大,行 中須留空地,仍須寫空中勢,須偏著右,或亦各一分。(分窠法)

             第十 分布法

             布方 中展圓則疏者均方,中蹙圓則密者均方。點畫孤單者展一畫,“大”、“人”、“卜” 之類是也。重並者蹙之一旁,“棗”、“轉”、“影”、“欒”、“嶽”、“麓”、“森”之類是也。古者所無, 不得擅寫。

             映帶 凡偏傍不相稱者,屈伸點畫以避之。太繁者減除之,太疏者補續之,必古人有 樣,乃可用耳。

             變換 字之中點畫重並者,隨宜屈伸以變換之。點不變謂之布棋,畫不變謂之布算 子,若“一”、“馬”、“三”、“冊”是也。字之中偏傍重並者,隨宜開合而變換化之,間合間開之類“林”、“晶”、“炎”,“焱”是也。

             體樣 隨字變體,隨體識樣。字形有孤單、重並、併累、攢積之體,須據許慎《說文》為 主而分布之。“一”“二”為孤,“日”“月”為單,“棗”“炎”為重,“林”“竝 ”為並,“轉”“影”為併, “晶”“焱”為累,“墅”“樣”為攢,“爨”“鬱”為積,以此為例,廣推求之。

             字間 對者宜疏,疏者宜密。

             行白 對者宜等,間者宜半。

             篇段 平、起、伏,六分之一平,其三起,最後二分伏。平者圓穩而平畫多也;起者振動而仰畫多也;伏者收斂而多偃畫也。

             第十一 變法

             情 喜怒哀樂,各有分數。喜即氣和而字舒,怒則氣粗而字險,哀即氣鬱而字斂,樂則氣平而字麗。情有重輕,則字之斂舒險麗亦有淺深,變化無窮。

             氣 清和肅壯,奇麗古澹,互有出入者是。窗明幾淨,氣自然清;筆墨不滯,氣自然和;山水仙隱,氣自然肅;珍怪豪傑,氣自然奇;佳麗園池,氣自然麗;造化上古,氣自然古;幽貞閒適,氣自然澹。八種交相為用,變化又無窮矣。

             形 字形八面,迭遞增換,一面變,形凡八變;兩面變,形凡五十六變;三面以上,變化不可勝數矣。

             勢 形不變而勢所趨背各有情態。勢者,以一為主,而七面之勢傾向之也。

             第十二 法書

             真 鍾繇《力命》、《剋捷》、《宣示》。王羲之《樂毅》、《畫贊》、《黃庭》、《告誓》、《霜寒》。 王獻之《洛神》。六朝不知名氏《曹娥》。羊叔子《遺教序》。陶弘景《瘞鶴》、《舊館壇》。智 永《千文》。虞世南《孔子廟碑》。歐陽詢《九成宮》、《化度寺》、《虞恭公》。褚遂良《哀冊》、《聖教》。張旭《郎官》。顏真卿《麻姑壇》、《放生池》、《中興頌》、《乾祿字》、《東方朔》。柳公權《陀羅尼》。

             行 鍾繇《丙舍》。吳人《羸頓》、《雪寒》、《長風》。羲之《蘭亭》、《極寒》、《苦熱》、《官奴》、《快雪》、《來禽》、《奉橘》、《聖教序》、《開元寺》、《十七帖》。獻之《地黃》、《歲終》、《衛軍》、《授衣》、《阿姨》、《鵝群》、《歲盡》、《夏日》、《奉對》、《思戀》、《天寶》、《吳興》、《黃門》、《山陰》、《東家》、《轉勝》、《相過》、《鵝還》、《觸事》、《夏節》、《恨深》、《黃耆》、《礜石》、《駱驛》、《月內》、《尊體》。謝安《八月五日》。褚遂良《枯樹賦》。李邕《岳麓》、《娑羅樹》。張從申《玄靜》。

             《淳化法帖》 諸帖之祖,王著模刻,深得古意,不見真跡,得此足矣。

             《絳帖》 《淳化》之子,潘師旦模刻,骨法清勁,足正王著肉勝之失。然駿馬露骨,又未免羸瘠之憾。

             《潭帖》 《淳化》之子,寶月大師模,風韻和雅,血肉停勻,但形勢俱圓,頗乏峭健之氣。

             《大觀帖》 《淳化》之弟,蔡京模刻,京沉酣富貴,恣意粗率,筆偏手縱,非復古意,賴刻手精工,猶勝他帖耳。

             《太清樓續閣帖》 劉燾模勒,工夫精致,亞於《淳化》,肥而多骨,求備於王著,乃失之粗硬,遂少風韻。

             《戲魚堂帖》 劉次莊模,在《淳化》翻刻中頗為有骨格者,淡墨搨尤佳。

             《武岡》、《修內司》、《福州》帖 皆有可觀,《鼎帖》石硬而刻手不精,雖博而乏古意。

             《星鳳樓帖》 曹士冕模刻,工致有餘,清而不濃,亞於《太清續帖》也。《玉麟堂帖》 吳琚模刻,濃而不清,多雜米家筆仗。

             《寶晉齋帖》 曹之格模刻,《星鳳》之子,在諸帖為最下,今佳帖難得,學者賴此得見晉唐人仿佛耳。

             《百一帖》 王萬慶模刻,筆意清遒,雅有勝趣,恨刻手不精妙耳。

             《二王帖》 搜拾二王行草書小帖略備,但本非能書人模勒,故博而不精。

             右十二章,大要筆圓字方,傍密間豁,血濃骨老,筋藏肉潔,筆筆造古意,字字有來曆,日臨名書,毋吝紙筆,工夫精熟,久自得之矣。    

          [評點]陳繹曾,元代元統至元年間書法家。字伯敷,處州(今屬浙江)人。[此從《元史》說,《元詩選》作歸安(今屬浙江)人。]舉進士,官至國子助教。口吃而精敏異常,諸經注疏,多能成誦,文辭汪洋浩博,與陳旅齊名。又善真草篆書,著有《文說》、《文筌》、《行文小譜》。
             《翰林要訣》一卷,分十二章:一執筆法,二血法,三骨法,四筋法,五肉法,六平法,七直法,八圓法,九方法,十分布法,十一變法,十二法書。各法中俱立種種名目,有本於前人者,有其自創者。前人論書頗以此書為重,也有以為此書涉於繁瑣,徒令學者目眩神昏不知所主。姑備一說,未可墨守。


          06:成公綏《隸書體》 ▲Top

            皇頡作文,因物構思;觀彼鳥跡,遂成文字。燦矣成章,閱之後嗣,存在道德,紀綱萬事。俗所傳述,實由書紀;時變巧易,古今各異。蟲篆既繁,草藁近偽;適之中庸,莫尚於隸。規矩有則,用之簡易。

            隨便適宜,亦有弛張。操筆假墨,抵押毫芒。彪煥*硌,形體抑揚。芬葩連屬,分間羅行。爛若天文布曜,蔚若錦繡之有章。

            或輕拂徐振,緩按急挑。挽橫引縱,左牽右繞。長波鬱拂,微勢縹緲。工巧難傳,善之者少;應心隱手,必由意曉。

            爾乃動纖指,舉弱腕,握素紈,染玄翰。彤管電流,雨下雹散。點*折撥,掣挫安按。繽紛絡繹,紛華燦爛。絪緼卓犖,一何壯觀!繁縟成文,又何可玩!章周道之鬱鬱,表唐虞之耀煥。

            若乃八分璽法,殊好異制;分白賦黑,棋布星列。翹首舉尾,直刺邪制;繾綣結體,劖衫奪節。

            或若虯龍盤遊,蜿蜒軒翥;鸞鳳翱翔,矯翼欲去。或若鷙鳥將擊,並體抑怒,良馬騰驤,奔放向路。

            仰而望之,鬱若宵霧朝升;遊煙連雲;俯而察之,漂若清風厲水,漪瀾成文。

            重象表式,有模有概;形功難詳,粗舉大體。

          [說明]:成公綏(231-273) 西晉文學家。字子安。東郡白馬(今河南滑縣)人。他博涉經傳,閒默自守,不求聞達。張華很看重他,“每見其文,嘆伏以為絕倫”(《晉書·成公綏傳》),舉薦為太常博士。他擅長辭賦。樑代劉勰《文心雕龍·詮賦》將他與陸機並列,以為其賦“□績於流制”。今存賦20餘篇,多系殘篇。他雅好音律,曾作《嘯賦》、《琴賦》、《琵琶賦》等。其中《嘯賦》以細致生動的筆法 描繪了“聲不假器,用不借物”的長嘯,認為嘯具有悠揚 婉轉的音韻之美和“因形創聲,隨事造曲,應物無窮”的 自然神趣,此賦文辭清雋,被蕭統《文選》收錄。此外存詩數首。

             《隸書體》一文選自明代張溥輯的《成公子安集》,盛贊各體書中惟有隸書繁簡中庸、規矩有則,用之適宜。


          07:崔瑗《草書勢》 ▲Top

            書契之興,始自頡皇;寫彼鳥跡,以定文章。爰暨末葉、典籍彌繁;時之多僻,政之多權。官事荒蕪,勦其墨翰;惟多佐隸,舊字是刪。草書之法,蓋又簡略;應時諭指,用於卒迫。兼功並用,愛日省力;純儉之變,豈必古式。觀其法象,俯仰有儀;方不中矩,圓不中規。抑左揚右,望之若欹。獸跂鳥跱,志在飛移;狡兔暴駭,將奔未馳。或¤¤點¤,狀似連珠;絕而不離。畜怒怫鬱,放逸後奇。或凌邃惴慄,若據高臨危,旁點邪附,似螳螂而抱枝。絕筆收勢,馀綖糾結;若山蜂施毒,看隙緣巇;騰蛇赴穴,頭沒尾垂。是故遠而望之,漼焉若注岸奔涯;就而察之,一畫不可移。幾微要妙,臨時從宜。略舉大較,仿佛若斯。

          [注]《草書勢》,崔瑗(77-142年)字子玉,涿郡安平(今屬河北)人,年輕時遊學京都洛陽,與張衡、馬融等為伍,官至濟北相。崔瑗書法師法杜度,擅長章草,在書史上地位顯要,人稱崔、杜。《草書勢》是談論草書技法的文章,用比喻的手法加以描述。文見《晉書列傳第六·衛恆傳》

            這是流傳至今的我國曆史上最早的一篇書法論文,而且是論草書的。書法是一種線條藝術,草書於此尤具代表性。因此,這篇文章也就彌足珍貴。文章在講了書法的起源之後,重點講了草書的產生,指出由於“官事荒蕪”,出現了比大小篆簡略的“隸書”;而“草書之法,蓋又簡略,應時諭指,用於卒迫,兼功並用,愛日省力”。這就說明,草書是由於政事繁忙,為適應書寫簡易快速的需要而產生的。這是符合實際的。任何一種藝術,起初都是為了實用,後來才出於審美的需要,逐漸使之完善成熟。漢代草書在實用中提高技藝,成為一種獨具特色的書法藝術,終於得到了社會的承認。

            崔瑗《草書勢》的重要意義,還在於它記錄了他對草書藝術的審美感受,把草書作為供人欣賞的美的藝術。文中提出一個重要美學命題:“觀其法象”。法象,本指人的合乎禮儀規範的儀表舉止,借用到草書直觀上,則指其合乎法度而又獨具特色的藝術形象。因此,“觀其法象”,就是觀賞草書的藝術形象。而且文中具體生動地描繪了這一點。一則說,“抑左揚右,望之若欹”,意在講草書結體不同於篆隸的對稱平穩。一則說,“獸跛鳥躊,志在飛移;狡兔暴駭,將奔未馳”,強調草書的動態美。書法本是空間藝術,是靜止的,這裏的鳥獸想要“飛移”;狡兔突然受驚將要“奔馳”,給人強烈的時間藝術的動態感。一則又說,“或蜘蛛點蝻,狀似連珠,絕而不離”,指出草書的下點,如“燕”、“然”下面四點,筆勢也有它自身的特色。一則還說,“若山蜂施毒,看隙緣巇;騰蛇赴穴,頭沒尾垂”,點出草書筆畫的曲折、回旋、流暢。這些都是草書的特殊處。它較之漢代的正書篆、隸來,線條更流暢,更自由,更具活力,更富意態。那筆勢“畜怒怫鬱”,縱放出來,就會產生出奇異的場景。然則崔瑗在肯定了草書的這些特征之後,又指出草書的自由不是隨意的。文中一方面寫到“方不中矩, 圓不中規”,指出草書打破了篆隸要求對稱平穩的限制;另一方面又寫到“就而察之,一畫不可移”,表明草書是有自己的法度的,有著“一畫不可移”的規則和規律性。這種對自由與規律、合目的性與合規律性的高度統一的要求,是我國先秦美學就具有了的一條重要原則。崔瑗對草書藝術的審美感受,再次體現了這一點。


          08:董其昌《畫禪室隨筆》 ▲Top

            此帖(官奴帖)在《淳熙秘閣續刻》,米元章所謂絕似《蘭亭敘》。昔年見之南都,曾記其筆法於米帖,曰:“字字騫翥,勢奇而反正,藏鋒裹鐵,遒勁蕭遠,庶幾為之傳神。”今為吳太學用卿所藏。頃於吳門出餘,快餘二十馀年積想,遂臨此本雲:抑餘二十馀年時書此帖,茲對真跡,豁然有會,蓋漸修頓證,非一朝夕。假令當時力能致之,不經苦心懸念,未必契真。懷素有言:“豁焉心胸,頓釋凝滯。”今日之謂也。時戌申十月有三日,舟行朱涇道中,日書《蘭亭》及此帖一過,以《官奴》筆意書《禊帖》,尤為得門而人。

          吾書無所不臨仿,最得意在小楷書,而懶於拈筆。但以行草行世,亦多非作意書,第率爾酬應耳。若使當其合處,便不能追蹤晉、魏,斷不在唐人後乘也。

            作書與詩文同一關捩,大抵傳與不傳,在談與不談耳。極才人之致,可以無所不能而談之,玄味必由天骨,非鑽仰之力、澄練之功所可強人。

            轉筆處,放筆處,精神血氣易於放過。此正書家緊要關津,造物待是而完也。但知出筆,不知轉筆、放筆,必不詣極。

            書須參(離合)二字,楊凝式非不能為歐、虞諸家之體,正為離,以取勢耳。米海嶽一生誇詡,獨取王半山之枯淡,使不能進此一步,所謂“雲花滿眼,終難脫出淨盡”。趙子昂則通身入此玄中,覺有朝市氣味。《內景經》曰:“淡然無味天然糧”,此言可想。

            三十年前參米書在,無一實筆,自謂得訣。不能常習,今猶故吾,可愧也。米雲:“以勢為主。”餘病其欠淡,淡乃天骨帶來,非學可及,內典所謂帶師智,書家謂之氣韻也。

            翰墨之事,良工苦心,未嘗敢以耗氣應也,其尤精者,或以醉,或以夢,或以病,遊戲神通,無所不可,何必神怡氣王,造物乃完哉!世傳張旭號草聖,飲酒數鬥,以頭濡墨,縱書壁上,淒風急雨,觀者嘆愕。王子安為文,第磨墨數升,蒙被而臥,熟睡而起,詞不加點,若有鬼神,此皆得諸筆墨蹊徑之外者。今觀察王先生當人日,病不飲酒,莫廷韓饋以內府良藥,輒據枕作詩二十餘章謝之,皆風騷鼓吹也。乃與彼二子鼎足六立也矣。……

            晉人書取法,宋人書取意,或不勝於法乎?不然,宋人自以其意為書耳。非能有古人之意也。然趙子昂則矯宋之弊,雖已意亦不用也,此必宋人所訶,蓋為法所轉也。唐人詩律與其書法頗似,皆以濃麗為主,而石法稍遠矣。餘每謂晉唐無態,學唐乃能入晉。晉詩如其書,雖陶元亮之古澹,阮嗣宗之後爽,在書法中無虞、褚可當,以其無門也。因為唐人詩及之。

            晉、宋人書,但以風流勝,不為無法,而妙處不在法。至唐人始專以法為蹊徑,而盡態極研矣。

            總之俗欲造極處,使精神不可磨沒。所謂神品,以吾神所著故也。何獨書道,凡事皆爾。

            大慧禪師論參禪雲:“譬如有人具百萬資,吾皆籍沒盡,更興索債。”此語殊類書家關捩子。米元璋雲:“如撐急水灘船,用盡氣力,不離故處。”蓋書家妙在能合,神在能離,所以離者,非歐、虞、褚、薛名家伎倆,直要脫去右軍老子習氣,所以難耳。那吒拆骨還父,拆肉還母,若別無骨肉,說甚虛空粉碎,始露全身,晉、唐以後,惟楊凝式解此竅耳,趙吳興未夢見在。

            餘十七歲學書,二十二歲學畫,今五十七八矣。有謬稱許者,餘自校勘,頗不似米顛作欺人語。大都畫與文太史較,各有短長,文之精工具體,吾所不如。至於古雅秀潤,更進一籌矣。與趙文敏較,各有短長。行間茂密,千字一同,吾不如趙。若臨仿曆代,趙得其十一吾得其十七,又趙書因“熟”得俗態,吾書因“生”得秀色。趙書無弗作意,吾書往往率意;當吾作意,趙書亦輸一籌。第作意者少耳。

            吾於書似可直接趙文敏,第少生耳。而子昂之熟,又不如吾有秀泣之氣。惟不能多書,以此讓吳興一籌。畫則具體而微,要亦三百年來一具眼人也。

            予學書三十年,司得書法,而不能實證者,在自起自倒、自收自束處耳。過此關,即曆軍父子亦無奈何也。轉左側右,乃曆軍字勢。所謂跡似奇而反正者,世人不能解也。

            唐人書皆回腕,宛轉藏鋒,能留得筆住。不直率流滑,此是書家相傳秘訣。微但書法,即畫家用筆,亦當得此意。

          書法雖貴藏鋒,然不得以模糊為藏鋒,須有用筆如太阿*截之意,蓋以勁利取勢,以虛和取韻。顏魯公所謂“以印印泥、如錐畫沙”是也。細參《玉潤帖》,思過半也。

            米海嶽書,無垂不縮,無往不收。此八字真言無等咒也。然須結字得勢,海嶽自謂集古字,蓋於結字最留意,比其晚年,始自出新意耳。……

            古人作書,必不作正局,蓋以奇為正,此趙吳興所以不大入晉、唐室也。《蘭亭》非不正,其縱岩用筆處,無跡可尋。若開採模相似,轉去轉遠。柳公權雲:“筆正”,須善學柳下惠者參之。餘學書三十九年,見此意耳。

            餘嘗謂右軍父子之書,至齊、樑時風流頓盡。自唐初虞、褚輩,一變其法,乃不合而合,右軍父子殆如復生。此言不大易會,蓋臨摹最易,神氣難傳也。

            臨帖如驟遇異人,不必相其耳目、手足、頭面,當觀其舉止、笑語、真精神流露處。莊子所謂“目擊而道存”者也。

          章子厚日臨《蘭亭》一本,東坡聞之,謂:其書必不得工。禪家有雲,從門入者,非是家珍也。惟趙子昂臨本甚多,世所傳十七跋、十三跋是已。“世人但學蘭亭面,欲換凡骨無金丹。”山谷語與東坡同意,正在離合之間,守法不變,即為書家奴耳。

            昔右軍諸帖,半出於問病吊唁,從哀戚中結法,所謂淚漬老筆者,其書獨垂至今。

            《內景經》全在筆墨畦徑之外,其為六朝人得意書無疑。今人作書只信筆為波畫耳。結構縱有古法,未嘗真用筆也。善用筆者清勁,不善用筆者濃濁。不獨連篇各體有分別,一字中亦具此兩種,不可不知也。

            顏魯公受筆法於張長史。嘗有“錐畫沙”、“印印泥”之喻,又謂之“屋漏痕”。然其碑帖嚴整,蠶頭鼠尾,即不無“錐沙”、“印泥”、“屋漏痕”。未之見也。獨此碑落筆與放筆處,和緩挺勁兼之,餘臨寫之,次恍若有悟。魯公曰:自鐘、王至虞、陸,皆口決手授,以至張長史。信矣。

            錐沙三喻,皆喻藏鋒,不知出鋒亦有之。因出鋒之尤,故成藏鋒之渾,此碑是也。東坡偃筆雖形類顏,失在用筆矣。其學王僧亦然。

            《爭座位帖》,宋蘇、黃、米、蔡四家書皆仿之。唐時歐、虞、褚、薛諸家,雖刻畫二王,不無拘於法度。惟魯公天真爛漫,姿態橫出,深得右軍靈和之致,故為宋一代淵源。

            餘近來臨顏書,因悟所謂“折釵股”“屋漏痕”者,惟二王有之。魯公直入山陰之室,絕去歐、褚輕媚習氣,東坡雲:“詩至於子美,書至於魯公。”非虛語也。顏書惟《蔡明遠序》尤為沉古,米海嶽一生不能仿佛,蓋亦為學唐初諸公書,稍乏骨氣耳。燈下為此,都不對帖,雖不至入俗,第神採璀璨,即是不及古人處,漸老漸熟,乃造平淡。米老猶隔塵,敢自許逼真乎?題以志吾愧。

            餘每臨懷素《自敘帖》,皆以大令筆意求之,黃長睿雲:米芾見閣帖書稍縱者,輒命之旭。旭、素故自二王得一家眷屬也。旭雖姿性顛逸,超然不羈,而楷法精詳,特為正真,學狂草者,從此進之。

            柳誠懸書,極力變右軍法,蓋不欲與《禊帖》面目相似。所謂神奇化為臭腐,故離之耳。凡人學書,以姿態取媚,鮮能解此。餘於虞、褚、歐,皆曾仿佛十一,自學柳誠懸,方悟用筆古淡處。自今以往,不得舍柳法而趣右軍也。

            楊景度書,自顏尚書、懷素得筆,而溢為奇怪,無五代衰*之氣。宋蘇、黃、米皆宗之。《書譜》曰:“既得平正,須追險絕”景度之謂也。

          書家以險絕為奇,互竊惟魯公、楊少師得之,趙吳興弗解也。今人眼目為吳興所遮障。予得楊公《遊仙詩》,日益習之。

            東坡先生書,世謂其學徐浩。以餘觀之,乃出於王僧虔耳。但坡公用其結體,而中有偃筆,又雜以顏常山法。故世人不知其所自來。即米海嶽書自率更得之,晚年一變,遂有冰寒於水之奇。書家未有學古而不變者也。

            米元章書,沉著痛快,直奪晉人之神。少壯未能立家,一一規模古帖,及錢穆父訶其刻畫太甚,當徒勢為主,乃大悟,脫盡盡本家筆,自出機軸,如禪悟後,拆肉還母,拆骨還父,呵佛罵祖,面目非故。雖蘇、黃相見,不無氣懾。晚年自言無一點右軍俗氣,良有以也……。

            右皆趙文敏閒窗信筆所書。錫山安氏刻於家。餘素不學趙書,以其結構微有習氣,至於用筆、用墨,文敏所謂“千古不易”者。不如是,何以名喧宇宙也!前人正自未可輕哉議。

            人謂倪書有《黃庭》遺意,此論未公。倪自作一種調度,如啖橄欖,時有清津繞頰耳。書家四忌:甜、邪、俗、賴。倪從畫悟出,因得清麗。枝指山人書,吳中多贗本。此書律詩二十首,如綿裹鐵,如印印泥,方是本色真虎,非裴將軍先射諸彪也。

            本朝學素書者,鮮得宗趣。徐武功、祝京兆、張南安、莫方伯各有所人,豐考功亦得一斑,然狂怪怒張失其本矣。餘謂張旭之有懷素,猶董元之有巨然,衣缽相承,無復馀恨,皆以平淡天真為旨,人目之為狂乃不狂也。

            吾松書自陸機、陸雲,創於右軍之前,以後遂不復繼響。二沈及張南安、陸文裕、莫方伯稍振之,都不甚傳世,為吳中文、祝二家所掩耳。文、祝二家,一時之標,然欲突過二沈,未能也。以空疏無實際。故餘書則並去諸君子而自快,不欲爭也,以待知書者品之。

          "詩不求工字不奇,天真爛漫是吾師,"東海先生語也,宜其名高一世.

          書道只在巧妙二字,拙則直率而無化境矣.

          字之巧處在於用筆,尤在用墨,然非多見古人真跡,不足與此竅也.

          作書須得提起,不可信筆,蓋信筆則其波畫皆無力.提得筆起,則一轉一束,處皆有主宰.轉.束二字,書家妙訣也.今人只是筆作主,未嘗運筆.

          作書最要泯沒稜痕,不使筆筆在紙素成刻板樣.

          用墨須有潤,不可使其枯燥,尤忌濃肥,肥則大惡道矣.

          書家好觀《閣帖》,此正是病,蓋五著輩絕不識晉.唐人筆意,專得其形,故多正局.字須奇岩瀟灑,時出新致,以奇為正,不主故常.此想象吳興所未嘗夢見者,催米癡能會其趣耳.今當以王僧虔.陶隱居.大令帖幾種為宗,餘俱不必學.

          古人作書,必不作正局,蓋以奇為正,此趙吳興所以不人晉,唐門室也.<蘭亭>非不正,其縱岩用筆處,無跡可尋,若形模相公,轉去轉遠.柳公權雲"筆正"須善學柳下惠參之.餘學書三十年,見此意耳.

          須結字得勢,海岳自謂集古字,蓋於緒字最留意.

          晉.唐人結字,須一一錄出,時常參取,此最關要.

          [評點]在書法理論上首倡文人字的董其昌和米芾一樣,指向書法的平淡天真的特質,其最高目標當然也是晉人.不過他不鄙視唐人書法,認為只有學唐,才能入晉。對於唐人的書法,主要抓住了其自然性的特征,注重“似奇實正”和“以奇為正"的表現方法。在結字上要求有疏有密,能收能放,在變化中求得均衡。反對布畫均勻,位置齊平,狀如算子的結體。對於點畫線條,以能遒勁而豐潤為理想。運筆貴在能提得筆起,提筆不等於少墨,飽墨切忌重按,按則秾肥臃腫。這正是書家在用筆和用墨兩方面的巧妙之所在,在運筆的程序中,二者是統而為一,相輔相成的。


          09:豐坊《書訣》 ▲Top

             昔人傳筆訣雲:“雙鉤懸腕,讓左側右,虛掌實指,意前筆後。” 論書勢雲:“如屋漏痕,如壁坼,如錐畫沙,如印印泥,如折釵股。” 自鐘、王以來,知此秘者,晉則謝安石、郗方回、庾稚恭、張君祖,宋 則羊敬元、薄欽叔,齊則王簡、穆伯寶,樑則蕭景喬,蕭挹、陶弘景、孫文韜,陳則蔡征、毛喜、陳伯智、智永禪師,隋則史陵、薛道衡、丁道護、趙文淵,唐則歐陽信本、虞伯施、諸登善、薛純陀、薛嗣通、孫過庭、鐘紹京、賈膺福、李泰和、賀季真、李太白、張伯高、杜子 美、顏清臣、柳誠懸、錢藏真、張從申,五代則楊凝式、釋彥脩,趙 宋則蔡君謨、周子發、先清敏公、蘇子美、黃魯直、米元章、黃長睿、 楊補之、姜堯章,金則趙周臣,元則胡伋仲、趙子昂、仲穆、巙子山、宣伯絅、薛宗海、仇仁近、黃晉卿、傅汝礪、俞伯貞、曹世長、陳叔 夏、饒介之、揭曼碩、陳象賢、葉敬常、吳主一、龍子高,本朝唯宋 景濂、仲珩、楊孟載、王叔明、端木孝思、陶晉生、陳文東、曾子啟、先曾祖通奉府君、謝原功、陳繼善、袁德驤、李貞伯、陸子淵、文徴 仲、祝希哲數公而已。雖所就不一,要之皆有師法,非孟浪者。古語 雲:“取法乎上,僅得乎中;取法乎中,斯為下矣。”永、宣之後, 人趨時尚,于是效宋仲溫、宋昌裔、解大紳、沈民則、姜伯振、張汝 弼、李賓之、陳公甫、莊孔暘、李獻吉、何仲默、金元玉、詹仲和、張君玉、夏公謹、王履吉者,靡然成風。古法無餘,濁俗滿紙。況於反賊李士實、娼夫徐霖、陳鶴之跡,正如藍縷乞兒,麻風遮體,久墮 溷廁,薄伏通衢,臃腫蹣,無復人狀。具眼鼻者,勇避千舍,乃有師 之如馬一龍、方元渙等,莊生所謂“鯽且甘帶”,其此輩歟?

             雙鉤懸腕者,食指中指圓曲如鉤,與拇指相齊而撮管於指尖,則執筆挺直;大字運上腕,小字運下腕,不使肉襯於紙,則運筆如飛。讓左側右者,左肘讓而居外,右手側而過中,使筆管與鼻準相對,則行間直下而無攲曲之患。虛掌實指者,指不實則顫掣而無力,掌不 虛則窒礙而無勢;妙在無名指得力,三指齊撮於上,而第四指抵管於下;無垂不縮,無往不收,一畫之間,變起伏於鋒杪,一點之內,殊衄挫於毫芒。意前筆後者,熟玩古帖,於字形大小、偃仰、平直、疏密、纖秾,蘊藉於心,臨紙瞑默,豫思其法,隨物賦形,各得其理。揚子雲:“斫木為棋,摶革為鞠,亦皆有法。”況書居六藝之五,聖人以之參贊化育,貫徹古今。明道先生執筆甚敬,曰即此是學。近時業舉白丁,厚賂主司,叨冒掄魁,舐痔權倖,驟躋膴仕, 乃謂書不足學也。噫嘻,彼何知!彼何知!

             無垂不縮,無往不收,則如屋漏痕;言不露圭角也。違而不犯,和而不同,帶燥方潤,將濃遂枯,則如壁坼:言布置有自然之巧也。指實臂懸,筆有全力,擫衄頓挫,書必入木,則如印印泥;言方圓深厚而不輕浮也。點必隱鋒,波必三折,肘下風生,起止無跡,則如錐 畫沙;言勁利峻拔而不凝滯也。水墨得所,血潤骨堅,泯規矩於方圓,遁鉤繩於曲直,則如 折釵股;言嚴重渾厚而不必蛇蚓之態也。古人論詩之妙,必曰沉著痛快。惟書亦然,沉著而不痛快,則肥濁而風韻不足;痛快而不沉著,則潦草而法度蕩然。曾子曰:“士不可以不 弘毅。”弘則曠達,毅則嚴重。嚴重則處事沉著,可以托六尺之孤;曠達則風度閒雅,可以寄百裏之命;兼之而後為全德,臨大節而不可奪也。姜白石雲:“一須人品高。”此其本 歟?

             書有筋骨血肉。筋生於腕,腕能懸則筋脈相連而有勢,指能實則骨體堅定而不弱。血生於水,肉生於墨,水須新伋,墨須新磨,則燥濕調勻而肥瘦得所。此古人所以必資乎器 也。

             古人作篆、分、真、行、草書,用筆無二,必以正鋒為主,間用側鋒取妍:分書以下,正鋒居八,側鋒居二,篆則一毫不可側也。詳辯後,

             古大家之書,必通篆籀,然後結構淳古,使轉勁逸,伯喈以下皆然。米元章稱謝安石《中郎帖》、顏魯公《爭坐》書有篆籀氣象,乃其證也。然篆學必精六書,六書之說,唯趙古則《本義》卷首諧聲、假借、轉注三論,足以一掃諸家之謬,但以小篆為主,不能深考古文,譬則無根之木,無首之人。如“三”為古文“天”字,庖羲始制,而以“一”“大”會意。□(無法輸入)象形,而以為形兼意;□從口,指事,而以為事兼聲;□象簟形,而以為從卑;“也”乃卮匜,象形,而以為女陰,皆失倉頡本旨。蓋小篆者,李斯以愚黔首,豈可反以為據乎?楊桓《六書統》最博,然承許慎之訛,以會意為轉注,轉注為假借,又不逮古則遠矣。餘著《書海溯源》,極博而精,第知者鮮矣。

             篆有百種,宜常用者六種而已。一曰古文,史皇倉頡廣天皇之制;二曰奇字,黃帝史沮誦增損古文;三曰大篆,周公命史佚同天下之文,三體宜書箴銘,可以出入;四曰小篆,李斯制,碑額、志蓋、齋匾用之;五曰繆篆,漢晉印章之文,圖書私印宜其體;六曰疊篆,今 官府印信所用,禮部鑄印局所掌,亦宜習知,印以防詐偽。其唐元序、夢英、陳摶道肎所傳,杜撰非古,不必遍習也。

             古文見《宣和博古圖》、呂與叔《考古圖》、李伯時《甲秀堂帖》、鄭漁仲《泉潛》、趙明誠《古器物銘》、胡世將《資古錄》、薛用敏《鐘鼎款識》、王子弁《嘯堂集古錄》、王子端《雪溪堂帖》、曹貞素《款識續錄》。

             大篆,結體本於古人,而垂筆圓齊,蓋小篆之所從出。史逸,字孟佚;伯邑考之子,文 王之嫡長孫也。逸生頙,頙生黎,黎生籀,世以大宗為周太史。籀又損益潤色,別號“籀文”, 垂筆铦利,以此為別。

             小篆,一名玉筋篆。吾子行曰:“李斯方圓廓落,陽冰圓活姿媚。”然兼之者亦唯於行一人,可謂獨步千古。陶宗儀乃雲專法陽冰,淺之知篆矣。馀家亦有妙處。

             隸者,作於程邈,今楷書之原也。微存篆體,元吳幼清、周伯溫、國初趙古則得之。其曰:今隸皆楷書也,亦分五等;一曰銘石,鍾繇特勝。二曰小楷,二王稍變鍾法:右軍用 筆內擫,正鋒居多,故法度森嚴而入神;子敬用筆外拓,側鋒居半,故精神散朗而入妙。三 曰中楷,率更神品上,永興妙品上,河南妙品中,嗣通妙品下。四曰擘窠,刨於魯公,柳以清 勁敵之。五曰題署,亦顏公為優,太白次之,君謨又次之。本朝惟孟舉可配古人,自後未見 其比也。

             米元章《書史》錄張伯高帖語雲:“忽忽興來,五指包管。”此為題署及顛草而言。伯高、魯公皆言大字運上腕,謂徑尺以上也;小字運下腕,謂徑寸以內也。若徑丈以上,如文信 公魁字,人必立起,以一身全力自肩及肘運,則以五指齊撮墨池之端,似握鐵塑畫沙泥,使 手離紙三尺,然後八法完整,左右無病。若字三寸至於五寸,可以端坐而書,亦必運肩及肘 之力,使手離紙尺許,所謂上腕也。伯高得法於賀季真,其筆如空中拋彈,壯偉奇怪,高視 千古。正以能運上腕全力在筆,筆與神會,不自知其所以然而然也。其徑寸以內,如《蘭 亭》、《乞假》、《金丹》,小而《姚恭公》、《化度寺》、《宣示》、《力命》、《憂虞》、《樂毅》、《方朔》、《黃庭》、《曹娥》,細而河南《陰符》、法暉《塔經》,則運自肘至掌之力,亦必手離紙三二分,所謂下腕也。腕者,肘內之彎;上,時掌切,滑由此而上至肩也;下,奚價切,謂由此而下至 掌也。竇蒙《書賦》慨以五指包管為言,則徑寸以內,不以三指撮管於上,不以無名指抵管 於下,不面幾端坐而書,顫掣傾側,筆且墮落,點畫焉施?此蒙所以雖作此賦而不以書名 也。子瞻反此,乃曰:“執筆無定法,大要虛而寬。”由不能虛掌實指而肉必襯紙,故其遺跡 扁闊肥濁,猥俗可厭,不惟自誤,抑且誤人。又世傳《學古編》雲:“作篆宜單鉤。”夫單鉤,則顫掣攲邪,寒酸枯燥;真行且不能,況於篆乎!子行墨跡與李少溫、徐鼎臣、楚金、張謙中 用筆一律,乃知傳寫之訛、邪說惑世,因悉辯之。    

          [評點]豐坊,明代嘉靖年間書法家。字人翁,又字存禮,更名道生,號南禺外史。浙江鄞人。官至吏部考功主事。為人逸出法紀外,而書學極博,五體並能,諸家自魏、晉以及明,靡不兼通,蓋工於執筆者也。然坊平生好作偽書,至今為世厲垢。
            《書訣》,弇州四部稿作。筆訣。是編皆論學書之法,而尤注意於篆籀。此選論筆訣書勢四段、論篆法三段和次論古文、大篆、小篆、隸書各一段。原書所列法帖書跡,極為繁佚,綜計所載目錄,幾佔全書十分之八九。所載書跡目錄,今佚者頗多,故刪去不錄。末一段論懸腕用筆之法,亦可供參考。


          10:馮班《鈍吟書要》[節錄] ▲Top

          餘見東坡、子昂二真跡,見坡書點畫學顏魯公,體勢學李北海,風卷雲舒,遠之若將飛動。趙殊精工,直逼右軍,然氣骨自不及宋人,不堪並觀也。坡書真有努猊抉後,渴驥奔泉之態,徐季海世有真跡,不知視此何如耳?

          坡公少年書《圓覺經》小楷,直逼季海。見老泉一書,亦學徐浩。山谷稱東坡學徐季海,蘇斜川卻雲:“不然。”我信山谷。

          趙子昂用筆絕勁,然避難從易,變古為今。用筆既不古,時用章草法便拙。當其好處,古今不易得也。近文太史學趙,去之如隔千裏,正得他不好處耳。枝山多學其好處,真可愛玩,但時有失筆別字。董宗伯全不講結構,用筆亦過弱,但藏鋒為佳,學者或不知。董似未成字,在文下。

          趙松雪出入古人,無所不學,貫穿斟酌,自成一家,當時誠為獨絕也。自近代李楨伯創“奴書”之論,後生恥以為師,甫習執筆,使羞言模仿古人,晉唐舊法于今掃地矣!松雪正是子孫之守家法者爾。詆之以奴,不已過乎!但其立論,欲使字形流美,又功夫過於天資,於古人蕭散廉斷處,微為不足耳。如楨伯書,用盡心力,視古人何如哉?

          [評點]馮班(1602一1670),江蘇常熟人,字定遠,號鈍吟老人。明諸生。為人落拓佯狂,不合時俗,能詩文,善書,尤其精於小楷。著有《定遠集》、《鈍吟詩文稿》、《評點才調集》。書學論著有《鈍吟書要》、《鈍吟雜錄》。《清史稿》卷四百八十四有傳。怒猊抉石:猊,獅子;抉,挑出。“怒猊抉石,渴驥奔泉”二句喻其沉雄奔放之態。這本是唐人評徐浩書法的話,見《新唐書·徐浩傳》。老泉:蘇洵。蘇斜川:蘇過。文太史:文征明。枝山:祝允明。董宗伯:即董其昌。李楨伯:李應楨(1431一1490)本名姓,後以字行,更字楨伯,一作貞伯,官至太僕少卿。明文震孟《姑蘇名賢小記》曰:“少卿書法自成家,蓋軼唐而上,然每恥以是見名."文征明曾從其學書。

          蘇軾、趙孟頫均為一代大家,分析他們的書風源流及得失,無疑可以為後學者提供借鑑。

          東坡書風究竟受何人影響,自然毋須拘於一說。馮班在這段評說中揭示了蘇軾書風形成的關鍵,即兼收並蓄,轉益多師,這對於有志於書法的人來說無疑是值得重視的。

          趙字的優劣曆來議論頗多,有崇尚傳統而極力譽之的,有薄其為人而恣意毀之的。馮班秉持公心,一方面稱贊他恪守傳統,無所不學,自成一家;一方面又指出他用筆不古和追求流美這些缺點。這對于今人認識趙字,學習趙字是很有幫助的,尤其是現在許多人重創新薄傳統,不願苦練基本功,以花拳繡腿沽名一時,讀此能不深自反省?


