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代의 書藝家

 

  영순ㆍ김향선ㆍ허영조

 

Ⅰ. 들어가는 말

Ⅱ. 淸代 書藝家

Ⅲ. 마치는 말

Ⅳ. 부록 : 청나라 황제와 연호

 

 

Ⅰ. 들어가는 말

 

저서 『서법지식천제』 중에서 ‘청나라 서예가’ 부분을 한국서학연구소 금요반에서 공동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모두 서학 연구에 뜻을 두고 정진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미흡한 점이 많이 있을 줄 알고 있으나 오로지 서학 발전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고, 공동 작업을 통해 회원 유대감을 드높이며, 학습의 성취감을 얻고자 하는 취지에서 번역한 것을 발표하게 되었다.

지면상 모두 다 실을 수 없는 형편이므로, 나름대로 요약하고 간추렸다. 요약의 기준으로는, 관향과 자·호·벼슬·작품 등은 각 항목의 아래에 작고 간단하게 요약하여 달았으며, 각 서예가의 고유한 일화나 학서과정, 서예의 특징, 그리고 서예에 대한 견해와 논지 등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원저에 수록된 서예가는 모두 실었다.

청나라는 서예의 발전사에서 비교적 특수한 시기이다. 강희와 건륭황제 때에는 동기창과 조맹부의 서예를 추대하고 숭상해서, 결과적으로 서예는 가면 갈수록 더욱 세속적인 것이 되어갔다. 첩학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고, 당시 과거고시는 필수적으로 일종의 ‘館閣?’라고 부르는 글씨로 답안을 쓰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만약 ‘관각체’로 쓸 수 없으면 설령 문장이 아주 좋아도 답안작성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관각체’는 ‘烏, 먹색이 일률적으로 검은 것’?‘方, 結字가 가지런하고 章法의 배열이 주판알 같은 것’?‘光, 점과 획이 빛나고 매끄러워 운필을 일으키고 떨어뜨린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쓰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완전히 서예의 자연스러운 정취를 잃어버렸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완원 등 유명한 학자와 서예에 인식이 있는 선비들이 북위비의 글씨를 학습할 것을 제창함과 동시에 진ㆍ한 석각 서예를 추대하고 숭상하여 저 웅장하고 강하고 질박하고 무성한[雄强朴茂] 것으로 쇄미한 서풍을 만회해서 매우 높은 성취를 얻었다.

 

 

Ⅱ. 淸代 書藝家

 

1. 王鐸

명과 청나라 사이에, 북방의 서예에서 王鐸과 傅山이 가장 유명하다. 왕탁( 1592-1652)은 ‘神筆’이라고 불렸으며, 당시에 거의 단절된 학문인 六書古文字學과 鐘鼎款識, 그리고 진ㆍ한시대의 碑牌 및 불경의 문자를 자세히 연구했다. 그는 옛것을 배워야만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글씨를 배울 때 처음에는 법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고, 나중에는 법첩에서 나오는 것이 힘들다면서, 이러한 ‘入’?‘出’이 글씨를 배우는 관건이라고 했다. 그는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 등 모든 서체를 잘 썼다. 해서는 종요를 배웠고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띠어 험절하고 굳세면서 침착했다. 굳세나 사납지 않고 풍요로우나 살찌지 않았으며 매우 서권기가 있었다. 행서와 초서의 성취가 가장 높았고, 왕희지 부자와 미불을 법으로 삼았으며, 필력은 굳세고 여유가 있으며 능히 방종하면서 정돈되었다. 체세는 이어지면서 얽히고 들쑥날쑥 질탕하다. 포백은 마치 진눈깨비와 같고 호탕하며 시원스럽고 유창하며 표일하다.

* 孟津(지금의 河南省 孟津縣) 사람. 자는覺斯?覺之. 호는 石樵?十樵?嵩樵?痴庵?痴仙道人?雪山道人?煙潭漁?. 벼슬은 翰林院庶吉士?東閣大學士?禮部尙書. 시호는 文安. 작품은 <擬山園帖>?<琅華館帖>?<龜龍館帖>?<弘月館帖>.

 

2. 傅山

傅山은 (1605-1690, 一作1607-1684, 一作1609-1690)은 명말청초의 서예가로서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개탄하여 항청운동에 개입하여 체포당했고, 출감 후 청나라 조정에서 수차례 그를 회유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므로 그는 서예를 논함에 또한 특별히 사람의 절개와 품격을 중시했다. ‘글씨를 씀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作字先作人].’라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의 소리이다.

부산의 서예는 또한 그 사람됨과 같이 매우 개성이 있다. 전서ㆍ예서ㆍ해서ㆍ초서 각 서체에 능했으며 행초서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초서는 용필이 둥글고 굳세면서 유창하며, 필묵이 무르익고 뜻이 족하며, 웅장하고 표일하면서 기이하고 위대한 정취를 깊이 얻었다. 소해 또한 맑고 뛰어나며 예스럽고 그윽한 것이 위?진에서 나왔다. 부산의 서론은 더욱 독특한 면이 있는데, 바로 “차라리 졸할지언정 교묘하지 말고, 차라리 추할지언정 아리땁게 하지 말고, 차라리 지리할지언정 가볍고 매끄럽게 하지 말고, 차라리 진솔할지언정 안배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부산 자신의 서예작품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체현했다.

부산은 서예를 논함에 또한 ‘正入變出’을 강조했다. 이른바 ‘正入’은 고법을 따르는 것이고, 옛사람을 공부함에 견실한 기초가 이루어 졌을 때 비로소 ‘變出’을 할 수 있으니 이를 버리고 다른 첩경은 없다는 것이다.

* 산서성 陽曲 사람. 자는 靑主?公宅. 호는 朱衣道人?丹崖子?丹崖翁?眞山?濁翁?石道人. 작품은 『傅靑主詩畵題錄冊』?『霜紅龕集』 등에 있다.

 

3. 鄭?

