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월호 원고 묵향인 / 장석 서명택
예술의 혼, 붓으로 말하다
서예는 단순히 글씨의 형태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에 그치지 않는다. 한 자의 글씨를 쓰기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버리고 비워내 오롯이 붓 끝에 집중해야 한다. 따라서 서예는 정신문화예술이다. 또한 선인의 글자를 무작정 따라 쓰는 것을 넘어 옛 성인의 정신과 고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글자는 예술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서예는 지금까지 동양에서 전수되어지는 예술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장석 서명택 선생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자면 서예는 논리적 사유와 감성적 요소가 결합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토로하는 행위예술이다.
오늘은 서예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널리 떨치고자 매 순간을 묵묵히 자기와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장석 서명택 선생과 이 시간 함께해본다.
의정부에 있는 선생의 집무실은 정갈하면서도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책상에서는 20여년이 넘는 오랜 시간과 고된 수련의 흔적이 보이나 그 위는 항상 말끔하다. 한쪽에 가지런히 놓은 새하얀 화선지와 잘 정돈 된 벼루, 붓 역시 그러하다. 비어있는 집무실의 모습만 보아도 붓을 잡기에 앞서 주변을 정돈하고 마음을 비워 붓 끝에 온 신경을 모으려는 선생과 그 가르침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서예에 대한 마음가짐이 전해지는 듯하다.
본래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예를 통해 그 급함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는 그는 붓을 잡기에 앞서 책상 위를 한 번 더 손질하는데, 그 손끝이 붓을 잡는 것만큼 매우 신중해 보여 정말 급한 성격을 지닌 과거의 모습이 있었을까 잠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영월에서 태어나고 자라 중학교 대신 서당에서 3년을 수학하였다. 한학에 밝으셨던 안의동 선생님 밑에서 3년간 혹독한 시간을 겪었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한시와 사서삼경을 익혔으며 덕분에 한글보다 한문을 더 빨리 읽고 한시도 직접 지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의정부에 자리를 잡고, 야간학교를 전전하다 마하 선주선 선생님 사사로 서예에 입문하게 된 그는 26년이 훌쩍 넘는 시간동안 와석서예서당을 운영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이 일에 매진해왔다.
유년시절 서당에서 수학한 것이 영향을 크게 받아서인지 지금까지 해온 작품 활동을 보면 한문자작시(한시/자음시)를 발표한 경우가 많다. 옛 성인들의 말씀이나 작품의 일부를 필사하기도 하나 서당에서 한시를 접하고 15년 이상을 한시 공부에 매진하다보니 보다 창의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이 직접 한문자작시를 짓는 것이었다. 한문과 한시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밑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서체에 대한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서를 주로 많이 쓰고 있으나 한문 오체, 한글 오체까지 두루 섭렵하였고 이론 실력까지 겸비한 노력하는 실력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에는 끝이 없다며 늘 정진해야함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니 작가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선생은 이 시대의 서예가들이 지녀야 할 선비정신에 대해 언급했다.
“옛 선비들은 詩․書․畵 에 능했지요. 지금의 서예가들 역시 먼저 시문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문이나 한시를 하고 난 후 서예를 익히고 그 마지막 단계에 그림을 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옛말에도 전해지듯이 詩․書․畵 三絶이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러한 실력을 갖춘 서예가가 왕유, 추사와 같은 사람이지요. 이러한 실력을 가지고 서예에 매진한 이가 있었기 때문에 서예가 예술로서 자리매김하고 전수되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요. 이는 앞으로 서예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경우를 보면 이러한 순서를 익히는 것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한문은 곧 기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시문(한문)이 일천하면서 쓰기에 급급하니 그 병폐가 말로 할 수 없지요. 자기가 쓰고 있는 것을 모르고 다른 이가 쓴 것을 읽지 못한다면 문화의 향유와 예술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따라서 저는 서예에 임하기에 앞서 한문을 익히길 강조하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듯 한문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의 말처럼 한문을 익히지 않고 서예의 발전을 논하기란 설계도 없이 완성도 높은 집을 짓겠다고 큰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한국서예교육의 문제점과 한문교육 활성화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이것이 곧 서예의 발전을 이끌어 갈 초석이 될 것이라고 그의 논문에서도 밝히고 있다. 2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의정부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그의 글에서는 한국서예의 문제점으로 서예 이론 교육의 부실, 한문교육의 부재, 서예문화의 왜곡을 꼽았으며 한국 서예 활성화 방안으로 한문교육 활성화와 공모전 문화 재정립을 주장하고 있다.