          11:傅山 ▲Top

          作字示兒孫

          作字先作人,人奇字自古。綱常叛周孔,筆墨不可補。誠懸有至論,筆力不專主。一臂加五指,乾卦六爻睹。誰為用九者,心與孥是取。永興逆羲文,不易柳公語。未習魯公書,先觀魯公詁。平原氣在中,毛穎足吞虜。
          貧道二十歲左右,於先世所傳晉唐楷書法,無所不臨,而不能略肖,偶得趙子昂、董香光墨跡,愛其圓轉流麗,遂臨之,不數過而遂欲亂真。此無他,即如人學正人君子,只覺觚凌難近,降而與匪人遊,神情不覺其日親日密,而無爾我者然也。行大薄其為人,痛惡其書,淺俗如徐偃王之無骨。始復宗先人四、五世所學之魯公,而苦為之。然腕難矣,不能勁瘦挺拗如先人矣。比之匪人,不亦傷乎。不知董太史何見,而遂稱孟頫為五百年中所無。貧道乃今大解,乃今大不解。寫此詩仍用趙態,令兒孫輩知之勿復犯。此是作人一著。然又須知趙卻是用心於王右軍者,只緣學問不正,遂流軟美一途。心手不可欺也如此。危哉!危哉!爾輩慎之。毫釐千裏,何莫非然。寧拙毋巧,寧醜毋媚,寧支離毋輕滑,寧真率毋安排,足以回臨池既倒之狂瀾矣。

          題自臨蘭亭後

          向見邢太僕家所撫定武蘭亭,一味整齊標致,較今諸所引行蘭亭頗懸都鄙,比之唐臨絹本則不無安勉之別矣。及見胡世安所得秘府十六種第一卷,及褚河南臨本,于今野本天淵絕也。始想書評龍跳虎臥之語,非無端造此景響虛譽,今人抹索不得也。褚臨本已爾,不知右軍真跡復當奈何。吾懸擬龍跳似之,尚恐虎臥不盡其變。

          跋孔宙碑

          緩案、急挑、長波、鬱拂八字,頗盡隸書之微,若翹首、揚尾、直剌、邪制,又專指八分璽法,直邪全似用刀矣,而勁筆亦爾。

          散論

          作小楷,須用大力,柱筆著紙,如以千金(斤)鐵杖柱地。若謂小字無須重力,可以飄忽點綴而就,便於此技說夢。寫黃庭經數千過,了用圓鋒,筆香象力,竭誠運腕,肩背供筋骨之輸,久久從右天柱湧起,然後可語奇正之變。

          小楷走波不難,而勒落尤難,刻亦難之,此法書者,勒者,皆等閒置去。

          寫字只在不放肆,一筆一畫,平平穩穩,結構得去,有甚行不得。靜光好書法,收此武拔甫數紙,皆是兢業謹慎時作,惜乎死矣。靜光頗學此筆法,而青於蘭矣。

          寫字無奇巧,只有正拙。正極奇生,歸於大巧若拙已矣。不信時,但於落筆時先萌一意,我要使此字為如何一勢,及成字後與意之結構全乖,亦可以知此中天倪造作不得矣。手熟為能,邇言道破。王鐸四十年前字極力造作,四十年後無意合拍,遂能大家。

          晉自晉,六朝自六朝,唐自唐,宋自宋,元自元,好好筆法近來被一家寫壞,晉不晉,六朝不六朝,唐不唐,宋元不宋元,尚煥煥姝姝自以為集大成,有眼者一見,便窺見室家之好。
          唐林曰:此為董文敏說法。

          予極不喜趙子昂,薄其人遂惡其書。近細視之,亦未可厚非,熟媚綽約,自是賤態,潤秀圓轉,尚屬正脈。蓋自蘭亭內稍變而至此,與時高下,亦由氣運,不獨文章然也。

          吾極知書法佳境,第始欲如此而不得如此者,心手紙筆主客互有乖左之故也。期於如此而能如此者,工也。不期如此而能如此者,天也。一行有一行之天,一字有一字之天。神至而筆至,天也,筆不至而神至,天也。至與不至,莫非天也。吾復何言,蓋難言之。

          楷書不自篆隸八分來,即奴態不足觀。此意老索即得,看急就大了然。所謂篆隸八分,不但形相,全在運筆轉折活潑處論之。俗字全用人力擺列,而天機自然之妙竟以安頓失之。按他古篆隸落筆,渾不知如何布置,若大散亂而終不能代為整理也。寫字不到變化處不見妙,然變化亦何可易到。不自正入,不能變出。但能正入,自無婢賤野俗之氣。然筆不熟不靈,而又忌褻,熟則近於褻矣。志正體直,書法通於射也。元陽之射而鐘老竟不知,這不褻之道也,不可不知。

          吾八九歲即臨元常,不似。少長,如黃庭、曹娥、樂毅論、東方贊、十三行洛神,下及破邪,無所不臨,而無一近似者。最後寫魯公家廟,略得其支離。又朔而臨爭座,頗欲似之,又進而臨蘭亭,雖不得其神情,漸欲知此技之大概矣。老來不能作小楷,然於黃庭,曰厲其微,裁欲下筆,又復千裏。

          字與文不同者,字一筆不似古人即不成字,文若為古人作印板,當得謂之文耶?此中機變不可勝道,最難與俗士言。

          字亦何與人事,政復恐其帶奴俗氣,若得無奴俗習,乃可與論風期日上耳,不惟字。

          楷書不知篆隸之變,任寫到妙境,終是俗格。鐘王之不可測處,全得自阿堵。老夫實實看破地,工夫不能純至耳,故不能得心應手。若其偶合,亦有不減古人之分釐處。及其篆隸得意,真足籲駭,覺古籀真行草隸,本無差別。

          真行無過蘭亭,再下則聖教序。兩者皆無善本。若必求善本而後臨池,此道不幾乎息耶?近來學書家多從事聖教,然皆婢作夫人。聖教比之蘭亭,已是轅下之駒,而況屋下架屋重儓之奴?趙子昂善抹索得此意,然楷中多行,殊不知蘭亭行中多楷也。即蘭亭一記,世之膾炙定武之一,以餘視之,無過唐臨絹本。此可與知者言,難與門外人語。若以大乖論之,子敬尚不可學,何況其他。開米顛一流,子敬之罪;開今日一流,米家之罪。是非作者之罪,是學之者之過也。有志者斷不墮此惡道。此餘之妄談,然亦見許有瞻有識之同人,不敢強人之同我也。

          凡事天勝天,不可期人,純天矣。不習於人而自欺以天,天懸空造不得也。人者天之使也,勤而引之,天不深也,寫字一道,即具是倪,積月累歲自知之。

          混目冒躁之士,曰粗豪,粗非豪也。果豪矣,必不粗也。且道卯君中書者,喜其粗耶,亦屬其銳而長耶?如以粗也,緝羊牛毛如指、如臂、如腹,何難?豈不中用哉?何必兔脊狸背鼠須之選也。

          漢隸之不可思議處,只是硬拙,初無布置等當之意。凡偏旁左右寬窄疏密,信手行去,一派天機。今所行聖林樑鵠碑,如模中物,絕無風味,不知為誰翻撫者,可厭之甚。

          不知篆籀從來而講字學書法,皆寐也,適發明者一笑。

          文章小技,於道未尊,況茲書寫,於道何有?吾家為此者,一連六、七代矣,然皆不為人役,至我始苦應接俗物。每逼面書,以為得真。其時對人作者,無一可觀。且先有忿懣於中,大違心手造適之妙,真正外人那得知也。然此中亦有不傳之秘。強做解人又輒雲能辯吾父子書法,吾獨為之掩口。大概以墨重筆放、滿黑枒杈者為父,以墨輕筆韶、行間明媚者為子。每聞其論,正詅癡耳。三二年來,代我筆者,實多出姪仁,人輒雲真我書。但知子不知姪,往往為我省勞。悲哉,仁徑舍我去一年矣。每受屬撫筆,酸然痛心,如何贖此小阮也。乙卯五月偶記。


          12:韓方明《授筆要說》 ▲Top

            昔歲學書,專求筆法。貞元十五年,授法於東海徐公璹,十七年授法於清河崔公邈,由來遠矣。自伯英以前,未有真、行、草書之法,姚思廉奉詔論書雲:“王僧虔答竟陵王書雲:‘張芝、韋誕、鐘會、索靖、二衛並得名前代,古今既異,無以辨其優劣,唯見筆力驚絕耳。'”時有羅暉、趙襲並善書,與張芝同著名,而張矜巧自許,眾頗惑之。常與太僕朱寬書曰:上比崔、杜不足,下方羅、趙有餘。今言自古能書,皆雲鐘、張,按張自矜巧,為眾所惑。今言筆法,亦不言自張芝。芝自雲比崔、杜不足,即可信乎筆法起自崔瑗子玉明矣。清河公雖雲傳筆法於張旭長史,世之所傳得長史法者,惟有得“永”字八法,次有五執筆,已下並未之有前聞者乎。方明傳之於清河公,問八法起於隸字之始,後漢崔子玉曆鐘、王以下,傳授至於永禪師,而至張旭始弘八法,次演五勢,更備九用,則萬字無不該於此,墨道之妙,無不由之以成也。

            夫把筆有五種,大凡管長不過五六寸,貴用易便也。

            第一執管。夫書之妙在於執管,既以雙指苞管,亦當五指共執,其要實指虛掌,鉤擫訐送,亦曰抵送,以備口傳手授之說也。 世俗皆以單指苞之,則力不足而無神氣,每作一點畫,雖有解法, 亦當使用不成。曰平腕雙苞。虛掌實指,妙無所加也。

            第二*<扌族>管,亦名拙管。謂五指共扌族其管末,吊筆急疾,無體之書,或起藁草用之。今世俗多用五指扌族管中,則全無筋骨,慎不可效也。

            第三撮管。謂以五指撮其管末,惟大草書或書圖幛用之,亦與拙管同也。

            第四握管。謂撚拳握管於掌中,懸腕以肘助力書之。或雲起自諸葛誕,倚柱書時,雷霹柱裂,書亦不輟。當用壯氣,率以此 握管書之,非書家流所用也。後王僧虔用此法,蓋以異於人故, 非本為也。近有張從申郎中拙然而為、實為此笑也。

            第五搦管。謂從頭指至小指,以管於第一、二指節中搦之,亦是效握管,小異所為。有好異之輩,竊為流俗書圖幛用之,或 以承凡淺,時提轉,甚為怪異、此又非書家之事也。

            徐公曰:執筆於大指中節前,居動轉之際,以頭指齊中指,兼助為力、指自然實,掌自然虛。雖執之使齊,必須用之自在。 今人皆置筆當節,礙其轉動,拳指塞掌,絕其力勢。況執之愈急, 愈滯不通,縱用之規矩,無以施為也。

            又曰:夫執筆在乎便穩,用筆在乎輕健,故輕則須沉,便則須澀,謂藏鋒也。不澀則險勁之狀無由而生也,太流則便成浮滑, 浮滑則是為俗也。故每點畫須依筆法,然始稱書、乃同古人之跡, 所為合於作者也。

            又曰:夫欲書先當想,看所書一紙之中是何詞句。言語多少,及紙色目,相稱以何等書令與書體相合,或真或行或草,與紙相當。然意在筆前,筆居心後、皆須存用筆法,想有難書之字,預於心中布置,然後下筆,自然容與徘徊,意態雄逸,不得臨時無 法,任筆所成,則非謂能解也。

          [評點]韓方明,唐代貞元年間書法家,生平事跡不詳。自雲:昔歲學書專求筆法,貞元十五年,授法於東海徐公璹,十七年授法於清河崔公邈。
            《授筆要說》一篇,前敘筆法傳授,自謂授法于徐璹、崔邈, 後言執筆五法。大抵唐以前作書,頗重執筆之法,故言者較多。 但所引名家口授秘傳,並不可靠。


          13:韓愈《送高閒上人序》 ▲Top

          苟可以寓其巧智,使機應於心,不挫於氣,則神完而守固,雖外物至,不膠於心。堯、舜、禹、湯治天下,養叔治射,庖丁治牛,師曠治音聲,扁鵲治病,僚之於丸,秋之於奕,伯倫之於酒,樂之終身不厭,奚暇外慕?夫外慕徙業者,皆不造其堂,不嚌其胾者也。

          往時張旭善草書,不治他技。喜怒窘窮,憂悲、愉佚、怨恨、思慕、酣醉、無聊、不平,有動於心,必於草書焉發之。觀於物,見山水崖谷,鳥獸蟲魚、草木之花實,日月列星,風雨水火,雷霆霹靂,歌舞戰鬥,天地事物之變,可喜可愕,一寓於書。故旭之書,變動猶鬼神,不可端倪,以此終其身而名後世。今閒之於草書,有旭之心哉!不得其心而逐其跡,未見其能旭也。為旭有道,利害必明,無遺錙銖,情炎於中,利欲鬥進,有得有喪,勃然不釋,然後一決於書,而後旭可幾也。

          今閒師浮屠氏,一死生,解外膠。是其為心,必泊然無所起,其於世,必淡然無所嗜。泊與淡相遭,頹墮委靡,潰敗不可收拾,則其於書得無象之然乎!然吾聞浮屠人善幻,多技能,閒如通其術,則吾不能知矣。

          [評點]韓愈對張旭的狂草創作作了完整而系統的考察,得出他是以情感為核心的表現程序的結論,從而揭示了狂草創作藝術思維模式:情感——書法,物象——情感——書法。這在當時是對狂草藝術本質一個棄舊立新、由表及裏的深層探索。正是韓愈此說剔除了張旭書法中的庸俗性一面,其精神實質被大大宣揚,因此,張旭的書法在後代更受推崇。

          韓氏站在儒家積極入世的功利主義立場上肯定了張旭的書法,並對釋家的高閒書法問難。在他看來,一個“四大皆空",一心出世的和尚不具備“利害必明”、“利欲鬥進"的條件,一切歸於淡泊就不可能產生激情,沒有激情,任憑高閒怎樣縱橫揮掃,也將只有空洞的形式,而無真苦、真樂、真淚的精神內容,也就無所謂書了。這種不加掩飾的儒家功利主義的藝術觀,雖然有其正確的一面,但以為“入世”才有“情"、“出世”則無“情”,這就把“情感”理解得太片面了。


          14:何紹基 ▲Top

          跋陳敘齋藏趙文敏書千文
          智師真草《千文》,草書分行比格,與真書齊同,故意近章草,而少參差超邁之趣。惟懷素小草書《千文》,神明變化,妙極古穆。文敏為此,使轉縱橫有自然湊泊之妙,蓋曾見素師墨跡而仿為之者。素師卷今在六舟上人小綠天庵中。敘齋前輩嗜古搜奇,亦曾寓目及之否?

          跋僧六舟藏米書老人星賦墨跡
          楷則至唐賢而極,其源必出八分。唐人八分去兩京遠甚,然略能上手,其於真書已有因規折矩之妙。宋人不講楷法,至以行草入真書,世變為之也。唐賢三昧遠矣,況山陰裴幾乎?襄陽精於摹古,跡恆苦行草中無楷法。此《老人星賦》典型莊正,乃有六朝之方整,而兼北海、季海之寬綽穩實者。[寬處可使走馬,密處不使透風,]信有此理。昔曾見米老大篆分石刻古拓本,欹斜無範,不料其入真書中已有此力量。顧其真書不多見者,欲以簡禮逾二王,不欲以模楷媲唐賢耳。究之短長自在,何若乃口口耶。

          跋文氏停雲館刻晉唐小楷
          山陰真面目無處尋覓,世間紛尚《黃庭》,其實了不見古人意思,即此刻亦苦橫、直、撇、捺、戈法無古勁厚遠之氣矣。惟《曹娥》全是分書意度。餘嘗謂度尚大字八分碑,右軍仿其意作小真書,故心手間尚有分法。子敬《洛神賦》用筆橫逸疏宕,欲出父書之外,頗見本色。欲求二王律令,觀此兩種可想象十一,其餘殆無足摹覽,非謂《停雲》刻不佳也。

          跋賈秋壑刻閣貼初拓本
          唐以前碑碣林立,發源篆分,體歸莊重,又書手、刻手各據所長,規矩不移,變化百出。匯帖一出,合數十代千百人之書歸於一時,鉤摹出於一手。於執筆者性情骨力既不能人人揣稱,而為此務多矜媚之事者,其人之性情骨力已可想見,腕下筆下刀下又止此一律。況其人本無書名,天下未有不善書而能刻古人書者,亦未有能一家書而能刻百家書者。餘少年亦習摹勒,彼時習平原書,所鉤勒者即盡與平原近。心是所學,謂本是一意,後漸於書律有進,乃知其誤也。《戲鴻》、《停雲》疵議百出,弊正坐此。而《淳化》則罕有雌黃,特因其所從出者,世不睹其初本,不能上下其議論耳。以餘臆見揣之,共爐而冶,五金莫別,宋人書格之壞,由《閣帖》壞之。類書盛於唐,而經旨歧類;帖起於五代、宋,而書律墮。門戶師承掃地盡矣。古法既湮,新態自作,八法之衰有由然也。懷仁《聖教》集山陰裴幾而成,珠明魚貫,風矩穆然,然習之化丈夫為女朗,縛英雄為傀儡,石可毀也,氈椎何貴耶!匯帖遂俑於此,重畢施繆更相沿襲,《淳化》遂成祖本,尊無二上。南渡以後,災石未已,試看匯帖中於古人碑版,方重之字不敢收入一字,非以其難似乎?簡札流傳,欹斜宛轉以取姿趣,隨手鉤勒,可得其屈曲之意。唐碑與宋帖,低昂得失,定可知矣。[羲之俗書趁姿媚],昌黎語豈為過哉!東坡、山谷、君謨、襄陽、不受束縛,努力自豪,然擺脫拘束,率爾會真者,惟坡公一人。三子者皆十九人等耳。

          跋吳平齋藏爭坐位帖宋拓本
          [折釵股],[屋漏痕],特形容之辭,機到神來,往往有之,非必謂如是乃貴也。有意為之,必成頓滯。至習顏書者,尤先習其莊楷,若驟摹是帖,即墮入惡道矣。顏楷帖多於顏行,所以競習《坐位》者不過期速化耳。凡事畏難不如其已。

          跋大字麻姑山仙壇記宋拓本
          顏書各碑,意象種種不同,此碑獨以樸勝,正是變化狡獪之極耳。惜公書原刻傳至今日者不逾十石,未足盡窺其轉形易勢之妙也。

          跋重刻李北海書法華寺碑
          北海書,石刻惟《大照禪師碑》餘未及見。所見者,若《戒壇銘》、《葉國重碑》、《娑羅樹碑》、《東林寺碑》皆翻本,無足觀。至《李思訓碑》、《任令則碑》之蕩軼,《端州石室記》之敦樸,《麓山寺碑》之遒勁,《李秀碑》之肅穆,《盧正道碑》之精麗,《靈岩寺碑》之靜逸,《龍興寺額》四大字雄厚,既各造其妙,而純任天機。渾脫充沛,則以《法華寺碑》為最勝,去春在吳門韓履卿丈崇以此宋拓本見詒,攜至濟南,手自鉤摹,令老僕陳芝勒石,雖於神理未能微肖,然規模粗具矣。
          北海書於唐初諸家外,自樹一幟,與魯公同時並驅。所撰書多方外之文,以剛烈不獲令終,大略俱與魯公同。餘平生於顏書手鉤《忠義堂》全部,又收藏宋拓本《祭伯文》、《祭姪文》、《大字麻姑壇記》、《李元靖碑》,於李書則見北《雲麾》原石全拓於番禺潘氏,收宋拓《麓山寺碑》於杭州,近日收得《靈岩寺碑》上下兩段於長清靈岩山魯般洞,見古拓精本《盧府君碑》於崇雨令中丞處,今夏得此宋拓《法華寺碑》,墨緣重疊,可雲厚幸。竊謂兩公書律,皆根矩篆分,淵源河北,絕不依傍山陰。餘習書四十年,堅持此志,於兩公有微尚焉。苦臂腕孱弱,復多嗜少專,瞻望前哲,徒增嘆愧耳。

          跋麓山寺碑並碑陰舊拓本
          是碑題額曰《麓山寺碑》,碑文雲[麓山寺]者,知俗稱岳麓寺者誤也。北海書發源北朝,復以其乾將莫邪之氣,決蕩而出,與歐、虞規矩山陰者殊派,而奄有徐會稽、張司直之勝。顧世間石刻日少,《李秀》僅存六礎,原石拓在南海潘氏者,早成孤本。《靈岩寺碑》自阮文達師纂《山左金石志》時,已雲僅存趙晉齋家藏拓本矣。近日吾兒慶涵忽得一本與趙藏無二,然亦止此兩本耳。《東林寺》、《葉有道》久無原石,《娑羅樹》亦重攜本,《端州石室記》、《少林寺戒壇銘》則本非真跡。其恆赫世間者,止陝《雲麾》與《麓山寺》而已。《雲麾》頗嫌多輕悅處,惟此碑沈著勁慄,不以跌宕掩其樸氣,最為可貴。碑陰字肅穆靜實與《李秀碑》近,當日書意兼有此兩路,而是碑乃兼具之也。

          跋周允臣藏關中城武廟堂碑拓本
          覃溪論書,以永興接山陰正傳、此說非也。永興書欹側取勢,宋以後楷法之失,實作俑於永興。試以智師《千文》與《廟堂碑》對看,格局筆法,一端嚴,一逋雋,消息所判,明眼人自當辨之。因其氣味不惡,又為文皇當日所特賞,遂得名重後世。若論正法眼藏,豈惟不能並軌歐、顏,即褚、薛亦尚勝之。餘雖久持此論,而自覃溪、春湖兩先生表彰《廟堂》,致學者翕然從之,皆成榮咨道之癖,餘不能奪也。

          跋道因碑拓本
          是帖拓不甚舊,而裝飾精致,珍如古物。每想宋時拓帖,至今日皆寶儕彝鼎,而汴、杭書律不復有唐賢規矩,東坡、山谷亦自用其才,不遵軌轍。當時氈臘皆宋拓也,視如塵土,此事遂淵源欲絕。若得知珍重如是本者,何至宋、元來楷法竟不可問津乎?餘學書四十餘年,溯源篆分,楷法則由北朝求篆分入真楷之緒,知唐人八法以出篆分者為正軌。守山陰裴幾者,止能作小字,不能為大字。率更模《蘭亭》,特因上命,以已意仿前式,手眼中謂有右軍,吾不信也。蘭亭善承家法,又沉浸隸古,厚勁堅凝,遂成本家極筆。後來惟魯公、北海各能出奇,可與是鼎足,而有唐書勢于是盡矣。大孫能習是帖,餘舊得宋拓有夢樓跋者,後復得一本勝此,最後得此本,亦勝近拓,而裝覃之佳如此,珍之珍之!

          跋張星伯藏道因碑宋拓本
          二十年前,見《房彥謙碑》分書筆勢與《道因》楷法相同,疑即都尉所書,而誤傳為率更者,彼時尚未見碑陰有率更銜名書款也。然鄙意以為率更分書橫逸峭勁,非韓、蔡所能到,以其法為真、行,殊無庸借徑山陰。乃所傳《虞恭公》、《化度》諸碑,俱不能出山陰貴矩。由太宗重二王,尤秘《蘭亭》繭紙,至令諸臣模寫。渤海特出之姿,亦不能歸其軌。由善媽幼孤,克承家法,乃能以率更分書意度力量並其形貌,運入真書,
          卓自立,以傳於後,豈非墨林中一巨孝哉!

          跋道因碑舊拓本
          有唐一代,書家林立,然意兼篆分涵抱萬有,則前惟渤海後惟魯國,非虞、褚諸公所能頡頏也。此論非深於篆分真草源流本末者,固不能信。都尉此書逼真家法,握拳透掌,模之有稜,其險勁橫軼處,往往突過乃翁,所謂智過其師,乃堪傳授也。欲學渤海,必當從此帖問津。若初學執筆,便模仿《化度》、〈醴泉〉,譬之不掛帆而涉海耳。世人作書,動輒雲[去火氣],吾謂其本無火氣,何必言去?能習此種帖,得其握拳透掌之勢,庶乎有真火氣出。久之如洪爐冶物,氣燄照空,乃雲去乎?庸腕拙爾,如病在陽衰,急須參、耆、桂、附以補其元陽,庶氣足生血。今顧日以滋陰為事,究之氣不長,而血亦未嘗生也。書道貴有氣、有血、否則倔馀於血,尚不至不成丈夫耳。此舊拓本在今日已為難得,寒夜展視,聊發臆論。時庭前聚雪為山,有萬笏乾霄之勢。丁酉冬臘八日漫記,是日甚寒,字字欲凍。

          跋祁叔和藏宋翻宋拓化度寺碑
          《醴泉銘》以疏抗勝,《邕師銘》以遒肅勝,得此古拓觀之,可以窺見吾鄉率更真實力量,不依傍山陰裴幾處,叔得兄方勤習篆分,八法源流當已洞徹,頗以斯語為然否?

          跋汪鑑齋藏虞恭公溫公碑舊拓本
          書家有南北兩派,如說經有西、東京,論學有洛、蜀黨,談禪有南北宗,非可強合也。右軍南派之宗,然而《曹娥》、《黃庭》則力足以兼北派,但絕無碑版巨跡,抑亦望中原而卻步耳。唐初四家,永興專祖山陰,褚、薛純乎北派,歐陽信歐陽信本從分書入手,以北派而兼南派,乃一代之右軍也。《醴泉》宏整而近闊落
          ,《化度》遒緊而近欹側,《皇甫》肅穆而近窘迫,惟《虞恭公碑》和介相兼,形神俱足,當為現存歐書第一。前輩推重《化度》,乃以少見珍耳,非通論也。餘於鹹豐乙卯冬,至昭陵細觀此碑,其下截半字殘畫尚多,而拓者皆遺之,但取完字,故相傳古拓無有過八百字者。此拓精膩有韻,金和玉節,折矩周規,令人使盡氣力無從仿佛昔朱朵山殿撰藏本劇佳,此尚當過之也。

          跋崇雨令藏智永千文舊拓本
          右軍書派,自大令已失真傳。南朝宗法右軍者,簡牘狎書耳。至於楷法精詳,筆筆正鋒,亭亭孤秀,於山陰裴幾直造單微,惟有智師而已。永興書出智師,而側筆取妍,遂開宋、元以後習氣,實書道一大關鍵,深可慨嘆。
          先文安公藏宋拓本,臨仿有年,每以[橫平堅直]四字訓兒等。餘肄書泛濫六朝,仰承庭誥,惟以此四字為律令。於智師《千文》持此見久矣,未敢宣諸楮墨也。雨令中丞工書耽古,出示一本,雖非宋拓,然神採腴潤飛動,自是數百年物。

          跋牛雪樵丈藏智永千文宋拓本
          顏魯國與素師論書,謂[折釵股何如屋漏痕?]屋漏痕者,言其無起止之痕也。顧唐賢諸家,於使轉縱橫處皆筋骨露現,若智師《千文》筆筆從空中落,從空中住,雖屋漏痕猶不足以喻之。二王楷書,俱帶八分體勢,此視之覺漸遠於古。永興得筆於智師,乃於疏密邪正處著意作姿態,雖開後來無數法門,未免在鐵門限外矣。

          跋魏張黑女墓志拓本
          包慎翁之寫北碑,蓋先於我二十年,功力既深,書名甚重於江南,從學者相矜以包派。餘以[橫平豎直]四字繩之,知其於北碑未為得髓也。記問浩博,口如懸河,酒後高睨大談,令人神王,今不可復得矣。
          餘既性嗜北碑,故摹仿甚勤,而購藏亦富。化篆分入楷,遂爾無種不妙,無妙不臻。然遒厚精古,未有可比肩《黑女》者。每一臨寫,必回腕高懸,通身力到,方能成字,約不及半,汗浹衣襦矣。因思古人作字,未必如此費力,直是腕力、筆鋒天生自然,我從一二千年後策駑駘以躡騏驥,雖十駕為徒勞耳,然不能自已矣。

          跋玉版洛神賦十三行拓本
          意思奇矯,所謂[外人那得知]者,直亦不欲其遽知耳。後《鶴銘》實師其意。唐則誠懸,宋則東坡,根矩秘傳,波瀾不二,良工不示人以樸,故亦無道破及此者。然非如此佳刻,亦何從窺其津逮耶?
          劉文清跋雲:[唐人臨本,亦從永興法中來。]唐臨斷不能臻此,謂是唐模可耳。至永興法出智師,而不能盡其渾融變化之妙,於子敬此帖風馬牛也。文清書格到宋人,而短於鑑別,故所見如此。
          嘗怪坡公書,體格不到唐人而氣韻卻到晉人,不解其故。既而思之,由天分超逸,不就繩矩,而於《黃庭》、《禊敘》所見皆至精本,會心所遇,適與腕迎。子敬《洛神》則所心摹手追,得其體勢者,來往焦山,於貞白《鶴銘》必間坐臥其下,遂成一剛建婀娜百世無二之書勢,為唐後第一手。餘生也晚,若起公於九京當不以斯言為謬誤。但恐以漏洩秘蘊,被公呵責耳。
          斜正信絀不使一直筆,能臨楮出此意耶?腕際縱橫,胸中兀傲,自然造此耳。明賢乃無睹斯境者,為松雪所縛也。

          跋舊拓肥本黃庭經
          觀此帖橫直撇捺,皆首尾直下,此古屋漏痕法也。二王雖作草,亦是此意。唐人大家,同此根矩。宋人雖大家,不盡守此法矣。乃停雲館刻,此帖多紆折取勢,剛柔厚薄相去蓋遠。停雲以越州石氏為祖本,我知石氏本必不然也,文氏以已意為之耳。
          神虛體直,骨堅韻深。 以唐賢大楷求《黃庭》遺矩,此真知書人語。又每以《鶴銘》與《黃庭》合觀,最為得訣矣。
          今世《黃庭》皆從吳通微寫本出,又復沿模失真,字勢皆屈左伸右,為斜迆之態,古法遂失。元、明書家皆中其弊。苦不自悟者,由不肯看東京、六朝各分楷碑版,致右軍面目亦被掩失入矣。試玩此帖
          ,當有會心處。然從未習分書者,仍難與語此也。 合南北二宋,為書家度盡金針,前惟《黃庭》,後惟《化度》,中間則貞白《鶴銘》,智永《千文》耳。

          跋褚臨蘭亭拓本
          《禊帖》傳本,大抵以纖婉取風致,學者臨摹,遂往往入於飄弱。竊疑右軍當日以鼠須寫蠶繭,必不徒以纖婉勝。唐初諸賢臨本,亦當似之。故臨此帖者仍當以凝厚為主,子昂乃深得此意。世間《禊帖》石刻無慮數十百本,而其精神氣息,全在學書者自賞於牝牡驪黃之外,無取紛紛聚訟也。是本風致婉弱,雖非精本,於初學誠非無補雲爾。
          右軍行草書,全是章草筆意,其寫《蘭亭》乃其得意筆,尤當深備八分氣度。初唐諸公臨本,皆窺此意,故茂逸超邁之神,如出一轍。然欲遽指為山陰原墨,則誠未見何本為可據。以其中總不免有齊、隋以後筆致也。近日《禊本》皆纖瘦少精神,獨此覺墨暈間尚有風力,可算佳本。

          跋吳平齋藏秦山二十九字拓本
          秦相易古籀為小篆,遒肅有馀而渾噩之意遠矣。用法刻深,蓋亦流露於書律。此二十九字古拓可珍,然欲溯源周前,尚不如兩京篆勢寬展圓厚之有味。斫雕為樸,破觚為圓,理固然耳。

          書鄧完伯先生印冊後為守之作
          餘廿歲時始讀《說文》、寫篆字。侍遊山左,厭飫北碑,窮日夜之力,懸臂臨摹,要使腰股之力悉到指尖,務得生氣。每著意作數字,氣力為疲爾,自謂得不傳之秘。後見石如先生篆分及刻印,驚為先得我心,恨不及與先生相見。而先生書中古勁橫逸、前無古人之意,則自謂知之最真。張翰翁、包慎翁、龔定庵、魏默深、周子堅,每為餘言完翁摹古用功之深,餘往往笑應之。我自心領神交,不待旁人告語也。慎翁自謂知先生最深,而餘不以為然者,先生作書於準平繩直中自出神力,柔毫勁腕,純用筆心,不使欹斜,備盡轉折,慎翁於平,直二字全置不講,扁筆側鋒,滿紙俱是,特胸有積軸,具有氣韻耳,書家古法掃地盡矣。後學之避難趨易者,靡然從之,競談北碑,多為高論。北碑方整厚實,惟先生之用筆鬥起直落,舍易趨難,使盡氣力不離故處者,能得其神髓,篆意草法時到兩京境地矣。慎翁字皆現做,殆未足知先生也。先生作印使刀如筆,與書律純用筆心者正同。哲嗣守之兄搜藏各書印冊,餘獲見久矣,未嘗敢著一語,酒後縱墨題此用別紙寫,不書於冊者,願守之為我秘之也。


          15:黃庭堅《論書》 ▲Top

          《蘭亭敘草》,王右軍平生得意書也。反復觀之,略無一字一筆不可人意,摹寫或失之肥瘦,亦自成研,要各存之以心會其妙處爾。---《跋蘭亭》
            《蘭亭》雖是真行書之宗,然不必一筆一畫以為準,譬如周公、孔子,不能無小過,過而不害其聰明睿聖,所以為聖人。不善學者即聖人之過處而學之,故蔽於一曲,今世學《蘭亭》者多此也。魯之閉門者曰:“吾將以吾之不可學柳下惠之可。”可以學書矣。---《跋蘭亭》
            餘在黔南末甚覺書字綿弱,及移戎州,見舊書多可憎,大概十字中有三四差可耳。今方悟古人“沉著痛快”之語,但難為知音爾。李翹叟出褚遂良臨右軍書《文賦》,豪勁清潤,真天下之奇書也。---《書右軍文賦後》
            右軍嘗戲為龍爪書,今不復見。餘觀《瘞鶴銘》,勢若飛動,豈其遺法耶?歐陽公以魯公書《宋文貞碑》得《瘞鶴銘》法,詳觀其用筆意,審如公說。---《題瘞鶴銘後》
            餘嘗論近世三家書雲:“王著如小僧縛律,李建中如講僧參禪,楊凝式如散僧入聖。當以右軍父子書為標準。”觀予此言,乃知遠近。---《跋法帖》
            大令草法殊迫伯英,淳古少可恨,彌覺成就爾。所以中間論書者,以右軍草人能品,而大令草入神品也。餘嘗以右軍父子草書比之文章,右軍如左氏,大令似莊周也。由晉以來難得脫然都無風塵氣似二王者,惟顏魯公、楊少師仿佛大令爾。魯公書今人隨俗多尊尚之,少師書口稱善而腹非也。欲深曉楊氏書,當如九方皋相馬,遺其玄黃牝牡乃得之。---《跋法帖》
            餘嘗評書,字中有筆,如禪家句中有眼。至如右軍書,如《涅口經》說“伊字具三眼”也。此事要須自體會得,不可立論便興諍也。---《題繹本法帖》
            王氏書法以為如錐畫沙,如印印泥,蓋言鋒藏筆中,意在筆前耳。承學之人更用《蘭亭》、“永”字以開字中眼目,能使學家多拘忌,成一種俗氣。要之右軍二言,群言之長也。---《題繹本法帖》
            鐘大理表章致佳,世間蓋有數本,肥瘠大小不同,蓋後來善臨拓本耳。要自皆有佳處,兩晉士大夫類能書,筆法皆成就,右軍父子拔其萃耳。觀魏晉間人論事,皆語少而意密,大都猶有古人風澤,略可想見。論人物要是韻勝為尤難得,蓄書者能以韻觀之,當得仿佛。---《題繹本法帖》

            觀江南李主手改草表,筆力不減柳誠懸,乃知今世石刻,曾不能得其仿佛。餘嘗見李主與徐鉉書數紙,自論其文章筆法政如此,但步驟太露,精神不及。此數字筆意深穩。蓋刻意與率爾為之,工拙便相懸也。---《跋李後主書》
            顏魯公書雖自成一家,然曲折求之,皆合右軍父子筆法。書家多不到此處,故尊尚徐浩、沈傳師爾。九方皋得千裏馬於沙丘,眾相工猶笑之。今之論書者多牡而驪者也。《跋洪駒父諸家書》
            東坡簡札,字形溫潤,無一點俗氣。今世號能書者數家,雖規摹古人自有長處,至於天然自工,筆圓而韻勝,所謂兼四子之有以易之不與也。建中靖國元年五月乙巳觀於沙市舟中。同觀者劉觀國、王霖,家弟寂向,小子相。---《題東坡字後》
            餘嘗論右軍父子翰墨中逸氣破壞於歐、虞、褚、薛,及徐浩、沈傳師幾於掃地,惟顏尚書、楊少師尚有仿佛。比來蘇子瞻獨近顏、楊氣骨,如《牡丹帖》,甚似白家寺壁。百馀年後,此論乃行爾。---《跋東坡帖後》
            東坡書隨大小真行皆有嫵媚可喜處。今俗子喜譏評東坡,彼蓋用翰林侍書之繩墨尺度,是豈知法之意哉!餘謂東坡書學問文章之氣鬱鬱芋芋發於筆墨之間,此所以他人終莫能及爾。---《跋東坡書遠景樓賦後》
            少年以此增來乞書,渠但聞人言老夫解書故來也爾,然未必能別功口也。學書要須胸中有道義,又廣之以聖哲之學,書乃可貴。若其靈府無程政,使筆墨不減元常、逸少,只是俗人耳。餘嘗為少年言,土大夫處世可以百為,唯不可俗,俗便不可醫也。或問不俗之狀,老夫曰:“難言也。視其平居無以異於俗人,臨大節而不可奪,此不俗人也。平居終日,如含瓦石,臨事一籌不畫,此俗人也。”雖使郭林宗、山巨源復生,不易吾言也。---《書增卷後》
            舊為陳誠老作此書,不知乃歸楊廣道已數年。餘滴黔南道出尉氏,廣道持以相訪,茫然似不出餘手,梵志所謂“吾猶昔人非昔人者耶”!紹聖甲戌在黃龍山中忽得草書三昧,覺前所作太露芒角。若得明窗淨幾,筆墨調利,可作數乾字不倦,但難得此時會爾。---《書自作草後》
            往時王定國道餘書不工,書工不工是不足計較事,然餘未嘗心服。由今日觀之,定國之言誠不謬。蓋用筆不知禽縱,故字中無筆耳。字中有筆,如禪家句中有眼。非深解宗趣,豈易言哉!---《自評元祐間字》
            東坡先生雲:“大字難於結密而無間,小字難於寬綽而有馀”寬綽而有馀,如《東方朔畫像贊》、《樂毅
          論》、《蘭亭禊事詩敘》、先秦古器科鬥文字。結密而無間,如焦山崩崖《瘞鶴銘》,永州磨崖《中興頌》,李斯《嶧山》刻秦始皇及二世皇帝沼。近世兼二美,如楊少師之正書、行、草,徐常侍之小篆。此雖難為俗學者言,要歸畢竟如此。如人眩時五色無主,及其神澄意定,青黃皂白亦自粲然。學書時時臨摹可得形似,大要多取古書細看,令入神,乃到妙處;唯用心不雜,乃是入神要路。---《書贈福州陳繼月》
            凡學書欲先學用筆。用筆之法欲雙鉤回腕,掌虛指實,以無名指倚筆,則有力。古人學書不盡臨摹,張古人書於壁問,觀之入神,則下筆時隨人意。學字既成,且養於心中,無俗氣然後可以作,示人為楷式。凡作字,須熟觀魏晉人書,會之於心,自得古人筆法也。欲學草書,須精真書,知下筆向背,則識草書法,草書不難工矣。---《跋與張載熙書卷後》
            元符二年三月十三日,步自張園看酥醾回,燭下試宣城諸葛方散卓,覺筆意與黔州時書李白《白頭吟》筆力同中有異,異中有同。後百年如有別書者,乃解餘語耳。張長史折釵股,顏太師屋漏法,王右軍錐畫沙,印印泥,懷素飛鳥出林,驚蛇人草,索靖銀鉤蠆尾:同是一筆,心不知手,手不知心法耳。若有心與能者爭衡後世不朽,則與書藝工史輩同功矣。---《論黔州時字》
            近世士大夫書,富有古人法度唯宋宣獻公耳。如前翰林侍書王著書《樂毅論》及周興嗣《千字》筆法圓勁,幾似徐會稽,然病在無韻。如宣獻公能用,徐季海筆,暮年擺落右軍父子規摹,自成一家,當無遺恨矣。---《跋常山公書》
            幼安弟喜作草,攜筆東西家動輒龍蛇滿壁,草聖之聲欲滿江西。來求法於老夫,老夫之書,本無法也。但觀世間萬緣如蚊納聚散,未嘗一事橫於胸中,故不擇筆墨,遇紙則書,紙盡則已,亦不計較工拙與人之品藻譏彈。譬如木人舞中節拍,人嘆其工,舞罷則雙蕭然矣。幼安然吾言乎?---
          《書家弟幼安作草後》
            餘書姿媚而乏老氣,自不足學。學者輒萎弱不能立筆,雖然筆墨各系其人工拙,要須韻勝耳。病在此處,筆墨雖工不近也。又學書端正則窘於法度,側筆取研往往工左尚病右。正書如右軍《霜寒表》,大令《乞解台職狀》,張長史《郎官廳壁記》,皆不為法度病其風神。至於行書,則王氏父子隨肥瘠皆有佳處,不復可置議論。近世惟顏魯公、楊少師特為絕倫,甚妙於用筆,不好處亦撫媚,大抵更無一點一畫俗氣。比來士大夫惟荊公有古人氣質而不端正,然筆間甚遒。溫公正書不甚善,而隸法及端勁似其為人。---《論書》

            昔予大父大夫公及外祖特進公,皆學暢整《遺教經》及蘇靈芝《北岳碑》,字法清勁,筆意皆到,但不入俗人眼爾。數十年來,士大夫作字尚華藻而筆、不實,以風檣陣馬為痛快,以插花舞女為姿媚,殊不知古人用筆也。客有惠棕心扇者,念其太樸,與之藻飾,書老杜“巴中”十詩。頗覺驅筆成字,都不為筆所使,亦是心不知手,手不知筆,恨不及二父時耳。下筆痛快沉著,最是古人妙處,試以語今世能書人,便十年分疏不下。頓覺驅筆成字,都不由筆。---《書十棕心扇因自評之》
            凡書要拙多於巧。近世少年作字,如新婦子妝梳,百種點綴,終無烈婦態也。---《李致堯乞書書卷後》
            予學草書三十馀年,初以周越為師,故二十年抖擻俗氣不脫,晚得蘇才翁子美書觀之,乃得古人筆意;其後又得張長史、僧懷素、高閒墨跡,乃窺筆法之妙。今來年老懶作此書,如老病人扶杖隨意傾倒,不復能工,顧異于今人書者,不紐提容止強作態度耳。---《書草老杜詩後與黃斌老》
            古人有言:“大字無過《瘞鶴銘》,小字莫學癡凍蠅,隨人學人成舊人,自成一家始逼真。”今人字自不案古體惟務排疊,字勢悉無所法,故學者如登天之難。凡學字時,先當雙鉤,用兩指相疊蹙筆壓無名指,高提筆,令腕隨己意左右。然後觀人字格則不患其難矣,異日當成一家之法焉。---《論寫字法》
            近時士大夫罕得古法,但弄筆左右纏繞遂號為草書耳,不知與科鬥、篆、隸同法同意。數百年來惟張長史、永州狂僧懷素及餘三人悟此法耳。蘇才翁有悟處而不能盡其宗趣,其馀碌碌耳”。---《跋此君軒詩》
            心能轉腕,手能轉筆,書寫便如人意。古人工書無他異,但能用筆耳。
            草書妙處須學者自得,然學久乃當知之。墨池筆家,非傳者妄也。
            肥字須要有骨,瘦字須要有肉。古人學書學其二處,令人學書肥瘦皆病,又常偏得其人醜惡處,乃其可慨然者。
            楷法欲如快馬人陣,草法欲左規右矩”,此古人妙處也。書字雖工拙在人,要須年高手硬,心意閒澹,乃人微耳。


          16:姜夔《續書譜》 ▲Top

            總論

            真行草書之法,其源出於蟲篆、八分、飛白、章草等。圓勁古澹,則出於蟲篆;點畫波發,則出於八分,轉換向背,則出于飛白,簡便痛快,則出於章草。然而真草與行,各有體制。歐陽率更、顏平原輩以真為草,李邕、西台輩以行為真,亦以古人有專工正書者,有專工草書者,有專工行書者,信乎其不能兼美也。或雲,草書千字,不抵行草十字;行草十字,不如真書一字。意以為草至易而真至難,豈真知書者哉!大抵下筆之際,盡仿古人,則少神氣;專務遒勁,則俗病不除。所貴熟習精通,心手相應,斯為美矣。白雲先生、歐陽率更書訣亦能言其梗概,孫過庭論之又詳,可參稽之。

            真書

            真書以平正為善,此世俗之論,唐人之失也。古今真書之神妙,無出鐘元常,其次則王逸少。今觀二家之書,皆瀟灑縱橫,何拘平正?良由唐人以書判取士,而士大夫字書,類有科舉習氣。顏魯公作《乾祿字書》,是其證也。矧歐、虞、顏、柳,前後相望,故唐人下筆,應規入矩,無復魏晉飄逸之氣。且字之長短、大小、斜正、疏密,天然不齊,孰能一之?謂如“東”字之長,“西”字之短“口”字之小,“體”字之大,“朋”字之斜,“黨”字之正,“千”字之疏,“萬”字之密,畫多者宜瘦,少者宜肥,魏晉書法之高,良由各盡字之真態,不以私意參之(注:一本此後至“今略言其指”為“魏晉書法之高,良由各盡字之真態,理也,唐人師之,法也。真書用筆,自有八法,”)耳。或者專喜方正,極意歐、頗;或者惟務勻圓,專師虞、永。或謂體須稍扁,則自然平正,此又有徐會稽之病。或雲欲其蕭散,則自不塵俗,此又有王子敬之風。豈足以盡書法之美哉!真書用筆,自有八法,吾嘗採古人之字,列之以為圖,今略言其指:點者,字之眉目,全藉顧盼精神,有向有背,隨字形勢。橫直畫者,字之骨體,欲其豎正勻淨,有起有止,所貴長短合宜,結束堅實。乀者,字之手足,伸縮異度,變化多端,要如魚翼鳥翅,有翩翩自得之狀,乚挑趯者,字之步履,欲其沉實,(注:一本此後至“轉折者,”為“或長或短,或向上,或向下,或向右,或向左;或輕出而稍斜,或隨衂而峻發,各隨字之用處。”)晉人挑剔或帶斜拂,或橫引向外,至顏、 柳始正鋒為之,正鋒則無飄逸之氣。轉折者,方圓之法,真多用折,草多用轉。折欲少駐,駐則有力;轉不欲滯,滯則不遒。然而真以轉而後遒,草以折而後勁,不可不知也。懸針者,筆欲極正,自上而下,端若引繩。若垂而復縮謂之垂露。故翟伯壽問於老米曰:“書法當何如?”米老曰:“無垂不縮。無往不收。”此必至精至熟然後能之。古人遺墨,得其一點一畫,皆昭然絕異者,以其用筆精妙故也。大令以來,用筆多失,一字之間,長短相補,斜正相拄,肥瘦相混,求妍媚於成體之後,至于今尤甚焉。

            用筆

            用筆不欲太肥,肥則形濁;又不欲太瘦,瘦則形枯;不欲多露鋒芒,露則意不持重;不欲深藏圭角,藏則體不精神;不欲上大下小,不欲左高右低,不欲前多後少。歐陽率更結體太拘,而用筆特備眾美,雖小楷而翰墨灑落,追蹤鐘、王,來者不能及也。顏、柳結體既異古人,用筆復溺於一偏,予評二家為書法之一變。數百年間,人爭效之,字畫剛勁高明,固不為書法之無助,而晉、魏之風軌,則掃地矣。然柳氏大字,偏旁清勁可喜,更為奇妙。近世亦有仿效之者,則俗濁不除,不足觀。故知與其太肥,不若瘦硬也。

            草書

            草書之體,如人坐臥行立、揖遜忿爭、乘舟躍馬、歌舞擗踴,一切變態,非苟然者。又一字之體,率有多變,有起有應,如此起者,當如此應,備有義理。右軍書“羲之”字、“當”字、“得”字、“慰”字最多,多至數十字,無有同者,而未嘗不同也,可謂所欲不逾矩矣。大凡學草書,先當取法張芝、皇象、索靖章草等,則結體平正,下筆有源。然後仿王右軍,申之以變化,鼓之以奇崛。若氾學諸家,則字有工拙,筆多失誤,當連者反斷,當斷者反續,不識向背,不知起止,不悟轉換,隨意用筆,任筆賦形,失誤顛帶,反為新奇。自大令以未,已如此矣,況今世哉!然而襟韻不高,記憶雖多,莫湔塵俗。若風神蕭散,下筆便當過人·自唐以前多是獨草,不過兩字屬連。累數十字而不斷,號日連綿、遊絲,此雖出於古人,不足為奇,更成大病。古人作草,如今人作真,何嘗苟且。其相連處,特是引帶。嘗考其字,是點畫處皆重,非點畫處偶相引帶,其筆皆輕。雖復變化多端,而未嘗亂其法度。張顛、懷素規矩最號野逸,而不失此法。近代山谷老人,自謂得長沙三味,草書之法,至是又一變矣。流至于今,不可復觀。唐太宗雲:“行行若縈春蚓,字字如綰秋蛇。”惡無骨也。大抵用筆有緩有急,有有鋒,有無鋒,有承接上文,有牽引下字,乍徐還疾,忽往復收。緩以效古,急以出奇;有鋒以耀其精神,無鋒以含其氣味,橫斜曲直,鉤環盤紆,皆以勢為主。然不欲相帶,帶則近俗,橫畫不欲太長,長則轉換遲,直畫不欲太多,多則神癡。以捺代乀,以發代辵,辵亦以捺代,惟則間用之。意盡則用懸針,意未盡須再生筆意,不若用垂露耳。

            用筆

            用筆如折釵股,如屋漏痕,如錐畫沙,如壁坼。此皆後人之論,折釵股欲其曲折圓而有力;屋漏痕欲其橫直勻而藏鋒;錐畫沙欲其無起止之跡;壁坼者,欲其無布置之巧。然皆不必若是,筆正則鋒藏,筆偃則鋒出,一起一倒,一晦一明,而神奇出焉。常欲筆鋒在畫中,則左右皆無病矣。故一點一畫,皆有三轉;一波一拂,皆有三折;一又有數樣。一點者欲與畫相應;兩點者欲自相應;三點者有必有一點起,一點帶,一點應;四點者一起、兩帶、一應。 筆陣圖雲:“若平直相似,狀如算子,便不是書。”如口,音圍。當行草時,尤宜泯其稜角,以寬閒圓美為佳。“心正則筆正”,“意在筆前,字居心後”皆名言也。故不得中行,與其工也寧拙,與其弱也寧勁,與其鈍也寧速。然極須淘洗俗姿,則妙處自見矣。大抵要執之欲緊,運之欲活,不可以指運筆,當以腕運筆。執之在手,手不主運,運之在腕,腕不主執。又作字者亦須略考篆文,須知點畫來曆先後,如“左”“右”之不同,“刺”、刾之相異,“王”之與“玉”,“示”之與“衣”,以至“奉”“秦”“泰”“春”,形同體殊,得其源本,斯不浮矣。孫過庭有執、使、轉、用之法:執為長短淺深,使為縱橫牽掣,轉為鉤環盤紆,用為點畫向背。豈苟然哉!