鄭?(1622-1694)는 명나라 말 송각의 기이하고 특이한 서풍에 매료되어 그의 예서를 모방했다. 20년간 꾸준히 배웠으나 나중에는 결국 송각의 예서를 배우는 것이 근본을 버리고 말류를 따르는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추구하여 마땅히 漢碑로부터 들어가야 비로소 바른 길임을 알았다. 이에 그는 泰山?華山?曲阜 등에서 碑版을 수집했고, 산 속 바위에 남은 글자, 오래된 벽에 남아 있는 문자를 지나치지 않고 정성스레 탁본을 하여 4개의 궤짝이 가득 찼다. 그는 항상 한비를 임모했고, 30년이 지나자 <乙瑛>?<?閣>?<張遷>?<尹宙>?<衡方> 등 동한의 명비 모두를 거의 임모했다. 그 중 <曹全>ㆍ<史晨> 두 비의 공력이 가장 깊었다. 또한 朱?尊 등과 함께 필법을 토론하여 소박해야 저절로 예스러워지고 졸해야 스스로 기이해짐을 인식했으며, 한비로부터 융회관통해야 고졸하고 진기한 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보는 한비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운필방법을 창조했다. 그는 “글씨를 쓸 때 가장 조심할 것은 가볍고 쉽게 하는 것이다. 필관이 손에 이름은 마치 천균의 활을 당기듯 하는데,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면 힘은 곧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모할 때 형체에 주의했을 뿐 아니라 성정 또한 중시했다.

정보의 만년 서예 풍격에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는데, 예서에 초서의 필법을 섞어서 고졸한 가운데에 표일하고 춤추는 듯한 운치와 멋을 겸해 마침내 동 시대의 예서 명가를 초월하여 당대의 名手가 되었다. 예서의 점과 획은 변화가 많고 결체는 새롭고 기이하면서 과장됐으며, 용필은 방종하고 운치는 순박하고 예스러워 그는 朱彛尊에게 ‘古今第一’이란 칭찬을 받았다.

* 上元(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사람. 자는 汝器. 호는 谷口. 작품은 <?雅三章>?<唐詩七絶詩卷>?<王建春閨詞>?<(楊巨源?于駙馬詩>.

 

4. 馮班

馮班(1602-1671)은 시문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소해에 뛰어났다. 그는 서예이론에 대해 주도면밀한 견해가 있었다. 『鈍吟書要』에서 그는 글씨를 배움에 우선 짜임새와 결구를 배워야하고, 짜임새와 결구가 단정하고 가지런하면 다시 용필을 배워야 하며, 짜임새를 배움에는 비문과 석각을 임서해야 하고, 용필을 배움에는 반드시 이전 사람들의 묵적과 탁본을 봐야한다고 했다. “진나라 사람은 이치를 운용하고 당나라 사람은 법을 운용했으며 송나라 사람은 뜻을 운용했다[晉人用理, 唐人用法, 宋人用意].”라는 것은 그가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이다.

* 강소성 常熟사람. 자는 定遠. 호는 鈍吟.

 

5. ?重光

?重光(1623-1692년). 그의 저서인 「書筏」은 29조항으로 되어있고 그의 저작 중에서 출중한 작품이다. 王文治가 이 글의 제발에서 칭찬하기를 “이 책은 달중광 글에서 최고의 묘품이며 서예를 논함은 깊이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 곧바로 손과정과 앞뒤를 다툴만하니 「筆陣圖」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달중광은 글씨도 매우 잘 썼다. 필세가 방종하고 표일하며 장초와 행서를 최고로 삼는다. 그의 소해 역시 법도가 근엄하다. 또한 당나라의 법도로 위·진 체세를 써서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 강소성 丹徒 사람. 자는 在辛. 호는 君宜ㆍ?光ㆍ江上外史ㆍ鬱崗掃葉道人.

 

6. 歸莊

歸莊(1614-1674)은 명나라 말 곤산의 抗淸운동에 참가했었고 숨어 지내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귀장은 시와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해서?초서?전서?예서?행서 등 각종 서체를 잘 썼다. 그는 서예를 창작할 때 종종 먼저 술을 마시고나서 거나해지고 뜻이 만족해질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다. 심지어 그는 經生考試에 참가했을 때에도 주변에 마시고 난 빈 술병이 쌓였을 정도이다. 만약 그에게 글씨를 청하려고 하면 단지 술만 가져오면 승낙하지 않음이 없었다. 청나라 朱?尊은 『竹?詩話』에서 “귀장은 기이함을 좋아하여 세상에서 미치광이라 했으며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라고 했다.

* 昆山(江蘇省 昆山) 사람. 처음 이름은 祚明. 자는 爾禮?玄慕?元功?懸弓. 호는 恒軒?歸妹?歸藏?普明頭陀.

* 이른바 ‘歸奇顧怪’라는 것은 歸莊과 顧炎武의 세속과 상반된 말과 행동 그리고 문예창작을 가리킨다. 

 

7. 顧炎武

顧炎武(1613-1682)는 명나라 말 유명한 抗淸 지사로 귀장과 한 고향 사람으로 귀장과 막역한 사이였고, 성정이 강직하고 세속을 끊어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청나라 초의 유명한 경학대사였다.

* 원래 이름은 繹. 자는 寧人. 스스로 蔣山俑. 亭林鎭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亭林先生’이라 불렀다.

 

8. 沈?

沈?(1624-1684)은 청나라 초 강희황제가 매우 칭찬했던 서예가이다. 그가 詹事府詹事겸 翰林院侍讀學士로 있었을 때, 강희황제는 그를 어전으로 불러 고금의 서예를 담론했으며, 어제의 碑版과 궁전의 병풍?御座?箴銘 등은 대부분 심전에게 쓰도록 명했다.

한번은 그가 강희황제 앞에서 미불의 글자첩을 임서했는데, 황제는 그의 붓이 닳은 것을 보았다. 이에 황제는 필관에 봉황이 새겨진 좋은 붓 한 자루를 취해 입안에 넣고 붓털을 잘 빨아서 심전에게 건네주었다. 매번 심전은 강희가 글씨 쓰는 것을 받들어 모실 때마다, 항상 즉석에서 용필과 결체의 결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아울러 이러한 병폐가 생기는 원인을 분석했다. 그러므로 강희는 종종 그에게 진귀한 붓?먹?의복과 기물?식품 등을 하사했으니, 그에 대한 존중의 뜻을 가히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명나라의 沈度?沈粲과 더불어 三沈이다.”라고 했다.

* 강소성 華亭(지금의 上海市 華亭縣) 사람. 자는 貞?. 호는 繹堂?充齋. 시호는 文恪.