여러 시대를 거쳐 문화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서예가 그 자리를 잃고 한문교육마저 외면되고 있는 현실은 결코 시대적 변화에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선생님의 자질에 따라 편향된 시각으로 익힐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 도제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현재 전통문화에 대한 소양이나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정보화라는 시대적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서예지도자들에 대한 문제까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이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공교육에서도 한문교육이 그 실효성을 잃고 외면 받고 있다. 불교/유교 문화권이었던 우리나라의 과거사를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한문이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한문의 활성화는 난항을 겪고 있으며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 심해지는 악순환이 연속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모전의 난립, 각종 부정부패 등으로 그 의도에 부합하는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졌으며 이것이 곧 공모전 발전 저해를 넘어서 서예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정은 무시되고 단순히 베껴 쓰는 기예로 멸시받는 현 상황, 작가 정신이 사라진 작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악조건을 떨쳐내고 서예를 올바른 문화의 일환으로 정립시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한문의 활성화가 성행되어야 한다. 이미 한문의 필요성이 다시 인식되고 있으니 이는 좋은 징조이다. 하나의 단적인 예로 현재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청소년 학교 폭력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러한 폭력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인성교육, 정서함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방편의 하나로 한문교육과 서예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 실천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명심보감부터 사서삼경 등 한문의 도덕적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익히고 서예를 통해 자신을 안정시켜 스스로 제어할 능력을 길러준다면 학교폭력을 근절시키는데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처럼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교육과정으로 편성되는 것이나 공모전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간의 진통이 예상된다. 또한 실제 서예학원 대다수가 그 명맥을 이어가지 못하고 폐업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기다리며 수행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선생은 서예의 미래가 밝다고 믿는다며 강하게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으니 도덕, 문화교육을 위해 한문이 교육과정에 필요하다는 것을 위정자들이 깊이 인식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현재 중국은 문화장려 사업을 펼치면서 서예 문화가 활성화되고 있고 정부차원 에서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예를 장려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예 시장의 전망도 밝습니다. 서화작품이 종이황금이라고 불릴 만큼 명성이 높아졌고 옛 작가의 작품은 물론 현직 작가의 작품도 고가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향이 머지 안아 우리나라로 미쳐 온다면 한국의 서예도 새로운 바람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특히 서예의 역사로 본다면 한국이 결코 동양의 어느 나라보다 뒤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한문쓰기가 습관화 되어 세필이 발달한 중국에 비해 한국은 공모전이 발달해 있어 큰 글씨에 강합니다. 그러니 초서를 제외하고 한문 오체 중 전서, 예서, 해서, 행서부분은 오히려 나은 부분이 있지요.”
한국의 서예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서명택 선생은 지금 어렵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힘들겠지만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문을 두루 섭렵하고 서법 수련과 이론에 더욱 정진하여 기반을 탄탄하게 만들고 훗날 서예가 부흥했을 때 서예가들이 제 실력을 갖춰 서예 발전에 앞장서야 함을 당부했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 문자의 역사가 존재하고 문자가 존재하는 한 문자의 예술은 결코 사라질 리 없다고 믿는 그는 이 문자가 예술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선 학문적 심화가 밑바탕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서예의 외적인 환경을 보면 여러 가지 긍정적인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더욱 노력하여 이 땅에 서예의 바른 문화를 재정립 시킬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선생은 오늘도 밤늦도록 법첩과 붓을 놓지 못한다.
또한 서예의 부흥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하나씩 실천하고자 온 힘을 기울인다. 그 중 하나로 주위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문, 한시 교육을 집중적으로 시켜 인성과 실력을 겸비한 서예가를 많이 배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가 가진 한국 서예에 대한 애정과 절실함이 많은 이들에게 닿아 그가 바라는 한국 서예의 부흥기가 하루 빨리 다가오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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