            用墨

            凡作楷,墨欲乾,然不可太燥。行草則燥潤相雜,以潤取妍,以燥取險。墨濃則筆滯,燥則筆枯,亦不可不知也。筆欲鋒長勁而圓;長則含墨,可以取運動;勁則剛而有力,圓則妍美。予嘗評世有三物,用不同而理相似:良弓引之則緩來,舍之則急往,世俗謂之揭箭;好刀按之則曲,舍之則勁直如初,世俗謂之回性;筆鋒亦欲如此,若一引之後,已曲不復挺,又安能如人意邪?故長而不勁,不如弗長;勁而不圓,不如弗勁。紙筆墨,皆書法之助也。

            行書

            嘗夷考魏、晉行書,自有一體,與草書不同。大率變真,以便於揮運而已。草出於章,行出於真,雖曰行書,各有定體。縱復晉代諸賢,亦不相遠。《蘭亭記》及右軍諸帖第一,謝安石、大令諸帖次之,顏、柳、蘇、米,亦後世之可觀者。大要以筆老為貴,少有失誤,亦可輝映。所貴乎濃纖間出,血脈相連,筋骨老健,風神灑落,姿態備具,真有真之態度,行有行之態度,草有草之態度。必須博習,可以兼通。

            臨摹

            摹書最易。唐太宗雲:“臥王濛於紙中,坐徐偃於筆下。”亦可以嗤蕭子雲。唯初學者,不得不摹,亦以節度其手,易於成就。皆須古人名筆,置之幾案,懸之座右,朝夕諦觀,思其用筆之理,然後可以臨摹。其次雙鉤蠟本,須精意摹搨,乃不失位置之美耳。臨書易失古人位置,而多得古人筆意。臨書易進,摹書易忘,經意與不經意也。夫臨摹之際,毫發失真則神精頓異,所貴詳謹。世所有《蘭亭》,何啻數百本?而《定武》為最佳。然《定武本》有數樣,今取諸本參之,其位置、長短、大小,無一不同,而肥瘠、剛柔、工拙要妙之處,如人之面無有同者。以次知《定武》石刻又未必得真跡之風神矣。字書全以風神超邁為主,刻之金石其可苟哉!雙鉤之法,須得墨暈不出字外,或廓填其內,或朱其背,正得肥瘦之本體。雖然尤貴於瘦,使工人刻之,又從而刮治之,則瘦者亦變而肥矣。或雲雙鉤時須倒置之,則亦無容私意於其間。誠使下本明,上紙薄,倒鉤何害?若下本晦,上紙厚,卻須能書者為之發其筆意可也。夫鋒芒圭角,字之精神,大抵雙鉤多失。此又須朱其背時稍致意焉。

            方圓

            方圓者,真草之體用。真貴方,草貴圓。方者參之以圓,圓者參之以方,所為妙矣。然而方圓、曲直,不可顯露,直須涵泳一出於自然。如草書尤忌橫直分明,橫直多則字有積薪、束葦之狀,而無蕭散之氣。時參出之,斯為妙矣。

            向背

            向背者,如人之顧盼、指畫、相揖、向背。發於左者應於右,起於上者伏於下。大要點畫之間,施設各有情理,求之古人,右軍蓋為獨步。

            位置

            假如立人、挑土、“田”、“王”、“衣”“示”,一切偏旁皆須令狹長,則右有餘地矣。在右者亦然。不可太密、太巧。太密、太巧者,是唐人之病也。假如“口”字,在左者皆須與上齊,“嗚”、“呼”、“喉”、“嚨”等字是也;在右者皆須與下齊,“和”“扣”等是也。又如“”頭須令覆其下,“走”、“辵”皆須能承其上。審量其輕重,使相負荷,計其大小,使相別稱為善。

            疏密

            書以疏欲風神,密欲老氣。如“佳”之四橫,“川”之三直,“魚”之四點,“畫“之九畫,必須下筆勁淨,疏密停勻為佳。當疏不疏,反成寒乞,當密不密,必至凋疏。

            風神

            風神者,一須人品高,二須師法古,三須筆紙佳,四須險勁,五須高明,六須潤澤,七須向背得宜,八須時出新意。自然長者如秀整之士,短者如精悍之徒,瘦者如山澤之瘦,肥者如貴遊之子,勁者如武夫,媚者如美女,欹斜如醉仙,端楷如賢士。

            遲速

            遲以取研,速以取勁。先必能速,然後為遲。若素不能速而專事遲,則無神氣;若專務速,又多失勢。

            筆勢

            下筆之初,有搭鋒者,有折鋒者,其一字之體,定於初下筆。凡作字,第一字多是折鋒,第二、三字承上筆勢,多是搭鋒。若一字之間,右邊多是折鋒,應其左故也。又有平起者,如隸畫;藏鋒者,如篆畫。大要折搭多精神,平藏善含蓄,兼之則妙矣。

            情性

            藝之至,未始不與精神通,其說見於昌黎《送高閒序》。孫過庭雲:一時而書,有乖有合,合則流媚,乖則凋疏。神怡務閒,一合也;感惠徇知,二二合也;時和氣潤,三合也;紙墨相發,四合也;偶然欲書,五合也。心遽體留,一乖也;意違勢屈,二乖也;風燥日炎,三乖也;紙墨不稱,四乖也;情怠手懶,五乖也。乖合之際,優劣互差。

            血脈

            字有藏鋒出鋒之異,粲然盈楮,欲其首尾相應,上下相接為佳。後學之士,隨所記憶,圖寫其形,未能涵容,皆支離而不相貫穿。《黃庭》小楷,與《樂毅論》不同,《東方朔畫贊》,又與《蘭亭記》殊旨,一時下筆,各有其勢,因應爾也。餘嘗曆觀古之名書,無不點畫振動,如見其揮運之時。山谷雲:“字中有筆,如禪句中有眼。”豈欺我哉!

            書丹

            筆得墨則瘦,得朱則肥。故書丹尤以瘦為奇,而圓熟美潤常有餘,燥勁老古常不足,朱使然也。欲刻者不失真,朱有若書丹者。然書時盤簿,不無少勞。韋仲將升高書凌雲台榜,下則須發已白。藝成而下,斯之謂歟!若鐘繇、李邕,又自刻之,可謂癖矣。

          [評點]姜夔(1163一1203),字堯章,號白石道人.鄙陽〈今江西波陽〉人.南宋詞人,音樂家、書法家。宋謝採《續書譜序》雲:“白石生好學無所不通,書法得魏、晉古法,運筆道勁,波瀾老成,尤好臨習《定武本蘭亭序》。所著《續書譜》一卷,議論精到,用志刻苦."

          《續書譜》仿效孫過庭《書譜》而撰寫,但並非《書譜》之續。全卷分總論、真書、用筆、草書、用筆、用墨、行書、臨摹、方圓、向背、位置、疏密、風神、遲速、筆勢、情性、血脈、書丹等十八則,所論書法藝術的各個方面,實自抒其心得之語。是南宋書論中成就最高,影響最大的學術著作。

          姜夔“崇晉貶唐”,反對俗書,和提倡文人意趣的蘇東坡、黃庭堅、米芾等相一致。但他對“唐法”並非不問青紅皂白一概予以否定,而是用了大量篇幅對“法"進行了系統的、全面的論述,並從肯定和解釋引申了“晉韻”古法。


          17:江式《論書表》 ▲Top

             臣聞庖犧氏作,而八卦列其畫;軒轅氏興,而靈龜彰其彩。古史倉頡,覽二象之文,觀鳥獸之跡,別創文字,以代結繩,用書契以紀事。宣之王庭,則百工以敘;載之方冊,則萬品以明。迄於三代,厥體頗異。雖依類取制,未能悉殊倉氏矣。故《周禮》八歲入小學,保氏教國子以六書,一曰指事,二曰諧聲,三曰象形,四曰會意,五曰轉注,六曰假借,蓋倉頡之遺法也。及宣王太史籀著大篆十五篇,與古之或同異,時人即謂之籀書。孔子修《六經》,左丘明述《春秋》,皆以古文,厥意可得而言。

             其後七國殊軌,文字乖別,暨秦兼天下,丞相李斯乃奏罷不合秦文者。斯作《倉頡篇》,中車府令趙高作《爰曆篇》,太史胡毋敬作《博學篇》,皆取史籀大篆,或頗省改,所謂小篆者也。于是秦燒經書,滌除舊典,官獄繁多,以趨約易,始用隸書,古文繇此息矣。隸書者,始皇時衙吏下邽程邈附於小篆所作也。世人以邈徒隸,即謂之“隸書”。故秦有八體,一曰大篆,二曰小篆,三曰刻符書,四曰蟲書,五曰摹印,六曰署書,七曰殳書,八曰隸書。

             漢興,有尉律學,復教以籀書,又習以八體,試之課最,以為尚書史。書或有字不正,輒舉劾焉。又有草書,莫知誰始。考其形畫,雖無厥誼,亦是一時之變通也。孝宣時,召通《倉頡篇》者,張敞從受之。涼州刺史杜鄴、沛人爰禮、講學大夫秦近亦能言之。孝平時,征禮等百餘人說文字於未央,以禮為小學元士。黃門侍郎揚雄採以作《訓纂篇》。及亡新居攝,自以運應制作。使大司空甄豐校文字之部,頗改定古文。時有六書,一曰古文,孔子壁中書也;二曰奇字,即古文而異者;三曰篆書,雲小篆也;四曰佐書,秦隸書也;五曰繆篆,所以摹印也;六曰鳥蟲,所以書幡信也。壁中書者,魯共王壞孔子宅而得《尚書》、《春秋》、《論語》、《孝經》也。又北平侯張蒼獻《春秋左氏傳》,書體與孔氏壁中書又類,即前代之古文矣。

             後漢郎中扶風曹喜號曰工篆,小異斯法,而甚精巧。自是後學皆其法也。又詔侍中賈逵修理舊文。殊藝異術,王教一端,苟有可以加於國者,靡不悉集。逵即汝南許慎古學之師也。後慎嗟時人之好奇,嘆俗儒之穿鑿。惋文毀於凡譽,痛字敗於庸說。詭更任情,變亂於世。故撰《說文解字》十五篇,首一終亥,各有部居。苞括六藝群書之詁,評釋百代諸子之訓。天地山川,草木鳥獸,昆蟲雜物,奇怪珍異,王制禮儀,世間人事,莫不畢載。可謂類聚群分,雜而不越,文質彬彬,最可得而論也。左中郎將陳留蔡邕採李斯、曹喜之法,為古今雜形,詔於太學立石碑,刊載《五經》,題書楷法多是邕書也。後開鴻都,書盡其能,莫不雲集。于時諸方獻篆,無出邕者。

             魏初博士清河張揖著《埤倉》、《廣雅》、《古今字詁》,究諸《埤》、《廣》,綴拾遺漏,增長事類,抑亦於文為益者也。然其《字詁》,方之許篇,古今體用,或得或失矣。陳留邯鄲淳亦與揖同時,博開古藝,特善《倉》、《雅》,許氏字指,八體六書,精究閒理,有名於揖,以書教諸皇子。又建《三字石經》於漢碑之西,其文蔚煥,三體復宣。校之《說文》,篆隸大同,而古字少異。又有京兆韋誕、河東衛覬二家,並號能篆,當時樓觀榜題、寶器之銘,悉是誕書。鹹傳之子孫,世稱其妙。

             晉世義陽王典詞令任城呂忱表上《字林》六卷,尋其況趣,附托許慎《說文》。而按偶章句,隱別古籀奇惑之字,文得正隸,不差篆意。忱弟靜別仿故左校令李登《聲類》之法,作《韻集》五卷,使宮、商、角、徵、羽各為一篇,而文字與兄便是魯、衛,音讀楚、夏,時有不同。

             皇魏承百王之季,紹五運之緒,世易風移,文字改變。篆形謬錯,隸體失真。俗學鄙習,復加虛造。巧談辯士,以意為疑。炫惑于時,難以釐改。傳曰:以眾非非行正言。信哉得之於斯情矣。乃曰:追來為歸,巧言為辯,小兔為

          <需兔>,神蟲為蠶,如斯甚眾,皆不合孔氏古書、史籀大篆、許氏《說文》、《石經》三字也。凡所開卷,莫不惆悵,為之咨嗟。夫文字者,六藝之宗,王教之始。前人所以垂後,今人所以識古。故曰“本立而道生”。孔子曰:“必也正名。”又曰:“述而不作。”《書》曰:“予欲觀古人之象。”皆言遵循舊文,而不敢穿鑿也。

             臣六世祖瓊家世陳留,往晉之初,與從父應元俱受學於衛覬。古篆之法,《埤倉》、《雅》、《言》、《說文》之誼,當時並收善譽。而祖至太子洗馬,出為馮翊郡,值洛陽之亂,避地河西,數世傳習,斯業所以不墜。世祖太廷中,皇風西被,牧犍內附,臣亡祖文威杖策歸國,奉獻五世傳掌之書,古篆八體之法。時蒙褒錄,敘列於儒林,官班文省,家號世業。暨臣闇短,識學庸薄,漸漬家風,有忝無顯。但逢時來,恩出願外,得承澤雲津,側霑濡潤,驅馳文閣,參預史官,題篆宮禁,猥同上哲。既竭愚短,欲罷不能。是以敢藉六世之資,奉遵祖考之訓,竊慕古人之軌,企踐儒門之轍,輒求撰集古來文字,以許慎《說文》為主,爰採孔氏《尚書》、《五經》音注、《籀篇》、《爾雅》、《三倉》、《凡將》、《方言》、《通俗文字》、《埤倉》、《廣雅》、《古今字詁》、《三字石經》、《字林》、《韻集》、諸賦文字有六書之誼者,以類編聯,文無重復,統為一部。其古籀奇字、俗隸諸體,鹹使班於篆下,各有區別。詁訓假借之誼,各隨文而解;音讀楚、夏之聲,並逐字而注。其所不知者,則闕如也。脫蒙遂許,冀省百氏之觀,而周文字之域,典書秘書。所須之書,乞垂敕給付。並學士五人嘗習文字者,助臣披覽。書生五人,專令招寫。付中書、黃門、國子祭酒一月一監,評議疑隱,庶無訛謬。所撰名目,伏聽明旨。

             詔曰:“可如所請,並就太常,兼教八分書史也。其有所須,依請給之,名目待書成重聞。”式于是撰集字書,號曰《古今文字》,凡四十篇,大體依許氏為本,上篆下隸。

          [說明]江式,(?-523?)後魏書法家。陳留(今河南開封)人。字法安,曆官驍騎將軍。世傳篆榴訓詁之學。洛京宮殿門榜,皆式所書'延昌間撰集字書四十卷,號曰《古今文字》,惟其未成。

             《論書表》,述其撰集字書《古今文字》四十篇之緣由,謂“大體依許 氏為本,上篆下隸。”

             全文見於張彥遠《法書要錄》


          18:康有為《廣藝舟雙楫》 ▲Top

          敘目
             可著聖道,可發王制,可洞人理,可窮物變,則刻鏤其精,冥其形為之也。不劬於聖道王制人理物變,魁儒勿道也。康子戊己之際,旅京師,淵淵然憂,悁悁然思,俯攬萬極,塞鈍勿施,格細于時,握發抃然,似人而非。厥友告之曰:“大道藏於房,小技鳴於堂,高義伏於床,巧奰顯於鄉。標枝高則隕風,累石危則墜牆。東海之鱉,不可入於井;龍伯的人,不可釣於塘。汝負畏壘之材,取桀杙,取簷櫨,安器汝。汝不自克以程於窮,固宜哉!且汝為人太多,而為己太少,徇於外有,而不反於內虛,其亦闇於大道哉!夫道無小無大,無有無無。大者小之殷也,小者大之精也。蟭螟之巢蚊睫,蟭螟之睫,又有巢者,視虱如輪,輪之中,虱復傅緣焉。三尺之畫,七日遊不能盡其蹊徑也。拳石之山,丘壑岩巒,{穴叫}深窅曲,蠛蠓蚋生,蛙掞之衣,蒙茸茂焉。一滴之水,容四大海,洲島煙立,魚龍波譎,出日沒月。方丈之室,有百千億獅子廣座,神鬼神帝,生天生地,反汝虛室,遊心微密,甚多國士,人民豐實,禮樂黼黻,草木蘢鬱,汝神禫其中,弟靡其側,復何鶩哉!盍黔汝志,鋤汝心,息之以陰,藏之無用之地以陸沈。山林之中,鐘鼓陳焉,寂寞之野,時聞雷聲。且無用者,又有用也。不龜手之藥,既以治國矣。殺一物而甚安者,物物皆安焉。蘇援一技而入微者,無所往而不進於道也。  
             于是康子翻然捐棄其故,洗心藏密,冥神卻掃,攤碑摛書,弄翰飛素,千碑百記,釣午是富。發先識之覆疑,竅後生之宦奧,足無用于時者之假物之遊戲莫也。國朝多言金石,寡論書者,惟涇縣包氏,钅(簸)之揚之。今則孳之衍之,凡為二十七篇。篇名如下:

          原書第一

          尊碑第二

          購碑第三

          體變第四

          分變第五

          說分第六

          本漢第七

          傳衛第八

          寶南第九

          備魏第十

          取隋第十一

          卑唐第十二

          體系第十三

          導源第十四

          十家第十五

          十六宗第十六

          碑品第十七

          碑評第十八

          餘論第十九

          執筆第二十

          綴法第二十一

          學敘第二十二

          述學第二十三

          榜書第二十四

          行草第二十五

          乾祿第二十六

          論書絕句第二十七

            永惟作始於戊子之臘,實購碑於宣武城南南海館之汗漫舫。老樹僵石,證我古墨焉。歸歟於己醜之臘,乃理舊稿於西樵山北銀塘鄉之詹如樓。長松敗柳,侍我草元焉。凡十七日至除夕述書訖,光緒十五年也。述書者,西樵山人康祖詒長素父也。


          19:李華《二字訣》 ▲Top

             截   拽

             或有人示以文卷者,中有《小學說》一篇,其略曰:鴻文先生坐於堂上,手執經一卷,弟子以次立。先生講既已,而為文焉,示於眾子,則不善書也。小學家流曰:“先生通儒也,而弗能字,學何哉?”鴻文先生方隱幾,聞是言也,笑而召之。責曰:“夫儒之立身以學乎?以書乎?苟其書,則孔子無以加也。且止雲典籍,至是則無聞也。爾徒學書,記姓名而已。已乎,已乎。”華既覽之,心膹膹然,思有以喻,故作論雲:

             夫六藝中,此為難事,人罕曉其奧;予非能也,亦嘗聞其旨。蓋用筆在乎虛掌而實指,緩衄而急送,意在筆前,字居筆後,其勢如舞風翔鸞,則其妙也。大抵字不可拙,不可巧,不可今,不可古,華質相半可也。鐘、王之法悉而備矣。近世虞世南深得其體,別有婉媚之態,凡雲八法,學者悉善。予有二字之訣,至神之方,所謂“截拽”也。苟善斯字,逸少、伯英'彼何人哉!噫,諒哉!書功之深,人之難能知也。是歟曷可已乎!

          [評點] 李華,監察禦史、右補闕。擅長古文,和蕭穎士齊名。原有文集十卷,已散佚,後人輯有《李遐叔文集》。

            《二字訣》一段,或作《論書》。《書苑菁華》題下注雲:汝瑮謹案:《書畫譜》標題作“唐李華二字訣”標題之次行有“截拽”二字,即所謂二字訣也。


          20:李嗣真《書後品》 ▲Top

            昔倉頡造書,天雨粟,鬼夜哭,亦有感矣。蓋德成而上,謂仁、義、禮、智、信也,藝成而下,謂禮、樂、射、禦、書、數也。吾作《詩品》,猶希聞偶合神交、自然冥契者,是才難也。及其作《書評》而登逸品數者四人,故知藝之為末,信也。雖然,若超吾逸品之才者,亦當絕終古,無復繼作也。故斐然有感而作《書評》,雖不足以對揚王休、弘闡神化,亦名流之美事 耳。與夫飽食終日,博奕猶賢,不其遠乎?項籍雲:“書足以記姓名”此狂夫之言也。嗟爾後生,既乏經國之才,又無干城之略,庶幾勉夫斯道。近代虞秘監、歐陽銀青、房、褚二僕射、陸學士、王家令、高司衛等亦並由此術,無所間。然其中亦有更無他技而俯措朱紱,如此則雖慚君子之盛烈,苟非莘野之器,箕山之英,亦何能作誡凌雲之台,拂衣碑石之際邪!今之馳騖,去聖逾遠,徒識方圓,而迷點畫,亦猶莊生之嘆盲者,《易·象》之談日中,終不見矣。 太宗與漢王元昌、褚僕射遂良等皆授之於史陵,褚首師虞,後又學史,乃謂陵曰:“此法更不可教人。”是其妙處也。陸學士柬之受於虞秘監,虞秘監受於永禪師,皆有法體。今人都不聞師範,又自無鑑局,雖古跡昭然,永不覺悟,而執燕石以為寶,玩楚風而稱珍,不亦謬哉!其議論品藻,自王愔以下,王僧虔、袁、庾諸公已言之矣;而或理有未周,今採諸家之善,聊措同異,以貽諸好事。其前品已定,則不復銓列。素未曾入,有可措者,亦復雲爾。太宗、高宗皆稱神札,吾所伏事,何敢寓言!始於秦氏,終於唐世,凡八十一人,分為十等。

            李斯小篆之精,古今妙絕。秦望諸山及皇帝玉璽,猶夫千鈞強弩,萬石洪鐘。豈徒學者之宗匠,亦是傳國之遺寶。

            張芝(章草)。      鐘繇(正書。)      王羲之(三體及飛白。)

            王獻之(草、行書,半草行書。)

            右四賢之跡,揚庭效伎,策勳底績。神合契匠。冥運天矩,皆可稱曠代絕作也。而鐘、張筋骨有餘,膚肉未贍,逸少加減太過,朱粉無設,同夫披雲睹日,芙蓉出水,求其盛美,難以備諸。然伯英章草似春虹飲澗,落霞浮浦;又似沃霧沾濡,繁霜搖落。元常正隸如郊廟既陳,俎豆斯在;又比寒澗豁,秋山磋峨。右軍正體如陰陽四時,寒暑調暢,岩廊宏敞,簪裾肅穆。其聲鳴也,則鏗鏘金石;其芬鬱也,則氤氳蘭麝,其難征也,則縹緲而已仙;其可覿也,則昭彰而在目。可謂書之聖也。若草、行雜體,如清風出袖,明月入懷,瑾瑜爛而五色,黼繡摛其七採,故使離朱喪明,子斯失聽,可謂草之聖也。其飛白也,猶夫霧繫卷舒,煙空照灼,長劍耿介而倚天,勁矢超騰而無地,可謂飛白之仙也。又如松岩點黛,蓊鬱而起朝雲;飛泉漱玉,灑散而成暮雨。既離方以遁圓,亦非絲而異帛,趣長筆短,差難縷陳。子敬草書逸氣過父,如丹穴風舞,清泉龍躍,倏忽變化,莫知所自'或蹴海移山,翻濤簸岳。故謝安石謂公當勝右軍,誠有害名教,亦非徒語耳。而正書、行書如田野學士越參朝列,非不稽古憲章,乃時有失體處。舊說稱其轉研去鑑,疏矣。然數公皆有神助,若喻之制作,其猶《雅》、《頌》之流乎。

            評曰:元常每點多異,羲之萬字不同、後之學者恐徒傷筋膂耳。然右軍肇變古質,理不應減鐘,故雲:“或謂過之。”庾翼每不服逸少,曾得伯英十紙,喪亂遺失,常恨妙跡永絕。及後見逸少與亮書,乃曰:“今見足下答家兄書,煥若神明,頓還舊觀。”方乃大服羲之。又曾書壁而去,子敬密拭之,而更別題。右軍還觀之曰:“吾去時真大醉。”子敬乃心服之矣。然 右軍終無敗累,子敬往往失落,及其不失,則神妙無方,可謂草聖也。

            贊曰:倉頡造書、鬼哭天廩,史籀堙滅,陳倉籍甚。秦相刻銘'爛若舒錦,鐘、張、羲、獻,超然逸品。

             上上品二人。

             程邈(隸)   崔瑗(小篆) 右程君首創隸則,規範煥於丹青、崔氏爰效李斯,點畫皆如鐫石。傳之後裔,闕功亦茂。此外鐫勒,去之無乃藑乎,若校之文章,則《三都》、《二京》之比也。

             上中品七人。

             蔡邕   索靖   樑鵠   鐘會

             衛瓘   韋誕   皇象

             右白王、崔以降,更無超越此數君。樑氏石書,雅勁於韋、蔡,皇、衛草跡,殆亞於二王。鐘、索跡雖少,吾家有小鐘正書《洛神賦》,河南長孫氏雅所珍好,用子敬草書數紙易之。索有《月儀》三章,觀其趣況,大力遒竦,無愧珪璋特達。猶夫聶政、相如千載凜凜,為不亡矣。 又《毋丘興碑》,雲是索書,比蔡,《石經》無相假借。蔡公諸體,惟有《範巨卿碑》風華豔麗,古今冠絕。王簡穆雲:“無可以定其優劣。”此亦何勞品書者乎!

             上下品十二人。

             崔寔(章草) 郗鑑   王廙   衛夫人(正書)

             王洽     郗愔   李式   庾翼

             羊欣     歐陽詢  虞世南  褚遂良

             右,逸少謂領軍“弟書不減吾”,吾觀可者有數十紙,信佳作矣,體裁用筆似逸少,虛薄不淪。右軍藻鑑,豈當虛發!蓋欲假其名譽耳。措之中下,豈所謂允僉望哉!崔、衛素負高名,王、庾舊稱拔萃,崔章草甚妙,衛正體尤絕。世將楷則遠類羲之,猶有古制,稚恭章草頗推筆力,不謝子真。郗、李超邁,過於羊欣。歐陽草書,難於競爽,如旱蛟得水,毚兔走穴,筆勢恨少。至於鐫勒及飛白諸勢,如武庫矛戟,雄劍欲飛。虞世南蕭散灑落,真草惟命,如羅綺嬌春,鹓鴻戲沼,故當子雲之上。褚氏臨寫右軍,亦為高足,豐豔雕刻,盛為當今所尚,但恨乏自然,功勤精悉耳。

             評曰:蟲篆者小學之所宗。草隸者士人之所尚,近代君子多好之,或時有可觀耳。然許靖之跡,殆不減小令,常嘆曰:“鐘書初不留意,試作之,乃不可得。研之彌久,如有仿佛。乃知有畫龍之惑耳,安可厚誣乎?此群英允居上流三品,其中銓鑑,不無優劣。

             贊曰:程邈隸體,崔公篆勢,樑、李、蔡、索、郗、皇、韋、衛,羊習獻規,褚傳羲制,邈乎天壤,光闕來裔。

             中上品七人。

             張昶   衛恆   杜預   張翼

             郗嘉賓  阮研   漢王元昌

             右文舒《西岳碑》但覺妍冶,殊無骨氣,庾公置之七品。張翼代羲之草奏,雖曰“小人幾乎亂真。“更乃編之乙科,涇渭混淆,故難品會。至於衛、杜之筆,流傳多矣,縱任輕巧,流轉風媚。剛健有餘,便娟詳惟,諒少儔匹,書賔與王庾相捋。是則高手顏黃門有言:阮交州、蕭國子、陶隱居各得右軍二體,故稱當時之冠絕。然蕭公力薄,終不能逮。阮漢王作獻之氣勢或如劍舞往往勝幾。

             中中品十二人

             謝安   康昕   桓玄   丘道護

             許靜   蕭子雲  陶弘景  釋智永

             劉珉   房玄齡  陸柬之  王知敬

             右謝公縱任自在,有螭盤虎踞之勢。康昕巧密精奇,有翰飛鶯弄之體。桓玄如驚蛇如草,銛鋒出匣。劉珉比顛波赴壑,狂澗爭流。隱居穎脫得書之筋髓,如麓景霜空,鷹隼初擊。道護謬登高品跡乃浮澷。陸柬之學虞草體用筆則青出於藍。故非子雲之徒,子雲正隸功夫恨少不至高絕也。智永精熟過人,惜無奇態矣。房司空含文抱質,王家令碎玉殘金,房如海上雙鵷(yuān),王比松間孤鶴 。

             中下品七人

             孫皓   張超   謝道蘊   宗 炳

             宋文帝  齊高帝  謝靈雲 右,孫皓,吳人酣暢,驕其家室,雖欲矜豪,亦復平矣。張如郢中少年,乍入京輦,縱有才辯,蓋亦可知。謝韞是王凝之之妻,雍容和雅,芬馥可玩。宋帝有子敬風骨,超縱狼藉,翁煥為美。康樂往往驚遒,齊帝時時合興,知慕韓、彭之豹變,有異張、桓之拾青。宗炳放逸屈懾,頗斅康、許,量其直置孤梗,是靈運之流也。

             評曰:古之學者皆有規法,今之學者但任胸懷,無自然之逸氣,有師心之獨任。偶有能者,時一斑,忽不悟者,終身瞑目,而欲乘款段,度越驊騮,斯亦難矣。吾當告勉夫後生,然自古嘆知音者希,可謂絕絃也。

             贊曰:西岳張昶,江東阮研,銀鷹貞白,鐵馬桓玄,衛、杜花散,安、康綺鮮。元昌、柬之,名後身先。

             下上品十三人

             陸機   袁崧  李夫人  謝眺

             庾肩吾  蕭綸  王褒   斛斯彥明

             錢毅   房彥謙 殷令名  張大隱   藺靜文

             右士衡以下,時然合作,踳(chuǎn)駮(同“駁”)不倫,或類蚌質珠胎,乍比金沙銀礫。陸平原、李夫人猶帶古風,謝吏部、庾尚書創得今韻。邵陵王、王司空是東陽之亞,房司隸、張隘州參小令之體。藺生正書甚為鮮緊,亦有規則。錢氏小篆、飛白,寬博敏麗,太宗貴之。斛斯筆勢,鹹有由來,司隸宛轉、頗稱流悅,皆著名矣。殷氏擅聲題榜,代有其人。嗟乎!有天才者或未能精之,有神骨者則其功夫全棄,但有佳處,豈忘存錄!

             下中品十人

             範曄   蕭思話   張融   樑簡文帝

             劉逖   王 晏    周颙   王崇素

             釋智果  虞綽

             右,範如寒雋之士,亦不可棄,蕭比遁世之夫,時或堪採。思光要自標舉,蓋無足褒;簡文拔群貴勝,猶難繼作。劉黃門落花從風,王中書奇石當徑。彥倫意則甚高,跡少俊銳。崇素時象麗人之姿,智果頗似委巷之質。虞綽鋒穎迅健,亦其次矣。

             下下品七人。

             劉穆之   褚 淵    樑武帝   樑元帝

             陳文帝   沈君理   張正見

             右數君亦稱筆札,多類效顰,猶枯林之春秀一枝,比眾石之孤生片琰。就中彥回輕快,練倩有力,孝元風流,君理放任,亦後來之所習,非先達之所營。吾黨論書,有異于是。

             評曰:前品雲“蕭思話如舞女回腰,仙人嘯樹”,則亦曰佳矣,又雲“張伯英如漢武學道,憑虛欲仙”,終不成矣。商榷如此,不亦謬乎?吾今品藻,亦來能至當,若其顛倒衣裳,白圭之玷,則庶不為也。後來君子,倘為鑑焉。

             贊曰:蚌質懷珠,銀鋼蘊礫,陸、謝參蹤,蕭、張繼跡。思話仙才、張融賞擊,如彼苦秀,眾多群石。   

          [評點]李嗣真,(?--六九六年)唐代書畫家,字承冑。 一說趙州(今屬河北)人,一說滑州匡城(今屬河南)人。則天永昌中,官禦史中丞、知大夫事,被酷吏來俊臣所陷。
            《書後品》一卷,《新舊唐志》、《崇文總目·小學類》、《書錄解題·雜藝類》、《通志略》等均作《書後品》,而《說郛》本作《後書品》,誤倒一字。李嗣真因庾肩吾《書品》,更分十等,各為評贊,此書所載八十一人,各有敘錄,條理姝然,今本乃有八十二人,文中“登逸品數者四人”、可能僅指張、鐘、二王,不包括李斯,故有一人之誤。稱《後品》是因為前有王愔、王僧虔、袁昂、庾肩吾之《書品》。本篇上上品之上更列逸品,為嗣真所創,明其在九等之上。
            《書後品》作於初唐,是繼樑庾肩吾之後的又一部書法著錄。全書評述了秦至初唐的81名書家,按十品分十個等級加以評述,依次為逸品、上上品、上中品、上下品、中上品、中中品、中下品、下上品、下中品、下下品,在品評中亦有理論闡述,條理中然。


          21:李煜《書述》 ▲Top

            壯歲書亦壯,猶嫖姚十八從軍,初擁千騎,憑陵沙漠,而目無勍敵;又如夏雲奇峰,畏日烈景,縱橫炎炎,不可向邇,其任勢也如此。老來書亦老,如諸葛亮董戎,來睿接敵,舉板輿自隨,以白羽麾軍,不見其風骨,而毫素相適,筆無全鋒。噫,壯老不同,功用則異,唯所能者可與言之。書有七字法,謂之“撥鐙”,自衛夫人並鐘、王,傳授於歐、顏、褚、陸等,流傳於此日,然世人罕知其道者。孤以幸會得受誨於先生。奇哉,是書也!非天賦其性,口受要訣,然後研功覃思,則不能窮其奧妙'安得不秘而寶之!所謂法者,擫壓、鉤提、抵拒、導送是也。此字今有顏公真卿墨跡尚存於世,餘恐將來學者無所聞焉,故聊記之。

             擫者,擫大指骨上節,下端用力欲直,如提乾鉤。

             壓者,捺食指著中節旁。

             鉤者,鉤中指著指尖鉤筆,令向下。

             揭者,揭名指著指爪肉之際揭筆,今向上。

             抵者,名指揭筆,中指抵住。

             拒者,中指鉤筆,名指拒定。

             導者,小指引名指過右。

             送者,小指送名指過左。     

          [評點]李煜(九三七年——九七八年),即李後主,五代南唐國主。詞人。字重光,初名從嘉,號鐘隱,徐州(今屬江蘇)人。國亡後為宋所俘,後被毒死。善詩文,音樂、書畫,尤工詞。後人把他及其父李璟(中主)的作品,合刻為《南唐二主詞》。
            《書述》言書有七字法,謂之“撥鐙”,自衛夫人並鐘、王,傳授於歐、顏、褚、陸等,流傳於此時。


          22:林蘊《撥鐙序》 ▲Top

            推、拖、撚、拽

            蘊鹹通末為州刑掾,時廬陵盧肇罷南浦太守,歸宜春。公之文翰,故海內知名。蘊竊慕小學,因師於盧公子弟安期。歲餘,盧公忽相謂曰:“子學吾書,但求其力爾。殊不知用筆之力,不 在於力;用於力,筆死矣。虛掌實指,指不入掌,東西上下,何所閡焉。常人雲‘永'字八法,乃點畫爾,拘於一字,何異守株。《翰林禁經》雲,筆貴饒左,書尚遲澀,此君臣之道也。大凡點畫,不在拘之長短遠近,但無遏其勢。俾令筋骨相連,意在筆前,然後作字。若平直相似,狀如算子,此畫爾,非書也。吾昔受教於韓吏部,其法曰‘撥鐙',今將授子,子勿妄傳。推、拖、撚、拽是也。訣盡於此,子其旨而味乎!”蘊加以久罹戎事,筆硯多亡,終不能窮其妙。亦猶古之有得不死之術者,人將從學焉,未至,得術者物故,嘆恨不極。人或譏之曰:彼尚不能自免,何恨之有耶?客曰:昔有善算術者,臨終,傳於子,終不能曉。乃傳於人,他人盡其妙。彼何妨得而不能演哉。愚雖受盧公之命、既不能自益其要妙,敢恡復傳於智者。    

          [評點]林蘊,唐代元和年間人。字復夢,泉州莆田(今福建泉州)人,蘊世通經,西川節度使韋皋闢推官,累遷禮部員外郎,出為邵州刺史。從盧肇授“撥鐙法”,從此書日進。
             《撥鐙序》,《書苑菁華》第十六卷題下汝瑮注曰:《書畫 譜》標題作唐林蘊《撥鐙四字法》,標題之次行有“推、拖、撚、 拽、”四字。所謂“四字法”即指此。


          23:劉熙載《藝概》[節錄] ▲Top

          孫過庭《書譜》雲:“篆尚婉而遇。"餘謂此須婉而愈勁,遇而愈節,乃可。不然,恐涉於描字也。
          篆書要如龍騰鳳翥,觀昌黎歌《石鼓》可知。或但取整齊而無變化,則槧人優為之矣。篆之所尚,莫過於筋,然筋患其弛,亦患其急。欲去兩病,赲筆自有訣也。
          書之有隸,生於篆,如音之有徵,生於宮。故篆取力¤氣長,隸取勢險節短,蓋運筆與奮筆之辨也。
          隸形與篆相反,隸意卻要與篆相用,以峭激蘊紆餘,以倔強寓款婉,斯征品量。不然,如撫劍疾視,適足以見其無能為耳。
          他書法多於意,草書意多於法。故不善言草者,意法相害;善言草者,意法相成。草之意法,與篆、隸、正書之意法,有對待,有傍通。若行,因草之屬也。
          移易位置,增減筆畫,以草較真有之,以草較草亦有之。學草者移易易知,而增減每不盡解。蓋變其短長肥瘦,皆是增減,非止多一筆少一筆之謂也。
          草書結體貴偏而得中。偏如上有偏高偏低,下有偏長偏短,兩旁有偏爭偏讓皆是。
          庸俗行草結字之體尤易犯者,上與左小而瘦,下與右大而肥。其橫豎波磔,用筆之輕重亦然。
          古人草書,空白少而神遠,空白多而神密。俗書反是。
          懷素自述草書所得,謂觀夏雲多奇峰,嘗師之。然則學草者徑師奇峰可乎?曰:不可。蓋奇峰有定質,不若夏雲之奇峰無定質也。
          昔人言為書之體,須入其形,以若坐、若行、若飛、若動、若往、若來、若臥、若起、若愁、若喜狀之,取不齊也。然不齊之中,流通照應,必有大齊者存。故辨草者,尤以書脈為要焉。
          草書尤重筆力。蓋草勢尚險,凡物險者易顛,非具有大力,奚以囿之?
          草書之筆畫,要無一可以移入他書,而他書之筆意,草書卻要無所不悟。
          地師相地,先辨龍之動不動,直者不動而曲者動,蓋猶草書之用筆也。然明師之所謂曲直,與俗師之所謂曲直異矣。
          草書尤重筋節,若筆無轉換,一直溜下,則筋節亡矣。雖氣脈雅尚綿亙,然總須使前筆有結,後筆有起,明續暗斷,斯非浪作。
          草書渴筆,本于飛白。用渴筆分明認真,其故不自渴筆始。必自每作一字,筆筆皆能中鋒雙鉤得之。
          正書居靜以治動,草書居動以治靜。
          草書比之正書,要使畫省而意存,可於爭讓向背間悟得。
          欲作草書,必先釋智遺形,以至於超鴻濛、混希夷,然後下筆。古人言“匆匆不及草書",有以也。
          凡,書要筆筆按,筆筆提。辨按尤當於起筆處,辯提尤當於止筆處。
          書家於提、按二字,有相合而無相離。故用筆重處正須飛提,用筆輕處正須實按,始能免墮,飄二病。
          書有振、攝二法。索靖之筆短意長,善攝也;陸柬之之節節加勁,善振也。
          行筆不論遲速,期於備法。善書者雖速而法備,不善書者雖遲而法遺。然或遂貴速而踐遲,則又誤矣。
          古人論用筆,不外疾、澀二字。澀非遲也,疾非速也。以遲速為疾澀而能疾澀者,無之!
          用筆者皆習聞澀筆之說,然每不知如何得澀。惟筆方欲行,如有物以拒之,竭力而與之爭,斯不期澀而自澀矣。澀法與戰掣同一機竅,第戰掣有形,強效轉至成病,不若澀之隱以神運耳。
          結字疏密須彼此互相乘除,故疏不嫌疏,密不嫌密也。然乘除不惟於疏密用之。
          字形有內抱,有外抱。如上下二橫,左右二豎,其有若弓之背向外,弦向內者,內抱也。背向內,弦向外者,外抱也。篆不全用內抱,而內抱為多;隸則無非外抱。辨正、行、草書者,以此定其消息,便知於篆隸孰為出身矣。
          字體有整齊,有參差。整齊,取正應也;參差,取反應也。
          書要曲而有直體,直而有曲致。若弛而不嚴,剽而不留,則其所謂曲直者誤矣。
          書一於方者,以圓為模稜;一於圓者,以方為徑露。蓋思地矩天規,不容偏有取舍。
          書宜平正,不宜欹側。古人或偏以位欹側勝者,暗中必有撥轉機關者也。《畫訣》有“樹木正,山石倒;山石正,樹木倒”,豈可執一後一木論之。

          [評點]劉熙載(1813一1881),字伯簡,號融齋,晚號窹崖子。江蘇興化人.道光二十四年〈1844〉進士,官至左春坊左中允,廣東提學使.晚年主講於上海龍門書院.一生以治經學為主,特別精通聲韻和算術,子、史、詩、賦、詞曲、書法無不通曉.著述甚富,有《四音定切》、《說文雙聲》、《說文疊韻》、《持志塾言》、《昨非集》和《藝概》等多種.《藝概》一書是他晚年的作品,共六卷,是他曆年來在文、詩、賦、詞曲、書法、經義方面言論的匯鈔.槧人:槧讀qian.槧人,讀書人.清代以八股取士,讀書人寫字一般追求工整.如音之有徽,生於宮:宮、徵(音只)分別是古代樂律中五音之一。古人通常以宮作為音階的起點,宮的音高確定了,商、角、徵、羽的音高也就都確定了。龍,堪輿學術語.舊時風水術因山形地勢逶迆象龍,所以把山勢稱作“龍”。渴筆:書法線條上的一種形式,用含墨較少的筆寫成,點畫內絲絲露白。振、攝:兩種不同的運筆方法.振,指運筆時步步頓挫澀進;攝,指運筆時急促內斂.陸柬之:唐代傑出書家.生卒年不詳.江蘇吳縣人。虞世甫外甥.官至朝散大夫,太子司議郎.書傳其舅父筆法,與歐、褚齊名.戰掣:一種運筆方法.指筆鋒微微向筆畫兩側顫動著執行,以使線條遒勁.這種方法又叫“顫筆"或“戰筆".