 

9. 倪燦

예찬(1625-1687)은 『明史』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서예와 시사는 당시 최고였다. 특히 그는 『倪氏雜記筆法』에서 글씨를 배우는 과정을 매우 투철하고 주도면밀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서예를 배우는 사람은 3단계로 나누어 연습할 수 있다. 제1단계는 한 가지에 전념하는 것이고, 제2단계는 넓게 공부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변화하여 창신하는 것이다. 단계마다 모두 3-5년의 공부를 필요로 하며, 비로소 공력이 충분해지면 노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름 있는 서예가의 서체를 깊이 파고 들어가 기초를 확실히 하면서 날마다 임서하여 점점 그 안에 들어가면 바로 형태와 정신을 겸비하게 된다. 제1단계의 마지막에 때때로 가장 큰 곤란함을 만나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른 것과 같음을 느끼게 된다. 이때 최대의 항심과 의지력을 견지하며 노력해야 비로소 통과할 수 있다. 제2단계에서는 역대의 법서 정수를 두루 임서함에 혹은 형태와 정신에 법을 겸하고 혹은 정신을 취하여 모양을 남기지만, 때때로 뒤돌아서 배운 것의 닮음과 닮지 않음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 변화하고 창신하는 단계에서는 한 사람을 주요 체세로 삼아 의지하고, 그런 연후에 광범위하게 역대 명가의 장점을 흡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의지하고 흡수하는 것은 반드시 무의식적으로 융회하고 관통하는 것이지 의식적으로 섞는 것이 아니다. 즉, ‘옛것도 없고 지금도 없으며, 다른 사람도 없고 나도 없다.’라는 것으로, 끊임없이 써 내려가다가 익숙함에 이를 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됨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갑자기 깨달음의 문이 크게 열리고 단계마다 철저히 들어가서 옛사람의 심오함을 꿰뚫어 보면, 나의 글씨 밑바닥에서 자연의 이치를 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곧 자기의 독특한 서예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서예를 배움에 이러한 3단계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사실 여기서의 관건은 생각과 방법의 문제인데, 공부가 모자라서는 안 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참신한 탐색의식과 강렬한 창조정신이다.

* 강소성 上元(지금의 南京市) 사람. 자는 暗公. 호는 雁園.

 

10. 八大山人

명나라 寧王의 후예인 청나라 八大山人(1626-1705)은 청나라 초기의 유명한 문인화가이다. 그의 서예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형세가 괴이하고 기운이 소산하며 격이 독특하여 서예사에서 독특하고 빼어난 한 줄기이다.

서화의 題款에 그는 매번 의도적으로 ‘八大’와 ‘山人’을 각각 이어 썼는데 마치 ‘哭’ 과 ‘笑’ 같았으나 ‘哭’자도 ‘笑’자도 아니었다. 그의 필법은 왕헌지와 안진경으로부터 나왔고, 또한 스스로 일가라 일컬었다. 성격이 거만하고 거칠면서 급하여,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글씨와 그림을 보배롭게 여겨 힘들게 구했으나 조각 종이의 몇 글자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팔대산인이 술을 매우 좋아하는 것을 알고서 술과 안주를 마련해두고는 은근히 초대했고 아울러 사전에 좋은 붓과 먹 그리고 종이와 벼루를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는 그가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문방사보를 그의 앞에 펼치면 그는 붓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거침없이 한 번에 수십 폭을 써내곤 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맑을 때는 백 냥의 황금을 주어도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관리와 귀족은 비단을 가지고 가서 그에게 글씨와 그림을 청하여도 쓰거나 그려주지 않자, 종종 산승과 마을 사람에게 큰돈을 내주거나 혹은 술집주인에게 작품을 사오도록 했다.

* 강서성 南昌 사람. 성은 朱, 이름은 ?. 자는 雪個. 호는 八大山人. 족보 이름은 統?.

 

11. 王士禎

왕사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고, 9세에 초서를 쓸 수 있었으며, 그 글씨는 멀리 진나라 사람에 가까웠다. 친척인 王雅宜의 법을 배웠으며 행필은 대부분 外拓의 필세로 활기찬 정취가 있었다.

청나라 陳奕禧는 『隱綠軒題跋』에서 그의 글씨는 비록 좋지만 왕사정 자신은 오히려 서예는 문인의 小道라고 여기고, 서예로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글씨를 청하면 때때로 그의 제자에게 대필을 시켰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글씨를 얻으려고, 의문이 나는 문제를 배우겠다는 명목으로 써서 아뢰어, 그에게 지시문을 쓰도록 했다. 그는 곧 상주문과 초고지 위에 뜻에 따라 비평했으며, 학생들은 이를 받은 후에 매우 진귀하게 표구하여 비밀리에 수장하였고 그는 오히려 기쁘게 여겼다.

* 산동성 新城 사람. 자는 子眞?貽上. 호는 阮亭?漁洋山人. 후세사람들은 항상 王漁洋이라 불렀다. 벼슬은 戶部郞中?刑部尙書. 시호는 文簡.

 

12. 張衡

蔣衡(1672-1743)은 유람을 좋아하여 널리 발자취를 남겼고, 도처에 비와 첩을 찾아가 적지 않은 진ㆍ당 이래의 유명한 법첩을 얻었다. 아울러 300여 종을 임모하여 『拙存堂臨古帖』으로 모아 기록하였다. 그는 12년간 은거하며 80여만 자의 『十三經』을 썼고, 후에 청나라 내부에 소장되었다. 또한 『蔣氏遊藝秘錄』을 저술했으며 서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첩을 임모함에 모름지기 나의 뜻을 운용해서 옛사람의 각기 다름을 참고하여 그 같음을 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러 명가들이 각기 임서한 <난정서>는 절대로 같은 것이 없다. 그 다른 곳은 각각의 천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같은 곳은 왕희지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이로써 구하면 생각이 반은 지난 것이다. 또한 정서는 행초의 필의를 운용하고 행초는 정서법을 운용한다. 저수량을 배워 그 무성하고 굳셈을 구하고, 구양순을 배워 원만하고 윤택함을 구한다. 성내고 베풀고 근본하고 강한 것을 구양순으로 삼고, 아름답고 쓰러지고 연약하고 약한 것을 저수량으로 삼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무릇 말이라는 것은 마음의 소리이며, 서예 또한 그렇다.

 

여기에서 그는 다름을 참고하여 같음을 구하는 것과 서로 대립되면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했고, 서예 창작은 자기의 진실한 감정 등을 반영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 강소성 金壇사람. 자는 湘帆?拙存. 振生으로 개명했으며, 호는 拙老人ㆍ江南拙??函澤布衣.

 

13. 高鳳翰

高鳳翰(1683-1768)은 산수화와 화조로 후세에 이름이 높았으며, 서예는 초서와 예서가 모두 뛰어났다. 전각 또한 豪邁하고 방종하면서 표일했다. 모든 풍격이 법에 구속되지 않았으며 굳세고 힘이 있었다. 고봉한은 揚州八怪에서 鄭板橋ㆍ金農ㆍ羅聘 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고봉한은 또 벼루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많았을 때는 천여 점에 이르렀고, 아울러 친히 모난 벼루에 일일이 題銘을 조탁하고 새겨 남겼다.