          【簡評】《藝概》是劉熙載平日探究書藝的心得。言雖簡短,每每一語中的。如論作篆應“婉而愈勁,通而愈節",這就比孫過庭所論更進一步。論隸書指出其特點是“勢險節短",並應以奮筆作書.其中論作草書如何增減筆畫,移易位置,以及應該吸收其它字體的特點等見解尤有新意.
          對於用筆的提按、疾澀他也有很精到的看法.如“重處正須飛提”,“輕處正須實按",“澀非遲也,疾非速也",均為度人金針.
          他還強調作書要於變化中求得統一.“整齊,取正應也;參差,取反應也",說的是結構章法上的變化統一;“曲而有直體,直而有曲致",說的是點畫形態;“一於方者,以圓為模稜;一於圓者,以方為徑露",講的是圓筆、方筆的運用。只顧整齊劃一則易死板,只求局部變化則易散亂,因此必須在變化中求得整體真正的統一.能善於處理這兩者間的關系,則書藝可至妙境。


          24:盧攜《臨池訣》 ▲Top

            吳郡張旭言:自智永禪師過江,楷法隨渡。永禪師乃羲、獻 之孫,得其家法,以授虞世南,虞傳陸柬之,陸傳子彥遠,彥遠 僕之堂舅,以授餘。不然,何以知古人之詞雲爾。攜按:永禪師 從姪纂及孫渙皆善書,能繼世。張懷瓘《書斷》稱上官儀師法虞 公,過於纂矣。張志遜又纂之亞。是則非獨專於陸也。王叔明 《書後品》又雲虞、褚同師於史陵。陵蓋隋人也。旭之傳法,蓋多其人,若韓太傅滉、徐吏部浩、顏魯公真卿、魏仲犀。又傳蔣 陸及從姪野奴二人。予所知者,又傳清河崔邈,邈傳褚長文、韓 方明。徐吏部傳之皇甫閱。閱以柳宗元員外為入室,劉尚書禹錫 為及門者,言柳公常未許為伍。柳傳方少卿直溫,近代賀拔員外 惎、寇司馬璋、李中丞戎,與方皆得名者。蓋書非口傳手授而雲 能知,未之見也。小子蒙昧,常有心焉。而良師不遇,歲月久矣, 天機懵然,因取《翰林隱術》、右軍《筆勢論》、徐吏部《論書》、《竇臮字格》、《永字八法勢論》,刪繁選要,以為其篇。《系辭》言智者觀其彖辭,思過半矣。倘學者覃思於此,鐘繇、 羲、獻,誠可見其心乎!

            第一,用紙筆。

            第二,認勢。

            第三,裹束。

            第四,真如立,行如行。

            第五,草如走。

            第六,上稀。

            第七,中勻。

            第八,下密。

            用筆之法:拓大指,擫中指,斂第二指,拒名指,令掌心虛 如握卵,此大要也。

            凡用筆,以大指節外置筆,今動轉自在。然後奔頭微拒,奔中中鉤,筆拒亦勿令大緊,名指拒中指,小指拒名指,此綱要也。 皆不過雙苞,自然虛掌實指。“永”字論雲:以大指拓頭指鉤中指。此蓋言單苞者。然必須氣脈均勻,拳心須虛,虛則轉側圓順; 腕須挺起,粘紙則輕重失準。把筆淺深,在去紙遠近,遠則浮氾虛薄,近則揾鋒體重。

            用水墨之法,水散而墨在,跡浮而稜斂,有若自然。紙剛則用軟筆,策掠按拂,制在一鋒。紙柔用硬筆,袞努鉤磔,順成在 指。純剛如以錐畫石,純柔如以泥洗泥,既不圓暢,神格亡矣。畫石及壁,同紙剛例,蓋相得也。     

          [評點]盧攜(?——八八○年),唐書法家。字子升。範陽(今河北涿縣)人。擢進士第,乾符中累進同中書門下平章事,拜中書侍郎,與鄭畋俱李翱甥,同位宰相,終太子賓客。
            《臨池訣》或作《臨池妙訣》一篇,首敘書法傳授源流,自謂得永興家法,乃取《翰林隱術》、右軍《筆勢論》、徐吏部《論書》、《竇臮字格》、《永字八法勢論》,刪繁選要,以為其篇,為目有八。


          25:米芾《海岳名言》《寶章待訪錄》 ▲Top

          曆觀前賢論書,征引迂遠,比況奇巧,如“龍跳天門,虎臥鳳闕”,是何等語?或遣詞求工,去法逾遠,無益學者,故吾所論要在入人,不為溢辭。
          吾書小字行書,有如大字。唯家藏真跡跋尾,間或有之,不以與求書者。心既貯之,隨意落筆,皆得自然,備其古雅。壯歲未能立家,人謂吾書為集古字,蓋取諸長,總而成之。既老始自成家,人見之,不知以何為祖也。
          江南吳□<山完>、登州王子韶大隸題榜有古意,吾兒友仁大隸題榜與之等。又幼兒友知代吾名書碑及手大字更無辨。門下釣忖R其小楷,:“每小簡可使令嗣書。”謂友知也。
          老杜作《薛稷慧普寺詩》:“鬱鬱三大字,蛟龍岌相纏。”今有石本得視之,乃是勾勒倒收筆鋒,筆筆如蒸餅,“普”字如人握兩拳,伸臂而立,醜怪難狀。由是論之,古無真大字明矣。
          葛洪《天之觀》飛白,為大字之冠,古今第一。歐陽詢《道林之寺》,寒儉無精神。柳公權《國清寺》,大小不相稱,費盡筋骨。裴休率意寫牌,乃有真趣,不陷醜怪。真字甚易,唯有體勢難,謂不如畫算,勾,其勢活也。
          字之八面,唯尚真楷見之,大小各自有分。智永有八面,已少鍾法。丁道護、歐、虞筆始勻,古法亡矣。柳公權師歐,不及遠甚,而為醜怪惡札之祖。自柳,世始有俗書。
          唐官誥在世為褚、陸、徐嶠之體,殊有不俗者。開元以來,緣明皇字體肥俗,始有徐浩,以合時君所好,經生字亦自此肥。開元以前古氣無復有矣。
          唐人以徐浩比僧虔,甚失當。浩大小一倫,猶使楷也。僧虔、蕭子雲傳鍾法,與子敬無異,大小各有分,不一倫。徐浩為顏真卿闢客,書韻自張顛血脈來,教顏大字促令小、小字展令大,非古也。
          石刻不可學,便自書使人刻之,已非己書也,故必須真跡觀之,乃得趣。如顏真卿,每使家僮刻字,故會主人意,修改波撇,致大失真。唯吉州廬山題名,題訖而去,後人刻之,故皆得其真,無做作凡俗之差,乃知顏出於褚也。又真跡皆無蠶頭燕尾之筆,與郭知運《爭坐位帖》,有篆籀氣,顏傑思也。柳與歐為醜怪惡札祖,其弟公綽乃不俗於兄。筋骨之說出於柳,世人但以怒張為筋骨,不知不怒張,自有筋骨焉。
          凡大字要如小字,小字要如大字。褚遂良小字如大字,其後經生祖述,間有造妙者。大字如小字,未之見也。
          世人多寫大字時用力捉筆,字無筋骨神氣,作圓筆頭如蒸餅,大可鄙笑。要須如小字,鋒勢備全,都無刻意做作乃佳。自古及今,餘不敏,實得之。榜字固已滿世,自有識者知之。
          石曼卿作佛號,都無回互轉折之勢,小字展令大,大字促令小,是張顛教顏真卿謬論。蓋自有大小相稱,且如寫“太一之殿”作四窠分,豈可將“一”字肥滿一窠,以對“殿”字乎!蓋自有相稱,大小不展促也。餘嘗書“天慶之觀”,“天”、“之”字皆四筆,“慶”、“觀”字多畫在下,各隨其相稱寫之,掛起氣勢自帶過,皆如大小一般,真有飛動之勢也。
          書至隸興,大篆古法大壞矣。篆籀各隨字形大小,故知百物之狀,活動圓備,各各自足。隸乃始有展促之勢,而三代法亡矣。
          歐、虞、褚、柳、顏,皆一筆書也。安排費工,豈能垂世。李邕脫子敬體,乏纖濃。徐浩晚年力過,更無氣骨。皆不如作郎官時《婺州碑》也。《董孝子》、《不空》,皆晚年惡札,全無研媚,此自有識者知之。沈傳師變格,自有超世真趣,徐不及也。禦史蕭誠書太原題名,唐人無出其右。為司馬《南真君觀碑》,極有鍾、王趣,餘皆不及矣。
          智永臨《集千文》,秀潤圓勁,八面具備,有真跡。自“顛沛”字起,在唐林夫處,他人所收不及也。
          字要骨格,肉須裹筋,筋須藏肉,秀潤生,布置穩,不俗。險不怪,老不活A潤不肥。變態貴形不貴苦,苦生怒,怒生怪;貴形不貴作,作入畫,畫入俗:皆字病也。
          “少成若天性,習慣若自然。”茲古語也。吾夢古衣冠人授以折紙書,書法自此差進,寫與他人都不曉,蔡元長見而驚曰:“法何遽大異耶!”此公亦具眼人。章子厚以真自名,獨稱吾行草,欲吾書如排算子,然真字須有體勢乃佳爾。
          顏魯公行字可教,真便入俗品。
          友仁等古人書,不知此學吾書多,小兒作草書,大段有意思。
          智永硯成臼,乃能到右軍。若穿透,始到鍾、索也。可不勉之!
          一日不書便覺思澀,想古人未嘗片時廢書也。因思蘇之才,《桓公至洛帖》字明意殊有工,為天下法書第一。
          半山莊上多文公書,今不知存否。文公學楊凝式書,人鮮知之,餘語其故,公大賞其見鑑。
          金陵幕山樓隸榜,乃關蔚宗二十一年前書,想六朝宮殿榜皆如是。
          薛稷書慧普寺,老杜以為「蛟龍岌相纏」。今見其本,乃如柰重兒握蒸餅勢,信老杜不能書也。
          學書須得趣,他好俱忘,乃入妙;別為一好縈之,便不工也。
          海岳以書學博士召對,上問本朝以書名世者凡數人,海岳各以其人對,曰:“蔡京不得筆,蔡卞得筆而乏逸韻,蔡襄勒字,沈遼排字,黃庭堅描字,蘇軾畫字。”上復問:“卿書如何?”對曰:“臣書刷字。”

          寶章待訪錄

            漢河間憲王購書必錄古簡,樑武元、隋唐文帝金題玉躞、錦質繡章、破紙斷麻取而華國。天寶以後,或進書得官,亦知上篤好。
             本朝太宗混一,偽邦國書皆聚。然士民之間尚或藏者,既非寶鑑,皆以世傳,聞見浸多,懼久廢忘,因作《寶章待訪錄》,以俟訪圖書使焉。元祐丙寅八月九日。  

             目睹

             晉右軍王羲之書《雪晴帖》
             右真跡在承務郎吳郡蘇激處,集賢校理舜欽子也。帖尾有古跋、君倩字及褚氏字印。
           
             陳僧智永真草書《歸田賦》

             右真跡在襄陽魏泰處,故南昌人裝題曰:“虞世南白麻紙。”有古跋曰:“開成五年,白馬寺臨一過潭記。”某官潭,泰遊湖外,攜行賞跋累日。
           
             唐率更令歐陽詢書《衛靈公天寒鑿池帖》

             右真跡麻紙,在魏泰處。
           
             唐彭王傅徐浩書張九齡《司徒告》

             右真跡用一尺高絹,書多渴筆。詞雲:“正大廈者,柱石之力;匡帝業者,輔相之功。生則保其雄名,沒猶稱其盛德。”今在其孫曲江人嶺南縣令張仲容處。某官於桂林,借留半月,仍以紙覆裹,欲為重背,仲容惜其印縫古紙不許。九齡《神道碑》亦浩書。
           
             唐中書令褚遂良《枯木賦》

             右唐粉蠟紙拓書也,在承議郎合肥魏倫處,收以為真跡,魏氏刻石。某官杭過潤,借觀於甘露寺。
           
             唐太師顏真卿書《送辛子序》

             右真跡楮紙書,在寶文閣學士謝景溫處。前後為好事者以筆描二大印,其文亂,仍書“鉉”字,其中幸不合縫,鑑非鉉筆,甚累墨寶。某佐寶文於潭,屢經賞閱。
           
             陳僧智永《千文》

             右唐粉蠟紙拓書,有古跋雲:“契闊艱難,不敢失墜,信好事也。”在前國子監直講楊褒處,得於外舅王安國。某元豐五年過金陵見之。內二真字雙鉤填者,然人猶未信為拓焉。
           
             陳僧智永《千文》

             右楮紙書,唐人臨寫,在宣德郎陳幵處。恭公姪作梵夾冊,雖非真跡,秀潤圓活逼真,今已罕得。某嘗三閱。
           
             智永《千文》半卷

             右黃麻紙,唐人臨書,在刑部尚書丹陽蘇頌處。
           
             王右軍《蘭亭燕集序》

             右唐粉蠟紙雙鉤摹本,在蘇激處。精神筆力毫發畢備,下真跡一等。此幾馮承素輩拓賜大臣者。舜欽父集賢校理耆購於蜀僧元靄。某與激友善,每過,公必一出,遂親為背飾。
           
             唐太師顏真卿《乞米帖》

             右真跡楮紙在朝請郎蘇澥處。度支郎中舜元子也得於關中安氏。士人多有臨拓本。此卷古玉軸,縫有舜元字印,範仲淹而下題跋。某嘗十餘閱。
           
             唐率府長史張旭四帖

             右真跡在杭州陸氏,大姓也。舊有五帖:第一秋深,第二前發,第三汝官,第四昨日,第五承須。今所存四帖,“汝官”後有一古印文記,不可辨。“昨日”、“承須”二帖,襞紙也。陸氏子素從奉議郎關景仁學,關因借撫三大帖,餘丱見石本於鎮戎軍。及冠,官桂林,朝奉大夫關杞為使者語及,始知石在關氏。二十五,官潭,杞通判邠州,以石本見寄。三十五,官杭,而景仁為錢塘令,陸氏子登進士第者來謁,與關謝而閱之。既見真跡,獨“秋深”一帖詰之,良久,顰蹙而言:嘉祐中,太守沈文通借觀,拆留不還,自此不復借出,因亦不復借閱。遣工撫得之即歸,詰遘弟遬,時為郡從事,乃言在其姪延嗣處,後復得閱,今歸餘家。
           
             王右軍《來戲帖》

             右麻紙,六朝人所臨寫,旁注小真字數枚,復以雌黃覆之。在蘇州故相丁謂孫景處,後以一萬質於鄆州樑子志處,故相樑適孫也。又有《唐雙鉤撫帖》,亦在丁景處。某皆有題跋。
           
             韓擇木八分

             右真跡楮紙,在丁景處。第二行書官位,以大字改為中字。
           
             唐太師顏魯公書名兩字

             右真跡書嶺南刺史綾告,在朝奉郎臨江許彥先處。
           
             唐辯才弟子草書《千文》

             右黃麻書,在龍圖閣直學士吳郡滕元發處。滕以為智永書,某閱其前空兩才字,全不書,固以疑之;後復空永字,遂定為辯才弟子所書,故特闕其祖師二名耳。
           
             唐虞世南《枕臥帖》

             右雙鉤唐模本,在朝奉大夫錢塘關杞處。上有儲氏圖書古印。關嘗謂某曰:昔越州一寺修佛殿,於樑棟內龕藏一函古撫數十本,所可記者,王右軍《十七帖》,世南《枕臥帖》、《十鬥九帖》,褚遂良《奉書寧帖》,上皆有儲氏圖書字印,致功精絕,毫發乾濃畢備。關與僧善購得《枕臥》、《十鬥九》、《書寧》三帖。
           
             唐秘書少監虞世南《積時帖》

             右古雙鉤摹本,在承議郎洛陽李熙處。翰林學士維之孫亦縫有儲氏印,某借撫石。
           
             唐僧高閒草書《千文》

             右楮紙真跡,在承議郎李熙處。
           
             唐禮部尚書沈傳師書《道林詩》

             右在潭州道林寺四絕堂,以杉板薄,略布粉,不蓋紋,故歲久不脫。裴休書杜甫詩,只存一甫字。某嘗為杜板行以紀其事。沈牌,某官潭借留書齋半歲,拓得之石本為撫石。僧希白務於勁快,多改落筆端直,無復縹眇縈回飛動之勢。
           
             唐太子率更令歐陽詢書荀氏漢書節

             右楮冊小楷,在潭州南楚門胡氏淳處。
           
             唐歐陽詢書道林之寺牌

             右在潭州道林寺。筆力險勁,勾勒而成,有刻板本。又江南廬山,多裴休題寺塔諸額,雖乏筆力,皆種種可愛。
           
             羲之《千文》

             右楮紙書字,筆力圓熟。在宣州觀察支使王仲詵處,故相圭之姪。謬題賀知章書四字於韻字下,非也。
           
             顏魯公頓首夫人

             右真跡楮紙,破爛過半,在駙馬都尉王晉卿家。
           
             孫過庭草書《千文》

             右真跡黃麻紙書。縫有樑秀收閱字印、王氏圖書四字,隨圈四轉,其異制也,在如上。
           
             懷素詩一首

             右真跡絹書,在王晉卿第。
           
             張長史虎兒等三帖

             右楮紙真跡,同上。
           
             晉武帝、王渾、王戎、王衍、郗愔、陸統、桓溫、陸雲、謝安、謝萬等十四帖

             右真跡在駙馬都尉李公炤第。武帝、王戎書字有篆籀氣象,奇古,墨色如漆紙,皆磨破,上有開元二字,小印太平公主胡書,印美哉,不可得而加矣,世之奇書也。王涯永存珍秘印、殷浩之印、樑秀收閱古書記字印。內郗愔一帖即閣本法帖所錄者。昔使王著取溥家書,與閣下書雜模,此卷中獨取愔兩行,餘在所棄,哀哉。謝安《慰問帖》字清古,在二王之上,宜乎批子敬帖尾也。
           
             晉謝奕、謝安、桓溫三帖

             右真跡,麻紙書,在李公炤家。上有鐘紹京書印、竇蒙審定字印印。謝安一帖,為後人恐墨淡,復用深墨填過,使人惋怛,與前卷並有絹帖書爵號,自為名筆。
           
             黃素《黃庭經》

             右同上字札,古無褚薛體,殆六朝人所作。縫有鐘紹京印,後有陶穀漢時跋雲:“此《換鵝經》也。”甲戌九月十一日,百計取得此書,詳觀,誠無唐盛時,是銛鋒筆行書,雖恐非右軍,誠爾。界行有鐘紹京書印,二字小印卷末,真寫胎仙二字,用陳氏圖書印印之。又有錢氏忠孝之家印紙,跋雲:“山陰道士劉君以群鵝獻右軍,乞書《黃庭經》,此是也。”逸少真書此經與《樂毅論》、《太史箴告誓文》累表也。《蘭亭》、《洛神賦》皆行書,其他並草書也。草十行敵行書一字,行書十行敵真書一字耳。又續題雲:“此乃明州刺史李振景福中罷任,過濬郊,遺光祿朱卿。朱卿名友文,即樑祖之子,後封博王,王薨,予獲於舊邸,時貞明庚辰秋也。晉都樑苑,因重背之。中書舍人陶穀記。”是日降麻,以京兆安彥威兼副都統。米某跋雲:“印小字,乃唐越公鐘紹京印也。”此書在李太師第,固是甲觀。
           
             顏魯公、郭定襄《爭坐位第一帖》

             右楮紙,真跡,用先豐縣先天廣德中牒起草,禿筆字,字意相連,屬飛動詭形異狀,得於意外也。世之顏行第一書也。縫有顏氏守一圖書字印。在宣教郎安師文處,長安大姓也,為解鹽池句當官,攜入京,欲背,予得見之。安自雲:“季明《文鹿脯帖》在其家。”
           
             晉王右軍《稚恭進鎮帖》

             右麻紙書跡,後有太常卿蕭祐題跋,在前著作郎丁仲修處。
           
             晉王羲之《官奴帖》

             右雙鉤,麻紙本,亦在王仲修處。
           
             唐張右史季明《賀八清鑑等帖》

             右楮紙,真跡,筆法勁古,不類他書,世間季明第一書也。在承議郎蘇液處,世多刻石。
           
             懷素《千文》

             右絹書,真跡,在蘇液處,沈遘刻板本是也。
           
             懷素書《任華草書歌》

             右真跡,兩幅,絹書,字法清逸,歌辭奇偉,在駙馬都尉王晉卿第。尚方有三幅,乃其後幅,適完嘗請出第,觀復歸尚方。
           
             李邕《多熱要葛粉帖》

             右白麻紙,真跡,上有唐氏雜跡字印、陳氏圖書字印、勾德元圖書記字印,紫微舍人石揚休物,今在其孫前宿州支使夷庚處。前一帖與光八郎謝惠鹿帖真跡,餘過甬上,於夷庚處購得之。
           
             懷素草書《祝融高座帖》

             右絹書,兩行,此字入神,石紫微嘗刻石,有六行在,不見前四行。問夷庚,雲:“在王洙參政家。”此亦為其子弟購去矣。
           
             陳賢《草書帖》

             右六七紙,字奇逸難辨,如日本書。上亦有唐氏雜跡字印,在駙馬都尉李公炤家。
           
             顏真卿《祭叔濠州使君文》

             右真跡,楮紙,書改抹多,在長安。安氏子師文攜至京。
           
             顏真卿《疏拙帖》

             右麻紙書,真字,清勁秀發,亦與李大夫,時顏責硤州別駕,此顏第一帖也。
           
             懷素三帖

             右絹帖,雲貧道胸中如刀刺。第二帖見顏公,第三帖律公發,懷素不與,世之第一帖也,亦見於師文。
           
             懷素自序

             右在湖北運判承議郎蘇泌處。前一帖破碎不存,其父舜欽補之。
           
             庾翼帖

             全福上有竇蒙審定印。
           
             張芝、王翼二帖非真。
           
             虞世南《汝南公主墓志》
             歐陽詢碧箋四帖,草聖
             顏真卿與李大夫奏事張溆二帖
             懷素草書三幅,楊凝式書三帖
             皇象急就唐撫奇絕


             右在故相張公齊賢孫、名直清、字汝欽處,今為楚州山陽主簿。
           
             王右軍《相溫破羌帖》 有開元印,唐懷充跋。

             右筆法入神奇絕,帖與王仲修學士家《稚恭帖》同是神物,有開元印,懷充跋。在蘇澄道淵之子之純處,今為歙州判官。
           
             王獻之《送梨帖》,有黎氏印,連柳公權跋。王右軍《言敘帖》兩行有貞觀半印,徐僧權字。

             右在左藏庫副使劉季孫處,據柳公權跋,於唐太宗書前雜出獻之書,乃將其父書卻粘於獻之帖後雲。又一帖,柳誤以父為子矣,況不知書者乎。
           
             李邕四帖,內一幅碧箋,有唐氏雜跡印,勾德元圖書記印、陳氏圖書印,與石夷庚所藏《多熱帖》同。

             右在章子厚家。
           
             王右軍《筆陣圖》,前有自寫真,紙緊,薄如金葉,索索有聲。

             右同上,章公自雲:借於趙竦。今為蔡河撥發。
           
             王右軍《紙妙筆精帖》,有貞觀印。王太令《日寒帖》,有唐氏雜跡印。

             右故相王曾家物,在其孫景融處,後為前龍圖待制沈括存中取之。古跋,右軍作,羊欣大令作,薄紹之仍將大中歲跋刮去數字,填為薛邕記之。而故相薛居正題曰:“和傅遺餘。”此蓋和凝為薛氏故物,歸居正耳。唐太宗雅不喜子敬書,故時人以他名名之以應募。所謂紹之書,曰:乃於耳字不刮去,及不次獻之頓首,字猶在,一分許可識。大中所跋,既不能辨,復為不鑑之人所收,遂使至寶永失其真,籲可痛也。
           
             的聞

             唐僧懷素自序

             右在朝奉郎蘇液處,杭州沈氏嘗刻板本。泌、激皆舜欽子。蘇氏自參知政事易簡之子耆,耆子舜欽,欽之子激,四世好事有精鑑,亦張彥遠之比已。上三事,並激雲見之。
           
             洪元慎集右軍越州兩碑

             右真跡,在越州僧正子文處。嘗通許借,未果。
           
             褚遂良書《黃庭經》

             右聞綠綾所書,丁謂孫倩處。質在無錫民家,士多因邑官借出。
           
             王右軍書家譜

             右在山陰縣王氏家,越州教授王渙之以書抵某,具言有此書。
           
             虞世南書經

             右同上,在越州上虞。
           
             晉中令王獻之《己復此節帖》

             右在朝請大夫新昌石元之家,關景仁屢見之,嘗撫石。某見兩本,字札精妙。
           
             虞世南書《汝南公主銘》起草

             右在通直郎洛陽王護處,見撫本。給事中舉元子雲:真跡在洛陽好事家,有古跋。
           
             歐陽詢四帖

             右同上。
           
             顏魯公書《韻海》

             右聞大書朱字,魯公書小字,他人作蘇駒雲。在其父刑部尚書處。
           
             柳公權書《柳尊師墓志》

             右真跡,在錢塘唐垌處。
           
             張長史《千文》三帖

             右同上,模石乃李師中也,洛陽人。
           
             歐陽詢《鄱陽帖》

             右同上,模石在靈隱寺。
           
             褚遂良臨王右軍二帖

             右同上,並坰自雲,未肯輕出。
           
             《老子西升經》,褚遂良書,閻立本畫

             右在觀文殿學士洛陽馮京處。
           
             晉王惲《真草帖》,晉張翼帖,宋阮研帖,宋蕭思話表文,帝批答

             右在駙馬都尉李瑋處。某並見石本,後見李雲:“在高橋楊氏。”未獲見。
           
             顏真卿《寒食帖》

             右綾紙書,在中書舍人錢勰處,世多石本。
           
             王右軍《玉潤帖》

             右蘇州教授閭丘籲雲:在承議郎建安王實處。有古跋。令裝書人背,久不還。及剪卻半跋,皆唐名公也,付理不可得,匠人願陪四十千,即知其切,真得金已多。
           
             蘭亭撫本

             右正議大夫章惇跋,蘇激所收蘭亭雲,此與吾家所收同。
           
             褚遂良《奉書寧帖》

             右在關杞,某見石本。
           
             晉葛玄飛白天台字

             右見石本,真跡聞在台州。
           
             唐東宮長史陸柬之書《十八學士贊》

             右西京留台王瓘雲:在舍弟圭處。
           
             唐高閒書令狐楚詩

             右真跡,在戶部尚書康季常家,某見石本在湖州。
           
             歐陽詢二帖

             右在朝議大夫晁端彥處。其本與蘇州進士周沔。
           
             懷素書蕭常侍日下三帖

             右同上。
           
             宋羊欣、宋翼二帖,並褚令模蘭亭

             右見中書舍人蘇軾雲:在故相王隨之孫景昌處。撫石在湖州墨妙亭,屢見石本,今在沈存中括家。
           
             柳公權《紫絲靸蘭亭詩》二帖

             右待制王廣淵撫石,跋雲:龍圖大諫李公帥府暇日出書,請撫石。李師中也,洛陽人。
           
             張長史全本《千文》

             右見臨淮令曾孝蘊雲:在京師謝氏,亦寶文公遠族也。
           
             顏魯公帖一軸五幅

             右見湖州巡檢供奉官石裔駙馬之孫雲:在其兄處。


          26:歐陽修《六一論書.試筆》 ▲Top

            學書為樂   

            蘇子美嘗言:明窗淨幾,筆硯紙墨皆極精良,亦自是人生一樂。然能得此樂者甚稀,其不為外物移其好者,又特稀也。
            餘晚知此趣,恨字體不工,不能到古人佳處,若以為樂,則自是有馀。

            學書消日

            自少所喜事多矣。中年以來,或厭而不為,或好之未厭,力有不能而止者。其愈久益深而尤不厭者,書也。至於學字,為於不倦時,往往可以消日。乃知昔賢留意於此,不為無意也。

            學書作故事

            學書勿浪書,事有可記者,他時便為故事。

            學真草書

            自此已後,只日學草書,雙日學真書。真書兼行,草書兼楷,十年不倦當得名。然虛名已得,而真氣耗矣,萬事莫不皆然。有以寓其意,不知身之為勞也;有以樂其心,不知物之為累也。然則自古無不累心之物,而有為物所樂之心。

            學書工拙

            每書字,嘗自嫌其不佳,而見者或稱其可取。嘗有初不自喜,隔數日視之,頗若有可愛者。然此初欲寓其心以消日,何用較其工拙,而區區於此,遂成一役之勞,豈非人心蔽於好勝邪!

            作字要熟

            作字要熟,熟則神氣完實而有馀,於靜坐中,自是一樂事。然患少暇,豈其於樂處常不足邪?

            用筆之法

            蘇子美常言用筆之法,此乃柳公權之法也。亦嘗較之斜正之間,便分工拙。能知此及虛腕,則羲、獻之書可以意得也。因知萬事有法。揚子雲:“斷木為棋,刓革為鞠,亦皆有法。”豈正得此也。

            蘇子美論書

            蘇子美喜論用筆,而書字不迨其所論,豈其力不副其心邪?然“萬事以心為本,未有心至而力不能者,”餘獨以為不然。此所謂非知之難,而行之難者也。古之人不虛勞其心力,故其學精而無不至。蓋其幼也,未有所為時,專其力於學書。及其漸長,則其所學漸近於用。今人不然,多學書於晚年,所以與古不同也。

            蘇子美蔡君謨書

            自蘇子美死後,遂覺筆法中絕。近年君謨獨步當世,然謙讓不肯主盟。往年予嘗戲謂:“君謨學書如口,用盡氣力,不離故處。”君謨頗笑以為能取譬。今思此語已二十馀年,竟如何哉?

            李邕書

            餘始得李邕書,不甚好之,然疑邕以書自名,必有深趣。及看之久,遂為他書少及者,得之最晚,好之尤篤。譬猶結交,其始也難,則其合也必久。餘雖因邕書得筆法,然為字絕不相類,豈得其意而忘其形者邪?因見邕書,追求鐘、王以來字法,皆可以通,然邕書未必獨然。凡學書者得其一,可以通其馀。餘偶從邕書而得之耳。

            《筆說》

            學書靜中至樂說

            有暇即學書,非以求藝之精,直勝勞心於他事爾。以此知不寓心於物者,直所謂至人也。寓於有益者,君子也;寓於伐性汨情而為害者,愚惑之人也。學書不能不勞,獨不害情性耳。要得靜中之樂,惟此耳。

            夏日學書論

            夏日之長,飽食難過,不自知愧。但思所以寓心而銷晝暑者,惟據案作字,殊不為勞。當其揮翰若飛,手不能止,雖驚雷疾霆,雨雹交下,有不暇顧也。古人流愛,信有之矣。字未至於工,尚已如此,使其樂之不厭,未有不至於工者。使其遂至於工,可以樂而不厭,不必取悅當時之人,垂名於後世,要於自適而已。

            《雜題跋.跋李翰林昌武書》

            昌武筆畫遒峻,蓋欲自成一家,宜共見稱於當時也。風雅寂寞久矣,向時蘇、梅二子以天下兩窮人主張斯道,一時士人傾想其風采,奔走不暇,自其淪亡遂無復繼者,豈孟子所謂“折枝之易”第不為耶?覽李翰林詩筆,見故時朝廷儒學侍從之臣,未嘗不以篇章翰墨為樂也。

            善為書者以真楷為難,而真楷又以小字為難。羲、獻以來,遺跡見于今者多矣,小楷惟《樂毅論》一篇而已。今世俗所傳,出故高紳學士家最為真本,而斷裂之馀僅存者百馀字爾,此外吾家率更所書《溫彥博墓銘》亦為絕筆。率更書世固不少,而小字亦止此而已。以此見前人於小楷難工,而傳於世者少而難得也。君謨小字新出而傳者二:《集古錄目序》橫逸飄發,而《茶錄》勁實端嚴。為體雖殊而各極其妙,蓋學之至者,意之所到,必造其精。予非知書者,以接君謨之論久,故亦粗識其一二焉。治平甲辰。


          27:錢泳《書學》 ▲Top

          古來書碑者,在漢、魏必以隸書,在晉、宋、六朝必以真書,以行書而書碑者,始於唐太宗之《晉祠銘》,李北海繼之。

          餘弱冠時輒喜學山谷書,雖老學見之,亦為稱賞不置,心甚疑焉。因求教於林蠡槎先生,先生一見泳書,便雲:“子錯走路頭矣。”因問曰:“將奈何?”先生曰:“必學松雪翁書,方能退轉也。”後見馮定遠論山谷詩,以為江西粗俗槎丫之病,一入筆端,便九牛撥不出,必以義山、西昆諸體退之,乃悟先生之言之妙。由此觀之,山谷之詩與書皆不可沾染一點。餘謂文衡翁老年書亦染山谷之病,終遜于思翁,沈石田無論矣。

          (宋四家)學魯公者唯君謨一人而已,蓋君謨人品醇正,字畫端方,今所傳《萬安橋碑》,直是魯公《中興頌》,《相州畫錦堂記》,直是魯公《家廟碑》,獨行草書又宗王大令,不宗《爭坐位》一派。

          米書不可學者過於縱,蔡書不可學者過於拘。米書筆筆飛舞,筆筆跳躍,秀骨天然,不善學者,不失之放,即失之俗。

          有唐一代之書,今所傳者,唯碑刻耳。歐、虞、褚、薛,各自成家,顏、柳、李、徐,不相沿襲,如詩有初、盛、中、晚之分,而不可謂唐人諸碑盡可宗法也。大都大曆以前宗歐、褚者多,大曆以後宗顏、李者多,至大中、鹹通之間,則皆習徐浩、蘇靈芝及集正《聖教》一派而流為“院體”,去歐、虞漸遠矣。今之學書者,自當以唐碑為宗。唐人門類多,短長肥瘦,各臻妙境;宋人門類少,蔡、蘇、黃、米,俱有毛疵。學者不可不知也。

          近日所稱海內書家者,有三人焉:一為諸城劉文清公,一為錢塘樑山舟侍講,一為丹徒王夢樓太守也。或論文清書如枯禪入定,侍講書如布帛菽粟,太守書如倚門賣俏。餘謂此論太苛。文清本從松雪入手,靈峭異常,而誤於《淳化閣帖》,遂至模稜終老,如商鼎、周彝,非不古而不適於用。侍講早年亦宗趙、董,唯自壯至老,筆筆自運,不屑依傍古人,故所書全無帖意,如舊家子弟,不過循規蹈矩,飽暖終身而已。至太守則天資清妙,本學思翁,而稍沾笪江上習氣。中年得張樗寮察真跡臨摹,遂入輕挑一路,而姿態自佳,如秋娘傅粉,骨格清纖,終不莊重耳。

          思翁於宋四家中獨推服米元章一人,謂自唐以後,未有過之,此所謂僧贊僧也。蓋思翁天分高絕,趙吳興尚不在眼底,況文征仲、視希哲輩耶!元章出筆實在蘇、黃之上,唯思翁堪與作敵。然二公者,皆能縱而不能伏,能大而不能小,能行而不能楷者,何也?餘謂皆坐天分過高之病,天分過高則易於輕視古人,筆筆皆自運而出,故所書如天馬行空,不受羈束,全以天分用事者也。

          董思翁嘗論宋四家書皆學顏魯公,餘謂不然,宋四家皆學唐人耳。思翁之言誤也。如東坡學李北海,而參以參寥;山谷學柳誠懸,而直開畫蘭畫竹之法;元章學褚河南,又兼得馳驟縱橫之勢;學魯公者唯君謨一人而已。……總之,宋四家皆不可學,學之輒有病,蘇、黃、米三家尤不可學,學之不可醫也。

          坡公書昔人比之飛鴻戲海,而豐腴悅澤,殊有禪機。餘謂坡公天分絕高,隨手寫去,修短合度,並無意為書家,是其不可及處。其論書詩曰:“我雖不善書,曉書莫如我,苟能通其意,自請不學可。”又曰:“端莊雜流麗,剛健含婀娜。”真能得書家玄妙者。然其戈法殊扁,不用中鋒,如書《表忠觀碑》、《醉翁亭記》、《柳州羅池廟碑》之類,雖天趣橫溢,終不是碑版之書。……餘年過五十,自分無有進境,亦不能成家,擬以蘇書終其身,孰知寫未三四年,毛疵百出,旋復去之。乃知坡公之書未易學也。

          或問餘宋四家書既不可學,當學何書為得?餘曰:“其唯松雪乎!”松雪書用筆圓轉,直接二王,施之翰牘,無出其右。前朝如祝京兆、文衡山俱出自松雪翁,本朝如姜西溟、汪退谷亦從松雪出來,學之而無弊也。唯碑版之書則不然。碑版之書必學唐人,如歐、褚、顏、柳諸家,俱是碑版正宗,其中著一點松雪,便不是碑版體裁矣。或曰:“然則何不徑學唐人,而必學松雪,何也?"餘曰:“吾儕既要學書,碑版翰牘須得兼備,碑版之書其用少,翰牘之書其用多,猶之讀三百篇,《國風》、《雅》、《頌》不可偏廢,書道何獨不然。"

          張醜雲:“子昂書法溫潤閒雅,遠接右軍,第過為妍媚纖柔,殊乏大節不奪之氣。"非正論也。褚中令書,昔人比之美女蟬娟,不勝羅綺,而其忠言讜論,直為有唐一代名臣,豈在區區筆墨間,以定其人品乎?

          思翁書畫俱是大作手,其畫宗北苑,而兼得大小米之長,尚茬第二乘。唯書法無古無今,不名一格,而能卓然成家,蓋天資高妙,直在古人上也。餘嘗見思翁一畫卷,用筆淹潤,秀絕人寰,後有款雲:“時年八十又一。"又見一書卷,臨鍾、王、虞、褚、顏、柳及蘇、黃諸家,後有題雲:“此數帖餘臨仿一生,才得十之三四,可脫去拘束之習。“書時年亦八十一。夫以思翁之天資學力,尚作書作畫,老而不衰,自成大家也。

          米元章、董思翁皆天資清妙,自少至老筆未嘗停,嘗立論臨古人書不必形似,此聰明人欺世語,不可以為訓也。吾人學力既淺,見聞不多,而資性又復平常,求其形似尚不能,況不形似乎?


          28:包世臣《藝舟雙楫》[節錄] ▲Top

          藝舟雙楫[節錄]

          述書[中]

          餘既述諸君子之言為書,因以己意遇之,而知其悉合於古也。右軍以管為將軍,明書道之機樞在管,而管之不可亂動也。今小仲之法,引食指加大指之上,置管於食指中節之端,以主節斜鉤之;大指以指尖對中指中節拒之,則管當食指節灣,安如置床;大指之骨外突,抑管以向右,食指之骨橫逼,挺管以向左,則管定;然後中指以尖鉤其陽,名指以爪肉之際距其陰,小指以上節之骨貼名指之端;五指疏布,各盡其力,則形如握卵,而筆鋒始得隨指環轉如士卒之從旌麾矣。此古人所謂雙鉤者也。東坡有言:“執筆無定法,要使虛而寬。"善言此意已。

          仲瞿之法,使管向左迆後稍偃者,取逆勢也。蓋筆後偃,則虎口側向左,腕乃平而覆下如懸。于是名指之筋,環肘骨以及肩背;大指之筋,環臂灣以及胸脅。凡人引弓舉重,筋必反紐,乃長勁得刀。古人傳訣所為著懸腕也。唐賢狀撥鐙之勢雲:“如人並乘,鐙不相犯。"蓋善乘者,腳尖踏鐙,必內鉤,足大指若縫,腿筋皆反紐,是以並乘而鐙不相犯。此真工為形似者矣。至古之所謂實指虛掌者,謂五指皆貼管為實,其小指實貼名指,空中用力,令到指端,非緊握之說也。握之太緊,力止在管而不注毫端,其書必拋筋露骨,枯而且弱。永叔所謂“使指運而腕不知”,殆解此已。筆既左偃,而中指力鉤,則小指易於入掌,故以虛掌為難,明小指助名指揭筆尤宜用力也。大凡名指之力可與大指等者,則其書未有不工者也。然名指如桅之拒帆,而小指如桅點之助桅,故,必小指得勁,而名指之力乃實耳。

          山子之法,以筆毫平鋪紙土,與小鐘始艮終乾之說同,然非用仲瞿之法,則不能致此也。蓋筆向左迆後稍偃,是筆尖著紙即逆,而毫不得不平鋪於紙上矣。石工鐫字,畫右行者,其鐓必向左。驗而類之,則紙猶石也,筆猶鑽也,指猶鎚也。是故仲瞿之法,足以盡側、勒、策三勢之妙,而弩、[走+翟]、掠、啄、磔五勢入鋒之始,皆宜用之。鋒即著紙,即宜轉換;於畫下行者,管轉向上;畫上行者,管轉向下;畫左行者,管轉向右。是以指得勢而鋒得力。惟小正書,畫形既促,未及換筆而畫已成,非至神熟,難期合法。故自柳少師以後,遂無復能工此藝者也。

          始艮終乾者,非指全字,乃一筆中自備八方也。後人作書,皆仰筆尖鋒,鋒尖處巽也。筆仰則鋒在畫之陽,其陰不過副毫濡墨,以成畫形,故至坤則鋒止,佳者僅能完一面耳。惟管定而鋒轉,則逆入平出,而畫之八面無非毫力所達,乃後積畫成字,聚字成篇。過庭有言“一筆成一字之規,一字乃通篇之準”者,謂此也。蓋人之腕本側倚於幾,任其勢則筆端仰左而成尖鋒;鋒既尖,則墨之所到多筆鋒所未到。走過庭所譏“任筆為體,聚墨成形"者已。以主所述,凡皆以求墨之不上限溢位於筆也。

          青立之所謂“筆必斷而後起"者,即無轉不折之說也。蓋行草之筆多環轉,若信筆為之,則轉卸皆成扁鋒,故須暗中取勢換轉筆,過也。小仲所以憾未能盡側者,謂筆鋒平鋪,則畫滿如側,非尚真側也。漢人分法,無不平滿。中郎見刷牆堊痕而作飛白,以堊帚鋒平,刷痕滿足,因悟書勢,此可意推矣。古碑皆直牆平底,當時工匠知書,用刀必正下以傳筆法。後世書學既湮,石工皆用刀尖斜入,雖有晉、唐真跡,一經上石,悉成尖鋒,令人不復可見始艮終乾之妙。故欲見古人面目,斷不可舍斷碑而求匯帖已。餘見六朝碑拓,行處皆留,留處皆行。凡橫直平過之處,行處也,古人,必逐步頓挫,不使率然徑去,是行處皆留也。轉折挑剔之處,留處也,古人必提鋒暗轉,不肯¤[+厭]筆使墨旁出,是留處皆行也。完白計白當黑之論,即小仲左右如牝牡相得之意。小仲嘗言近世書鮮不鬩牆操戈者,又言正書惟太傅《賀捷表》、右軍《旦極寒》、大令《十三行》是真跡,其結構天成;下此則《張猛龍》足繼大令,《龍藏寺》足繼右軍,皆於平正通達之中,迷離變化不可思議。餘為申之,以《刁遵志》足繼太傅。河南《聖教序記》其書右行,從左玩至右,則字字相迎;從右看至左,則筆筆相背。噫!如此斯可與言書矣。

          [評點]包世臣(1775一1855)清書家.字慎伯,號倦翁、小倦遊閣外史.安徽涇縣人.嘉慶十三年舉人,曾經江西新喻縣知縣.工書,師承鄧石如,初學唐宋,後致力於北碑。曾自評雲:“餘性嗜篆分,頗知其意,而嘗致力,至於真、行、稿草之間,則不復後人矣。"他的書法理論對鹹豐、同治年間的書風很有影響。餘既述諸君子之言為書:本篇是緊承《述書上》的.在上篇中作者引述了霍金蘭、錢伯埛、鄧石如、黃乙生、朱昂之、吳育等人的言論,並敘述了自己按他們所說實踐後的體會。小仲:黃乙生(1769-1820,字小仲·江蘇陽湖(今武進縣〉人·道光初舉孝廉方正,未赴即卒.嗜書,攻之甚力.仲瞿:王良士(生卒年不詳),字仲瞿。浙江秀水人·山子:吳育的字.青雲:朱昂之(1755-?),字青雲,號津裏·江蘇武進人·善畫山水,行、草為時所重·清蔣寶齡《墨林今話》:“津裏書學董文敏,行、草筆墨精妙."