* 산동성 膠州 사람. 자는 西園. 호는 南村?老阜?南阜老人?尙左生ㆍ丁巳殘人. 저서로는 『硯史』ㆍ『高鳳翰硯譜』.

 

14. 汪士?

汪士?(1688-1762)은 서화사에서 유명한 ‘揚州八怪’의 한 사람이다. 화훼를 잘하고 전각에 정통했으며 예서를 잘 썼는데, 필묵이 생동하고 맑고 굳센 운치가 있었다. 만년에 두 눈이 실명했으나 공력은 심후했기 때문에 여전히 광초를 쓰고 매화를 그릴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는 눈이 멀었지만 마음은 멀지 않았다.”라고 했다. 마음에 헤아림이 있었기에 눈이 먼 뒤의 그림과 글씨가 오히려 더욱 깊고 오묘한 이치가 있었다.

* 안휘성 ?縣(一說 休寧縣) 사람. 자는 近人. 호는 巢林?溪東外史.

 

15. 金農

‘漆書’는 청나라 康熙(1662-1722) 연간의 서예가 金農(1687-1764)의 글씨이다. 금농의 용필은 모나고 넓적하여 마치 솔과 같으며, 또한 먹의 진함이 漆과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칠서’라고 불렀다.

金農은 일찍이 博學鴻詞로 천거되었지만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何羲門에게 배웠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옛것을 즐겼으며 감상에도 정통했다. 사람됨이 바르고 곧았으며 권세와 부귀에 굽히지 않았고 ‘揚州八怪’의 한 사람이 되었다.

청나라는 강희가 동기창을 좋아하고, 건륭이 趙孟?를 좋아하여, 동기창과 조맹부의 서체가 당시를 풍미했다. 이러한 조류에서도 그는 한나라 비를 법으로 삼아 탐색한 것을 보면 홀로 혜안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농은 예서로 이름이 났으며, 그의 예서 원류는 한나라 비로부터 근원했으며, 또한 위나라 서체인 해서를 예서에 섞어 독창적인 풍격을 개발했다. 그의 글씨 필획은 가로가 굵고 세로는 가늘며, 배합이 합리적이고 대비가 강렬하다. 파세는 안으로 함유했고 강하고 굳세며 날카롭다. 포백의 조밀함은 바늘도 허용치 않으며, 성글음은 말이 달릴만하니 측봉의 운용이 적절하다.

금농의 서예 성취는 매우 높은데, 이와 같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悟性’과 ‘靭性’에 있다.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며 또한 음률에 능통했고 선의 기미를 참고했으며 학식이 깊고 넓어 예술적 소양이 심후했으므로 서예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았다.

* 자는 壽門?司農?吉金. 호는 冬心?稽留山民?曲江外史?龍梭仙客?百二硯田富翁.

 

16. 鄭板橋

鄭板橋의 이른바 ‘六分半書’는 행초서에 한나라의 팔분서를 섞어 넣음으로써 팔분의 뜻이 부족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예서필법을 행초서에 들인 것이다.

청나라의 유명한 서화가인 鄭燮?金農?黃愼?李??李方膺?高翔?汪士愼?羅聘 등 여덟 사람은 옛날 법도에 구속되지 않고 홀로 풍격을 창조하여 스스로의 면목을 이루었으므로 당시 ‘揚州八怪’라고 불렸다. 일설에는 閔貞과 高鳳翰이 있고 李方膺?高翔은 없다고도 한다.

鄭燮(1693-1765)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으며 후에 친구의 도움을 얻어 비로소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어서 44세에 진사에 올랐다. 일찍이 벼슬은 산동성 ?縣의 현령이었으나, 지방유지와의 불화로 관직을 사임하고 양주에서 글씨와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정판교는 시?서?화 모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에 ‘三絶’이라고 불렸다. 그는 「五十八歲自敍」에서 스스로 육분반서라고 불렀으며, 사람들 또한 이를 ‘板橋體’라고 일컬었다. 당시 사대부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圓?光?齊?亮’의 ‘館閣體’에 심취하여 벼슬길을 구했으나 정판교는 이것을 따르지 않고 용감히 탐색하여 ‘육분반서’를 창조했고, 종횡으로 펼치며 천변만화의 기이한 정취가 물씬거리게 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였고 당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스스로 ‘육분반서’라고 한 것은 아마도 정판교의 익살스러운 뜻이 있었을 것이다.

* 강소성 興化 사람. 자는 克柔. 호는 板橋.

 

17. 梁?

梁?(1710-1785)을 ‘北梁’이라고 한다. 그는 청대 乾隆(1736-1795) 연간에 중요한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王澍ㆍ劉墉ㆍ王文治ㆍ梁同書 등 유명한 서예가와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다.

양헌의 해서는 진ㆍ당을 종주로 했고, 초서는 ‘이왕’을 법으로 삼았으며, 李邕ㆍ張從申을 특히 오랫동안 모방하여 정신을 거의 닮았다. 만년에는 서예의 모든 경지에 완전히 심취했고 매우 높은 성취를 얻었다. 양헌의 서예는 수려하고 윤택하며 서권기가 있어 ‘館閣?’의 풍속을 일소했다. 그의 서예는 비각에 매우 적합하고, 작품이 거의 이옹과 유사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즐겨 그에게 ‘書丹’을 청했기 때문에 그의 碑版이 세상에 두루 펼쳤다. 그가 쓴 행서와 초서는 동기창의 신운을 얻었으나 기백은 앞섰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오히려 보물로 여겼다.

양헌은 서예이론에 정통하여 서예를 논함에 근거가 있고 내용이 충실하며 핵심을 찌르고 있다. 비첩을 임서의 이로움과 폐단, 그리고 임모의 절차와 보완의 방법 등을 제시했다.

* 안휘성 ?縣 사람. 자는 聞山. 호는 松齋. 서론저작으로는 『評書帖』 1권. 그의 서론을 집대성한 것은 『承晉齋積聞錄』.

 

18. 劉墉

劉墉(1719-1804)은 소해를 잘 썼으며, 그의 글씨는 혼후하고 고졸하며 모양은 풍요롭고 골력이 굳세어 당시에 독보적이었다. 특히 당시 서예의 미약한 풍조와는 서로 큰 차이가 났다. 물론 유용 글씨의 ‘모양은 풍요롭고 골력은 굳센[貌豊骨勁]’ 풍격에 대해 어떤 사람은 ‘癡肥’ㆍ‘墨猪’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사실상 유용은 젊었을 때 조맹부ㆍ동기창을 배웠고, 후에 또한 소식ㆍ미불을 배웠으며, 계속해서 안진경ㆍ종요로 올라가, 홀로 뛰어나서 ‘모양은 풍요롭고 골력은 굳센[貌豊骨勁]’과 ‘솜으로 쇠를 싼 것 같은 [如綿裏鐵]’ 예술적 효과를 얻었다.