          包世臣是碑學的重要理論家,他對寫魏碑字的技法作了深入研究,為後人指明門徑,貢獻是很大的。《述書中》專論執筆用筆的方法。包氏推崇魏碑,甚至以為只有從魏碑中才能領悟到古人用筆的方法,這卻有待商榷。北魏諸碑的刻手大多未能忠實於書者的筆意,然而就在這種率意而為中卻使魏碑別具風姿,受到後人高度重視,以至有人以毛錐來求刀意。由於他以魏碑的筆勢為圭臬,所以他強調點畫線條要平滿,並且十分推崇黃乙生的“始艮終乾”說和王良士的筆管左偃使筆毫平鋪以取逆勢的用筆方法。從寫魏碑的角度來看,這些無疑是不傳之秘,但用來臨摹晉人法帖則失當了。這是我們在實踐中需要注意區別的。

          述書[下]

          字有九宮。九宮者,每字為方格,外界極肥,格內用細畫界一“井”字,以均布其點畫也。凡字無論疏密斜正,必有精神挽結之處,是為字之中宮。然中宮有在實畫,有在虛白,必審其字之精神所注,而安置於格內之中宮;然後以其字之頭目手足分布於旁之八宮,如j隨其長短虛實而土下左右皆相得矣。每三行相並,至九字又為大九宮,其中一字即為中宮,必須統攝上下四旁之八字,而八字皆有拱揖朝向之勢。連字移看,大小兩中宮皆得圓滿,則俯仰映帶,奇趣橫出已。九宮之說,始見於宋。蓋以尺寸算字,專為移縮古帖而說,不知求條理於本字,故自宋以來,書家未有能合九宮者也。兩晉真書碑版不傳於世,餘以所見北魏、南樑之碑數十百種,悉心參悟而得大小兩九宮之法。上推之周、泰、漢、魏、兩晉篆分碑版存於世者,則莫不合於此。其為鐘、王專力可知也。世所行《賀捷》、《黃庭》、《畫贊》、《洛神》等帖皆無橫格,然每字布勢奇縱周致,實合通篇而為大九宮。如三代鐘鼎文字,其行書如《蘭亭》、《玉潤》、《白騎》、《追尋》、《違遠》、《吳興》、《外出》等帖,魚龍百變,而按以矩矱,不差累黍。降及唐賢,自如才力不及古人,故行書碑版皆有橫格就中。九宮之學,徐會稽、李北海、張郎中三家為尤密,傳書俱在,潛精按驗,信其不謬也。

          然而畫法字法,本於筆,成於墨,則墨法尤書法一大關鍵已。筆實則墨沈。凡墨色奕然出於低上,瑩然作紫碧色者,皆不足與言書,必黝然以黑,色平紙面,諦視之,紙墨相接之處,仿佛有毛,畫內之墨,中邊相等,而幽光若水紋徐漾於波發之間,乃為得之。蓋墨到處皆有筆,筆墨相稱,筆鋒著紙,水即下注,而筆力足以攝墨,不使旁溢,故墨精皆在紙內。不必真跡,即玩石本亦可辯其墨法之得否耳。嘗見有得筆法而不得墨者矣,未有得墨法而不由於用筆者也。

          [評點]張郎中:張從申(生卒年未詳〉,唐代書家.吳郡(今江蘇蘇州市〉人.曾官大理司直、檢校禮部郎中.書學二王.宋黃伯恩《東觀餘論》:“從申書雖學右軍,其原出於大令,筆意與李北海同科,名重一時,宜不虛得,但所短者,抑揚低昂太過,又真不及行耳.然唐人而有晉韻,殊可佳尚."畫內之墨,中邊相等:包世臣在《述書上》中說自己“每以熟紙作書,則其墨皆由兩邊漸燥至中,一線細如絲發,墨光晶瑩異常,紙背狀如針畫,自謂於書道頗盡其秘".這裏所說的“中"即指這一條中線.

          書法的結構、章法問題曆來為人們所重視,許多人都想用一種簡單明了的方法揭示其中的規律.元陳繹曾、清蔣驥都曾對用九宮法安排字的結構作過論述,但是包世臣又進了一步,他不但論述了“小九宮",還試圖用“大九宮"來揭示章法安排的規律。這種方法到底是否符合實際,還需要我們自己在實踐中作進一步的揣摩。至於墨法,包世臣強調要“筆力足以攝墨",這自然是對的,而他又認為必須做到“紙墨相接之處,仿佛有毛,畫內之墨,中邊相等"才算掌握了用墨的方法,這似乎又機械了些。

          曆下筆譚[節錄]

          用筆之法,見於畫之兩端,而古人雄厚恣肆令人斷不可企及者,則在畫之中截。蓋兩端出入操縱之故尚有跡象可尋,其中截之所以豐而不怯、實而不空者,非骨勢洞達,不能倖致,更有以兩端雄肆而彌使中截空怯者,試取古帖橫直畫,蒙其兩端而玩,其中截,則人人共見矣。中實之妙,武德以後,遂難言之。近人鄧石如書,中截無不圓滿遒麗,其次劉文清中截近左處亦能潔淨充足,此外則並未夢見在也。古今書訣俱未及此,惟思白有筆畫中須直,不得輕易偏軟之說,雖非道出真際,知識固自不同。其跋杜牧之《張好好詩》雲“大有六朝風韻"者,蓋亦賞其中截有豐實處在也。

          北碑畫勢甚長,雖短如黍米,細如纖毫,而出入收放、俯仰向背、避就朝揖之法備具。起筆處順入者無缺鋒,逆入者無漲墨,每折必潔淨,作點尤精深,足以雍容寬綽,無畫不長。後人著意留筆,則駐鋒折穎之處墨多外溢,未及備法而畫已成;故舉止匆遽,界恆苦促,畫恆苦短,雖以平原雄傑,未免斯病。至於作勢裹鋒,斂墨入內,以求條鬯手足,則一畫既不完善,數畫更不變化,意恆傷淺,勢恆傷薄,得此失彼,殆非自主。山谷謂征西《出師頌》筆短意長,同此妙悟。然渠必見真跡,故有是契,若求之匯帖,即北宋棗本,不能傳此神解,境無所觸,識且不及,況雲實證耶!

          [評點]武德:唐高祖李淵年號。劉文清:既劉墉,劉羅鍋也。征西:漢書家索靖。

          清代初期,趙、董二家風靡書壇。北碑的盛行,一洗前人鉛華,以雄強剛方的面目展示在人們面前。北碑點畫豐滿厚重,和崇尚帖學的書家們那種秀勁精巧的線條截然不同。這樣就促使人們重新審視線條的質量標準。于是包世臣發前人之未發,提出了筆畫中截應豐實的新見解。這對於我們理解北碑的點畫特征是很有幫助的。

          作為碑學的重要理論家,包世臣還著重指出“北碑畫勢甚長”。這是北碑點畫的又一重要特征。至於如何做到這一點,他認為關鍵在“備法”.這種認識不僅對於寫碑,就是對寫帖也是很有指導意義的.

          答熙載九問[節錄

          問:自來論具書以不失篆分遺意為上,前人實之以筆畫近似者,而先生駁之,信矣。究竟篆分遺意寓於具書從何處見?

          篆書之圓勁滿足,以鋒直行於畫中也;分書之駿發滿足,以毫平鋪於紙上也。真書能斂墨入毫,使鋒不側者,篆意也;能以鋒攝墨,使毫不裹者,分意也。有漲墨而篆意湮,有側筆而分意漓。誠懸、景度以後遂滔滔不可止矣。

          問:先生常言草書自有法,非字體之說也。究竟何者為草法?

          《書譜》雲:“真以點畫為形質,使轉為性情;草以使轉為形質,點畫為性情。”是真能傳草法者。世人知真書之妙在使轉,而不知草書之妙在點畫,此草法所為不傳也。大令草常一筆環轉,如火筋劃灰,不見起止。然精心探玩,其環轉處悉具起伏頓挫,皆成點畫之勢。由其筆力精熟,故無垂不縮,無往不收,形質成而性情見;所謂畫變起伏,點殊衄、挫,導之泉泣,頓之山安也。後人作草,心中之部分,既元定則,毫端之轉換,又復鹵莽,任筆為體,腳忙手亂,形質尚不備具,更何從說到性情乎?蓋必點畫寓使轉之中,即性情發形質之內,望其體勢,肆逸飄忽,幾不復可辨識,而節節換筆,筆心皆行畫中,與真書元異。過庭所為言“張不真而點畫狼藉”,指出楷式,抉破¤奧也。

          至謂“鐘不草而使轉縱橫",此語並傳盡真法。蓋端莊平直,真勢也;古人一點一畫皆使鋒轉筆以成之,非至起止掣曳之處乃用使轉。縱橫者,無處不達之謂也。盤紆跳蕩,草勢也;古人一牽一連筆皆旋轉,正心著紙,無一黍米倒塌處。狼藉者,觸目悉是之謂也。草法不傳,實由真法之不傳。真草同源,只是運指換筆。真則人人共習,而習焉不察;草則習之者少,故謂草法不傳耳。然草書部分亦是一大事,《晉書》所謂“殺字甚安”是專言結構。不力究此義,所以日趨狂怪繚繞而不可止也。草故有法,然豈有別法哉?千年黑洞,今始鑿出一線天。

          然工力互有深淺,吳郡所為嘆右軍博涉多優也。抑餘有更為吳郡進一解者,書之形質如人之五官四休,書之情性如人之作止語默,,必如相人書所謂五官成,四體稱,乃可謂之形質完善,非是則為缺陷;必如《禮經》所謂九容,乃得性情之正,非是則為邪僻。故真書以平和為上,而駿宕次之;草書以簡淨為止,而雄肆次之。是故有形質而無情性,則不得為人,情性乖戾又烏得為人乎!明乎此而自力不倦,古人未嘗不可企及耳。

          問:先生嘗雲:“道蘇須汰爛漫,由董宜避凋疏。”爛漫、凋疏。章法中事乎?筆法中事乎?汰之。避之。從何處著手?

          爛漫、凋疏。見於章法而源於筆法。花到十分爛漫者,菁華內竭,而色彩外褪也;草木秋深,葉凋而枝疏者,以生意內凝而生氣外蔽也。書之爛漫,由於力弱,筆不能攝墨,指不能伏筆,任意出之,,故爛漫之弊至幅後尤甚。凋疏由於氣怯,筆力盡於畫中,結法止於字內,矜心持之,故凋疏之態在幅首尤甚。汰之,避之,唯在練筆。筆中實則積成字,累成行,綴成幅而氣皆滿,氣滿則二弊去矣。寶晉藉《辭中令書》,畫瘦行寬而不凋疏者,氣滿也。戲鴻堂摘句《蘭亭詩》、《張好好詩》,結法率易,格致散亂而不爛漫者,氣滿也。氣滿由於中實,中實由於指勁,此詣甚難至,然不可不知也。

          [評點]熙載:即吳熙載。誠懸:柳公權。景度:楊凝式殺字甚安,意為結字妥帖。晉衛恆《四體書勢》:“杜氏(杜度)殺字甚安而書體微瘦,崔氏(崔瑗)甚得筆勢而結字小疏."九容:身體九部分之容姿。《禮記·玉藻》:“君子之容舒遲,見所尊者齊¤(音素,局促不安貌)。足容重,手容恭,目容端,口容止,聲容靜,頭容直,氣容肅,立容德,色容莊,坐如屍,燕居告溫溫”。寶晉齋:原為米芾書齋名,這裏指《寶晉齋法帖》。戲鴻堂:指《戲鴻堂帖》,為董其昌所刻叢帖,刻有晉、唐、宋、元諸家名跡。

          任何一種新字體的誕生,都是當時人們在“因革損益”規律的支配下,在使用中對原有字體進行加工改造的結果。楷書是在漢代小篆餘風猶在,隸書方興未艾這一字體急劇變化的時期出現的,因此也就必然帶有篆書、隸書的一些特點。包世臣從篆、隸書的筆勢和用筆、用墨的方法上,論述了如何使楷書“不失篆分遺意”,簡明扼要地抓住了問題的關鍵。

          書法作品中表現出來的性情是作者人格的物件化。包世臣有見於此,從傳統的儒家思想出發,強調了以“平和"、“簡淨”為上這樣一種審美標準,顯而易見,這和他一貫推崇的北碑的審美特征是有矛盾的,反映了他在書法藝術的探索程序中既渴望求新但又不能擺脫儒家傳統文化束縛的兩難處境。他自己的創作成就之所以不大,大約也是受制於此。

          在古今許多書法作品中,都存在著一種不足之處,即前後效果不統一,有的前段成功後段失敗,有的則與此相反。包世臣指出了造成這種弊病的原因,提出了克服的方法,為世人獻上了一劑良藥。


          29:阮元《南北書派論》[節錄] ▲Top

          南北書派論[節錄]

          書法遷變,流派混淆,非溯其源,曷返於古?蓋由隸字變為正書、行草,其轉移皆在漢末、魏、晉之間;而正書、行草之分為南、北兩派者,則東晉、宋、齊、樑、陳為南派,趙、燕、魏、齊、周、隋為北派也。南派由鍾繇、衛瓘及王羲之、獻之、僧虔等,以至智永、虞世南;北派由鐘繇、衛瓘、索靖及崔悅、盧諶、高遵、沈馥、姚元標、趙文深、丁道護等,以至歐陽詢、褚遂良。南派不顯於隋,至貞觀始大顯。然歐、褚諸賢,本出北派,洎唐永徽以後,直至開成,碑版、石經尚沿北派餘風焉。南派乃江左風流,疏放妍妙,長於啟牘,減筆至不可識。而篆隸遺法,東晉已多改變,無論宋、齊矣。北派則是中原古法,拘謹拙陋,長於碑榜。而蔡邕、韋誕、邯鄲淳、衛覬、張芝、杜度篆隸、八分、草書遺法,至隋末唐初猶有存者。兩派判若江河,南北世族不相通習。至唐初,太宗獨善王羲之書,虞世南最為親近,始令王氏一家兼掩南北矣。然此時王派雖顯,縑楮無多,世間所習猶為北派。趙宋《閣帖》盛行,不重中原碑版,于是北派愈微矣。

          褚遂良雖起吳、越,其書法遒勁,乃本褚亮,與歐陽詢同習隋派,實不出於二王。褚書碑石,雜以隸筆,今有存者,可復按也。褚臨《蘭亭》,改動王法,不可強同。虞世南死,太宗嘆無人可與論書,魏征薦遂良曰:“遂良下筆遒勁,甚得王逸少體。”此乃征知遂良忠直,可任大事,薦其人,非薦其書。其實褚法本為北派,與世南不同。

          [評點]阮元(1764-1849),清代著名學者,書家.字伯元,號芸台,晚號怡性老人.江蘇儀征人.乾隆五十四年(1789)進士,曆任戶、兵、工部侍郎,浙、閩、贛諸省巡撫,兩廣、雲貴總督,體仁閣大學士,卒溢文達.他曆官所至,以提倡學術自任,主編《經籍纂沽》,校刻《十三經注疏》,匯刻《皇清經解》一百八十餘種.在書法方面,所作《南北書派論》、《北碑南帖論》均是書學史上重要著述,為碑學的首倡者.他的書作亦頗受時人稱道.《清史稿》卷三百六十四有傳.

          北碑南帖論[節錄]

          古石刻紀帝王功德,或為卿士銘德位,以佐史學,是以古人書法未有不托金石以傳者。秦石刻曰“金石刻”,明白是也。前、後漢隸碑盛興,書家輩出。東漢山川廟墓無不刊石勒銘,最有矩法。降及西晉、北朝,中原漢碑林立,學者慕之,轉相摹習。唐人修《晉書》、南、北《史》傳,於名家書法,或曰善隸書,或曰善隸草,或曰善正書、善楷書,善行草,而皆以善隸書為尊。當年風尚,若曰不善隸,是不成書家矣。故唐太宗心折王羲之,尤在《蘭亭序》等帖,而禦撰《羲之傳》,唯曰“善隸書,為古今之冠”而已,絕無一語及於正書、行草。蓋太宗亦不能不沿史家書法以為品題。《晉書》具在,可以覆案。而羲之隸書,世間未見也。是以北朝書家,史傳稱之,每曰長於碑榜。

          晉室南渡,以《宣示表》諸跡為江東書法之祖,然衣帶所攜者,帖也。帖者,始於卷帛之署書,後世凡一縑半紙珍藏墨跡,皆歸之帖。今《閣帖》如鍾、王、郗、謝諸書,皆帖也,非碑也。且以南朝教禁刻碑之事,是以碑碣絕少,唯帖是尚,字全變為真行草書,無復隸古遺意。即以焦山《瘞鶴銘》與萊州鄭道昭《山門》字相較,體近相近,然妍態多而古法少矣。

          唐太宗幼習王帖,於碑版本非所長,是以禦書《晉祠銘》(貞觀二十年,今在太原府。〉筆意縱橫自如,以帖意施之巨碑者,自此等始。此後,李邕碑版名重一時,然所書《雲麾》諸碑,雖字法半出北朝,而以行書書碑,終非古法。故開元間修《孔子廟》諸碑,為李邕撰文者,邕必諭張庭珪以八分書書之,邕亦謂非隸不足以敬碑也。唐之殷氏(仲容)、顏氏(真卿),並以碑版隸、楷世傳家學。王行滿、韓擇木、徐浩、柳公權等,亦各名家,皆由沿習北法,始能自立。

          是故短箋長卷,意態揮灑,則帖擅其長。界格方嚴,法書深刻,則碑據其勝。宋蔡襄能得北法,元趙孟頫楷書摹擬李邕,明董其昌楷書托跡歐陽,蓋端書正畫之時,非此則筆力無立卓之地,自然入於北派也。要之漢、唐碑版之法盛,而鐘鼎文字微;宋、元鐘鼎之學興,而字帖之風盛。若其商榷古今,步趨流派,擬議金後,名家復起,其誰與歸?

          [評點]作為又一篇鼓吹北碑的力作,阮元在本文中論述了北碑南帖的不同特點和南北書風的差異。刻石題匾必須用隸書,非隸不古;北派書家擅長碑榜之書,北碑中多隸意;後世碑版名家無不借鑑隸書,追蹤北派,如此等等可以說是這篇文章的要點。但讀者的眼光不能就此而止。阮元尊隸崇碑不是在強調它們的功用,而是在表明自己的審美觀點。他之所以尊隸是因為隸有古法,之所以尊碑是因為碑版之書“界格方嚴,法書深刻"。南帖飄逸妮媚之美不足貴,題署碑版古意盎然,氣勢雄強值得推崇,這才是蘊含於字裏行間的作者的深意。


          30:盛熙明 《法書考》 ▲Top

            虞集序

             伏羲始畫八卦而文字興焉,六書之象形,此其端也。中古簡牘之事則史氏掌之,後世有天下者,蓋有以書名世者矣。曲鮮盛熙明得備宿衛,有以知皇上之天縱多能,留心書學、手輯書史之舊聞,參以國朝之成法,作法書考八卷上之。燕閒之暇,多有取焉。昔唐柳公權嘗進言於其君曰:心正則筆正。天下後世謂之筆諫。勗哉熙明,無俾公權專美前世。史臣虞集序。
           
             歐陽玄序

             小學廢,書學幾絕,聲音之學尤泯如也。周秦而下,體制迭盛,西晉以來,華梵兼隆。唐人以書取士,宋人臨拓價逾千金,刻之秘閣,法書興矣。然而循流遺源,士有憾焉。此龜茲盛熙明法書考之所由作歟?熙明刻意工書,而能研究宗原,作為是書。至於運筆之妙,評書之精,則甘苦疾徐之度,非老於斫輪者疇克如是耶!書成,近臣薦達,以徹上覽。清問再三,又能悉所學以對,因獲賞嘆。給事中兼起居注亦思刺瓦性吉時中出資鋟梓,以廣其傳,庶俾世之學者有所模楷,其用心可謂公且仁矣。熙明以書入官,今為夏官屬,蓋亦不忘其本者雲。翰林學士資善大夫知制誥同修國史廬陵歐陽玄序。
           
             揭傒斯序

             法書肇伏羲氏,愈變而愈降,遂與世道相隆汙。能考之古猶難,況復之乎?至順二年,盛君熙明作法書考,稿未竟,已有言之文皇帝者。有旨趣上進,以修皇朝經世大典。事嚴,未及錄上而文皇帝崩。四年四月五日,今上在延春閣,遂因奎章承制學士沙刺班以書進。上方留神法書,覽之徹卷,親問八法旨要,命藏之禁中,以備親覽。當是時,上新入自嶺南,聖心所向,已傳播中外。及即位,開經筵,下崇儒之詔,天下颙颙然翹首跂足,思見聖人之治。法書之復,其在茲乎?然天下之期復於古者不止法書也,而于是乎觀也,則盛氏之書其復古之兆乎?惟盛氏之先曲鮮人,今家豫章。而熙明清修謹飭,篤學多才有文章,工書,能通諸國書,而未嘗自賢,或為一時名公卿所知。是書之作,虞奎章既為之序,餘特著其進書始末如此。元統二年十月望,文林郎藝文監丞參檢書籍事揭傒斯序。

          卷首: 序言
          卷一: 書譜
          卷二: 字源
          卷三: 筆法
          卷四: 圓訣
          卷五: 形勢
          卷六: 風神
          卷七: 工用


          31:釋亞棲 《論書》 ▲Top

            凡書通即變。王變白雲體,歐變右軍體,柳變歐陽體,永禪師、褚遂良、顏真卿、李邕、虞世南等,並得書中法,後皆自變其體,以傳後世,俱得垂名,若執法不變,縱能入石三分,亦被號為書奴,終非自立之體。是書家之大要。     

          [評點]釋亞棲,晚唐書法家。洛陽(今之洛陽城東,洛水北岸)人。生平事跡不詳。《宣和書譜》雲:“喜作字,得張顛筆意,自謂吾書不大不小,得其中道,若飛鳥出林,驚蛇入草。”
            《葆光祿》曰:、“亞棲書骨氣不及謄光,而遒媚過之,二人俱應制,其蹤海內旨盛。”李日華《六研齋二筆》雲:“亞棲書開元寺壁,筆勢濃鬱,古帖有之,亦是晚唐奇跡。”
            《論書》一篇,強調推陳出新,“若執法不變,縱能入石三分,亦被號為書奴。”這個觀點,無疑是正確的。


          32:釋智果《心成頌》 ▲Top

          回展右肩 頭項長者向右展,“寧”、“宣”、“臺”、“尚”字是。(非為頭項長。)

          長舒左足 有腳者向左舒,“寳”、“典”、“其”、“類”字走。(謂“”、“”、“木”、“”之類,非“其”、“典”之類。)

          峻拔一角 字方者抬右角,“國”、“用”、“周”字是。

          潛虛半腹 畫稍粗於左,右亦須著,遠近均勻,遞相覆寫,放令右虛。“用”、“見”、“岡”、“月”字是。

          間合間開 “無”字等四點四畫為縱,上心開則下合也。

          隔仰隔覆 “並”字隔“二”、“畺”字隔“三”,皆斟酌“二”、“三”字,仰覆用之。

          回互留放 謂字有磔掠重者,若“爻”字上住下放,“茶"字上放下住是也,不可並放。

          變換垂縮 謂兩豎畫一垂一縮,“並”字右縮左垂,“斤”字右垂左縮。土下亦然。

          繁則減除 王書“懸”字、虞書“毚”字,皆去下一點;張書“盛”字,改“血”從“皿”也。(“盛”本從“皿"。)

          疏當補續 王書“神”字、“處”字皆加一點,“卻”字“”從“”是也。

          分若抵背 謂縱也,“卅”、“冊”之類,皆須自立其抵背,鍾、王、歐、虞皆守之。

          合如對目 謂逢也,“八”字、“州”字,皆須潛相矚視。

          孤單必大 一點一畫成其獨立者是也。

          重並仍促 謂“昌”、“呂”、“爻”、“棗”等字上下,“林”,、“棘”、“絲”、“羽”等字左促,“森”、“淼”字兼用之。

          以側映斜 為斜,、[捺]為側,“交”、“大”、“以”、“入”之類是也。

          以斜附曲 謂L[彎折] 為曲,“女”、“安”、“必”、“互”之類是也。

          覃精一字,功歸自得盈虛。向背、仰覆、垂縮、回互不失也。

          統視連行,妙在相承起復。行行皆相映帶,聯屬而不背違也。

          [評點]釋智果,隋仁壽年間步法家,師從智永.會稽〈今浙江紹興〉人。隋煬帝曾說z“智永得右軍肉,智果得右軍骨。"《心成頌》見於宋·蘇霖《書法鉤玄》。全文由“頌"、“注"兩部分構成.“頌"為有韻文體,注文據嚴可均《全隋文》認為“非智果自注”。“心成"指“書法" 。

          從單個字的布白結構,到行與行之間的相互映帶,再到整篇的均衡勻稱,作者都作了精彩的闡述,為後世書法結體立下了原則,也為重整體美的書法美學思想開了先聲。作者所主張的創作應遵守動態平衡的美學思想,尤其值得我們重視。

          據清包世臣《藝舟雙椅·記兩棒師語》,認為此文是談站立時作書的手法和身法,所以有“長舒左足,潛虛半腹”,(即站立時寫長幅字,右半腹一定會貼緊幾案,左半腹側離幾案,左腳舒展向後,這樣“氣”就不會偏右上浮,從而保證了書寫時的自由舒暢)、“回展右肩,峻拔一角"(即右手斜著伸展,如角向前,那麼右肩也就必然展開)之說,可作參考。


          33:宋曹 《書法約言》 ▲Top

          總論

          學書之法,在乎一心,心能轉腕,手能轉筆。大要執筆欲緊,運 筆欲活,手不主運而以腕運,腕雖主運而以心運。右軍曰:“意在筆 先”。此法言也。古人下筆有由,永遠不虛發;今人好溺偏固,任筆為 體,恣意揮運,以少知而自炫新奇,以意足而不顧顛錯,究於古人妙 境,茫無體認,又安望其升晉魏之堂乎!凡運筆有起止,(一筆一字, 俱有起止。)有緩急,(緩以會心,急以取勢。)有映帶,(映帶以連脈 絡。)有回環,(即無往不收之意。)有輕重,(凡轉肩轉場用輕,凡畫 捺蹲駐用重。)有轉折,(如用鋒向左,必轉鋒向右,如書轉肩,必內 方外圓。書一捺必內直外方,須有轉折之妙,方不板實。)有虛實, (如指用實而掌用虛,如肘用實而腕用虛,如小書用實處,而大書則 用虛,更大則周身皆用虛。)有偏正,(偶用偏鋒亦以取勢,然正鋒 不可使其筆偏,方無王伯雜處之弊。)有藏鋒有露鋒,(藏鋒以包其 氣,露鋒以縱其神。藏鋒高於出鋒,亦不得以模糊為藏鋒,須有用筆, 如太阿截鐵之意方妙。)即無筆時亦可空手作握筆法書空,演習久之自 熟。雖行臥皆可以意為之。自此用力到沉著痛快處,方能取古人之神, 若一味仿摹古法,又覺刻劃太甚,必須脫去摹擬蹊徑,自出機軸,漸 老漸熟,乃造平淡,遂使古法優遊筆端,然後傳神。傳神者,必以形, 形與心手相湊而忘神之所托也。今人患在空竭心力,總不能離本來面 目,以言乎神,烏可得乎?古有雲:書法之要,妙在能合,神在能離。 所謂離者,務須倍加工力,自然妙生。既脫於腕,仍養於心,方無右 軍習氣。(筆筆摹擬不能脫化,即謂右軍習氣。)魯公所謂趣長筆短, 常使意勢有餘,字外之奇,言不能盡。故學子敬者,畫虎也。學元常 者,畫龍也。餘謂學右軍者,因無畫之跡,亦無畫之名矣。

          初作字,不必多費楮墨。取古拓善本細玩而熟觀之,既復,背帖而索之。學而思,思而學,心中若有成局,然後舉筆而追之,似乎了了於心,不能了了於手,再學再思,再思再校,始得其二三,既得其四五,自此縱書以擴其量。總在執筆有法,運筆得宜。真書握法,近筆頭一寸。行書寬縱,執宜稍遠,可離二寸。草書流逸,執宜更遠,可離三寸。筆在指端,掌虛容卵,要知把握,亦無定法。熟則巧生,又須拙多於巧,而後真巧生焉。但忌實掌,掌實則不能轉動自由,務求筆力從腕中來。筆頭令剛勁,手腕令輕便,點畫波掠騰躍頓挫,無往不宜。若掌實不得自由,乃成稜角,縱佳亦是露鋒,筆機死矣。腕豎則鋒正,正則四面鋒全。常想筆鋒在畫中,則左右逢源,靜燥俱稱。學字既成,猶養於心,令無俗氣,而藏鋒漸熟。藏鋒之法,全在握筆勿深,深者,掌實之謂也。譬之足踏馬鐙,淺則易於出入,執筆亦如之。﹪
          楷法如快馬斫陣,不可令滯行,如坐臥行立,各極其致。草如驚蛇入草,飛鳥出林,來不可止,去不可遏。先作者為主,後作者為賓,必須主賓相顧,起伏相承,疏取風神,密取蒼老。真以轉而後遒,草以折而後勁。用骨為體,以主其內,而法取乎嚴肅,用肉為用,以彰其外,而法取乎輕健。使骨肉停勻,氣脈貫通,疏處、平處用滿,密處、險處用提。滿取肥,提取瘦。太瘦則形枯,太肥則質濁。筋骨不立,脂肉何附;形質不健,神彩何來?肉多而骨微者謂之墨豬,骨多而肉微者謂之枯藤。書必先生而後熟,既熟而後生。先生者學力未到,心手相違;後生者不落蹊徑,變化無端。然筆意貴淡不貴豔,貴暢不貴緊,貴涵泳不貴顯露,貴自然不貴作意。蓋形圓則潤,勢疾則澀。不宜太緊而取勁,不宜太險而取峻。遲則生妍而姿態毋媚,速則生骨而筋絡勿牽。能速而速,故以取神;應遲不遲,反覺失勢。無論藏鋒出鋒,都要章法安好,不可虧其點畫,而使氣勢支離。﹪
          夫欲書先須凝神靜思,懷抱蕭散,陶性寫情,預想字形偃仰平直,然後書之。若迫於事,拘于時,屈於勢,雖鐘、王不能佳也。凡書成,宜自觀其體勢,果能出入古法,再加體會,自然妙生。但拘於小節,畏懼生疑,迷於筆先,惑於腕下,不成書矣。今人作書,如新婦梳妝,極意點綴,終無烈婦態也,何今之不逮古歟?﹪

          答客問書法﹪

          客謂射陵子曰:“作書之法有所謂執,可得聞乎?”射陵子曰:“非深淺得宜、長短鹹適之謂乎。”
          曰:“其次謂使,可得聞乎?”曰:“非縱橫不亂、牽掣不拘之謂乎。”﹪
          曰:“次謂轉,可得聞乎?”曰:“非鉤镮不乖、盤紆相屬之謂乎。”﹪
          曰:“次謂用,可得聞乎?”曰:“非一點分向背,一畫辨起伏之謂乎。”﹪
          曰:“又有淹留勁疾之法,可得聞乎?”曰:“非能速不速,是謂淹留;能留不留,方能勁疾之謂乎?”﹪
          曰:“不可使狀如算子,大小齊平一等,可得聞乎?”曰:“非分布不可排偶,體勢不可倒置,各盡其字之真態之謂乎。”﹪
          曰:“又有體用兼收、脫化無我,可得聞乎?”曰:“非要領了然,意先筆後,導之如注, 頓之若山,電激龍飛之勢,雲崩獸駭之奇無所不至之謂乎?”﹪
          曰:“又有蹇鈍滑突之弊,可得聞乎?”曰:“非以狐疑而故作淹留,以狼藉故稱疏脫之謂乎?”
          曰:“如巨石當路、枯槎架險,可得聞乎?”曰:“非妍姿不足,體質猶存,有意剛方而終 為強項之謂乎。﹪
          曰:“如秋蛇纏物、春林落蕊,可得聞乎?”曰:“非骨氣相離,專事柔媚,存心紆緩而終為俗胎之謂乎。”﹪
          曰:“又有脫易不收,輕鎖任意,全無紀律,隨手弊生,可得聞乎?”曰:“非失於規矩,流於酬應,撓於世務,染於俗吏之謂乎。”﹪
          曰:“善哉言乎,願請其詳。”﹪
          曰:“書法之要,先別乎古今。今不逮古者,古人用質而今人用妍,古人務虛而今人務滿。質所以違時,妍所以趨俗。虛所以專精,滿所以自畫也。予弱冠知書,留心越四紀。枕畔與行麓中,嘗置諸帖,時時摹仿,倍加思憶,寒暑不移,風雨無間。雖窮愁患難,莫不與諸帖俱。復嘗慨漢、晉以逮有唐,諸先正已遠,無從起而質問。間有所會,或亦茫然。所謂功力智巧,凜然不敢自許。大約聞之古人雲:“運用之方,雖由已出,而規矩所在,必從古人。學規矩則老不如少,思運用則少不如老。”老不如少者,期其可勉,少不如老者,愈老愈精。又要於竿頭進步,時得取勢取致之妙。非勁利不能取勢,非使轉不能取致。若果於險絕處復歸平正,雖平正時亦能包險絕之趣,而勢與致兩得之矣。故志學之士,必須到愁慘處,方能心悟腕從,言忘意得,功效兼優,性情歸一,而後成書。”客退而書諸紳。
          射陵逸史曰:茲篇作問答語,間用《筆陣圖》與《書譜》成句,非褻取也,不過假此以為注疏,俾志學之士,一見了然,豈不快歟?﹪

          論作字之始

          伏羲一畫開天,發造化之機,而文字始立。自是有龍書、穗書、雲書、鳥書、蟲書、龜書、 螺書、蝌蚪書、鐘鼎書以至虎爪、蚊腳、蝦蟆子,皆取形而作書。古帝啟萌,倉頡肇體,嗣有 六書,而書法乃備。史籀從此變而為大篆,李斯又變而為小篆,王次仲又變而為八分,程邈 又變而為隸書,蔡邕又變而為飛白。飛白者,隸書之捷也,隸書又八分之捷也。八分減小 篆之半,小篆又減大篆之半,去古漸遠,書體漸真,故六義八體既行於世,而楷法于是乎生 矣。

          論楷書

          蓋作楷先須令字內間架明稱,得其字形,再會以法,自然合度。然大小、繁簡、長短、廣 狹,不得概使平直如算子狀,但能就其本體,盡其形勢,不拘拘於筆畫之間,而遏其意趣。使 筆筆著力,字字異形,行行殊致,極其自然,乃為有法。仍須帶逸氣,令其蕭散;又須骨涵於中,筋不外露。無垂不縮,無往不收,方是藏鋒,方令人有字外之想。如作大楷,結構貴 密,否則懶散無神,若太密恐涉於俗。作小楷易於局促,務令開闊,有大字體段。易於局 促者,病在把筆苦緊,於運腕不靈,則左右牽掣;把筆要在虛掌懸起,而轉動自活。若不空 其手心而意在筆後,徒得其點畫耳,非書也。
          總之,習熟不拘成法,自然妙生。有唐以書法取人,故專務嚴整,極意歐、顏。歐、顏諸 家,宜於朝廟誥敕。若論其常,當法鍾、王及虞書《東方畫贊》、《樂毅論》、《曹娥碑》、《洛神 賦》、《破邪論序》為則,他不必取也。

          論行書

          凡作書要布置、要神採。布置本乎運心,神採生於運筆,真書固爾,行體亦然。蓋行書 作於後漢劉德升,魏鍾繇亦善作行書,所謂行者,即真書之少縱略。後簡易相間而行,如雲 行水流,秾纖間出,非真非草,離方遁圓,乃楷隸之捷也。務須結字小疏,映帶安雅,筋力老 健,風骨灑落。字雖不連而氣候相通,墨縱有馀而肥瘠相稱。徐行緩步,令有規矩;左顧右 盼,毋乖節目。運用不宜太遲,遲則癡重而少神;亦不宜太速,速則窘步而失勢。布置有度,起止便靈;體用不均,性情安托?有攻無性,神採不生;有性無攻,神採不變。若心不 疑乎手,手不疑乎筆,無機智之跡,無馳騁之形。要知強樑非勇,柔弱非和;外若優遊,中 實剛勁;志專神應,心平手隨;體物流行,因時變化;使含蓄以善藏,勿峻削而露巧;若 黃帝之道熙熙然,君子之風穆穆然。如此作行書,斯得之矣。又有行楷、行草之別,總皆取 法右軍《禊帖》、懷仁《聖教序》、大令《鄱陽》、《鴨頭丸》、《劉道士》、《鵝群》諸帖,而諸家行 體次之。

          論草書

          漢興有草書。徐鍇謂張竝作草,竝草在漢興之後無疑。迨杜度、崔瑗、崔寔草法始暢。 張伯英又從而變之。王逸少力兼眾美,會成一家,號為“書聖”。王大令得逸少之遺,每作 草,行首之字,往往續前行之末,使血脈貫通,後人稱為“一筆書”,自伯英始也。衛瓘得伯英 之筋,索靖得伯英之骨,其後張顛、懷素,皆稱“草聖”。顛喜肥,素喜瘦;瘦勁易,肥勁難,務 使肥瘦得宜、骨肉相間,如印泥、畫沙,起伏隨勢。筆正則鋒藏,筆偃則鋒側。草書時用側 鋒而神奇出焉。逸少嘗雲:作草令其筆開,自然勁健,縱心奔放,覆腕轉促,懸管聚鋒,柔 毫外托。左為外拓,右為內伏。內伏有度,始為藏鋒。若筆盡墨枯,又須接鋒以取興,無常 則也。
          然草書貴通暢,下墨易於疾,疾時須令少緩,緩以仿古,疾以出奇,或斂束相抱,或婆娑 四垂,或陰森而高舉,或脫落而參差,勿往復收,乍斷復連,承上生下,戀子顧母,種種筆法, 如人坐臥、行立、奔趨、揖讓、歌舞、擘踴、醉狂、顛伏,各盡意態,方為有得。若行行春蚓,字 字秋蛇,屬十數字而不斷,縈結如遊絲一片,乃不善學者之大弊也。古人見蛇鬥與擔夫爭 道而悟草書,顏魯公曰:張長史觀孤蓬自振、驚沙坐飛與公孫大娘舞劍器,始得低昂回翔 之狀,可見草體無定,必以古人為法,而後能悟生於古法之外也。悟生於古法之外而後能 自我作古,以立我法也。

          射陵逸史曰:作行草書須以勁利取勢,以靈轉取致,如企鳥跱,志在飛,猛獸駭,意將 馳,無非要生動,要脫化,會得斯旨,當自悟耳。

          [注]《書法約言》中國清代書法理論著作。宋曹著。宋曹,字彬臣,一作邠臣,號射陵,自號耕海潛夫。大縱湖北宋狀(今江蘇鹽城)人。明崇禎時為中書,入清後,隱居不仕。工詩文,善草書。
          《書法約言》1卷7篇。即總論2篇,答客問書法1篇,論作字之始1篇,論楷書、行書、草書3篇。在這部著作中,宋曹集中闡述了他的書法理論。他認為書法的筆意貴淡雅,不貴豔麗;貴流暢,不貴緊結;貴含蓄,不貴顯露;貴自然,不貴做作。說書法之要,妙在能合,神在能離。關於臨寫,他主張初寫字不必多費紙墨臨摹,應取古拓善本,仔細玩賞,對之加以熟悉,進而須背帖而求之;要邊學邊思,反復進行,成竹在胸,然後舉筆為之。論草書,他說張旭喜肥,懷素喜瘦;瘦勁易,肥勁難。認為寫草書時用側鋒,則能產生神奇。作行草書須以勁利取勢,以靈轉取致。說草書無定,須以古人為法,而後能悟生於古法之外,悟生後能自我作古,也能產生自己的方法和面貌。  


          34:蘇軾《論書》 ▲Top

            一、創作論

            書唐氏六家書後

            永禪師書,骨氣深穩,體並眾妙,精能之至,反造疏淡。如觀陶彭澤詩,初若散緩不收,反覆不已,乃識其奇趣。今法帖中有雲“不具釋智永白”者,誤收在逸少部中,然亦非禪師書也。雲“謹此代申”,此乃唐未五代流俗之語耳,而書亦不工。

            歐陽率更書,妍緊拔群,尤工於小揩,高麗遣使購其書,高祖嘆曰:“彼觀其書,以為魁梧奇偉人也。”此非知書者。凡書象其為人。率更貌寒寢,敏語絕人,今觀其書,勁險刻厲,正稱其貌耳。

            褚河南書,清遠蕭散,微雜隸體。古人論書者,兼論其平生,苟非其人,雖工不貴也。河南固忠臣,但有譖殺劉泊一事,使人怏怏。然餘嘗考其實,恐劉泊末年褊忿,實有伊、霍之語,非譖也。若不然,馬周明其無此語,太宗獨誅泊而不問周,何哉?此殆天後朝許、李所誣,而史官不能辨也。

            張長史草書,頹然天放,略有點畫處,而意態自足,號稱神逸。今世稱善草書者,或不能真行,此大妄也。真生行,行生草,真如立,行如行,草如走,未有未能行立而能走者也。今長安猶有長史真書《郎官石柱記》,作字簡遠,如晉、宋間人。

            顏魯公書,雄秀獨出,一變古法,如杜子美詩,格力天縱,奄有漢、魏、晉、宋以來風流,後之作者,殆難復措手。

            柳少師書,本出於顏,而能自出新意,一字百金,非虛語也。其言心正則筆正者,非獨諷諫,理固然也。世之小人,書字雖工,而其神情終有睢盱側媚之態,不知人情隨想而見,如韓子所謂竊斧者乎,抑真爾也?然至使人見其書而猶憎之,則其人可知矣。

            餘謫居黃州,唐林夫自湖口以書遺餘,雲:“事家有此六人書,子為我略評之而書其後。”林夫之書過我遠矣,而反求於予,何哉?此又未可曉也。無豐四年五月十一日,眉山蘇軾書。

            書吳道子畫後智永創物,能者述焉,非一人而成也。君子之於學,百工之於技,自三代曆漢至唐而備矣。故詩至於杜子美,之文至於韓退之,書至於顏魯公,畫至於吳道子,而古今之變,天下之能事畢矣。

            跋王晉卿所藏蓮華經凡世之所貴,必貴其難。其書難於飄揚,草書難於嚴重,大字難於結密而無間,小字難於寬綽而有餘。今君所藏,抑又可珍,卷之盈握,沙界已周,讀未終篇,目力可廢,乃知蝸牛之角可以戰蠻觸,棘刺之端可以刻沐猴。嗟吧之餘,聊題其末。

             論書
            書必有神、氣、骨、血、肉,五者缺一,不為成書也。

            論草書
            書初無意於佳,乃佳爾。草書雖是積學乃成,然要是出於欲速。古人雲“匆匆不及,草書”,此語非是。若“匆匆不及”,乃是平時亦有意於學。此弊之極,遂至於周越、仲翼,無足怪者。事書雖不甚佳,然自出新意,不踐古人,是一快也。

            跋王鞏所收藏真書僧藏真書七紙,開封王君鞏所藏。君侍親平涼,始得其二。而兩紙在張鄧公家。其後馮公當世,又獲其三。雖所從分異者不可考,然筆勢奕奕,七紙意相發生屬也。君鄧公外孫,而與當世相善,乃得而合之。

            餘嘗愛樑武帝評書,善取物象,而此公尤能自譽,觀者不以為過,信乎其書之工也。然其為人儻蕩,本不求工,所以能工此,如沒人之操舟,無意於濟否,是以覆卻萬變,而舉止自若,其近於有道者耶?

            跋山谷草書
            曇秀來海上,見東坡,出黜安居士草書一軸,問此書如何?坡雲:“張融有言:‘不恨臣無二王法,恨二王無臣法。'吾於黜安亦雲。”他日黜安當捧腹軒渠也。

            跋魯直為王晉卿小書爾雅
            魯直以平等觀作欹側字,以真實相出遊戲法,以磊落人書細碎事,可謂三反。

            跋錢君倚書遭遺教經
            人貌有好醜,而君子小人之態不可掩也。言有辯訥,而君子小人之氣不可欺也。書有工拙,而君子小人之心不可亂也。錢公雖不學書,然觀其書,知其為挺然忠信禮義人也。軾在杭州,與其子世雄為僚,因得其所書佛《遺教經》刻石,峭峙有勢不回之。孔子曰:“仁者其言也仞。”今君倚之書,蓋仞雲。
          將至曲江,船上灘欹側,撐者百指,篙聲石聲葷然,四頋皆濤瀨,士無人色,而吾作字不少衰,何也?吾更變亦多矣,置筆而起,終不能一事,孰與且作字乎?

            跋君謨飛白
            物一理也,通其意,則無適而不可。分科而醫,醫之衰也。佔色而畫,畫之陋也。和、緩之醫,不知老少,曹、吳之畫,不擇人物。謂彼長于是則可也,曰能是不能是則不可。世之畫篆不兼隸,行不及草,殆未能通其意者也。如君謨真、行、草、隸,無不如意,其遺力餘意,變為飛白,可愛而不可學,非通其意,能如此乎?

            書張長史草書
            張長史草書,必俟醉,或以為奇,醒即天真不全。此乃長史未妙,猶有醉醒之辯,若逸少何嘗寄於灑乎?僕亦未免此事。

            題醉草
            吾醉後能作大草,醒後自為不及。然醉中亦能作小楷,此乃為奇耳。 跋文與可論草書後
          與可雲:“餘學草書幾十年,終未得古人用筆相傳之法。後因見道上鬥蛇,遂得其妙。乃知顛、索之各有所悟,然後至於此耳。”
          留意於物,往往成趣。昔人有好章草,夜夢,則見蛟蛇糾結。數年,或晝日見之,草書則工也,而所見亦可患。與可之所見,豈真蛇耶?抑草書之精也?予平生好與與可劇談大噱,此語恨不令與可聞之,令其捧腹絕倒也。

            跋懷素帖
            懷素書極不佳,用筆意趣,乃似周越之險勢劣。此近世小人所作也,而堯夫不解辯,亦可怪矣。

            題魯公放生池碑
            湖州有《顏魯公放生池碑》,載其所上肅宗表雲:“一日三朝,大明一天子之孝;問安侍膳,不改家人之禮。”魯公知肅宗有愧于是也,故以此諫。孰謂公區區於放生哉?