유용은 또한 결자를 강구하여 그의 글씨는 확실히 ‘흰 공간을 계산하여 검은 필획을 마땅하게 함[計白當黑]’에 주의하여서 필획의 굵고 가늠을 적절히 했고, 빠르고 더딤을 교체했으며, 성글고 조밀함을 변화시켜 착락의 운치가 있게 하여, 자연스럽고 유창하면서 기운이 생동하게 했다. 유용은 濃墨으로써 글씨 쓰기로 유명했는데, 먹물이 빽빽하고 두터우며 빛이 밝기는 옻칠과 같았다. 의미가 함축되고 깊이 예스럽고 담담함을 만들어 졸한 것으로 아름다움을 얻은 것도 유용 서예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다. 평론가들이 유용의 글씨를 ‘黃鐘?大呂’의 음으로 비유하여 평한 것은 바로 이에 기초한 것이다.

* 산동성 諸城 사람. 자는 崇如. 호는 石庵?靑原?香岩?日觀峰道人. 벼슬은 編修?吏部尙書?體仁閣大學士?太子太保. 시호는 文淸.

 

19. 梁同書

梁同書(1723-1815)의 부친 梁詩正은 서예를 잘해서 양동서는 가학을 이어 받아 12세에는 큰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안진경ㆍ유공권을 배웠고, 중년에는 미불의 법을 본받았으며, 만년에는 붓에 맡겨 스스로 운용함에 자연스럽고 표일하여 옛사람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큰 글씨를 잘 썼고 글자가 클수록 결구가 더욱 엄정해졌다. 91세에 無錫의 손씨를 위해 가묘에 ‘忠孝傳家’라는 4글자의 편액을 써주었는데, 글자가 사방 3척이고 기백과 힘이 침착하고 두터워 보는 사람들이 그 뛰어남을 감탄했다. 당시에 논자들은 그의 서예가 동시대의 劉墉ㆍ王文治ㆍ翁方綱ㆍ汪士? 등의 장점을 겸했고 필력은 종횡으로 마치 천마가 하늘을 달리는 듯하며, 소식과 미불의 사이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양동서는 정력이 남보다 뛰어나, 만년에도 여전히 파리머리만한 소해를 쓸 수 있었다. 사람들이 국내외에서 그의 작품을 구하고자 하여 그는 매일 몇십 장의 종이에 글씨를 썼으며 팔십여 세 때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위하여 비문과 묘지를 쓰느라 종일 쉬지 않았다.

서예 이외에 그는 또한 인물과 화훼를 잘 그렸고 또한 감상에도 뛰어났다. 옛사람의 서화에 대해 눈길이 가면 곧 진위를 판별 할 수 있었다. 죽기 며칠 전에 그는 스스로 부고문을 썼는데 필법이 창경하기가 평상시와 같았다.

* 절강성 錢塘(지금의 浙江省 杭州市) 사람. 자는 元穎. 호는 山舟先生?不翁?新吾長翁. 저작은 『頻羅庵論書』ㆍ『直語補正』ㆍ『頻羅庵書畵跋』. 작품은 제자가 새긴 『瓣香樓帖』과 『靑霞館帖』.

 

20. 王文治

청나라 梁紹壬은 『兩般秋雨庵隨筆』에서 “청나라의 유용은 오로지 기백과 힘을 강구했고, 왕문치는 전적으로 풍신을 취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농묵재상, 담묵심화’라는 말이 있다.”라고 했다. 왕문치는 장봉인 양호와 검푸른 담묵을 즐겨 써서 자연스럽고 표일한 서풍과 함께 겉과 속이 서로 잘 어울리는 묘함을 이루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같이 말한 것이다.

王文治(1730-1802)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청년 시절에 시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동기창을 배웠고 후에 ‘이왕’을 전공했으며, 곁으로는 저수량?이옹?장즉지 등에 이르러 자신의 깨끗하고 성글면서 수려하고 연미한 독특한 서풍을 형성했다.

후세 사람은 비학을 법으로 삼았기에 그의 글씨와 그림을 가볍고 천박하다고 평했다. 객관적으로 논하면, 그의 글씨는 안온하고 표일하면서 온아하며 골격이 맑고 부드러우나, 약간 연미함에 치우친 단점이 있다.

* 丹徒(지금의 江蘇省 鎭江市) 사람. 자는 禹卿. 호는 夢樓. 벼슬은 翰林侍讀?운남성 臨安知府.

 

21. 翁方綱

翁方綱(1733-1818)은 장서가 매우 풍부했고 견문이 넓고 해박했으며 금석고증에 뛰어났고 감상에 정통했다. 일생동안 유명한 비첩을 고증하여 제발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는 비학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다. 처음에 안진경을 배웠고 나중에 우세남과 구양순 및 기타 당나라 비를 공부했으며, 예서는 『사신비』ㆍ『예기비』 등 한나라 비를 법으로 삼았다. 그는 비첩에서 숨은 지식을 두루 수집했고 글씨를 쓸 때 더욱 체세를 갖추었으며, 또한 옛날 첩을 雙鉤摹勒한 것이 수십 본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북방에서 쓰는 碑版의 대부분은 그에게 부탁했다.

당시 북경의 서예는 劉墉과 옹방강 두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옹방강은 해서?전서?예서의 모든 서체를 잘했는데, 특히 소해는 질박하고 차분하면서 두텁고 착실하여 경지가 자못 높았다. 이외에 옹방강은 미세한 글씨에 재주가 뛰어나서 매년 초하루에 반드시 수박씨 속살에다 해서 네 글자를 썼는데, 50세 이후에는‘聖壽無疆’, 60세 이후에는 ‘天子萬年’, 70세 이후에는‘天下泰平’이라고 썼다. 또한 사방 1촌이 되지 않는 종이에 <난정서>를 전부 썼는데 필획의 끝이 모든 운치를 다했고, 깨알 하나에 ‘一片氷心在玉壺’라는 7글자를 쓸 수 있었다.

* 順天大興(지금의 北京市) 사람. 자는 正三?忠敍. 호는 覃谿?彛齋?蘇齋. 벼슬은 內閣學士. 저서는 『兩漢金石記』?『漢石經殘字考』?『碑別字』.

 

22. 桂馥

桂馥(1736-1805)은 많은 책을 두루 읽었고 금석 비문과 조판에 대해 연구가 매우 깊었으며, 고증과 감상에 뛰어났다.

그의 예서는 한나라 비를 법으로 삼았고 <孔宙>?<衡方>?<張遷>비에 대한 공력이 특히 깊었다. 그의 젊은 시절 예서는 단정하고 두터우면서 평온했으며 수려하고 굳세어 능히 한나라 비를 축소시킬 수 있었는데 작아질수록 더욱 뛰어났다. 만년에는 강경하고 침착하며 혼후하고 웅장했으며, 결체는 모나게 채워 밖은 조밀하고 가운데는 펼쳐서 최고의 무르익은 경지에 도달했다. 계복은 또한 『國朝隸品』을 지어 청나라 서예가들의 예서 작품을 전문적으로 평가했다.

그의 행서와 해서도 파리하고 수려하며 표일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또한 指書에도 뛰어났다. 일찍이 제남의 五龍潭에서 한 그루의 고목을 하나를 둘로 쪼개 손가락에 먹을 묻혀서 한 폭의 전서 대련을 썼는데, 예스럽고 무성하며 기이한 정취가 있었다.

이외에 그는 詩文과 遊記도 잘 써서 완원은 그를 칭찬하여 “시를 짓는 재능과 예서 글씨는 동시대에 짝이 없다.”라고 칭찬했다.

* 산동성 曲阜 사람. 자는 冬卉. 호는 未穀?雩門?老苔?瀆井復民?肅然山外史. 서적과 서론으로는 『霖雨橋記』?『墨龍潭詩刻』?『續三十五擧』?『繆篆分韻』.

 

23. 錢?

청나라 강희ㆍ건륭 연간에는 조맹부와 동기창을 법으로 삼아 딱딱하고 판에 박은 것을 형성하여 ‘館閣體’가 풍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錢?(1740-1795)은 시대 조류의 움직임을 거슬러 새로운 표준인 기이함을 세우고, 시속이 좋아하지 않는 안진경의 모든 비를 전공하고, 형체와 정신을 갖춘 것 같은 변화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서예계의 억압된 시대의 답답한 국면을 타파했다.

그는 젊었을 때 널리 왕희지ㆍ저수량ㆍ구양순ㆍ미불 등을 취했고, 30세 이후 안진경을 전공했으며 무릇 안진경의 비첩이면 해서ㆍ행서ㆍ초고를 막론하지 않았다. 백 번 이상을 임모했고, 필의와 신운에 착안했지 근근이 필획의 간격을 따지지 않았다. 법을 지켰지만 법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의 서예 형체와 정신은 ‘안체’를 닮았으나 또한 자기의 너그럽고 유창함 등의 특유한 풍격을 형성했다. 이외에 그는 또한 화조를 잘 그렸는데, 정신과 성정이 뛰어나고 표일했으며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 그의 서예 명성은 생전에 결코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후 몇 년 뒤에 何紹基ㆍ翁同和ㆍ包世臣 등이 힘써 추앙하자 전풍의 글씨는 비로소 중시받기 시작했다.

* 운남성 昆明 사람. 자는 東注ㆍ約甫. 호는 南園. 벼슬은 通政副使ㆍ湖南學政ㆍ湖廣道監察御史. 작품으로는 <施芳谷壽序>ㆍ<正氣歌>ㆍ<杜甫詩冊>ㆍ<蘇軾詩冊>. 저서는 『南園集』.

 

24. 登石如

“평화롭고 간략하면서 온화하며, 굳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라는 말은 청나라 학자인 포세신이 등석여의 전서에 대해 평가한 말이다. 아울러 『藝舟雙楫?國朝書品』에 그를 신품에 나열했다.

鄧石如(1743-1805)가 전각을 배우게 된 것은 梁聞山의 소개로 梅?와 함께 8년간 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매유는 江寧의 대수장가였는데, 그는 금석서화의 수장품이 매우 많아 등석여가 서예를 깊이 연구할 수 있게 매우 좋은 학습조건을 제공했다. 이때부터 등석여의 서예와 전각이 크게 진전되어, 당시의 명사 金枋 등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서예로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특히 전서로 유명했다. 등석여의 전서는 초기에 ‘二李(李斯ㆍ李陽?)’를 종주로 삼았으나, 그것을 한계로 삼지 않고 예서의 필법으로 전서를 써서 행필의 提按頓挫 변화를 강화하여 전서의 용필을 풍부하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획마다 圓轉하는 玉箸篆을 타파하고 곳곳마다 둥글게 꺾는 울타리에서 침착하고 웅장하면서 혼후하며 뜻과 기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예술효과를 얻었다. 이것이 이른바 “필획은 둥근 곳에서 다시 곧음을 구하고, 필의는 둥글게 들어갈 때 다시 모남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등석여 전서의 필획은 응결되고 단련되어 굳세며, 긴밀하고 중후하여 일종의 금석의 운치를 갖추고 있다. 등석여는 산수 유람을 즐겨 그의 서예에 일종의 변화무쌍하고 표일하며 성글고 질탕하면서 전아하며 영활한 산수의 기질을 주었다. 이외에 등석여는 전서를 쓰는데 ‘굳셈[?]’과 ‘영활함[靈]’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의 글씨의 선은 부드러운 가운데 강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 안휘성 懷寧 사람. 호는 頑伯?完白山人ㆍ?游道人?古浣子.

 

25. 錢?

錢?(1744-1806)의 집안 숙부인 錢大昕과 錢大昭, 그리고 형인 錢塘은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이다. 전점은 가학을 계승하여 文字訓??經史?輿地?音韻?金石 등의 학문에 정통했다.

전점은 집에 있을 때 전서를 배우지 않았는데, 후에 북경으로 가서 전대흔을 방문했을 때 그가 전점에게 당나라 이양빙의 <城隍墓碑>를 쓰라고 하여 전점은 각고의 노력으로 연습하여 글씨가 크게 발전했다.

전점은 만년에 오른쪽이 반신불수가 되어 왼손을 사용해서 글씨를 썼기 때문에 단순한 小篆의 굴림과 전환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에 鐘鼎文?石鼓文?晉漢銅器款識?漢碑題額 등 모든 서체를 전서 가운데 섞어서 서체가 둥글면서 모나고 전서 같으면서 예서 같고 필력이 굳세고 두터워 또 다른 맛이 있었다.

* 嘉定縣 사람. 자는 憲之. 호는 十蘭?篆秋. 벼슬은 乾州州判?署武功縣.

 

26. 伊秉綬

청나라 서예가 伊秉綬(1754-1815)는 전서와 해서를 잘 썼고, 특히 예서에 뛰어났다. 이병수는 퇴임 후에 남은 시간을 서예와 전각 그리고 시문과 회화에 힘썼다. 한나라 비에서 <衡方碑>ㆍ<張遷碑>ㆍ<孔宙碑>ㆍ<韓仁碑>ㆍ<禮器碑> 등은 모두 그가 매우 정밀히 연구한 것이다.