            跋葉致遠所藏永禪師千文
            永禪師欲存王氏典刑,以為百家法祖,故舉用舊法,非不能出新意求變態也,然其意已逸於繩墨之外矣。雲下歐、虞,殆非至論,若復疑其臨放者,又在此論下矣。

            題筆陣圖
            筆墨之跡,托於有形,有形則有弊。苟不至於無,而自樂於一時,聊寓其心,忘憂晚歲,則猶賢於博弈也。雖然,不假外物而有守於內者,聖賢之高致也。惟顏子得之。

            二、技法論

             題二王書
            筆成塚,墨成池,不及羲之即獻之。筆禿千管,墨磨萬鋌,不作張芝作索靖。

            書所作字後
            獻之少時學書,逸少從後取其筆而不可,知其長大必能名世。僕以為不然。知書不在於筆牢,浩然聽筆之所之而不失法度,乃為得之。然逸少所以重其不可取者,獨以其小兒子用意精至,猝然掩之,而意未始不在筆,不然,則是天下有力者莫不能書也。

            跋庾徵西帖
            吳道子始見張僧繇畫,曰:“浪得名耳。”已而坐臥其下,三日不能去。庾徵西初不服逸少,有“家雞野鶩”之論,後乃吧其為伯英再生。今觀其石,乃不逮子敬遠甚,正可比羊欣耳。

             書張長史書法
            世人見古有桃花司道者,爭頌桃花,便將桃花作飯吃。吃此飯五十年,轉沒交涉。正如張長史見擔夫與公主爭路,而得草書之法。欲學長史書,日就擔夫求之,豈可得哉?

             書張少公判狀
            張旭常熟尉,有父老訴事,為判其狀,欣然持去。不數日,復有所訴,亦為判之。他日復來,張甚怒,以為好訟。叩頭曰:“非敢訟也,誠見少公筆勢殊妙,欲家藏之爾。”張驚問其詳,則其父蓋天下工書者也。張由此盡得筆法之妙。古人得筆法有所自,張以劍器,容有是理。雷太簡乃雲聞江聲而筆法盡,文與可亦見蛇鬥而草書長,此殆謬矣。

            記與君謨論書
            作字要手熟,則神氣完實而有餘韻,於靜中自是一樂事。然常患少暇,豈於其所樂常不足耶?自蘇子美死,遂覺筆法中絕。近年蔡君謨獨步當世,往往謙讓不肯主盟。往年,予嘗戲謂君謨言,學書如溯急流,用盡氣力,船不離舊處。君謨頗諾,以謂能取譬。今思此語已四十餘年,竟如何哉?
          跋君謨書賦餘評近風書,以君謨為第一,而論者或不然,殆未易與不知者言也。書法當自小楷出,豈有正未能而以行、草稱也?君謨年二十九而楷法如此。知其本末矣。

             跋陳隱居書
            陳公密出其祖隱居先生之書相示。軾聞之,蔡君謨先生之書,如三公被袞冕立玉墀之上。軾亦以為學先生之書,如馬文淵所謂學龍伯高之為人也。書法備於正書,溢而為行、草,未能正晝而能行、草,猶未嘗莊語而輒放言,無是道也。

            跋歐陽文忠公書
            歐陽文忠公用尖筆乾墨,作方闊字,神採秀發,膏潤無窮。後人觀之,如見其清眸豐頰,進趨裕如也。

            跋王荊公書
            荊公書得無法之法,然不可學,學之則無法。故僕書盡意作之似蔡君謨,稍得意似楊風子,更放似言法華。

            跋黃魯直草書
            草書只要有筆,霍去病所謂不至學古兵法者為過之。魯直書。
            去病穿城蹋鞠,此正不學古法之過也。學即不是,不學亦不可。子瞻書。

             跋秦少遊書
            少遊近日草書,便有東晉風味,作詩增奇麗。乃知此人不可使閒,遂兼百技矣。技進而道不進,則不可,少遊乃技道兩進也。

            書硯
            硯之發墨者必費墨筆,不費筆則退墨,二德難兼,非獨硯也。大字難結密。小字常局促;真書患不放,草書苦無法。茶苦患不美,酒美患不辣。萬事無不然,可一大笑也。

             三、品評論

            記潘延之評予書
            潘延之謂子由曰:“尋常於石刻見子瞻書,今見真跡,乃知為顏魯公不二。”嘗評魯公書與杜子美詩相似,一出之後,前人皆廢若予書者,乃似魯公而不廢前人者也。

            書贈宗人鎔
            宗人镕,貧甚,吾無以濟之。昔年嘗見李駙馬璋以五百千購王夷甫,吾書不下夷甫,而其人則吾之所恥也。書此以遺生,不得五百千,勿以予人。然事在五百年外,價值如是,不亦鈍乎?然吾佛一坐六十小劫,五百年何足道哉!東坡居士。

            自評字
            昨日見歐陽叔弼。雲:“子書大似李北海。”予亦自覺其如此。世或以為似徐書者。

            題自作字
            東坡平時作字,骨撐肉,肉沒骨,未嘗作此瘦妙也。宋景文公自名其書鐵線。若東坡此貼,信可謂雲爾已矣。元符三年九月二十四日,遊三州岩回,舟中書。

             題子敬書
            子敬雖無過人事業,然謝安欲使書宮殿榜,竟不敢為口,其氣節足嘉者。此書一卷,尤可愛。

            題晉武書
            昨日閣下,見晉武帝書,甚有英偉氣。乃知唐太宗書,時有似之。魯君之宋,呼於垤澤之門,門者曰:“此非吾君也,何其聲之似吾君也!”“居移氣,養移體”,信非虛語矣。

            題蕭子雲書
            唐太宗評蕭子雲書曰:“行行如紆春蚓,字字若綰秋蛇。”今觀其遺跡,信虛得名耳。

            題顏魯公書畫贊
            顏魯公平生寫碑,惟《東方朔畫贊》為清雄,字間櫛化,而不失清遠。其後見逸少本,乃知魯公字字臨此書,雖大小相懸,而氣韻良是。非自得於書,未易為言此也。

            雜評
            楊凝式書,頗類顏行。李建中書,雖可愛,終可鄙;雖可鄙,終不可棄。李國士本無所得,舍險瘦,一字不成。宋宣獻書,清而復寒,正類李留台重而復寒,俱不能濟所不足也。蘇子美兄弟,俱太俊,非有餘,乃不足也。蔡君謨為近世第一,但大字不如小字,草不如真,真不如行也。

            論君謨書
            歐陽文忠公論書雲:“蔡君謨獨步當世”此為至論。言君謨行書第一,小楷第二,草書第三。就其所長而求其所短,大字為小疏也。天資既高,輔以篤學,其獨步當世,宜哉!近歲論君謨書者,頗有異論,故特明之。

            評楊氏所藏歐蔡書
            自顏、柳氏沒,筆法衰竭,加以唐末喪亂,人物落磨滅,五代文采風流,掃地盡矣。獨楊公凝式筆跡雄傑,有二王、顏、柳之餘,此真可謂書之豪傑,不為時世所汩沒者。國初,李建中號為能書,然格韻卑濁,猶有唐未以來衰陋之氣,其餘未見有卓然追佩前人者。獨蔡君謨言書,天資天資既高,積學深至,心手相應,變態無窮,遂為本朝第一。然行書最盛,小楷次之,草書又次之,大字又次之,分、隸小劣。又嘗出意外飛白,自言有關心翔龍舞鳳之勢,識者不以為過。歐陽文忠公書,自是學者所共儀刑,庶幾如見其人者。正使不工,猶當傳實,況其精勤敏妙,自成一家乎?楊君畜二公書,過黃州,出以相示,偶為評之。世多稱李建中、宋宣獻。此二人書,僕所不曉。宋寒而李俗,殆是浪得名。惟近日蔡君謨,天資既高,而學亦至,當為本朝第一。

            論沈遼米芾書
            自君謨死後,筆法衰絕。沈遼少時本學其家傳師者,晚乃諱之,自雲學子敬。病其似傳師也,故出私意新之,遂不如尋常人。近日米芾行書,王鞏小草,亦頗有高韻,雖不逮古人,然亦必有傳於世也。

            與米元章札
            某啟。嶺海八年,,親友曠絕,亦未嘗關念。獨念吾元章邁往凌雲之氣,清雄絕俗之文,超妙入神之字,何時見之,以洗我積年瘴毒耶!今真見之矣,餘無足言者。不二。


          35:孫過庭《書譜》 ▲Top

             夫自古之善書者,漢魏有鐘張之絕,晉末稱二王之妙。王羲之雲:“頃尋諸名書,鐘張信為絕倫,其徐不足觀。”可謂鐘張雲沒,而羲獻繼之。又雲:“吾書比之鐘張,鐘當抗行,或謂過之。張草猶當雁行。然張精熟,池水盡墨,假令寡人耽之若此,未必謝之。”此乃推張邁鐘之意也。考其專擅,雖未果於前規;摭(zhi)以兼通,故無慚於即事。

          [今譯]:關於古代以來,善長書法的人,在漢、魏時期,有鐘繇(you)和張芝的卓絕書藝,在晉代末期是王羲之和王獻之的墨品精妙。王羲之說:“我近來研究各位名家的書法,鐘繇、張芝確實超群絕倫,其餘的不值得觀賞。”可以說,鐘繇和張芝死後,王羲之、王獻之繼承了他們。王羲之又說:“我的書法與鐘繇、張芝相比,與鐘繇是不相上下,或者略超過他。對張芝的草書,可與他前後相列;因為張芝精研熟練,臨池學書,把池水都能染黑了,如果我也像他那樣下功夫刻苦專習,未必趕不過他。”這是推舉張芝、自認超越鐘繇的意思。考察王羲之父子書法的專精擅長,雖然還未完全實作品前人法規,但能博採兼通各種書體,也是無愧於書法這項事業的。

             評者雲:“彼之四賢,古今特絕;而今不逮古,古質而今研。”夫質以代興,妍因俗易。雖書契之作,適以記言;而淳醨一遷,質文三變,馳鶩沿革,物理常然。貴能古不乖時,今不同弊,所謂“文質彬彬。然後君子。”何必易雕宮於穴處,反玉輅於椎輪者乎!又雲:“子敬之不及逸少,猶逸少之不及鐘張。”意者以為評得其綱紀,而未詳其始卒也。且元常專工於隸書,伯英尤精於草體,彼之二美,而逸少兼之。擬草則馀真,比真則長草,雖專工小劣,而博涉多優;總其終始,匪無乖互。

          [今譯]:書法評論者說:“這四位才華出眾的書法大師,可稱得上古今獨絕。但是今人(二王)還不及古人(鐘、張),古人的書法風尚質樸,今人的書法格調妍媚。”然而,質樸風尚因循時代發展而興起,妍媚格調也隨世俗變化在更易。雖然文字的創造,最初只是為了記錄語言,可是隨著時代發展,書風也會不斷遷移,由醇厚變為淡薄,由質樸變為華麗;繼承前者並有所創新,是一切事物發展的常規。書法最可貴的,在於既能繼承曆代傳統,又不背離時代潮流;既能追求當今風尚,又不混同他人的弊俗。所謂“文采與質樸相結合,才是清雅的風度”。何必閒置著華美的宮室去住古人的洞穴,棄舍精致的寶輦而乘坐原始的牛車呢?評論者又說:“獻之的書法之所以不如羲之,就像羲之的不如鐘繇、張芝一樣。”我認為這已評論到問題的要處,但還未能詳盡說出它的始末原由。鐘繇專工楷書,張芝精通草體,這兩人的擅長,王羲之兼而有之。比較張芝的草體王還擅於楷書,對照鐘繇的楷書王又長於草體;雖然專精一體的功夫稍差,但是王羲之能廣氾涉獵、博採眾優。總的看來,彼此是各有短長的。

             謝安索善尺牘,而輕子敬之書。子敬嘗作佳書與之,謂必存錄,安輒題後答之,甚以為恨。安嘗問敬:“卿書何如右軍?”答雲:“故當勝。”安雲:“物論殊不爾。”於敬又答:“時人那得知!”敬雖權以此辭折安所鑑,自稱勝父,不亦過乎!且立身揚名,事資尊顯,勝母之裏,曾參不入。以於敬之豪翰,紹右軍之筆札,雖復粗傳楷則,實恐未克箕裘。況乃假託神仙,恥崇家範,以斯成學,孰愈面牆!後羲之往都,臨行題壁。子敬密拭除之,輒書易其處,私為不惡。羲之還,見乃嘆曰:“吾去時真大醉也!”敬乃內慚。是知逸少之比鐘張,則專博斯別;子敬之不及逸少,無或疑焉。

          [今譯]:謝安素來善寫尺牘書,而輕視王獻之的書法。獻之曾經精心寫了一幅字贈給謝安,不料被對方加上評語退了回來,獻之對此事甚為怨恨。後來二人見面,謝安問獻之:“你感覺你的字比你父親的如何?”答道:“當然超過他。”謝安又說:“旁人的評論可不是這樣啊。”獻之答道:“一般人哪裏懂得!”王獻之雖然用這種話應付過去,但自稱勝過他的父親,這說的不是太過分了嗎!況且一個人立身創業,揚名於世,應該讓父母同時得到榮譽,才是一種孝道。(這裏引用《孝經》一個故事)曾參見到一條稱“勝母”的巷子,認為不合人情拒絕進去。人們知道,獻之的筆法是繼承羲之的,雖然粗略學到一些規則,其實並未把他父親的成就全學到手。何況假托是神仙授書,恥於推崇家教,帶著這種思想意識學習書藝,與面牆而觀有什麼區別呢! 有次王羲之去京都,臨行前曾在牆上題字。走後獻之悄悄擦掉,題上自己的字,認為寫得不錯。待羲之回家來,見到後嘆息道:“我臨走時真是喝得大醉了。”獻之這才內心感到很慚愧。由此可知,王羲之的書法與鐘繇、張芝相比,只有專工和博涉的區別;而王獻之根本比不上王羲之·則是毫無疑問的了。
            餘志學之年,留心翰墨,昧鐘張之馀烈,挹羲獻之前規,極慮專精,時逾二紀。有乖入木之術,無間臨池之志。觀夫懸針垂露之異,奔雷墜石之奇,鴻飛獸駭之資,鸞舞蛇驚之態,絕岸頹峰之勢,臨危據槁之形;或重若崩雲,或輕如蟬翼;導之則泉注,頓之則山安;纖纖乎似初月之出天涯,落落乎猶眾星之列河漢;同自然之妙,有非力運之能成;信可謂智巧兼優,心手雙暢,翰不虛動,下必有由。一畫之間,變起伏於鋒杪;一點之內,殊衄挫於毫芒。況雲積其點畫,乃成其字;曾不傍窺尺犢,俯習寸陰;引班超以為辭,援項籍而自滿;任筆為體,聚墨成形;心昏擬效之方,手迷揮運之理,求其妍妙,不亦謬哉!

          [今譯]:我少年讀書時,就留心學書法,體會鐘繇和張芝的作品神採,仿效羲之與獻之的書寫規範,又竭力思考專工精深的訣竅,轉瞬過去二十多年,雖然缺乏入木三分的功力,但從未間斷臨池學書的志向。觀察筆法中,懸計垂露似的變異,奔雷墜石般的雄奇,鴻飛獸散間的殊姿,寫舞蛇驚時的體態,斷崖險峰狀的氣勢,臨危據枯中的場景;有的重得像層雲崩飛,有的輕得若金蟬薄翼;筆勢導來如同泉水流注,頓筆直下類似山岳穩重;纖細的像新月升上天涯,疏落的若群星布列銀河;精湛的書法好比大自然形成的神奇壯觀,似乎進入決非人力所能成就的妙有境界。的確稱得上智慧與技巧的完美結合,使心手和諧雙暢;筆墨不作虛動,薄紙必有章法。在一畫之中,令筆鋒起伏變化;在一點之內,使毫芒頓折回旋。須知,練成優美點畫,方能把字寫好。如果不去專心觀察字帖,刻抓緊埋頭苦練;只是空論班超寫的如何·對比項羽自己居然不差。放任信筆為體,隨意聚墨成形;心裏根本不懂摹效方法,手腕也未掌握運筆規律,還妄想寫得十分美妙,豈不是極為荒謬的嗎!

            然君子立身,務修其本。楊雄謂:“詩賦小道,壯夫不為。”況復溺思毫釐,淪精翰墨者也!夫潛神對奕,猶標坐隱之名;樂志垂綸,尚體行藏之趣。詎若功定禮樂,妙擬神仙,猶埏埴之罔窮,與工爐而並運。好異尚奇之士;玩體勢之多方;窮微測妙之夫,得推移之奧賾。著述者假其糟粕,藻鑑者挹其菁華,固義理之會歸,信賢達之兼善者矣。存精寓賞,豈徒然與?

          [今譯]:然而君子立身,務必致力於根本的修養。揚雄則說詩賦乃為“小道”,胸有壯志的人不會只搞這一行,何況專心思考用筆,把主要精力埋沒在書法中呢!對全神貫注下棋的,可標榜為一“坐隱”的美名;逍造自在垂釣者,能體會“行藏”的情趣。而這些又怎比得上書法能起宣揚禮樂的功用,並具有神仙般的妙術,如同陶工揉和瓷土塑造器皿一般變化無窮,又像工匠動作熔爐鑄鍛機具那樣大顯技藝!酷好崇異尚奇的人,能夠欣賞玩味字書體態和意韻氣勢的多種變化;善於精研探求的人,可以從中得到潛移轉換與推陳出新的幽深奧秘。撰寫書論文章的人,往往擇取接受前人的糟粕;真正精於鑑賞的人,方能得到內涵的精華。經義與哲理本可溶為一體,賢德和通達自然可以兼善。伋取書藝精華借以寄托賞識情致,難道能說是徒勞的嗎?

            而東晉士人,互相陶淬。室於王謝之族,郗庾之倫,縱不盡其神奇,鹹亦挹其風味。去之滋永,斯道愈微。方復聞疑稱疑,得末行末,古今阻絕,無所質問;設有所會,緘秘已深;遂令學者茫然,莫知領要,徒見成功之美,不悟所致之由。或乃就分布於累年,向規矩而猶遠,圖真不悟,習草將迷。假令薄能草書,粗傳隸法,則好溺偏固,自閡通規。詎知心手會歸,若同源而異派;轉用之術,猶共樹而分條者乎?加以趁變適時,行書為要;題勒方幅,真乃居先。草不兼真,殆於專謹;真不通草,殊非翰札,真以點畫為形質,使轉為情性;草以點畫為情性,使轉為形質。草乖使轉,不能成字;真虧點畫,猶可記文。回互雖殊,大體相涉。故亦傍通二篆,俯貫八分,包括篇章,涵泳飛自。若毫釐不察,則胡越殊風者焉。

          [今譯]:東晉的文人,均互相熏陶影響。至於王、謝大族,郄、庾流派,其書法水平沒有盡達神奇的地步,可也具有一定的韻致和風采。然而距離晉代越遠,書法藝術就愈加衰微了。後代人聽到書論,明知有疑也盲目稱頌,即使得到一些皮毛亦去實踐效行;由於古今隔絕,反正難作質詢;某些人雖有所領悟,又往往守口忌談,致使學書者茫然無從·不得要領,只見他人成功取美,卻不明白收效的原因。有人為掌握結構分布費時多年,但距離法規仍是甚遠。臨摹楷書難悟其理,練習草體迷惑不測。即便能夠淺薄了解草書筆法,和粗略懂得楷書法則,又往往陷於偏陋,背離法規。哪裏知道,心手相通猶如同一源泉形成的各脈支流;對轉折的技法,就像一顆樹上分生出若干枝條。談到應變時用,行書最為要著;對於題榜鐫石,楷書當屬偏好。寫草書不兼有楷法,容易失去規範法度;寫楷書不旁通草意,那就難以稱為佳品。楷書以點畫組成形體,靠使轉表現情感;草書用點畫顯露性靈,靠使轉構成形體。草書用不好使轉筆法,便寫不成樣子;楷書如欠缺點畫工夫,仍可記述文辭。兩種書體形態彼此不同,但其規則卻是大致相通。所以,學書法還要旁通大篆、小篆,融貫漢隸,參酌章草,吸取飛白。對於這些,如果一點也不清楚,那就像北胡與南越的風俗大不相同而屬於兩碼事的性質了。

            至如鐘繇隸奇,張芝草聖,此乃專精一體,以致絕倫。伯英不真,而點畫狼藉;元常不草,使轉縱橫。自茲己降,不能兼善者,有所不逮,非專精也。雖篆隸草章,工用多變,濟成厥美,各有攸宜。篆尚婉而通,隸欲精而密,草貴流而暢,章務檢而便。然後凜之以風神,溫之以妍潤,鼓之以枯勁,和之以閒雅。故可達其情性,形其哀樂,驗燥濕之殊節,千古依然;體老壯之異時,百齡俄頃,磋呼,不入其門,詎窺其奧者也!

          [今譯]:至於鐘繇的楷書堪稱奇妙,張芝的草體榮膺草聖,都是由於專精一門書體,才達到無與倫比的境地。張芝並不擅寫楷書,但他的草體具有楷書點畫明晰的特點;鐘繇雖不以草見長,但他的楷書卻有草書筆調奔放的氣勢。自此以後,不能兼善楷草二體的人,書法作品便達不到他們的水平,也就不能算作是真正的專精了。由於篆書、隸書、今草和章草,工巧作用各自多有變化,所以表現出的美妙也就各有特點:篆書崇尚委婉圓通,隸書須要精巧嚴密,今草貴在暢達奔放,章草務求簡約便捷。然後以嚴謹的風神使其凜峻,以妍媚的姿致使其溫潤,以枯澀的筆調使其勁健,以安閒的態勢使其和雅。這就在一定程度上,表達書者的情性,抒發著喜怒哀樂。察驗用筆濃淡輕重的不同風格,從古到今都是一樣的;從少壯到老年不斷變化的書法意境,一生中隨時可以表露出來。是啊!不入書法門徑,怎能深解其中的奧妙呢?

            又一時而書,有乖有合,合則流媚,乖則雕疏,略言其由,各有其五:神怡務閒,一合也;感惠徇知,二合也;時和氣潤,三合也;紙墨相發,四合也;偶然欲書,五合也。心遽體留,一乖也;意違勢屈,二乖也;風燥日炎,三乖也;紙墨不稱,四乖也;情怠手闌,五乖也。乖合之際,優劣互差。得時不如得器,得器不如得志,若五乖同萃,思遏手蒙;五合交臻,神融筆暢。暢無不適,蒙無所從。當仁者得意忘言,罕陳其要;企學者希風敘妙,雖述猶疏。徒立其工,未敷厥旨。不揆庸昧,輒效所明;庶欲弘既往之風規,導將來之器識,除繁去濫,睹跡明心者焉。

          [今譯]:書家在同一個時期作書,有合與不合,也就是得勢不得勢、順手不順手的區別,這與本人當時的心情思緒、氣候環境頗有關系。合則流暢雋秀,不合則凋零流落,簡略說其緣由,各有五種情況:精神愉悅、事務閒靜為一合;感人恩惠、酬答知己為二合;時令溫和、氣候宜人為三合;紙墨俱佳、相互映發為四合;偶然興烈、靈動欲書為五合。與此相反,神不守舍、雜務纏身為一不合;違反己願、迫於情勢為二不合;烈日燥風、炎熱氣悶為三不合;紙墨粗糙、器不稱手為四不合;神情疲憊、臂腕乏力為五不合。合與不合,書法表現優劣差別很大。天時適宜不如工具應手,得到好的工具不如舒暢的心情。如果五種不合同時聚攏,就會思路閉塞,運筆無度;如果五合一齊俱備,則能神情交融,筆調暢達。流暢時無所不適,滯留時茫然無從。有書法功底的人,常常是得其意而忘言,不願對人講授要領,企求學書者又每每慕名前來詢其奧妙,雖能悟到一些,但多疏陋。空費精力,難中要旨。因此,我不居守個人平庸昧見,將所知的全盤貢獻出來,望能光大既往的風範規則,開導後學者的知識才能,除去繁冗雜濫,使人見到論述即可心領神會了。
            代有《筆陣圖》七行,中畫執筆三手,圖貌乖舛,點畫湮訛。頃見南北流傳,疑是右軍所制。雖則未詳真偽,尚可發啟童蒙。既常俗所存,不藉編錄。至於諸家勢評,多涉浮華,莫不外狀其形,內迷其理,今之所撰,亦無取焉。若乃師宜官之高名,徒彰史牒;邯鄲淳之令範,空著縑緗。暨乎崔、杜以來,蕭、羊已往,代祀綿遠,名氏滋繁。或藉甚不渝,人亡業顯;或憑附增價,身謝道衰。加以糜蠢不傳,搜秘將盡,偶逢緘賞,時亦罕窺,優劣紛紜,殆難覼縷。其有顯聞當代,遺跡見存,無俟抑揚,自標先後。

          [今譯]:世上流傳的《筆陣圖》七行,中間畫有三種執筆的手勢,圖象拙劣 文字謬誤。近來見在南北各地流傳,推測為王羲之所作。雖然未能辨其真偽,但還可以啟發初學兒童。既然為一般人收存,也就不必編錄。至於以往諸家的論著,大多是華而不實,莫不從表面上描繪形態,闡述不出內涵的真理。而今我的撰述,不取這種作法。至於像師誼官雖有很高名望,但因形跡不存,只是虛載史冊;邯鄲淳也為一代典範,僅僅在書卷上空留其名。及至崔瑗、杜度以來,蕭子雲、羊欣之前,這段漫長年代,書法名家陸續增多。其中有的人,當時就負盛名,人死後書作流傳下來,聲望愈加榮耀;也有的人,生前憑借顯赫地位被人捧高身價,死了之後,墨跡與名氣也就衰落了。還有某些作品糜爛蟲蛀,毀壞失傳,剩下的亦被搜購秘藏將盡。偶然欣逢鑑賞時機,也只是一覽而過,加之優劣混雜,難得有條不紊的鑑別。其中有的早就揚名當時,遺跡至今存在,無須高人褒貶評論,自然會分辨出優劣的了。

            且六文之作,肇自軒轅;八體之興,始於嬴政。其來尚矣,厥用斯弘。但今古不同,妍質懸隔,既非所習,又亦略諸。復有龍蛇雲露之流,龜鶴花英之類,乍圖真於率爾,或寫瑞於當年,巧涉丹青,工虧翰墨,異夫楷式,非所詳焉。代傳羲之與子敬筆勢論十章,文鄙理疏,意乖言拙,詳其旨趣,殊非右軍。且右軍位重才高,調清詞雅,聲塵未泯,翰牘仍存。觀夫致一書,陳一事,造次之際,稽古斯在;豈有貽謀令嗣,道葉義方,章則頓虧,一至於此!又雲與張伯英同學,斯乃更彰虛誕。若指漢末伯英,時代全不相接;必有晉人同號,史傳何其寂寥!非訓非經,宜從棄擇。

          [今譯]:關於“六書”的始作、可以上溯到軒轅時代;“八體”的興起,自然源於秦代嬴政。由來已很久遠,曆史上運用廣氾,已起過重大作用。因為古今時代不同,質樸的古文和妍美的今體相差懸殊,且已不再沿用,也就略去不說。還有依據龍、蛇、雲、露和龜、鶴、花、草等類物狀創出來的字體,只是簡單描摹物象形態,或寫當時的“祥瑞”,雖然筆畫巧妙,但缺作書技能、又非書法規範,也就不詳細論述了。社會流傳的王羲之《與子敬筆勢論》十章,文辭鄙陋,論理粗疏;立意乖戾,語言拙劣,詳察它的旨趣,絕非王羲之的作品。且羲之德高望重,才氣橫溢,文章格調清新,詞藻優雅,聲譽依然高尚,翰牘仍存於世。看他寫一封信,談一件事,即使倉促之時,還是注重古訓。豈會在傳授家教於子孫時,在指導書法規範的文章中,竟然頓失章法,一至如此地步!又說,他與張芝是同學,這就更加荒誕無稽了。若指的是東漢末期的張芝,時代完全不符;那必定另有同名的東晉人,可史傳上為何毫無記載。此書既非書法規範,又非經典著作,應當予以拋棄。

            夫心之所達,不易盡於名言;言之所通,尚難形於紙墨。粗可仿佛其狀,綱紀其辭。冀酌希夷,取會佳境。闕而末逮,請俟將來。今撰執使轉用之由,以祛未悟。執謂深淺長短之類是也;使謂縱橫牽掣之類是也;轉謂鉤環盤紆之類是也;用謂點畫向背之類是也。方復會其數法,歸於一途;編列眾工,錯綜群妙,舉前人之未及,啟後學於成規;窺其根源,析其枝派。貴使文約理贍,跡顯心通;披卷可明,下筆無滯。詭辭異說,非所詳焉。

          [今譯]:關於心裏所理解的,難於用語言表達出來;能夠用語言敘說的,又不易用筆墨寫到紙上。只能粗略地書其形狀,陳述大致紀要。希能斟酌其中的微妙,求得領悟佳美的境界。至於未能詳盡之處,只好有待將來補充了。現在敘說執、使、轉、用的道理與作用,可讓不了解書法的人能夠領悟:執,是說指腕執筆有深淺長短一類的不同;使,是講使鋒運筆有縱橫展縮一類的區別;轉,是指把握使轉有曲折回環一類的筆勢;用,就是點畫有揖讓向背一類的規則。將以上各法融會貫通,復合一途;編排羅列眾家特長;交錯綜合諸派精妙,指出前列名家不足之處,啟發後學掌握正確法規;深刻探索根源,分析所屬流派。盡求做到文辭簡練,論理恰當,條例分明,淺顯易懂;閱後即可明瞭把握,下筆順暢無所淤滯。至於那些奇談怪論,詭詞異說,就不是本篇所要說的了。然而現在要承述的,力求對後學者有所裨益。

            然今之所陳,務稗學者。但右軍之書,代多稱習,良可據為宗匠,取立指歸。豈惟會古通今,亦乃情深調合。致使摹蹋日廣,研習歲滋,先後著名,多從散落;曆代孤紹,非其效與?試言其由,略陳數意:止如《樂毅論》、《黃庭經》、《東方朔畫贊》、《太史箴》、《蘭亭集序》、《告誓文》,斯並代俗所傳,真行絕致者也。寫《樂毅》則情多佛鬱;書《畫贊》則意涉瑰奇;《黃庭經》則怡懌虛無;《太史箴》又縱橫爭折;暨乎《蘭亭》興集,思逸神超,私門誡誓,情拘志慘。所謂涉樂方笑,言哀已嘆。豈惟駐想流波,將貽啴噯之奏;馳神睢渙,方思藻繪之文。雖其目擊道存,尚或心迷議舛。莫不強名為體,共習分區。豈知情動形言,取會風騷之意;陽舒陰慘,本乎天地之心。既失其情,理乖其實,原夫所致,安有體哉!

          [今譯]:在以往書法家中,王羲之的書跡為各代人所贊譽學習,可作為效法的宗師,從中獲得造就書法的方向。王羲之書法不僅通古會今,而且情趣深切,筆意和諧。以致摹拓的人一天比一天多,研習的人一年比一年多;王羲之前後的名家手跡,大都散落遺失,只有他的代代流傳下來,這難道不是明證嗎?試談其中緣由,簡要地敘說幾點。僅以《樂毅論》《黃庭經》《東方朔畫贊》《太師箴》《蘭亭集序》《告誓文》等帖,均為世俗所傳,是楷書和行書的最佳範本。寫《樂毅論》時心情不舒暢,多有憂鬱;寫《東方朔畫贊》時意境瑰麗,想象離奇;寫《黃庭經》時精神愉悅,若入虛境;寫《太師箴》時感念激蕩,世情曲折;說到蘭亭興會作序時,則是胸懷奔放,情趣飄然;立誓不再出山做官,可又內心深沉,意志戚慘。正是所謂慶幸歡樂時笑聲溢於言表,傾訴哀傷時嘆息發自胸臆。豈非志在流波之時,始能奏起和緩的樂章;神情馳騁之際,才會思索華翰的詞藻。雖然眼見即可悟出道理,內心迷亂難免議論有誤。因此無不勉強分體定名,區分優劣供人臨習。豈知情趣有感於激動,必然通過語言表露,抒發出與《詩經》《楚辭》同樣的旨趣;陽光明媚時會覺得心懷舒暢,陰雲慘暗時就感到情緒鬱悶。這些部是緣於大自然的時序變化。那種違心作法,既背離書家的意願,也與實情不相符合。從書法原本來說,哪有什麼體裁呢!

            夫運用之方,雖由己出,規模所設,信屬目前,差之一豪,失之千裏,苟知其術,適可兼通。心不厭精,手不忘熟。若運用盡於精熟,規矩諳於胸襟,自然容與徘徊,意先筆後,瀟灑流落,翰逸神飛,亦猶弘羊之心,預乎無際;庖丁之目,不見全牛。嘗有好事,就吾求習,吾乃粗舉綱要,隨而授之,無不心悟手從,言忘意得,縱未窮於眾術,斷可極於所詣矣。

          [今譯]:對運筆的方法,雖然在於自己掌握,但是整個規模布局,確屬眼前的安排要務。關鍵一筆僅差一毫,藝術效果就可能相去千裏。如果懂得其中訣竅,便可以諸法相通了。用心不厭其精,動手不忘其熟。倘若運筆達到精熟程度,規矩便能藏解胸中,自然可以縱橫自如,意先筆後,瀟灑流落,筆勢飄逸神飛了。像桑弘羊理財(精明乾練,排程周到),心思籌措在於各方;又似庖丁宰牛(熟知骨骼,用刀利索),眼裏也就沒有牛了。曾有愛好書法者,向我求學,便簡明舉出行筆結體的要領,教授他們實用技法,因此無不心領神會,默然得到旨意了。即使還不能完全領略各家所長,但也可以達到所探索的最深造詣了。

            若思通楷則,少不如老;學成規矩,老不如少。思則老而愈妙,學乃少而可勉。勉之不已,抑有三時;時然一變,極其分矣。至如初學分布,但求平正;既知平正,務追險絕,既能險絕,復歸平正。初謂未及,中則過之,後乃通會,通會之際,人書俱老。仲尼雲:“五十知命”、“七十從心。”故以達夷險之情,體權變之道,亦猶謀而後動,動不失宜;時然後言,言必中理矣。

          [今譯]:說到深入思考,領悟基本法則,青少年不如老年人;要是從頭開始,學好一般規矩,老年人不如青少年。研究探索,年紀越大越能得其精妙;而臨習苦學,年紀念輕愈有條件進取。勉勵進取不止,須經三個時期;每個時期都會產生重要的變化,最後使書藝達到極高境地。例如初學分行布局時,主要求得字體平穩方正;既然掌握了平正的法則,重點就要力追形勢的險絕;如果熟練了險絕的筆法,又須重新講求平側欹正的規律。初期可說還未達到平正,中期則會險絕過頭,後期才能真正實作品平正,書法藝術臻於老成階段,那麼人也進入老年時期。孔子說:人到五十歲才能懂得天命,到了七十歲始可隨心所欲。因此只有老年方能掌握平正與險絕的情勢,體會出變化的道理。所以,凡事考慮周全後再行動,才不會失當;掌握好時機再說話,才能切中實理。

            是以右軍之書,末年多妙,當緣思慮通審,志氣和平,不激不曆,而風規自遠。子敬已下,莫不鼓努為力,標置成體,豈獨工用不侔,亦乃神情懸隔者也。或有鄙其所作,或乃矜其所運。自矜者將窮性域,絕於誘進之途;自鄙者尚屈情涯,必有可通之理。磋乎,蓋有學而不能,未有不學而能者也。考之即事,斷可明焉。

          [今譯]:王羲之的精妙書法大多出自晚年,因這時思慮通達審慎,志氣和雅平靜,不偏激不凌厲,因而風範深遠。自獻之以後,莫不功力不足而鼓勁作勢,為標新立異,另擺布成體,非但工用比不上前人,就是神採情趣也相差懸殊。有人輕視自己的墨品,有人誇耀自己的書作。喜歡自誇的人將因缺乏繼續勤奮精神而斷絕進取之路,認為自己不行的人總想勉勵向前,定可達到成功的目標。確實這樣啊,只有學而未果,哪有不學就會成功的。觀察一下現實情況,即可明白這個道理。

            然消息多方,性情不一,乍剛柔以合體,忽勞逸而分驅。或恬憺雍容,內涵筋骨;或折挫槎枿,外曜鋒芒。察之者尚精,擬之者貴似。況擬不能似,察不能精,分布猶疏,形骸未撿;躍泉之態,未睹其妍,窺井之談,已聞其醜。縱欲唐突羲獻,誣罔鐘張,安能掩當年之目,杜將來之口!慕習之輩,尤宜慎諸。至有未悟淹留,偏追勁疾;不能迅速,翻效遲重。夫勁速者,超逸之機,遲留者,賞會之致。將反其速,行臻會美之方;專溺於遲,終爽絕倫之妙。能速不速,所謂淹留;因遲就遲,詎名賞會!非其心閒手敏,難以兼通者焉。

          [今譯]:然而書體的變化有多方面因素,表現性格情感也不一致,剛勁與柔和被乍揉為一體,又會因遲緩與疾速的遷移而分展;有的恬淡雍容,內涵筋骨;有的曲折交錯,外露鋒芒。觀察時務求精細,摹擬時貴在相似。若摹擬不能相似,觀察不能精細,分布仍然松散,間架難合規範;那就不可能表現出魚躍泉淵般的飄逸風姿,卻已聽到坐井觀天那種浮淺俗陋的評論。縱然是使用貶低羲之、獻之的手段,和誣蔑鐘繇、張芝的語言,也不能掩蓋當年人們的眼睛,堵住後來學者的口舌;賞習書法的人,尤其應該慎重鑑別。有些人不懂得行筆的淹留,便片面追求勁疾;或者揮運不能迅速,又故意效法遲重。要知道,勁速的筆勢,是表現超邁飄逸的關鍵;遲留的筆勢,則具有賞心會意的情致。能速而遲,行將達到薈萃眾美的境界;專溺於留,終會失去流動暢快之妙。能速不速,叫作淹留,行筆遲鈍再一味追求緩慢,豈能稱得上賞心會意呢!如果行筆不是心境安閒與手法嫻熟,那是難以做到遲速兼施、兩相適宜的。

            假令眾妙攸歸,務存骨氣;骨既存矣,而遒潤加之。亦猶枝乾扶疏,凌霜雪而彌勁;花葉鮮茂,與雲日而相暉。如其骨力偏多,遒麗蓋少,則若枯槎架險,巨石當路,雖妍媚雲闕,而體質存焉。若遒麗居優,骨氣將劣,譬夫芳林落蕊,空照灼而無依;蘭沼漂萍,徒青翠而奚托。是知偏工易就,盡善難求。雖學宗一家,而變成多體,莫不隨其性欲,便以為姿:質直者則徑侹不遒;剛佷者又倔強無潤;矜斂者弊於拘束;脫易者失於規矩;溫柔者傷於軟緩,躁勇者過於剽迫;狐疑者溺於滯澀;遲重者終於蹇鈍;輕瑣者淬於俗吏。斯皆獨行之士,偏玩所乖。

          [今譯]:假若能使眾妙之筆歸納具備,一定要致力於追求骨氣,骨氣樹立,還須融合遒勁圓潤的素質。這就好比枝乾繁衍的樹木,經過霜雪浸凌就會顯得愈加堅挺;鮮豔芳茂的花葉,間與白雪紅日相映,自然更加嬌輝。如果字的骨力偏多,遒麗氣質即少,就像枯本架設在險要處,巨石橫擋在路當中;雖然缺乏妞媚,體質卻還存在。如果婉麗佔居優勢,那麼骨氣就會薄弱,類同百花叢中折落的英蕊,空顯芬美而毫無依托;又如湛藍池塘飄蕩的浮萍,徒有青翠而沒有根基。由此可知,偏工一專較易做到,而完美盡善就難求得了。雖是宗師學習同一家書法,卻會演變成多種的體貌,莫不隨著本人個性與愛好,顯示出各種不同的風格來:性情耿直的人,書勢勁挺平直而缺遒麗;性格剛強的人,筆鋒倔強峻拔而乏圓潤;矜持自斂的人,用筆過於拘束;浮滑放蕩的人,常常背離規矩;個性溫柔的人,毛病在於綿軟;脾氣急躁的人,下筆則粗率急迫;生性多疑的人,則沉涵於凝滯生澀;遲緩拙重的人,最終困惑於遲鈍;輕煩瑣碎的人,多受文牘俗吏的影響。這些都是偏持獨特的人,因固求一端,而背離規範所致。

            《易》曰:“觀乎天文,以察時變;觀乎人文,以化成天下。”況書之為妙,近取諸身。假令運用未周,尚虧工於秘奧;而波瀾之際,已濬發於靈台。必能傍通點畫之情,博究始終之理,镕鑄蟲篆,陶均草隸。體五材之並用,儀形不極;象八音之迭起,感會無方。至若數畫並施,其形各異;眾點齊列,為體互乖。一點成一字之規,一字乃終篇之準。違而不犯,和而不同;留不常遲,遣不恆疾;帶燥方潤,將濃遂枯;泯規矩於方圓,遁鉤繩之曲直;乍顯乍晦,若行若藏;窮變態於毫端,合情調於紙上;無間心手,忘懷楷則;自可背羲獻而無失,違鐘張而尚工。譬夫絳樹青琴,殊姿共豔;隋殊和璧,異質同妍。何必刻鶴圖龍,竟慚真體;得魚獲兔,猶恡筌蹄。

          [今譯]:《易經》上說:“觀看天文,可以察知自然時序的變化;了解人類社會的文化現象,可以用來教化治理天下。”何況書法的妙處,往往取法於人本身容貌的特征。假使筆法運用還不周密,其中奧秘之處也未掌握,就須經過反復實踐,發掘積累經驗,啟動心靈意念,以指使手中之筆。學書須懂得使點畫能體現情趣,全面研究起筆收鋒的原理,融合蟲書、篆書的奇妙,凝聚草書、隸書的韻致。體會到用五材來制作器物,塑造的形體就當然各有不同;像用八音作曲,演奏起來感受也就興會無窮。若把數種筆畫擺在一起,它們的形狀多不相同;好幾個點排列一塊,體態也應各有區別。起首的第一點為全字的範例,開篇的第一個字是全幅準則。筆畫各有伸展又不相互侵犯,結體彼此和諧又不完全一致;留筆不感到遲緩,迅筆不流於滑速;燥筆中間有濕潤,濃墨中使出枯澀;不依尺規衡量能令方圓適度,棄用鉤繩準則而致曲直合宜;使鋒忽露而忽藏,運毫若行又若止,極盡字體形態變化於筆端,融合作者感受情調於紙上;心手相應,毫無拘束。自然可以背離羲之、獻之的法則而不失誤,違反鐘繇、張芝的規範仍得工妙。就像絳樹和青導這兩位女子,容貌盡管不同,卻都非常美麗;隨侯之珠與和氏璧這兩件寶物,形質雖異,卻都極為珍貴。何必一定要去刻意畫鶴描龍,使天然真體大為遜色;撈到了魚、獵得了兔,又何必定要去吝惜捕獲的器具呢!

            聞夫家有南威之容,乃可論於淑媛;有龍泉之利,然後議於斷割。語過其分,實累樞機。吾嘗盡思作書,謂為甚合,時稱識者,輒以引示:其中巧麗,曾不留目;或有誤失,翻被嗟賞。既昧所見,尤喻所聞;或以年職自高,輕致陵誚。餘乃假之以湘縹,題之以古目:則賢者改觀,愚夫繼聲,競賞豪末之奇,罕議鋒端之失;猶惠侯之好偽,似葉公之懼真。是知伯子之息流波,蓋有由矣。夫蔡邕不謬賞,孫陽不妄顧者,以其玄鑑精通,故不滯於耳目也。向使奇音在爨,庸聽驚其妙響;逸足伏櫪,凡識知其絕群,則伯喈不足稱,伯樂未可尚也。

          [今譯]:曾經聽到過這種說法,家裏有了像南威一樣美貌的女子,才可以議論女人姿色;得到了龍泉寶劍,才能夠試評其他寶劍的鋒利。這把話說得大過分了,實際上束縛著人們闡發議論的思路。我曾用全部心思來作書,自以為寫的很不錯。遇到世稱有見識的人,就拿出來向他請教。可是對寫得精巧秀麗的,並不怎麼留意;而對寫得比較差的,反被贊嘆不已。他們面對所見的作品,井不能分辨出其中的優劣,僅憑傳聞所悉誰為名人,即裝出辨識的樣子評說一通。有的竟以年齡大地位高,隨便非議譏諷。于是我便故弄虛假,把作品用綾絹裝裱好,題上古人名目。結果號稱有見識者,看到後改變了看法,那些不懂書法的人也隨聲附和,競相贊賞筆調奇妙,很少談到書寫的失誤。就像惠侯那樣喜好偽品,同葉公懼怕真龍有什麼兩樣。于是可知,伯牙斷弦不再彈奏,確是有道理的。那蔡邕(對於琴材)鑑賞無誤,伯樂(對於駿馬)相顧不錯,原因就在於他們具有真知實學和辨別能力,並不限於尋常的耳聞目睹。假使,好的琴材被焚燒,平庸的人也能為其發出妙音而驚嘆;千裏馬伏臥廄中,無識的人也可看出它與眾馬不同,那麼蔡邕就不值得稱贊,伯樂也勿須推崇了。

            至若老姥遇題扇,初怨而後請;門生獲書幾,父削而子懊;知與不知也。夫士屈於不知己,而申於知己;彼不知也,曷足怪乎!故莊子曰:“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老子雲:“下士聞道,大笑之;不笑之則不足以為道也。豈可執冰而咎夏蟲哉!