이병수는 예서에서 파책과 도필로 燕尾를 만드는 것, 즉 반드시 붓을 들어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뜻을 이르게 할 뿐이니, 스스로 높고 예스러우며 넓고 커서 굳센 운치와 맛이 있었다. 결체의 모습은 마치 방정한 것 같으면서도 변화가 풍부하여, 엄정하고 단아하며 또한 기세가 드높았으니, 특히 편액이나 주련을 쓰기에 적합하다. 그는 작은 예서 또한 매우 뛰어나서 당시에 王文端과 紀文達 등은 늘 그의 작은 예서로 상소를 써서 건륭황제의 칭찬을 크게 받았다. 당시 이병수의 예서와 등석여의 전서는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므로 ‘南伊北鄧’이란 칭찬이 있었다. 이병수의 행서는 전서의 필법을 섞어서 파리하면서도 굳세고 강건하며 종횡으로 전환하며 자유자재로 글씨를 썼다.

* 복건성 汀州 사람. 자는 組似. 호는 墨卿??庵. 저서는 『留春草堂詩?』. 작품은 대부분 『?庵集錦』에 남아 있다.

 

27. 包世臣

嘉慶(1796-1820)?道光(1821-1850) 연간에 碑學이 점차 일어나 서예의 신천지를 열었다. 包世臣(1775-1855)은 비학운동의 기수이면서 이론의 권위자이다.

포세신은 중년에 안진경과 구양순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소식과 동기창을 거친 뒤에 북비에 힘을 다했고 만년에는 왕희지 부자를 배웠다. 그는 스스로 말하길, 南唐의 『畵贊』 棗板閣本을 얻어 10년을 애써 연습해도 필법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후에 다시 漢ㆍ魏의 여러 비를 배우고서야 비로소 필법을 깨달았다고 했다. 포세신은 서예에 40여 년간 힘을 다하고서야 비로소 옛사람들의 집필법?운필?결체?포백의 비결을 얻어 雙鉤懸腕ㆍ實指虛掌ㆍ逆入平出로 총결하여 자기의 학설체계를 형성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서예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그의 집필법도 결코 매우 정확하지 않다고 여겼으며, 서예 평가도 극단적인 면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서예사의 지위와 적극적인 작용에 대한 것은 또한 긍정했다. 특히 그가 쓴 『藝舟雙楫』이 비록 이론에서 아직 완전히 갖추어진 것은 아니지만 비학운동의 창시에 지도적 작용을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안휘성 涇縣 사람. 자는 愼伯?愼齋. 호는 倦翁?小倦游閣外史.

 

28. 吳熙載

吳熙載(1799-1870년)는 諸生으로 박학하고 재능이 많았으며, 포세신의 입문제자가 되었다. 포세신은 서예이론가이며 비록 전서와 예서를 매우 좋아했으나, 본인은 오히려 이 두 서체에 공력이 비교적 얕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서와 예서의 공부가 심후했던 오희재는 곧 스승 이론의 이상적 실천자가 되었다.

오희재는 서예에서 스승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秦ㆍ漢과 남북조에 치력했으며, 특히 북위의 비에 특히 힘을 다했다. 전서 필법은 직접 포세신의 선생 등석여를 계승하여 필획이 둥글고 단정하면서 조화로움과 평온함이 등석여를 꼭 닮았다.

그는 여러 분야에 능했으니,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인장 새기는 것이 첫째, 화훼도가 둘째, 산수화가 셋째, 전서가 넷째, 예서가 다섯째, 마지막으로 해서라고 평했다.

* 강소성 儀徵 사람. 본명은 廷?. 자는 熙載?讓之?攘之. 호는 讓翁?晩學居士.

 

29. 阮元

阮元(1764-1849)은 청나라 중ㆍ만기의 금석고고학 제창자의 한 사람이며, 또한 ‘南北書派論’을 제일 먼저 제창한 사람이다. 완원은 학식이 깊고 넓어서 저작이 자못 영향력이 있었으며 당시 명망이 매우 높았다.

그는 서론저작인 『南北書派論』에서 서예의 南宗과 北宗의 설을 제일 먼저 제시했다. 또한 후세의 帖學과 碑學 양파의 서예 원류와 풍격의 차이점을 상세히 분석한 그는 중국지역문화설의 옹호자이다. 그의 『小滄浪筆談』이란 글은 서예의 기초이론에 대해 또한 독창적인 견해가 있다.

완원의 서예는 비학에서 힘을 얻었으니, 〈석문송〉ㆍ〈천발신참비〉 등에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큰 기운이 물씬거리며 에워싸면서 방종하고 표일하여 날아 움직이는 것 같으니, 이 두 비의 정신과 뜻이 매우 많이 있다. 아울러 항상 이러한 종류의 글자로 쓴 擘?의 큰 글씨와 편액의 글씨가 사람들에게 많은 숭배와 존경을 받았다.

* 강소성 儀徵 사람. 자는 伯元. 호는 芸臺ㆍ怡性老人ㆍ?經老人. 관직은 體仁閣大學士. 시호는 文達.

 

30. 何紹基

何紹基(1799-1873). 유명한 서예가 하소기는 청나라 비학파의 정신과 실천을 확실하게 탐색하고 성공한 실천자의 한 사람이다.

하소기는 많은 책을 넓게 섭렵해서 經ㆍ史ㆍ子에 모두 저술이 있었다. 특히, 소학에 정통했고, 곁으로는 金石碑版 문자에 이르렀으며, 서예에 심취해 수십 년 동안 쉬지 않았다. 아울러 또한 옛것을 배워 변화할 수 있어 스스로 면모를 이루었다. 하소기의 서예는 처음에 안진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구를 개척해서 점과 획이 웅장하고 강했다. 글씨를 쓸 때 回腕法을 사용하고 온몸의 힘으로 逆勢行筆을 하여 북위서예의 신운을 잘 얻었다.

하소기는 북위서예를 배움에 있어 마음으로 임모하고 손으로 추구하며 위로 거슬러 올라가 주ㆍ진ㆍ양한의 옛날 주문ㆍ전서ㆍ예서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로부터 서예 변천의 연속성을 탐색할 수 있었다. 그는 한나라 예서를 배워 그 활달함을 얻었고, 歐暘通을 배워 그 험준함을 취했다. 또한 비를 임서하는 법으로 행서와 초서를 썼고, 첩을 임서하는 법으로 북비를 써서, 풍격과 광채를 드러냈으며 판에 박히지 않았다. 그는 안진경의 <爭座位帖>?<裴將軍帖>에 깊이 빠져 이를 행서와 초서에 융화시켰다. 확실히 그는 비와 첩의 장점을 융화해서 스스로의 풍격과 법도를 이룬 서예의 대가이다.