          [今譯]:至於王羲之為賣扇老婦題字,老婦起初是埋怨,後來又請求;一個門生獲得王羲之的床幾題字,竟被其父親刮掉,使兒子懊惱不已。這說明懂書法與不懂書法,大不一樣啊!再如一個文人,會在不了解自己的人那裏受到委屈,又會在了解自己的人那裏感到寬慰;也是因為有的人根本不懂事理,這又有什麼奇怪的呢?所以莊子說:“清晨出生而日升則死的菌類,不知道一天有多長;夏生秋死的蟪蛄(俗稱黑蟬),不知過一年有四季。”老子說:“無知識的人聽說講道,便會失聲大笑,倘若不笑也就不足以稱為道了。”怎麼可以拿著冬天的冰雪,去指責夏季的蟲子不知道寒冷呢!

            自漢魏已來,論書者多矣,妍蚩雜糅,條目糾紛:或重述舊章,了不殊於既往;或苟興新說,竟無益於將來;徒使繁者彌繁,闕者仍闕。今撰為六篇,分成兩卷,第其工用,名曰書譜,庶使一家後進,奉以規模;四海知音,或存觀省;緘秘之旨,餘無取焉。

            垂拱三年寫記

          [今譯]:自漢、魏時代以來,論述書法的人很多,好壞混雜,條目紛繁。或者重復前人觀點,無新意補充以往;或者輕率另創異說,也無裨益於將來;使繁瑣的更加繁瑣,而缺漏的依然空白。現今我撰寫了六篇,分作兩卷,依次列舉工用,定名為《書譜》。期待相傳給後來者,作為書法藝術規則套用;還望四海知音,或可聊作參閱。將自己終生的體驗緘藏秘封起來,我是不贊成的。

          垂拱三年(公元六八七年)寫記。


          36:索靖《草書狀》 ▲Top

          聖皇禦世,隨時之宜,倉頡既生,書契是為。
            科鬥鳥篆,類物象形,睿哲變通,意巧滋生。
            損之隸草,以崇簡易,百官畢修,事業並麗。
            蓋草書之為狀也,婉若銀鉤,漂若驚鸞,舒翼未發,若舉復安。
            蟲蛇虯蟉,或往或還,類婀娜以羸羸,欻奮□而桓桓。
            及其逸遊盼向,乍正乍邪,騏驥暴怒逼其轡,海水窳窿揚其波。
            芝草葡陶還相繼,棠棣融融載其華;玄熊對踞於山岳,飛燕相追而差池。
            舉而察之,以似乎和風吹林,偃草扇樹,枝條順氣,轉相比附,竊嬈廉苫,隨體散布。
            紛擾擾以猗,靡中持疑而猶豫。玄螭狡獸嬉其間,騰猿飛鼬相奔趣。
            凌魚奮尾,駭龍反據,投空自竄,張設牙距。
            或者登高望其類,或若既往而中顧,或若俶儻而不群,或若自檢於常度。
            于是多才之英,篤藝之彥,役心精微,耽此文憲。
            守道兼權,觸類生變,離析八體,靡形不判。
            去繁存微,大象未亂,上理開元,下周謹案。
            騁辭放手,雨行冰散,高間翰厲,溢越流漫。
            忽班班成章,信奇妙之煥爛,體磥落而壯麗,姿光潤以粲粲。
            命杜度運其指,使伯英回其腕,著絕勢於紈素,垂百世之殊觀。

          [注]《草書勢》,傳為索靖的書法理論著作。《晉書.列傳第三十.索靖傳》作《草書狀》,全篇載入。述草書流變,文似未完。《墨池編》作《書勢》,《書苑菁華》第三卷作《索靖敘草書勢》。


          37:陶弘景《與樑武帝論書啟》 ▲Top

             ○陶隱居《與樑武帝論書啟》

             奉旨,左右中書復稍有能者,惟用喜贊。夫以含心之荄,實俟夾鐘吐氣。今既自上體妙,為下理用成工。每惟申鐘、王論於天下,進藝方興,所恨微臣沉朽,不能鑽仰高深,自懷嘆慕。前奉神筆三紙,並今為五。非但字字注目,乃畫畫抽心。日覺勁媚,轉不可說。以讎昔歲,不復相類,正此即為楷式,何復多尋鐘、王。臣心本自敬重,今者彌增愛服。俯仰悅豫,不能自已。啟。
           
             適復蒙給二卷,伏覽褾帖,皆如聖旨。既不顯垂允少留,不敢久停。已就摹素者一段未畢,不赴今信。紙卷先已經有,兼多他雜,無所復取,亦請俟俱了日奉送。兼此諸書是篇章體,臣今不辨,復得修習。惟願細書如《樂毅論》、《太師箴》例,依仿以寫經傳,永存寘題中精要而已。
           
             ○樑武帝答書

             近二卷欲少留,差不為異。紙卷是出裝書,既須見,前所以付耳。無正,可取備於此。及欲更須細書如論、箴例。逸少跡無甚極細書,《樂毅論》乃微粗健,恐非真跡。《大師箴》小復方媚,筆力過嫩,書體乖異。上二者已經至鑑,其外便無可付也。
           
             ○陶隱居又啟

             《樂毅論》,愚心近甚疑是摹,而不敢輕言。今旨以為非真,竊自信頗涉有悟。箴詠吟贊,過為淪弱。許靜素段,遂蒙永給。仰銘矜獎,益無喻心。此書雖不在法例,而致用理均,背間細楷,兼復兩玩。先於都下偶得飛白一卷,雲是逸少好跡。臣不嘗別見,無以能辨。惟覺勢力驚絕,謹以上呈。於臣非用,脫可充閣。願仍以奉上。臣昔於馬澄處見逸少正書目錄一卷,澄雲“右軍《勸進》、《洛神賦》諸書十餘首,皆作今體,惟《急就篇》二卷,古法緊細”。近脫憶此語,當是零落,已不復存。澄又雲:“帖注出裝者,皆擬賚諸王及朝士。”臣近見三卷,首帖亦謂久已分。本不敢議此,正復希於三卷中一兩條更得預出裝之例耳。天旨遂復頓給完卷,下情益深悚息。近初見卷題雲第二十三、四,已欣其多。今者賜書卷第遂至二百七十,惋訝無已。天府如海,非一瓶所伋,量用息心。前後都已蒙見大小五卷,於野拙之分,實已過幸。若非殊恩,豈可觖望。愚固本博涉而不能精,昔患無書可看,乃願作主書令史。晚愛隸法,又羨典掌之人,常言人生數紀之內,識解不能周流天壤。區區惟充恣五欲,實可恥愧。每以為得作才鬼,亦當勝於頑仙,至今猶然,始欲翻然之。自無射以後,國政方殷,山心兼默,不敢復以閒虛塵觸。謹於此題事,故遂成煩黷。伏願聖慈照錄誠慊。
           
             ○樑武帝又答書

             又省別疏雲“故當宜微以著賞,此既勝事,風訓非嫌”雲雲,然非所習,聊試略言。夫運筆邪則無芒角,執手寬則書緩弱。點掣短則法擁腫,點掣長則法離澌。畫促則字勢橫,畫疏則字形慢。拘則乏勢,放又少則。純骨無媚,純肉無力。少墨浮澀,多墨苯鈍,比並皆然。任意所之,自然之理也。若抑揚得所,趨舍無違,值筆廉斷,觸勢峰鬱,揚波折節,中規合矩,分間下注,濃纖有方,肥瘦相和,骨力相稱,婉婉曖曖,視之不足,稜稜凜凜,常有生氣,適眼合心,便為甲科。眾家可識,亦當復繇串耳;六文可工,亦當復繇習耳。一聞能持,一見能記,且古且今,不無其人。大抵為論,終歸是習。程邈所以能變書體,為之舊也;張芝所以能善書,工學之積也。既舊既積,方可以肆其談。吾少來乃至不嘗畫甲子,無論於篇紙。老而言之,亦復何謂。正足見嗤於當今,貽笑於後代。遂有獨冠之言,覽之背熱,隱真于是乎累真矣。此直一藝之工,非吾所謂勝事;此道心之塵,非吾所謂無欲也。
           
             ○陶隱居又啟

             二卷中有雜跡,謹疏注如別,恐未允愚衷。並竊所摹者,亦以上呈。近十餘日,情慮悚悸,無寧涉事,遂至淹替,不宜復待。填畢,餘條並非用,惟叔夜、威輦二篇是經書體式,追以單郭為恨。伏按卷上第數甚為不少,前旨惟有四卷。此書似是宋元嘉中撰集,當繇自後多致散失。逸少有名之跡,不過數首,《黃庭》、《勸進》、《像贊》、《洛神》,此等不審猶得存不?
           
             第二十三卷,(今見有十二條在別紙。)按此卷是右軍書者惟有八條。前《樂毅論》書乃極勁利,而非甚用意,故頗有壞字。《太師箴》、《大雅吟》,用意甚至,而更成小拘束,乃是書扇題屏風好體。其餘五片,無的可稱。“臣濤言”一紙、(此書乃不惡,而非右軍父子,不識誰人跡,又似是摹。)“給事黃門”一紙、“治廉瀝”一紙,(凡二篇,並是謝安衛軍參軍任靖書。)後又“治廉瀝狸骨方”一紙,(是子敬書,亦似摹跡。)右四條,非右軍書。
           
             二十四卷,(今見有二十一條在。)按此卷是右軍書者惟有十一條,並非甚合跡,兼多漫抹,於摹處難復委曲。前“黃初三年”一紙、(是後人學右軍。)“繆襲告墓文”一紙、(是許先生書。)“抱憂懷痛”一紙、(是張澄書。)“五月十一日”一紙、(是摹王珉書,被油。)“尚想黃綺”一紙、“遂結滯”一紙、(凡二篇,並後人所學,甚拙惡。)“不復展”一紙、(是子敬書。)“便復改月”一紙、(是張翼書。)“五月十五日繇白”一紙、(亦是王珉書。)“治欬方”一紙,(是謝安書。)右一十條非右軍書。伏恐未垂許以區別,今謹上許先生書、任靖書如別,比方即可知。王珉、張澄、謝安、張翼書,公家應有。
           
             ○樑武帝又答書

             省區別諸書,良有精賞。所異所同所未可知,悉可不耳。“給事黃門”二紙為任靖書,觀其送靖書諸字相附近。彼二紙,靖書體解離,便當非靖書,要復當以點畫波撇論,極諸家之致。此亦非可倉卒運於毫楮,且保拙守中也。許、任二跡並摹者並付反。右三紙正書二十六日至,嗣公。
           
             ○陶隱居又啟

             啟,伏覽書用前意,雖止二六,而規矩必周。後字不出二百,亦褒貶大備。一言以蔽,便書情頓極。使元常老骨,更蒙榮造;子敬懦肌,不沉泉夜。逸少得進退其間,則玉科顯然可觀。若非聖證品析,恐愛附近習之風,永遂淪迷矣。伯英既稱草聖,元常寔自隸絕。論旨所謂,殆同璿機神寶,曠世以來莫繼。斯理既明,諸畫虎之徒,當日就輟筆。反古歸真,方弘盛世。愚管見預聞,喜佩無屆。比世皆高尚子敬,子敬、元常,繼以齊名,貴斯式略。海內非惟不復知有元常,於逸少亦然。非排棄所可,涅而無緇,不過數紙。今奉此論,自舞自蹈,未足逞洩日月。願以所摹,竊示洪遠、思曠。此二人皆是均思者,必當贊仰踴躍,有盈半之益。臣與洪遠雖不相識,從子詡以學業往來,故因之有會。但既在閣,恐或以應聞。知摹者所採字大小不甚均調,熟看乃尚可。恐竟意大殊。此篇方傳千載,故宜令跡隨名偕老,益增美晚。所奉三旨,伏循字跡,大覺勁密。竊恐既以言發意,意則應言而新。手隨意運,筆與手會,故意得諧稱。下情歡仰,寶奉愈至。世論鹹雲“江東無復鐘跡”,常以嘆息。比日佇望中原廓清,太丘之碑,可就摹採。今論旨雲:“真跡雖少,可得而推。”是猶有存者,不審可復幾字。既無出見理,冒願得工人摹填數行。脫蒙見此,實為過幸。又逸少學鐘,勢巧形密,勝於自運。不審此例復有幾紙。垂旨以《黃庭》、《像贊》等諸文可更有出給理。自運之跡,今不復希。請學鐘法,仰惟殊恩。
           
             ○樑武帝又答書

             鐘書乃有一卷,傳以為真。意謂悉是摹學,多不足論。有兩三行許似摹,微得鐘體。逸少學鐘,的可知。近有二十許首,此外字細畫短,多是鐘法。今始欲令人帖裝,未便得付來。月日有竟者,當遣送也。
           
             ○陶隱居又啟

             逸少自吳興以前諸書,猶為未稱。凡厥好跡,皆是向在會稽時永和十許年中者。從失郡告靈不仕以後,略不復自書。皆使此一人,世中不能別也。見其緩異,呼為末年書。逸少亡後,子敬年十七八,全放此人書,故遂成與之相似。今聖旨標題,足使眾識頓悟,於逸少無復末年之譏。阮研,近聞有一人學研書,遂不復可別。臣比郭摹所得,雖粗寫字形,而無復其用筆跡勢。不審前後諸卷,一兩條謹密者,可得在出裝之例?復蒙垂給至年末間不?此澤自天,直以啟審,非敢必覬。

          [說明]陶弘景(456-536),為南朝齊樑時著名道士、醫藥學家、煉丹家。字通明,自號華陽隱居。丹陽秣陵(今江蘇南京)人。

             史稱陶弘景幼有異操,年四五歲乃好書,"恆以荻為筆,書灰中學字"。工草隸,行書尤妙。《與樑武帝論書啟》為陶弘景與樑武帝討論當代著名書法家鐘繇、王羲之等書法之優劣得失的來往書啟。

             全文見於張彥遠《法書要錄》


          38:王鐸 ▲Top

          論藝摘錄

             書法貴得古人結構。近觀學書者,動效時流。古難今易,古深奧奇變,今嫩弱俗雅,易學故也。嗚呼!詩與古文皆然,寧獨 字法也。
             ——《瓊蕊廬帖》臨《淳化閣帖第五·古法帖》後。《瓊蕊廬帖》,現藏日本京都,刊於日本村上三島氏主編之《王鐸的書法·冊篇》

            懷素獨此帖可觀,他書野道,不願臨,不欲觀矣。
             ——《瓊蕊廬帖》臨《唐僧懷素帖》後

             吾臨帖善於使轉,雖無他長,能轉則不落野道矣。學書三十年,手畫心摹,海內必有知我者耳。
             ——臨《淳化閣帖·褚遂良帖》後,浙江省博物館藏

             每書當於譚兵說劍,時或不平感慨,十指下發出意氣,輒有椎晉鄙之快。
             ——臨《為嗇道兄書詩卷》後,榮寶齋藏

             予書何足重,但從事此道數千年,皆本古人,不敢妄為。故書古帖,瞻彼在前,瞠乎自惕。譬如登霍華,自覺力有不逮,假年苦 學,或有進步耳。他日當為親家再書,以驗所造如何。
             ——《琅華館帖》(張翱刻本)之《仿古帖》後

             吾書學之四十年,頗有所從來,必有深於愛吾書者。不知者則謂為高閒、張旭、懷素野道,吾不服、不服、不服!
             ——《草書杜詩卷》末,上海博物館藏 (參見文物出版社《書法叢刊》第五輯)

             書不師古,便落野俗一路,如作詩文,有法而後合。所謂不以 六律,不能正五音也。如琴棋之有譜。然觀詩之《風》、《雅》、《頌》, 文之夏、商、周、秦、漢,亦可知矣。故善師古者不離古、不泥古。 必置古不言者,不過文其不學耳。
             ——《琅華館帖冊》後,香港虛白齋藏

             丙戍三月初五,夜二更,帶酒,微醺不能醉,書於北都琅華館。 用張芝、柳、虞草法,拓而為大,非懷素惡札一路。觀者諦辨之, 忽忘。
             ——《草書杜甫秦州雜詩卷》後 (參見村上三島氏編《王鐸的書法·卷子篇二》

             予書獨宗羲、獻。即唐宋諸家皆發源羲、獻,人自不察耳。動 曰:某學米,某學蔡。又溯而上之曰:某虞、某柳、某歐。寓此道 將五十年,輒強項不肯屈服。古人字畫詩文,鹹有萭*(尋獲)。匪深造博 聞,難言之矣。
             ——臨《淳化閣帖》與山水合卷尾 (參見村上三島氏編《王鐸的書法·卷子篇二》)

             辛巳初一日,披覽是冊,忽已四載。苦廬無佳,況墨事都廢, 偶披覽輒覺稍快然。此予四十六歲筆,五十以後,更加淬礪,仍安 於斯乎?譬之登山,所躋愈進,愈峻以曠。已經崇峰,頓俯於下。 凡畫以自足,皆為河伯一流。
             ——《瓊蕊廬帖》後

             餘於書、於詩、於文、於字、沉心驅智,割情斷欲,直思(足支)彼 室奧。恨古人不見我,故飲食夢寐以之。今再審觀,亦覺有所證。(至至)不知於堂奧殹!歸之二弟仲和,則餘三十年於書、於詩、於文、 於字其敝精凝神,亦可概見矣。
             ——《瓊蕊廬帖》後

             徽之書法,溫潤綿密,有遠水流煙之致。惜不多見,載之古今, 寥寥數行耳。極力摹寫,瞠乎其後,始信書法非易事也。
             ——《瓊蕊廬帖》臨《晉黃門郎王徽之書》後

             書時,二稚子戲於前,嘰啼聲亂,遂落(如)龍、形、萬、壑 等字,亦可噱也。書畫事,須深山中,松濤雲影中揮灑,乃為愉快, 安可得乎?
             ——《擬山園選集》(詩集·台灣學生書局)卷一

             蓋字必先有成局於胸中,……。至臨寫之時,神氣揮灑而出, 不主故常,無一定法,乃極勢耳。
             ——《王煙客先生集》

             今觀公書法,根本二王變化如龍,楷之精,行之神,書所造深 且如此,嗚呼!公書即不深造,獨足令人想見忠憤,況藝文又若斯 乎。探它書,補公遺事於唐書,能無忘於後之苦心者歟?
             ——《擬山園選集》(王鑨刻本)卷三九之題跋二

             《聖教》之斷者,餘年十五,鑽精習之。今入都,覿今礎所有 與予所得者,予冊更勝也。將曆三十年,如天宮星纏,起止次舍, 時晷日眯,殆杖而後行,轉以自軹。可見逸少之書與淳化帖玄微渾 化,信學書者之潭奧矣。其珍摹靈林,勿褻此寶。昔人雲,仙芝煩 弱,既匪足讎蟲虎瑣碎,又安能匹時,取而味之終身焉。以測天者, 步此冊可也。
             ——《擬山園選集》(王鑨刻本)卷三九之題跋二

             米芾書本羲、獻,縱橫飄忽,飛仙哉。深得《蘭亭》法,不規規摹擬,予為焚香寢臥其下。
             ——跋《米芾吳江舟中詩卷》後,美國紐約某收藏家藏。

             刻僕字者,鉤多漸滅,隨其浸潤,踵之訛也。大作笯鸞囚龍, 異狀紛披,不區區襲開元、大曆之法矣。野火都離,枝葉漸脫。又 帶夫然幽冷之致,真古人不及。嘗論之古“(上禾下皿)老*(左王右獻),止能華人目,《鈞 樂》、《廣散》,止能爽人耳。若能悅人神,則足下之作歟!邴原之 從孫嵩,獨推鄭康成,僕今亦如是。
             ——《擬山園選集》(王鑨刻本)卷五十之《書牘·與石齋》

             山東五弦李群得善書《蘭亭》,紙故墨勞,似數百年物。或以 為雙鉤廓填,予觀之曰:其不然乎,斯褚登善之為乎!臨昭陵原書, 世不易有也。予足跡江南北,幾遍天下,惟此與潁州為第一腕所書。 飛越無心,別有仙趣,若一母子而孿焉,超定武刻汴中本而止之。 時虞山錢牧齋在席,亦極驚賞,且未有柳貫、鄧文原諸跋在。夫世 遠歟,傾圯同歸於盡,何物不爾,獨此書特出於煤塵,豈偶然哉! 觀書猶觀山升岳,嫌眾山之*(上山下列)*(上山下施)也。後之君子,欲見昭陵帖,觀此 帖斯過半矣。
             ——《擬山園選集》(王鑨刻本)卷三八之題二

             柳誠懸用《曹娥》、《黃庭》小楷法拓為大,力勁氣完。矩陰陽 於羲於獻,但以刀割塗加四隅耳。茲帖與《沂州》皆其特達者,謂 為國工不虛。
             ——《擬山園選集》(王鑨刻本)卷三八之跋二

             丙戍春,過北海齋,觀米海岳書,矯矯沉雄,變化於獻之,柳、 虞自為伸縮,觀之不忍去。噫!兵燹之餘,一時文獻凋剝,乃僅存 此卷,光怪陸離,不滅沒於瓦礫。物之遇,由蹇遇亨,可勝嘆耶。
             ——此文補刻於《停雲館帖》帖尾


          39:王僧虔《論書》《筆意贊》 ▲Top

          論書

            宋文帝書,自謂不減王子敬。時議者雲:“天然勝羊欣,功夫不及欣。

            王平南廙是右軍叔,自過江東,右軍之前,惟廙為最。畫為晉明帝師,書為右軍法。

            亡曾祖領軍洽與右軍俱變古形,不爾,至今猶法鐘、張。右軍雲:“而書遂不減吾。”亡從祖中書令氓,筆力過於子敬。書《舊品》雲:“有四疋素,自朝操筆,至暮便竟,首尾如一,又無誤宇。子敬戲雲:‘弟書如騎騾,骎骎恆欲度驊騮前。”庚征西翼書,少時與右軍齊名。右軍後進,庚猶不忿。在荊州與都下書雲:“小兒輩乃賤家雞,愛野鴦,皆學逸少書。須吾還,當比之。”張翼書右軍自書表,晉穆帝令翼寫題後答右軍,右軍當時不別,久方覺,雲:“小於幾欲亂真。”張芝、索靖、韋涎、鐘會、二衛並得名前代,古今既異,無以辨其優劣,惟見筆力驚絕耳。

            張澄書,當時亦呼有意。

            郗方回章草,亞於右軍。

            晉齊王偵書,京、洛以為楷法。

            李式書,右軍雲:“是平南之流,可比庾翼。”王濛書亦可比庾翼。

            陸機書,吳士書也,無以校其多少。

            庚亮書,亦能入錄。

            亡高祖巫相導,亦甚有楷法,以師鐘、衛,好愛無厭,,喪亂狼狽,猶以鐘繇《尚書宣示帖》藏衣帶中。過江後,在右軍處,右軍借王敬仁。敬仁死,其母見修平生所愛,遂以人棺。

            郝超草書亞於二王,緊媚過其父,骨力不及也。

            桓玄書,自比右軍,議者末之許,雲可比孔琳之。

            謝安亦人能流,殊亦自重,乃為子敬書秘中散詩。得子敬書,有時裂作校紙。

            羊欣、邱道護並親授於子敬。欣書見重一時,行草尤善,正乃不稱。孔琳之書,天然絕逸,極有筆力,規矩恐在羊欣後。邱道護與羊欣皆面授予敬,故當在欣後,邱殊在羊欣前。

            範曄、蕭思話同師羊欣,範後背叛,皆失故步,名亦稍退。

            蕭思話全法羊欣,風流趣好,殆當不減,而筆力恨弱。

            謝靈運書乃不倫,遇其合時,亦得人能流。昔子敬上表多在中書雜事中,皆自書,竊易真本,相與不疑。元嘉初,方就索還。《上謝太傅殊禮表》亦是其例,親聞文皇說此。

          謝綜書,其舅雲:“緊潔生起,實為得賞。”至不重羊欣,欣亦憚之。書法有力,恨少媚好。

            顏騰之、賀道力並便尺牘。

            康聽學右軍草,亦欲亂真,與南州釋道人作右軍書贊。

            孔琳之書,放縱快利,筆道流便,二王后略無其比。但工夫少,自任過,未得盡其妙,故當劣於羊欣。

            謝靜、謝敷並善寫經,亦入能境。居鐘毫之美,邁古流今,是以征南還即所得。

            辱告,並五紙,舉體精雋靈奧,執玩反覆,不能釋手。雖太傅之婉媚玩好,領軍之靜逖合緒,方之蔑如也。昔杜度殺字甚安,而筆體微瘦;崔瑗筆勢甚快,而結字小疏。居處二者之間,亦猶仲尼方於季孟也。夫工欲善其事,必先利其器。伯喈非流紈體素,不妄下筆。若子邑之紙,研染輝光;仲將之墨,一點如漆;伯英之筆,窮神靜思。妙物遠矣,邈不可追。遂令思挫於弱毫,數屈於陋墨。言之使人於邑。若三珍尚存,四寶斯覿,何但尺素信札,動見模式,將一字徑丈、方寸千言也。承天涼體豫,復欲繕寫一賦,傾遲暉採,心目俱勞。承閱覽秘府,備睹群跡。崔、張歸美於逸少,雖一代所宗,僕不見前古人之跡,計亦無以過於逸少。既妙盡深絕,便當得之實錄。然觀前世稱目,竊有疑焉。崔、杜之後,共推張芝。仲將謂之“筆聖”。伯玉得其筋,巨山得其骨。索氏自謂其書銀鉤蠆尾,談者誠得其宗。劉德升為鐘、胡所師,兩賢並有肥瘦之斷。元鳴獲釘壁之玩,師宜致酒簡之多。此亦不能止。長胤狸骨,右軍以為絕倫,其功不可及。繇此言之,而向之論,或至投杖。聊呈一笑,不妄言耳。

            鐘公之書,謂之盡妙。鐘有三體:一曰銘石書,最妙者也;二曰章程書,世傳秘書,教小學者也,三曰行狎書,行書是也。三法皆世人所善。

            張超字子並,河間人。衛覬字伯儒,河東人。為魏尚書僕射,謚敬侯。善草及古文,略盡其妙。草體如傷瘦,而筆跡精殺,亦行於代。子瓘字伯玉,晉司空太保,為楚王所害。瓘採張芝草法,取父書參之,更為草稿,世傳其善。瓘子恆,字巨山,亦能書。

            索靖字幼安,敦煌人,散騎常侍,張芝姊之孫也。傳芝草而形異,甚矜其書,名其字勢曰“銀鉤蠆尾”。

            韋誕字仲將,京兆人,善楷書。漢魏宮觀題署多是誕手。魏明帝起凌雲台,先釘榜未題。籠盛誕,轆轤長絙引上,使就榜題。榜去地將二十五丈,誕危懼,誡子孫絕此楷法,又著之家令。官至鴻臚。

          筆意贊

            書之妙道,神採為上,形質次之,兼之者方可紹於古人。以斯言之,豈易多得?必使心忘於筆,手忘於書,心手達情,書不忘想,是謂求之不得,考之即彰。乃為《筆意贊》曰:

            剡紙易墨,心圓管直。漿深色濃,萬毫齊力。先臨《告誓》,次寫《黃庭》。骨豐肉潤,人妙通靈。努如植槊,勒若橫釘。開張風翼,聳擢芝英。粗不為重,細不為輕。纖微向背,毫發死生。工之盡矣,可擅時名。   

          [評點]王僧虔(426—485),琅琊臨沂(今山東臨沂北)人,為王羲之的四世族孫,即王導的五世孫。宋孝武帝時,官武陵太宋,後累遷至尚書令。入齊,轉侍中,溢簡穆。
          王僧虔是南朝齊著名的書法家和書法理論家。通文史,精音律。少即善書,得家傳,工隸、行、草書。宋文帝劉義隆見其書素扇,遂感嘆:“非唯跡逾子敬,方當器雅過之。”宋孝武帝(劉駿)欲擅書名,僧虔不敢表現其能,常用拙筆寫字,以此見容。入齊,書名尤盛,所謂“雄發齊代”。齊太祖(蕭道成)亦善書,篤好不已,嘗與僧虔睹書,書畢,問道:“誰為第一?”僧虔答道:“臣書臣中第一,陛下書帝中第一。”太祖大笑說:“卿可謂善自為謀矣。”(事見《書斷》)樑武帝(蕭衍)曾評其書“如王、謝家子弟,縱復不端正,奕奕皆有一種風流氣骨”(《古今書人優劣評》)。有《王琰帖》、《禦史帖》、《陳情帖》等書跡傳世。另著有《書賦》、《論書》、《筆意贊》等書論行世。《論書》和《筆意贊》是王僧虔的代表論著,在中國書論史上亦佔有重要地位。

          《論書》見於《書苑菁華》第 l l卷。其簡明扼要地論列了自東漢至南朝宋的40餘位書家的成就、特點。自古以來,品藻人物,評論作品,由於種種原因,往往會出現一種傾向:要麼抬高,捧一通;要麼貶低,罵一通。而王氏對漢以來書家的品評,卻權為客觀、公允,包括自家祖輩、親屬亦能如此,實在難得,精神可貴! 其品評書家的方法,亦為後世所推重並繼承。
          《筆意贊》見於《書苑菁華》第18卷。此文一序一贊,僅一百多字,以《告誓》與《黃庭》為範本,對書法藝術的本質和學書的方法,如器具的選擇與使用,字帖的選擇與特點,用筆的標準及結字的方法等問題,作了精闢的闡述。其語言簡練,文辭優美,耐人尋味,真不愧大家手筆。文中第一次明確地提出了形神兼備、神採為上的創作與鑑賞的原則,揭示了書法藝術創作最根本的追求目標,並強調書家應做到心、手、筆相忘,才能達到創作的最高境界,自然地表達其情感。
          王氏的這些論述對後世書法藝術的發展產生了深遠的影響。


          40:王愔《古今文字志目》 ▲Top

          《文字志》三卷(未見此書,今錄其目。)

             △上卷目
           
             古書有三十六種:
           
             古文篆

            大篆 象形篆 科鬥篆

            小篆 刻符篆 摹篆
           
             隸書 署書 殳書
           
             繆書 鳥書 尚方大篆

            鳳書 魚書 龍書
           
             麒麟書 龜書 蛇書

            仙人書 雲書 芝英書

            金錯書 十二時書 懸針書 垂露篆
           
             倒薤書 偃波書 蚊腳書
           
             草書 楷書 飛白書
           
             填書 稿書 行書
           
             古今小學(三十七家,一百四十七人。) 書勢五家
           
             △中卷目

             秦、漢、吳五十九人:
           
             李斯 程邈 胡毋敬
           
             趙高 司馬相如 張敞
           
             嚴延年 漢元帝 史遊
           
             劉向 孔光 爰禮
           
             揚雄 陳遵 杜林
           
             劉睦 衛宏
           
             劉黨 曹喜 杜度
           
             王次仲 班固 徐幹
           
             賈逵 賈魴 左姬
           
             許慎 崔瑗 唐綜
           
             曹壽 崔寔 尹珍
           
             羅暉 趙襲 張超
           
             皇甫規妻 李巡 蔡邕 張芝
           
             蘇班 劉德昇 師宜官
           
             姜詡 樑宣 張昶
           
             樑鵠 張纮 毛弘
           
             左伯 魏武帝 邯鄲淳
           
             魏覬 鐘繇 張昭 蘇林
           
             張揖 胡昭 杜恕
           
             諸葛融
           
             △下卷目
           
             魏、晉五十八人:
           
             韋誕 張緝 郭伯通
           
             韋熊 來畋 鐘會
           
             諸葛瞻 皇象 何曾
           
             傅玄 韋弘 辛曠
           
             魏徽 陳暢 楊肇
           
             岑泉 張弘 朱育
           
             江偉 司馬攸 孫皓
           
             杜預 滿爽 楊經
           
             呂忱 衛恆 衛宣
           
             裴興 索靖 牽秀
           
             李韞 向泰 裴邈
           
             張柄 張越 羊忱
           
             荀輿 王廙 李式
           
             羊固 闢閭訓 王導
           
             庾翼 王濛 衛夫人
           
             李欽 王怡 劉劭
           
             王悠 王洽 王羲之
           
             張彭祖 謝安 郗愔
           
             任靜 王獻之 王珉 桓玄


          41:韋續《五十六種書》並序 ▲Top

            自三皇以前,結繩為政,至太昊氏,文字生焉。所謂依類象形 謂之文,形聲相益謂之字,著於竹帛謂之書。書者以代結繩之 政也,故字有六文: 一曰象形,“日”“月”是也;二曰指 事,“上”、“下”是也;三曰形聲,“江”、“河”是也; 四曰會意,“武”、“信”是也;五曰轉注,“考”、“老” 是也;六曰假借,“令”、“長”是也。又曰字有五易,蒼頡 變古文,史籀制大篆,李斯制小篆,程邈制隸書,漢代作章草 是也。其八體者,更加刻符、摹印、蟲書、署書、殳書、傳信 並大小篆,為八體也。後漢東陽公徐安於搜諸史籍,得十二時 書,皆象神形也。又加二十三體,共定五十有六,列之於後:

            一、太昊庖犧氏獲景龍之瑞,始作龍書。

            二、炎帝神農氏因上黨羊頭山始生嘉禾八穗,作八穗書, 用頒行時令。

            三、黃帝史蒼頡寫鳥跡為文,作篆書。

            四、黃帝時,因卿雲作雲書。

            五、少昊金天時以鳥紀官,作鸞風書,文章衣眼,取以 為象。

            六、蝌蚪書因蝌蚪之名,故飾之以形。不知年代,或雲 顓頊高陽氏所制,今古文是也。

            七、帝嚳高辛氏以人紀事,象仙人形書,車器衣眼皆為之。

            八、帝堯陶唐氏因軒轅靈龜負圖作龜書。

            九、夏後氏象鐘鼎形為篆,作鐘鼎書。

            十、殷湯時仙人務光作倒薤書,今薤葉篆是也。

            十一、周文王史史佚因騶虞作虎書,有虎不害人,騶虞因此始也。

            十二、周文王時赤雀銜書集戶,武士時丹鳥入室,以二祥瑞,故作鳥書。

            十三、周法魚書因素鱗躍舟所作。一雲漢武帝遊昆明池,學士陳遵所作。

            十四、填書,周媒氏作。魏韋誕用題宮闕,王廙、王隱皆好之。

            十五、大篆書,周宣王史史籀所作也。亦曰籀篆,《石鼓文》是也。

            十六、復篆,因大篆而重復之,亦史籀作。漢武帝用題建章闕。

            十七、殳書,伯氏所職。文記笏,武紀殳,因而制之。

            十八、小篆,周時所作。漢武帝得汾陰鼎,即其文也。

            十九、仙人篆,古之所有。李斯善辨古文字,改為篆形也。

            二十、麒麟書,魯哀公十三年西狩獲麟,仲尼反袂拭面,嘆“吾道 窮矣”,弟子用為素王紀瑞所制也。

            二十一、轉宿篆,宋司馬以熒惑退舍所作也,象蓮花未開形。

            二十二、蟲書,魯秋胡婦浣蠶所作,亦曰雕蟲篆。

            二十三、傳信鳥跡書,六國時書節為信,象鳥形也。

            二十四、細篆書,李斯摹寫始皇碑序,皆用此體,亦曰繆篆。

            二十五、小篆書,李斯刪古文作也。始皇以祈禱名山,皆用此書。

            二十六、刻符書,鳥頭雲腳,李斯、趙高並善之,用題印璽。

            二十七、古隸書,秦程邈系獄中,變大篆所作。始皇嘉焉,拜侍禦史, 名徒隸之書,今為八分。

            二十八、徒隸之書,因程邈幽囚為徒隸書也。邈字元岑。

            二十九、署書,漢蕭何所作,用題蒼龍、白虎二闕。

            三十、藁書,行草之文也,董仲舒欲言災異,主父偃竊而奏之。晉

            衛瓘、索靖善之,亦雲相聞之用也。

            三十一、氣候時書,漢文帝令蜀郡司馬長卿採日辰會屈伸之體、升 伏之勢,象四時為書也。

            三十二、符信書,六國時各以異體為符信所制也。

            三十三、芝英書,漢武代有靈芝三,植於殿前,遂歌《芝房之曲》 述焉,又名英芝。

            三十四、金錯書,古之錢銘,周之皇府、漢之銖兩刀布所制也。

            三十五、尚方大篆,程邈所述,後人飾之以為法焉。

            三十六、鶴頭書,與偃波皆詔版所用,漢家尺一之簡是也,亦名鵠頭。

            三十七、偃波書,即版書,狀如連文,謂之偃波。

            三十八、蚊腳書,尚方詔版也。其字體側纖垂下,有似蚊腳,因而為名。

            三十九、垂露篆,漢章帝時曹喜所作也。

            四十、懸針篆,亦曹喜所作。有似針鋒,因而名之,用題《五經》篇目。

            四十一、章草書,漢齊相杜伯度援藁所作。因章帝所好,名焉。韋誕謂之草聖。

            四十二、飛白書,蔡邕待詔,見門下吏堊帚成字所作。

            四十三、一筆書,弘農張芝臨池所制。其狀崎崄,有循環之趣。

            四十四、八分書,漢靈帝時上谷王次仲所作。魏鐘繇謂之章程書。

            四十五、蛇書,魯人唐終,當漢、魏之際'夢龍繞身,寤而作之。

            四十六、行書,正之小偽也。鐘繇謂之行狎書。

            四十七、散隸書,衛恆所作。跡同飛白。

            四十八、龍爪書,晉王右軍所作,形如龍爪也。

            四十九、藁及行隸,鐘繇變之,羲、獻重焉。

            五十、晉二王重變行隸及藁體為八體書。

            五十一、草書,王羲之飾古,亦甚善也。

            五十二、虎爪書,王僧虔擬龍爪所作也。

            五十三、鬼書,宋元嘉中,京口有人震死,臂上有篆,似八分也, 今曰雷書。

            五十四、外國書,阿馬鬼魅王之所授,其形似小篆。

            五十五、天竺書,梵王所作《涅槃經》,所謂“四十二章經”也。

            五十六、花書,河東山胤所作。    

          [評點]韋續,唐代書法家,生平事跡不詳。著有《墨藪》二卷。
             《五十六種書並序》一卷,舊本題唐韋續撰,續不知何許人。前有小序,言後漢東陽徐安於搜諸史籀,得十二時書,旨象神形,又加三十三體,共定五十六種,似此書為續所傳,非續之書也。韋續《墨藪》亦載此篇,《墨藪》皆輯前人之作,亦為此書非續所作之一證。所雲東陽徐安於,未詳何如人,十二種加三十三種亦不符五十六之數。編中所列太昊庖犧氏之龍書,炎帝神農氏之穗書等,俱無根據,不免附會。上古之時,文字簡單,書體未定,作書者僅為符號之用,各以巧意為之緣飾,事或有之,必以為書法之一種而羅列之,顛亦甚矣。宋朱長文《墨池編》曰:“所謂五十六種書者,何其紛紛多說耶?彼皆得於傳聞,因於曲說,或重復,或虛誕,未可盡信也。學者惟工大小篆八分楷草行草為法足矣,不必究心於諸體爾。”


          42:衛恆《四體書勢》 ▲Top

            恆字巨山,少闢司空齊王府,轉太子舍人、尚書郎、秘書丞、太子庶子、黃門 郎。

            恆善草隸書,為《四體書勢》曰:

            昔在黃帝,創制造物。有沮誦、倉頡者,始作書契以代結繩,蓋睹鳥跡以興思也。因而遂滋,則謂之字,有六義焉。一曰指事,上下是也;二曰象形,日月是也;三曰形聲,江河是也; 四曰會意,武信是也;五曰轉注,老考是也;六曰假借,令長是也。夫指事者,在上為上,在下為下。象形者,日滿月虧,象其形也。形聲者,以類為形,配以聲也。會意者,以戈為武,人言為信是也。轉注者,以老為壽考也。假借者,數言同字,其聲雖異,文意一也。

            自黃帝至於三代,其文不改。及秦用篆書,焚燒先典,而古文絕矣。漢武帝時魯恭王壞孔子宅,得《尚書》、《春秋》、《論語》、《孝經》,時人已不復知有古文,謂之科鬥書。漢世秘藏,希有見者。魏初傳古文者出於邯鄲淳,恆祖敬侯寫淳《尚書》,後以示淳而淳不別。至正始中,立三字石經,轉失淳法,因科鬥之名,遂效其形。太康元年,伋縣人盜發魏襄王塚,得策書十馀萬言,按敬侯所書,猶有仿佛。古書亦有數種,其一卷論楚事者最為工妙,恆竊悅之,故竭愚思以贊其美,愧不足以廁前賢之作,冀以存古人之象焉。古無別名,謂之《字勢》雲。

            黃帝之史,沮誦倉頡,眺彼鳥跡,始作書契。紀綱萬事,垂法立制,帝典用宣,質文著世。 爰暨暴秦,滔天作戾,大道既泯,古文亦滅。魏文好古,世傳丘墳,曆代莫發,真偽靡分。 大晉開元,弘道敷訓,天垂其象,地耀其文。其文乃耀,粲矣其章,因聲會意,類物有方。日處君而盈其度,月執臣而虧其旁;雲委蛇而上布,星離離以舒光。禾苯*<上艸下尊>以垂穎,山嵯峨而連岡;蟲跂跂其若動,鳥飛飛而未揚。觀其措筆綴墨,用心精專,勢和體均,發止無間。或守正循檢,矩折規旋;或方圓靡則,因事制權。其曲如弓,其直如弦。矯然突出,若龍騰於川;渺爾下頹,若雨墜於天。或引筆奮力,若鴻鵠高飛,邈邈翩翩;或縱肆婀娜,若流蘇懸羽,靡靡綿綿。是故遠而望之,若翔風厲水,清波漪漣;就而察之,有若自然。信黃唐之遺跡,為六藝之範先,籀篆蓋其子孫,隸草乃其曾玄。睹物象以致思,非言辭之所宣。

            昔周宣王時史籀始著大篆十五篇,或與古同,或與古異,世謂之籀書也。及平王東遷,諸侯立政,家殊國異,而文字乖形。秦始皇帝初兼天下,承相李斯乃損益之,奏罷不合秦文者。斯作《倉頡篇》,中車府令趙高作《爰曆篇》,太史令胡毋政作《博學篇》,皆取史籀大篆,或頗省改,所謂小篆者。或曰下杜人程邈為衙吏,得罪始皇,幽系雲陽十年,從獄中改大篆,少者增益,多者損減,方者使圓,圓者使方。奏之始皇,始皇善之,出為禦史,使定書。或曰邈定乃隸字也。

            自秦壞古,文有八體:一曰大篆,二曰小篆,三曰刻符,四曰蟲書,五曰摹印,六曰署書,七曰殳書,八曰隸書。王莽時,使司空甄酆校文字部,改定古文,復有六書:一曰古文,即孔子壁中書也;二曰奇字,即古文而異者也;三曰篆書,即秦篆書也;四曰佐書,即隸書也;五曰繆篆,所以摹印也;六曰鳥書,所以書幡信也。及漢祭酒許慎撰《說文》,用篆書為正,以為體例,最新,可得而論也。秦時李斯號為工篆,諸山及銅人銘皆斯書也。漢建初中,扶風曹喜善篆,少異於斯,而亦稱善。邯鄲淳師焉,略究其妙,韋誕師淳而不及。太和中,誕為武都太守,以能書留補侍中、中郎將,善篆,採斯、喜之法,為古今雜形,然精密閒理不如淳也。邕作《篆勢》雲:

            字畫之始,因於鳥跡。蒼頡循聖,作則制文。體有六篆,要妙入神。或象龜文,或比龍鱗。紆體效尾,長翅短身。頹若黍稷之垂穎,蘊若蟲蛇之棼緼。揚波振激,鷹跱鳥震。延頸協翼,勢似凌雲。或輕舉內投,微本濃末;若絕若連,似露緣絲,凝垂下端。 從者如懸,衡者如編。杳杪邪趣,不方不圓。若行若飛,蚑蚑翾翾(xuān)。遠而望之,若鴻鵠群遊,絡繹遷延。迫而視之,湍漈不可得見,指撝不可勝原。研桑不能數其詰屈,離婁不能睹其隙間。般倕揖讓而辭巧,籀誦拱手而韜翰。處篇籍之首目,粲粲彬彬其可觀。攡(chī)華豔於紈素,為學藝之範閒。嘉文德之弘蘊,懿作者之莫刊。思字體之俯仰,舉大略而論旃。

            秦既用篆,奏事繁多,篆字難成,即令隸人佐書,曰隸字。漢因用之,獨符璽、幡信、題署用篆。隸書者,篆之捷也。上谷王次仲始作楷法,至靈帝好書,時多能者,而師宜官為最,大則一字徑丈,小則方寸千言,甚矜其能。或時不持錢詣酒家飲,因書其壁,顧觀者以酬灑直,計錢足而滅之。每書輒削而焚其捬,樑鵠乃益為捬,而飲之酒,候其醉而竊其柎(fū )。鵠卒以書至選部尚書。宜官後為袁術將,今巨鹿宋子有《耿球碑》,是術所立,其書甚工,雲是宜官書也。樑鵠奔劉表,魏武帝破荊州,募求鵠。鵠之為選部也,魏武欲為洛陽令而以為北部尉,故懼而自縛詣門。署軍假司馬,在秘書書勤書自效,是以今者多有鵠手跡。魏武帝懸著帳中,及以釘壁玩之,以為勝宜官,今宮殿題署多是鵠書。鵠宜為大字,邯鄲淳宜為小字,鵠謂淳得次仲法,然鵠之用筆,盡其勢矣。鵠弟子毛弘教於秘書,今八分皆弘之法也。漢末有左子邑,小與淳、鵠不同,然亦有名。魏初,有鐘、胡二家為行書法,俱學之於劉德升,而鐘氏小異,然亦各有其巧,今盛行於世。作《隸勢》雲:

             鳥跡之變,乃惟佐隸,蠲彼繁文,從此簡易。厥用既弘,體象有度,煥若星陳,鬱若雲布。其大徑尋,細不容發,隨事從宜,靡有常制。或穹窿恢廓,或櫛比針裂,或砥平繩直,或蜿蜒繆戾,或長邪角趣,或規旋矩折。修短相副,異體同勢。奮筆輕舉,離而不絕。纖波濃點,錯落其間。若鐘簴(jù 古代掛鐘磬的架子上的立柱。)設張,庭燎飛煙。嶄岩嵯峨,高下屬連,似崇台重宇,層雲冠山。遠而望之,若飛龍在天;近而察之,心亂目眩,奇姿譎詭,不可勝原。研桑所不能計,宰賜所不能言。何草篆之足算,而斯文之未宣?豈體大之難睹,將秘奧之不傳?聊佇思而詳觀,舉大較而論旃。

            漢興而有草書,不知作者名。至章帝時,齊相杜度,號稱善作。後稱善作。後有崔瑗、崔寔,亦皆稱工。杜氏殺字安,而書體微瘦;崔氏甚得筆勢,而結字小疏。弘農張伯英者,而轉精其巧,凡家之衣帛,必先書而練之。臨池學書,池水盡墨。下筆必為楷則,常曰:“匆匆不暇草書”。寸紙不見遺,至今世尤寶其書,韋仲將謂之“草聖”。伯英弟文舒者,次伯英;又有姜孟穎、樑孔達、田彥和及仲將之徒,皆伯英之弟子,有名於世,然殊不及文舒也。羅叔景、趙元嗣者,與伯英同時,見稱於西州,而矜此自與,眾頗惑之。故伯英自稱:“上比崔、杜不足。下方羅、趙有馀。”河間張超亦有名,然雖與崔氏同州,不如伯英之得其法也。崔瑗作《草勢》雲:

            書契之興,始自頡皇;寫彼鳥跡,以定文章。爰暨末葉,典籍彌繁。時之多僻,政之多權。官事荒蕪,其墨翰;惟多佐隸,舊字是刪。草書之法,蓋又簡略;應時諭指,用於卒迫。兼功並用,愛日省力;純儉之變,豈必古式。觀其法象,俯仰有儀;方不中矩,圓不副規。抑左揚右,望之若欹。獸鳥跱,志在飛移;狡兔暴駭,將奔未馳。或黝黭(yǎn 黑;昏暗)點¤<左黑右主>,狀似連珠,絕而不離。畜怒怫鬱,放逸生奇。或凌邃惴慄,若據高臨危。旁點邪附,似螳螂而抱枝。絕筆收勢,馀糾結。若山峰施毒,看隙緣巇;騰蛇赴穴,頭沒尾垂。是故遠而望之,焉若注岸奔涯;就而察之,一畫不可移。幾微要妙,臨事從宜。略舉大較,仿佛若斯。

          [注]衛恆(?-291),西晉書法家。字巨山,河東安邑(今山西省夏縣)人。官至黃門侍郎,惠帝時為賈後等所殺。他出生在一個書法世家,祖衛覬、父衛瓘、姪女衛鑠都是著名書法家。明代陶宗儀《書史會要》說他:善草、章草、隸、散隸等書體,但見於世的,多是他的草書。唐李嗣真《書後品》稱他的書法縱任輕巧,流轉風媚,剛健有餘,便媚詳雅。北宋《淳化閣帖》卷二收有他草書二行。
            《四體書勢》1卷,是衛恆的書法理論著作,原文收入《晉書列傳第六·衛恆傳》,是存世最早和比較可靠的重要書法理論之一,有很高的史料價值。有關當時的各種書體、書史的演變,以及一些書法家代表的情況資料,大都賴此書得以儲存。


          43:衛鑠《筆陣圖》 ▲Top

            夫三端之妙,莫先乎用筆;六藝之奧,莫重乎銀鉤。昔秦丞相斯,見周穆王書,七日興嘆,患其無骨。蔡尚書邕,入鴻都觀碣,十旬不返,嗟其出群。故知達其源者少,喑於理者多。近代以來,殊不師古,而緣情棄道,才記姓名,或學不該贍,聞見又寡,致使成功不就,虛費精神,自非通靈感物,不可與談斯道矣。今刪李斯筆妙,更加潤色,總七條並作其形容,列事如左,貽諸子孫,永為模範,庶將來君子時復覽焉。筆要取崇山絕仞中兔毛,八九月收之。其筆頭長一寸,管長五寸,鋒齊腰強者。其硯取前涸新石,潤澀相兼,浮津耀墨者。其墨取廬冊之松煙,代郡之鹿膠,十年以上,強如石者為之。紙取東陽魚卵,虛柔滑淨者。凡學書字,先學執筆,若真書去筆頭二寸一分,若行草書去筆頭三寸一分執之。下筆點畫波撇、屈曲,皆須盡一身之力而送之。初學先大書,不得從小。善鑑者不寫,善寫者不鑑。善筆力者多骨,不善筆力者多肉,多骨微肉者謂之筋書,多肉微骨者謂之墨豬。多力豐筋者聖,無力無筋者病。一一從其消息而用之。

            [橫]如千裏陣雲,隱隱然其實有形。

            [點]如高峰墜石,磕磕然實如崩也。

            [撇]陸斷犀象。

            [折]百鈞弩發。

            [豎]萬歲枯藤。

            [捺]崩浪雷奔。

            [橫折彎鉤]勁弩筋節。

            右七條筆陣出入斬斫圖,執筆有七種:有心急而執筆緩者,有心緩而執筆急者。若執筆近而不能緊者,心手不齊,意後筆前者敗。若執筆遠而急,意前筆後者勝。又有六種用筆:結構員備如篆法,飄飄灑落如章草,凶險可畏如八分,窈窕出入如飛白,耿介特立如鶴頭,鬱拔縱橫如古隸。然心存委曲,每為一字各象其形,斯造妙矣,書道畢矣。永和四年上虞制記。

          [評點]衛夫人,名鑠,字茂漪,東晉人,傳為王右軍(王羲之)之師。家學淵源(北派之祖衛瓘姪女、衛桓從的妹妹),有名當代。《書法要錄》說她得筆法於鐘繇,熔鐘、衛之法於一爐。所著《筆陣圖》中雲:“橫”如千裏之陣雲、“點”似高山之墬石、“撇”如陸斷犀象之角、“豎”如萬歲枯藤、“捺”如崩浪奔雷、“努”如百鈞弩發、“鉤”如勁弩筋節。有《名姬帖》、《衛氏和南帖》傳世。其字形已由鐘繇的扁方變為長方形,幾條清秀平和,嫻雅婉麗,去隸已遠,說明當時楷書已經成熟而普遍。《書評》稱之為“如插花少女,低昂美容;又如美女登台,仙娥弄影,紅蓮映水,碧海浮霞。”

          衛鑠認為,書法品位就高在“多力豐筋”,即筋勁,力強。多“肉”則是下品,是“墨豬”,臃腫無神氣。魏晉人講“風骨”,講“清奇險峻”,所以以“瘦硬”為美。後代人或崇尚“豐腴”,或崇尚“肥勁”,對“筋”、“骨”、“肉”也就有了不同的理解。但“書必有神、氣、骨、肉、血,五者缺一,不能成書”(蘇軾《東坡題跋》卷上)則是曆代書家的共識。衛鑠的貢獻就在於她把“筋”、“骨”、“肉”之說引入書論,使之成為書法審美範疇,為後世的創作和欣賞開闢了新的思路。


          44:吾丘衍《學古編》 ▲Top

          《學古編》

          ◎序

             乾、莫,利器也;補履者,莫能用。欐樑,大材也;窒鼠穴者,莫能舉。故求此道,必得於此道,則達於此道矣。既達矣,止斯可乎?曰:不可。夏後氏治水,水之道也,汨使之流,道使之注。山泉之蒙,尾閭之虛,不相與違,斯所謂道。偶得此說,因寫為《學古編》序。
           
             大德四年五月二十五日,真白居士吾丘衍子行序
           
             三十五舉

             一舉曰:科鬥。為字之祖,象蝦蟆子形也。今人不知,乃巧畫形狀,失本意矣。上古無筆墨,以竹挺點漆書竹上,竹硬漆膩,畫不能行,故頭粗尾細,似其形耳。古謂筆為聿,《蒼頡》書從手,持半竹,加畫為聿肅。秦謂不律,由切音法雲。
           
             二舉曰:今之文章,即古之直言。今之篆書,即古人平常字。曆代變更,遂見其異耳。不知上古初有筆,不過竹上束毛,便於寫畫,故篆字肥瘦均一,轉折無稜角也。後人以真、草、行,或瘦或肥,以為美茂。若筆無心,不可成體。今人以此筆作篆,難於為古人尤多。若初學未能用時,略於燈上燒過,庶幾便手。
           
             三舉曰:學篆字,必須博古。能識古器,則其款識中古字神氣敦樸,可以助人。又可知古字象形、指事、會意等未變之筆,皆有妙處,於《說文》始知有味矣。前賢篆之氣象,即此事未嘗用力故也。若看模文,終是不及。
           
             四舉曰:凡習篆,《說文》為根本。能通《說文》,則寫不差。又當與《通釋》兼看。
           
             五舉曰:字有古今不同。若檢《說文》,頗覺費力,當先熟於《復古編》,大概得矣。
           
             六舉曰:篆書多有字中包一二畫。如“日”字、“目”字之類。若初一字內畫不與兩頭相黏,後皆如之,則為首尾。一法若或接或否,各自相異,為不守法度,不可如此。又圓點、又圓圈,小篆無此法,古文有之。口字,作三角形,不可引用。學者慎勿難寫處,妄意增入。
           
             七舉曰:篆法,扁者最好,謂之 扁。徐鉉謂非老手,莫能到石鼓文字也。
           
             八舉曰:小篆,一也,而各有筆法。李斯,方圓廓落;李陽冰,圓活姿媚;徐鉉,如隸無垂腳,字下如釵,股稍大;鍇如其兄,但字下如玉箸微小耳;崔子玉多用隸法,似乎不精,然甚有漢意。李陽冰篆,多非古法,效子五也,當知之。
           
             九舉曰:寫成篇章文字,只用小篆。二徐、二李,隨人所便。切不可寫詞曲。
           
             十舉曰:小篆,俗皆喜長。然不可太長,長無法,但以方楷一字半為度。一字為正體,半字為垂腳,豈不美哉!腳不過三,有無可奈何者,當以正腳為主,餘略收短,如幡腳可也。有下無腳字,如 shengyuezhi.gif等字,卻以上枝為出。如草木之為物,正生則上出枝,倒懸則下出枝耳。
           
             十一舉曰:凡寫碑匾,字畫宜肥,體宜方圓。碑額同此,但以小篆為正,不可用雜體。
           
             十二舉曰:以鼎篆、古文錯雜為用時,無跡為上。但皆以小篆法寫自然一法,此雖易求,卻甚難記。不熟其法,未免如“百家衣”,為識者笑。此為逸法正用,廢此可也。
           
             十三舉曰:凡□圈中字,不可填滿。但如鬥井中著一字,任其下空,可放垂筆,方不覺大。圈比諸字亦須略收。口不可圓,亦不可方,只以炭墼(音擊)範子為度自好。若“日”、“目”等字,須更放小。若印文中,扁口井,口字及子字上口,卻須略寬,使口半見,空稍多,字始渾厚。漢印皆如此。
           
             十四舉曰:寫篆把筆,只須單鉤卻伸,中指在下夾襯,方圓乎直,無有不可意矣。人多不得師傳,只如常把筆,所以字多欹斜,畫亦不能直,且字勢不活也。若初學時,當虛手心,伸中指並二指於幾上空畫,如此不拗,方可操筆。此說最要緊,學者審之,其益甚矣。
           
             十五舉曰:凡篆大字,當虛腕懸筆,手腕著紙,便字不活相。多有人不能用筆,用棕櫚條及紙個等物,皆俗夫所為,士大夫不可用此。
           
             十六舉曰:漢篆多變古法。許氏作《說文》,救其失也。
           
             十七舉曰:隸書,人謂宜扁,殊不知妙在不扁。挑拔平硬,如折刀頭,方是漢隸。《書體括》雲:“方勁古拙,斬釘截鐵。”備矣。隸法頗深,具其大略。
           
             十八舉曰:漢有摹印篆,其法只是方正,篆法與隸相通。後人不識古印,妄意盤屈,且以為法,大可笑也。多見故家藏漢印,字皆方正,近乎隸書,此即摹印篆也。王球《嘯堂集古錄》所載古印,正與相合。凡屈曲盤回,唐篆始如此。今碑刻有顏魯公官誥,尚書省印,可考其說。
           
             十九舉曰:漢魏印章,皆用白文,大不過寸許。朝爵印文皆鑄,蓋擇日封拜,可緩者也。軍中印文多鑿,蓋急於行令,不可緩者也。古無押字,以印章為官職信令,故如此耳。自唐用朱文,古法漸廢。至宋南渡,絕無知者,故後宋印文皆大謬。
           
             二十舉曰;白文印,皆用漢篆。平方正直,字不可圓。縱有斜筆,亦當取巧寫過。
           
             二十一舉曰:三字印。右一邊一字,左一邊兩字者,以兩字處與為一字處相等。不可兩字中斷,又不可十分相接。
           
             二十二舉曰:四字印。若前二字交界略有空,後二字無空,須當空一畫地別之。字有有腳、無腳,故言及此。不然,一邊見分,一邊不分,非法度也。
           
             二十三舉曰:軒齋等印。古無此式,唯唐相李泌有“端居室”三字印,白文玉印。或可照例,終是白文,非古法,不若只從朱文。
           
             二十四舉曰:朱文印。用雜體篆,不可大怪。擇其近人情,免費詞說可也。
           
             二十五舉曰:白文印。用崔子玉寫《張平子碑》上字,及漢器上並碑蓋印章等字,最為第一。
           
             二十六舉曰:凡姓名表字,古有法式。不可隨俗用雜篆及朱文。
           
             二十七舉曰:白文印必逼於邊。不可有空,空便不古。
           
             二十八舉曰:朱文印,不可逼邊。須當以字中空白得中處為相去,庶免印出。與邊相倚,無意思耳。字宜細,四旁有出筆,皆滯邊,邊須細於字邊,若一體。印出時,四邊虛紙昂起,未免邊肥於字也。非見印多,不能曉此粘邊,朱文建業文房之法。
           
             二十九舉曰:多有人依款識字式作印,此大不可。蓋漢時印文不差如此,三代時卻又無印,學者慎此。《周禮》雖有璽節,及職金掌辨其微惡揭而璽之之說。注曰:“印,其實手執之 (音節)也。”正面刻字,如秦氏璽,而不可印,印則字皆反矣。古人以之表信,不問字反,淳樸如此。若戰國時蘇秦六印,制度未聞。《淮南子·人間訓》曰:“魯君召子貢授以大將軍印。”劉安寓言而失詞耳。
           
             三十舉曰:道號,唐人雖有,不曾有印,故不可以道號作印用也。三字屋匾,唐卻有法。
           
             三十一舉曰:凡印文中有一二字,忽有自然空缺,不可聯帶者,聽其自空。古印多如此。
           
             三十二舉曰:凡印,僕有古人印式二冊。一為官印,一為私印,具列所以,實為甚詳。不若《嘯堂集古錄》所載,只具音釋也。
           
             三十三舉曰:凡名印,不可妄寫。或姓名相合,或加印章等字,或兼用印章字。曰姓某印章,不若只用印字,最為正也。二名可回文寫,姓下著印字在右,二名在左是也。單名者,曰姓某之印,卻不可回文寫。若曰姓某私印,不可印文墨,只宜封書,亦不可回文寫。名印內不可著氏字,表德可加氏字,亦當詳審之。
           
             三十四舉曰:表字印,只用二字,此為正式。近人欲並加姓氏於其上,曰某氏某。若作姓某父,古雖有此稱,系他人美己,卻不可入印。人多好古,不論其原,不為俗亂可也。漢人三字印,非復姓及無印字者,皆非名姓。蓋字印,不當用印字以亂名耳。漢張長安字幼君,有印曰“張幼君”(右一宇左二字)。唐李溫字化光,有印曰“李化光”,亦三字表德印式(幼君,西漢王式弟子。化光,見柳文呂衡州也)。
           
             三十五舉曰:諸印文下,有空處懸之,最佳,不可妄意伸開。或加屈曲,務欲填滿。若寫得有道理,自然不覺空也。字多無空,不必問此。
           
             合用文籍品目

             △小篆品五則
           
             許氏《說文解字》十五卷(慎,字叔重,汝南石陵人,太尉祭酒)。
           
             徐鉉校正定本,有新增入字。始一終亥者系正本,分韻川本,乃後人所更,非古人之本意。
           
             《蒼頡》十五篇(頡,姓侯剛氏,黃帝史也。亦曰皇頡)。即是《說文目錄》五百四十字。許氏分為每部之首,人多不知,謂已久滅。此為字之本原,豈得不在。後人又並字目為十四卷,以十五卷著序表,人益不意其存矣。僕聞之師雲。
           
             徐鍇《說文解字系傳》四十卷(鍇,字楚金,廣陵人,集賢學士)。嘗與許氏本相參,首卷上部分六書甚詳,末卷辯陽冰差誤。
           
             張有《復古論》二卷(有,字謙仲,吳興人。湖州有板)。載古今異文字,不可以為字少。又《五聲韻譜》五卷,比常韻無差。
           
             鐘鼎品二則

             薛尚功《款識法帖》十卷(尚功,字用敏,錢塘人。僉事定江軍節度判官廳事)。碑在江州,蜀中亦有翻刻者,字加肥。
           
             薛尚功《重廣鐘鼎篆韻》七卷,江州公使庫板。一卷象形奇字,一卷器用名目,五卷韻。
           
             古文品一則

             夏竦《古文四聲韻》五卷(竦,字子喬,江州德安人,樞密使)。前有序並全銜者好。別有僧翻本,不可用。此書板多而好看,極不易得。韻內所載字,多雲某人字集,初無出處,不可據信;且又不與三代款識相合,不若勿用。然古文別無文字,故前列之。
           
             碑刻品九則

             李斯《嶧山碑》(鄭氏曰:“此頌德碑也。”斯,字通古,上蔡人,秦丞相)。直長者為真本,橫刊者皆摹本。有徐氏門人鄭文寶,依真本式長刊者,法度全備,可近於真。但攸字立人相近,一直筆作兩股。近李處巽於建康新刻,甚謬。
           
             李斯《泰山碑》。《鹹陽志》曰:“《泰山碑》,秦相李斯書,跡妙時古,為世所重。”鄭文寶模刊石於長安故都國子學,今在文廟。石皆剝落,唯二世詔,一面稍見。
           
             李斯《秦望山碑》在會稽,今無。
           
             李陽冰《新泉銘》(陽冰,趙郡人,將作少監)。乃陽冰最佳者,人多以舒原輿之言稱《新驛記》。殊不知,此碑勝百倍也。陽冰名潮,杜甫甥也。後以字行,因以為名,而別字少溫。《木玄虛海賦》有雲:“其下陽冰不治,陰火潛然。”則知與潮,又且有理。人多不知,因詳其說。又有李騰,善偽作陽冰書。
           
             《碧落碑》在絳州。字雖多,有不合法度處。然布置美茂,自有神氣,當以唐碑觀之。世傳陽冰臥看三日,毀其佳者數字。又言道士寫畢,化鳥飛去,後及字欠一筆。尤為可笑,不知古文正當如此耳(一雲:唐韓元嘉子李訓等,為妣房氏立)。
           
             《詛楚文》(俗呼《詛楚文》,李斯篆,在鳳翔府)。有巫鹹、大沈文(音故)、湫氵亞(音誇)駝三種,辭則一。乃後人假作先秦之文,以先秦古器,比較其篆,全不相類,其偽明矣。篆文“皇”,本從“自”,世傳始皇謂與皋臭相似,因去一畫。不足為病,在前亦有如此者。《嶧山》數、成等字,皆與古異,此碑用之,及用《秦權殹》字作也。蓋知見《嶧山》、《秦權》而後創造者,未必不欲人曰嶧山用此法。誠古也,其如辨者何?
           
             史籀《石鼓文》(鄭氏曰:在鳳翔府。宣和間,移置東宮。周宣王太史,或雲柱下史)。
           
             薛尚功法帖所載,字完於真本多,故不更具。真本在燕都舊城文廟。
           
             崔璦《張平子碑》(瑗,字子玉,安平人,濟北相。碑在鄭州,前後兩段)。字多用隸法,不合《說文》卻可入印,篆全是漢。
           
             《古印式》二冊(即漢官威儀)。無印,本僕自整合者。後人若不得見,只於《嘯堂集古錄》十數枚,亦可為法。
           
             附用器品九則

             王楚《鐘鼎篆韻》七卷(楚,字□□□□人。管衡州露仙觀)。衡州本字少所出,在薛氏前。
           
             《無銜鐘鼎篆》兩冊。即薛書本,後重廣作七卷。恐人無別,故去其銜,亦間有帶銜者在。
           
             《石鼓音》後附《詛楚文》者,又載周穆王吉日癸巳之說。石鼓,鄭樵音不可信。
           
             呂大臨《考古圖》十卷(大臨,字與叔,永興人)。有黑白兩樣。黑字者,後為有韻圖,中欠璊玉彘。白字者,博山爐上,誤畫作人手。
           
             王球《嘯堂集古錄》二卷(球,字夔玉)。正文共一百紙,序跋在外,其間有古文印數十。有一曰“夏禹”,系漢巫厭水災法印。世俗傳,有渡水佩禹字法,此印乃漢篆,所以知之。又一印曰“孔夫”,首誤是孫茲二字。又有《滕公墓銘》,“鬱鬱”作兩字書,且妄為剝落狀。然考之古法,疊字只作二小畫附其下。秦時大夫,猶只以夫字加二小畫,況此疊文者乎?偽無疑矣。
           
             高衍孫《五書韻總》五卷(衍孫,字續古,四明人)。此書篆、隸、真、行、草一字五體,別體皆作小字,隨體分注,可備初學者用。間有差處,宜自斟酌。
           
             徐鉉篆(鉉,廣陵人,左散騎常侍)。二徐字跡最多,以其近世,故不條具。鉉,字鼎臣;鍇,字楚金。筆法(見前)。
           
             林罕《字源偏傍小說》三卷(罕字希古,安喜人,國子博士)。此書,言篆與隸相通源流,亦自可採。但有數說與《說文》悖,卻系陽冰變法,知之足矣。如“是”字上從 yue.gif,巴上從已,加點之類。
           
             葛刪《正續千字文》。雖是近人,然字法極好。《千文》有兩,續本不可無之。別有陳道士冒名擬本,不見好處。間有碑刻,惜其不多。
           
             辯謬品六則

             延陵季子《十字碑》在鎮江,人謂孔子書。文曰:“嗚呼!有吳延陵君子之墓。”按古法帖上止雲:“嗚呼!有吳君子”而已。篆法敦古,似乎可信。今此碑,妄增“延陵之墓”四字。除“之”外三字,是漢人方篆,不與前六字合。借夫子以欺後人,罪莫大於此。又且因“君”字作“季”字。漢器,“蜀郡”洗字半邊,正與此“君”字同,用此法也。以“季”字音,顯見其謬。比干墓前有漢人篆碑,亦有此說,蓋洪氏《隸釋》、《漢隸字源》辨之甚明,此不復具。
           
             《三墳書》,此偽本,大不可信。言詞俗謬,字法非古。《尚書》無“也”字,此書有之。“ bi.gif”字從八從戈,此從心加一筆。“走”字合從 dao.gif(音悼),此隨俗作之字引腳。其餘頗多。
           
             《古文尚書》,系後人不知篆者,以夏竦韻整合。亦有不合古處。若言今古篇次,文法同異,姑存之;言字畫則去之。
           
             《古文孝經》,內一篇大謬,今文無之。後人妄欲作古,以古文字整合者。觀者當取其字。
           
             《泉志》,聞有泉文近於道者,可以廣見。又有妄作“三皇幣”及禹時“幣”,不可為信。“卍”,此字人謂萬字,乃出古錢,不見此書,終不知也。故引入以待好事者。
           
             戴侗《六書故》。侗以鐘鼎文編此書,不知者多以為好,以其字字皆有,不若《說文》與今不同者多也。形古字今,雜亂無法,鐘鼎偏傍,不能全有,卻只以小篆足之。或一字兩法,人多不知此 huan.jpg(本音睘)加不過為“寰”字,乃音作官府之官。“ cun.gif”字從屯從邑,乃書邨不從寸木,今乃書此為村。引杜詩“無村眺望賒”為證,甚誤學者。許字解字引經,漢時猶篆隸,乃得其宜。今侗亦引經而不能精究經典古字,及以近世差誤等字,引作證據。鎊、鐘、銐、鋸、尿、屎等字,世俗作鐘。鐘鼎文,各有詳注。“卵”字解尤為不到,此書為一厄矣。學者先觀古人字書,方知吾言之當。
           
             隸書品七則

             諸漢碑,洪氏《隸釋》備具其說,更不再言。
           
             婁機《漢隸字源》六卷(機,字彥發,嘉興人。參知政事)。字法最好,洪氏本有碑目在前。
           
             劉球《碑本隸韻》十卷。外一卷紀源。
           
             《隸韻》兩冊。麻沙本與《隸韻》為一副刊,字體不好,以其冊數少,乃可常用之,故目此。
           
             洪適《隸釋》二十七卷,並《隸釋續》二十一卷(適,字景伯,鄱陽人。左僕射)。皆漢碑釋文《隸釋續》畫諸碑形及墓壁畫像。其碑多圭首,或笏首,上有垂虹。或題處偏僻,畫則如影像狀,渾黑。
           
             洪適《隸篆》十卷。以漢碑模臨傍偏奇古者(上石)。
           
             《石經遺字碑》。會稽蓬萊閣翻本,破缺磨滅,不異真古碑。今無矣。
           
             《佐書韻編》,姑蘇顏氏本。字比諸隸的為最多,寫得卻不好。
           
             以上書,計三十九種,美惡兼舉,學者皆當知之。此等事業,以博為貴。數外更有文字,不欲太繁。始言其不可無者,僕亦自有《續古篆韻》五卷,《疑字》一卷附後。未暇刊板,且令學者傳寫。又有《說文續釋》方更刪定,同志能為刻之,流傳將來,亦盛德事。
           
             字源七辯字

             一曰科鬥書。科鬥書者,蒼頡觀三才之文,及意度為之,乃字之祖。即今之偏傍是也。畫文像蝦蟆子形,如水蟲,故曰科鬥。
           
             二曰籀文。籀文者,史籀取蒼頡形意,配合為之,損益古文,或同或異,加之銛利鉤殺,大篆是也。史籀所作,故曰籀文。
           
             三曰小篆。小篆者,李斯省籀文之法,同天下書者。比籀文體十存其八,故小篆謂之“八分小篆”也。既有小篆,故謂籀文為大篆文雲。
           
             四曰秦隸。秦隸者,程邈以文牘繁多,難於用篆,因減小篆為便用之法,故不為體勢。若漢款識篆字相近,非有此法之隸也。便於佐隸,故曰隸書。即是秦權、秦量上刻字,人多不知,亦謂之篆,誤矣。或謂秦未有隸,且疑程邈之說,故詳及之。
           
             五曰八分。八分者,漢隸之未有挑法者也,比秦隸則易識,比漢隸則微似篆,若用篆筆作漢隸字即得之矣。八分與隸,人多不分,故言其法。
           
             六曰漢隸。漢隸者,蔡邕《石經》及漢人諸碑上字是也。此體最為後出,皆有挑法,與秦隸同名其實異。寫法,載前卷十七舉下,此不再敷。
           
             七曰款識。款識文者,諸侯本國之文也。古者,諸侯書不同文,故形體各異,秦有小篆始一其法。近世學者取款識字為用,一紙之上齊楚不分,人亦莫曉其謬。今分作外法,故末置之,不欲亂其源流,使可考其先後耳。
           
             ◎附錄

             ○洗印法
           
             圖書久為油朱所熾者,先於燈盞內浸一宿,次日取出,蘸香爐內灰,用硬棕刷乾洗之;若朱未盡,更蘸刷,以盡為度,不損印文,而清麗若新。凡欲洗刷,先當用繩約定,以防其滑,此法最良。
           
             印油法

             香油浸皂角於瓷器內,煎過放冷,和熟艾成劑;次加銀朱,以紅為度,入絹袋中,用瓷、玉器盛之,數日一翻,忌銅、錫器。若日久油乾,復用煎下油滴取盛器內,以印色置其上,使自沁,又不可自上澆下。此法不蒸不煉,久而益佳,與好事者共之。
           
             世存古今圖印譜式

             《宣和印譜》四卷。
           
             晁克一《圖書譜》一卷(又名《集古印格》)。
           
             王厚之《復齋印譜》。
           
             顏叔夏《古印譜》二卷。
           
             姜夔《集古印譜》二卷。
           
             吾衍《古人印式》二卷。
           
             趙孟頫《印史》二卷。
           
             取字法

             硇砂,瓦粉,白龍骨,木賊草,蜜陀僧,白石脂,桑柴灰(各等分),人言(少許)。
           
             右為細末,先濕字,後滲藥末,以熨鬥熨之,乾,隨落。
           
             摹印四妙

             李陽冰曰:“摹印之法有四:功侔造化,置受鬼神,謂之神;筆畫之外,得微妙法,謂之奇;藝精於一,規矩方圓,謂之工;繁簡相參,布置不紊,謂之巧。”


          45:項穆《書法雅言》 ▲Top

            書統

            河馬負圖,洛龜呈書,此天地開文字也。羲畫八卦,文列六爻,此聖王啟文字也。若乃龍鳳龜麟之名,穗雲科鬥之號,篆籀嗣作,古隸爰興,時易代新,不可殫述。信後傳今,篆隸焉爾。曆周及秦,自漢逮晉,真行迭起,章草浸孳,文字菁華,敷宣盡矣。然書之作也,帝王之經綸,聖賢之學術,至於玄文內典,百氏九流,詩歌之勸懲,碑銘之訓戒,不由斯字,何以紀辭。故書之為功,同流天地,翼衛教經者也。夫投壺射矢,猶標觀德之名;作聖述明,本列入仙之品。宰我稱仲尼賢於堯、舜,餘則謂逸少兼乎鐘、張,大統斯垂,萬世不易。第唐賢求之筋力軌度,其過也,嚴而謹矣;宋賢求之意氣精神,其過也,縱而肆矣;元賢求性情體態,其過也,溫而柔矣。其間豪傑奮起,不無超越尋常,概觀習俗風聲,大都互有優劣。明初肇運,尚襲元規,豐、祝、文、姚,竊追唐躅,大都畏難。夫堯、舜人皆可為,翰墨何畏於彼?逸少我師也,所願學是焉。奈自祝、文絕世以後,南北王、馬亂真,邇年以來,競仿蘇、米。王、馬疏淺俗怪,易知其非;蘇、米激厲矜誇,罕悟其失。斯風一倡,靡不可追,攻乎異瑞,害則滋甚。況學術經綸,皆由心起,其心不正,所動悉邪。宣聖作《春秋》,子輿距楊、墨,懼道將日哀也,其言豈得已哉。柳公權曰:心正則筆正。餘則曰:人正則書正。取舍諸篇,不無商、韓之刻;心相等論,實同孔、孟之思。六經非心學乎?傳經非六書乎?正書法,所以正人心也;正人心,所以閒聖道也。子輿距楊、墨於昔,予則放蘇、米于今。垂之千秋,識者復起,必有知正書之功,不愧為聖人之徒矣。

            古今

            ……

          [評點]項穆,明代萬曆年間書法家。元汴子,字德純,號貞元,亦號無稱子。秀水(今浙江嘉興)人。官中書。工書法,於晉唐名家,罔不該會,而心摹手追者逸少,稍稍降格,亦不減歐陽詢,與世父元淇齊名,有《雙美帖》行世。所著有《書法雅言》、《元貞子詩草》。

            《書法雅言》一卷,有沈思孝序。穆父元汴鑑藏書畫,甲於一時。穆承其家學,耳濡目染,故於書法特工,因抒其心得,撰為是書,凡十七篇,曰:書統、古今、辨體、形質、品格、資學、規矩、常變、正奇、中和、老少、神化、心相、取舍、功序、器用、知識。大旨以晉人為宗,而排蘇軾、米芾書,雖持論稍為過高,而終身一藝,研求至深,綜觀全編,論旨一貫,條理井然,獨抒心得,無剽襲苟且之弊,行文大體擬孫過庭《書譜》,氣息亦頗純厚,在明季著書中,實為僅見。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메모 :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출처 : 이보세상
          글쓴이 : 이보 원글보기
          메모 :

          갑골문
          기원전 14세기(지금으로부터 약3500년)전에서 기원전 11세기 상대 후기에 통용되던 글자체이다. 복사, 은허문자, 계문, 은계, 서계라고도 한다. 19세기 말 하남성 안양 소둔촌의 농지에서 출토되었다. 왕의영, 맹정생, 왕양, 유악, 나진옥 등의 학자들을 통해 연구되었다. 현재까지 출토된 갑골문은 약 15만 편인데 그 중 단자의 수는 5000자 정도이나 해석된 것은 1500자 정도이다. 내용은 복사와 비복사로 분류하며 특색은 그림의 요소가 강하며 필획이 가늘고 강하고 한자가 아직 정형화되지 않았으며 자형의 크기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대부분 한글자가 하나의 칸을 차지하지만 합문현상도 적지 않다. 어떤 글자는 자형에 표음성분이 출현한다(예;娶,酒,牧 등)

          금문
          종정문이라고도 하며 상주시대 청동기에 새겨진 한자로 특히 주대(서주)에 통용되었던 표준 자체이다. 왜 금문이라 하면 고대인들은 동(銅)을 금(金)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주조방법의 차이에 따라 글자가 오목하게 들어간 것은 음문, 볼록하게 나온 것은 양문이라 한다.또한 관과 지라고도 하여 종정문을 종정관지라고 한다. 즉 종정은 청동의 재료이고 관지는 주조방법이다. 갑골문을 기초로 발전되어 초기 금문은 갑골문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며 오히려 더 상형적이고 더 보수적이다. 후기의 금문이 상형성이 점점 감소하여 선화, 부호화되는 경향이 있으며 필획이 갑골문보다 둥글고 살지며 자형또한 크다. 또한 자형의 정도가 상당히 정형화되었으며 전체 자형은 상하로 긴 특징을 가지며 자형의 크기도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현존하는 최장의 명문은 모공정이다.

          대전
          금문의 기초 위에서 변화된 자체로 필획이 균형이 잡혔고 선화와 부호화의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체 자형이 상하로 긴 직사각형(장방형)이며 크기 또한 균일하다. 자형 구조가 금문보다 더욱 합리적이다.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에서 통용되었으며 소전과 상대되는 명칭이며 주문(籒文;중국 最古의 字書인 사주편에서 통용된 자체)이라고도 한다. 대전의 원모를 살펴볼 수 있는 현재 유일한 자료는 기원전8세기 진나라의 석고문(石鼓文)이다. 현재 고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육국문자
          한무제 말년 노의 공왕이 공자의 고택벽에서 발견한 고서에 사용된 문자이다. 이 책들은 전국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며 문자는 전국시대 제노齊魯지역에서 사용된 문자였다. 다시말해 지리와 정치적 이유로 당시 관동6국(제,초,연,한,위,조)에서 사용한 문자는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문자와 달랐다. 현존하는 육국고문의 자료는 설문해자(500여자)와 삼체석경의 잔석과 전국시대에 사용되던 병기,도기,전폐(화폐),새인(도장),증백(비단),죽간이며 그 중 수량이 많은 죽간이 가장 중요하다. 육국고문의 가장 큰 특징은 간체자가 유행하며 후세에 일부가 채용되기도 하였다.필법이 육국마다 다르며 어떤 것은 차이가 매우 컸다. 또한 조충서라고 하여 새와 벌레로 글씨를 쓰는 예술자체가 유행하였다.

          소전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후 ‘서동문자’라는 정책을 시행해서 소전을 표준자체로 하는 법령을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한자규범화작업을 실시하였다. 소전은 대전과 대비되는 명칭으로 진대에 통용되었으며 진전이라고도 한다. 소전은 여전히 상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전으로부터 갑골문, 금문을 인식할 수 있다. 현존하는 소전의 자료로는 진시황이 각지를 순시할 때 세운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역산각석 등의 비석이 있으며 진나라의 법정 문자 교본으로 창힐편, 원력편, 박학편(;;세편을 합해서 삼창이라고 함)등이 있다. 또한 설문해자의 표제자 9353개가 있다. 비석이 소전의 중요한 자료이다. 소전은 진대와 서한 초기에만 사용되었고 서한 중기에는 예서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역대의 인장에도 소전을 사용하였으며 전은 인장의 또다른 호칭으로 사용되며 이외에 소전은 서예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소전의 특징은 필획이 선화되었고 굵기가 같으며 둥글고 긴 선을 사용하며 밀도도 균형적이다. 상형정도가 감소하였고 한자체계의 부호성이 강화되었다(-한자발전과정중 나타나는 주요 경향). 대다수 한자의 자형이 통일되어 하나의 한자는 하나의 자형만을 갖으며 크기가 완전히 일치하며 상하로 긴 직사각형으로 사각형인 한자의 특징이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 이전의 자체보다 간화되었다.

          예서
          소전이 간화된 형태로 전국시대 후기에서 진대에 걸쳐 형성되어 한대에 통용된 자체이다.진예와 한예로 구분할 수 있으며 진예는 초기의 예서로 고예라고도 하며 진대의 도량형등에 남아있다. 한예는 가로로 긴 편방형이며 필획에 파세와 도법이 있고 금예라고도 한다. 파세란 가로획, 왼쪽삐침, 오른쪽삐침에 파도와 같은 기복이 있다는 것이고 도법이란 왼쪽, 오른쪽삐침의 마지막 부분에서 위로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서예에서의 예서는 주로 한예를 가리킨다. 이는 동한 시기 비각(예기비,조전비,서협송,사진비,장천비,희평석경 등)에 많이 남아 있다.
          예변
          소전에서 예서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변화를 말한다. 한예의 형성 원인이며 한자의 상형성이 소멸되고 부호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한자 구조 또한 간화되어 서사속도가 향상됨으로써 한자가 보다 완벽하게 언어를 기록하고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해주었다. 예변은 한자 성질의 변화를 촉진시켜 표의문자에서 의음문자(표의 겸 표음문자)로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세가지 예변이 있다. 먼저, 형변은 소전의 둥글고 긴 필획이 각이 진 직선의 필획으로 변화한 것으로 고예정, 예정이라고도 한다. 이는 소전의 상하로 긴 자형(장방형)이 예서에서는 좌우로 긴 자형(편방형)으로 바뀌는 변화를 가져왔다. 생변이란 필획이 생략되고 합병된 것을 의미하며 와변은 구조를 잘못 파악하여 편방을 잘못 변화시킨 것이다.즉 소전의 동일한 형체를 예서의 여러 형태로 분화시키거나 소전의 여러 가지 형체를 혼동하여 예서의 한가지 형체로 변화시킨 것을 의미한다.

          해서
          진서眞書,정서正書라고도 한다. 해楷는 모범,표준의 의미로 해서라고 하는 이유는 위진 이후부터 현재까지 약1700여 년 동안 통용되는 표준자체이므로 해서라고 하는 것이다. 예서를 기초로 변화발전된 것으로 기본 필획과 구조는 예서와 같으며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해서의 자료는 매우 풍부하다. 해서는 파세와 도법이 없고 마지막에 잠시 멈추었다가 붓을 돌려 마무리한다. 자형은 정방형이며 간결하고 명확하다. 또한 글자마다 개성이 두드러져 어떤 것은 최우로 넓적하고, 어떤 것은 상하로 길며, 어떤 것은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형태를 나타낸다. 예서는 밖으로 분산되며 해서는 안쪽으로 수축되고 집중된다.

          초서
          예서,해서와 동시에 통용된 보조 자체로 초草는 거칠다는 뜻이다. 초서는 필법이 간략하고 자유로운 것, 즉 초솔草率한 것에서 명칭을 얻게 되었다. 초서는 광의와 협의의 초서로 나눌 수 있는데, 광의의 초서란 어떤 자체든지 거칠게 흘려 쓴 것은 모두 초서로 보는 것이고, 협의의 초서는 특정한 자체, 즉 한대에 형성되어 예서와 해서의 보조자체가 된 자체만을 가리킨다. 초서는 다시 장초, 금초, 광초로 나누어진다. 장초는 거칠게 쓴 예서에서 발전되었고 동한의 장제가 제창했다고 전해지며 특징은 필획의 연결이 자유롭고 자형의 크기가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글자마다 분리되어 있으며 한 글자는 하나의 초서 필법을 가지며 마무리할 때 파세가 있어 한예의 구조와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여전히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동한 말기부터 진(삼국시대)대까지가 장초의 흥성시기이며 원 명대에도 장초의 중흥시기가 있었다. 금초는 장초에서 발전한 초서로 진대 왕희지, 왕헌지 부자를 통해 널리 유행되었고 글자들끼리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자형의 크기나 모양이 자유롭고 융통성 있으며 동일한 글자라도 여러 가지 필법이 존재하는 것이 특징이다. 필획과 필법이 극도로 간화되어 서사속도는 매우 빠르지만 알아보기가 쉽지 않아서 소수의 문인이나 학자들 사이의 교류도구로 사용되다가 점차 예술품으로 변화되었다. 광초는 대초라고도 하며 금초를 기초로 발달한 극단적인 초서이다. 광초는 마음대로 자형을 고치고 필획을 증감하고 필획의 꺽음과 연결도 아무런 규칙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필휘지一筆揮之,용사비무龍蛇飛舞,일필서一筆書 등으로 표현되며 의사소통의 가치는 거의 없고 예술적 가치만 존재한다.

          행서
          해서와 금초의 중간적 자체로서 현재의 행서는 금초를 기초로 발전했다. 쓰기 힘들고 속도가 느린 해서의 단점과 알아보기 힘든 초서의 단점을 보완했다. 해서에 가깝게 쓰인 것을 행해라고 하고 초서에 가깝게 쓰인 것을 행초라고 한다. 행서의 자료는 매우 많으며 그 중 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모범으로 공인된 행서작품은 왕희지가 쓴 난정서이다. 행서의 특징은 자유롭고 빠르게 쓸 수 있어 해서의 초서화라고, 해서와 비슷하며 규정에 맞게 쓰기 때문에 글자가 독립적이고 구별하기 쉽다는 점에서 초서의 해서화라고 한다. 행서의 가치는 실용적 가치가 매우 높아서 해서의 주요 보조 자체가 되었으며 사용범위가 가장 넓었으며 일반인들은 서신, 기록, 자료의 필사, 문장의 초고 등에 대부분 행서를 사용하였다. 또한 서예에서도 아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출처 : 관묵헌(觀墨軒)
          글쓴이 : 석주 원글보기
          메모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