* 호남성 道州縣 사람. 자는 子貞. 호는 東洲ㆍ??. 벼슬은 編修.

 

31. 張裕釗

張裕釗(1823-1894)의 글씨와 그림은 위ㆍ진ㆍ남북조 제가를 겸하고 취하여 스스로 하나의 서체를 이루었다. 결체는 굳세고 명랑하며, 파리하고 길며, 겉은 모나고 안은 둥글다. 정신과 기운은 안으로 함축하여 엄정하면서 맑고 굳세며, 용필은 굳세고 험준하며 깎아지른 듯하다.

강유위는 그를 극진히 여겨 그의 글씨를 “해서는 능히 晉을 빚어 魏를 구워내었고, 宋ㆍ梁을 잉태하여 齊ㆍ隋를 배양했으니, 천년 이래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없다.”라고 칭찬했다. 또한 말하기를 필법은 당나라로부터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장유쇠는 등석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용력이 특히 깊고 고금을 이겨서 혼후하고 넓으면서 깊고 예스러워 바로 위?진의 전함을 이었다. 특히 필법을 중흥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서예를 평론자하는 사람이 강유위의 말을 따른 자는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장유쇠의 해서는 청대 비학에서 가히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다른 서체는 동시대의 다른 서예가의 수준을 아직 뛰어넘지 못했다고 보았다.

* 호북성 武昌 사람. 자는 廉卿. 호는 濂亭.

 

32. 翁同和

翁同和(1830-1904)는 광서황제의 스승이고, 서예는 주로 안진경과 미불을 배웠다. 관직을 사양하고 집에 돌아간 후에 여러 북비를 공부하여, 서예 기백이 순후하고 하나의 격식에 구속되지 않았다. 초탈하고 표일하며 너그러워 안진경 글씨의 온화함과 북비의 혼후하고 그윽한 기운이 있었다. 청나라 徐珂는 『淸稗類?』라는 책에서 “옹동화의 서예는 하나의 격식에 구속되지 않아 건륭ㆍ가경 이후의 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평했다.

* 강소성 常熟 사람. 자는 叔平. 호는 松禪?甁庵居士. 벼슬은 工部尙書?軍機大臣. 시호가 文恭.

 

33. 趙之謙

趙之謙(1829-1884)은 박학다재하여 금석?고증?목록?서화?전각 등에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솔직하고 거만하여 세상에 분개하고 속세를 미워하여 시대조류를 따르지 않았다. 설령 시문과 서화에서라도 모두 독창적인 새로운 뜻을 펼쳐도 세상에서 용납 받지 못했다.

그의 서예는 제일 처음 안진경을 배웠고, 뒤에는 포세신의 비학이론의 영향을 받아 북비를 다시 공부했으며, <정문공비>?<장맹룡비> 등의 비와 북위의 조상기를 임모했다. 또한 등석여에게 전서와 예서를 배우기도 했다.

실제로 조지겸의 해서?예서?전서의 모든 체에는 자신의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는 포세신의 ‘갈고리와 파임은 거슬리고 보내며 모든 붓털은 힘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鉤捺抵送, 萬毫齊力].’라는 필법을 각종 서체에 운용해서 썼다. 예서에 전서 필의를 운용했고, 해서에 전서와 예서 필의를 운용했으며, 또한 안진경의 필법을 운용하여 북비를 썼다. 그러므로 그의 전서와 예서는 등석여를 배웠으나 등석여와 같지 않고, 해서는 위비를 배웠으나 결과는 ‘안진경을 바닥으로 하고 위나라의 면모[顔底魏面]’를 이루었다. 이외에 그는 또한 위비의 필법을 끌어다가 행초서에 넣어 뭇사람과 다른 예술 풍격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의 서예필력은 견실하고 기운과 기미가 유창하고 질탕하며, 의태가 다양하여 비학에서 수려하고 우아하면서 영활하고 아름다운 문파를 열었다.

* 會稽(지금의 浙江省 紹興市) 사람. 자는 益甫??叔. 호는 悲庵?梅庵?冷君?無悶?鐵三??寮. 벼슬은 강서성 奉新?南城 현령.

 

34. 梅調鼎

청나라 말의 梅調鼎(1839-1906)은 서예에서 매우 높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젊었을 때 일찍이 補博士弟子賢을 지냈으나, 후에 글씨가 안 좋아서 쫓겨나 省試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타격을 통해 더욱 서예학습에 분발했으며 아울러 벼슬길에 나갈 뜻을 끊었다.

매조정은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문득 현완법과 중봉으로 아주 높게 필관의 끝을 잡고 긴 붓털의 양호로 글씨를 연습을 했고 일정한 양에 이른 뒤에 아침을 먹었다. 이렇게 쉬지 않고 몇 십 년을 공부했다. 그의 젊었을 때의 글씨는 예쁘면서도 또한 소박하고 착실하여 마치 젊은 시골처녀를 닮았다. 이는 鄧散木의 말처럼 “분과 연지를 바르지 않은 자연미가 좋다.”라는 것이다. 그는 왕희지 부자를 종주로 삼았고, 곁으로는 여러 서예가를 섭렵했다. 중년이후 구양순 필법을 섞어 쓰기 시작하여 원필을 변화시켜 방필로 만드니 필력이 굳세어졌다. 만년에는 또한 북비에 뜻을 두었으며, 특히 <장맹룡비> 및 <용문이십품>에서 득력하여 필세가 침착하고 웅장하며 사나와졌다.

* 절강성 慈谿 사람. 자는 友竹. 호는 ?翁.

 

35. 蔣驥

蔣驥는 乾隆(1736-1795) 연간의 사람으로, 생졸연대가 자세치 않으며 蔣衡의 아들이다. 그의 서예는 그다지 이름이 나지 않았지만, 논서 방면에서 특히 懸?執筆의 방법에 관해 주도면밀한 논술이 있었다.

 

소해를 쓸 때 팔꿈치를 들고 할 수 있으면 이미 하수가 아니다. 오직 팔을 들 수 있어야 정신과 기운이 더욱 평정해질 수 있으며 단정하게 앉지 아니하면 이렇게 될 수 없다. 처음 배울 때 오른 팔은 책상과 가로 놓으나 착실하지 않아서 그 가운데를 허하게 한즉 전체의 힘이 붓 끝에 이르게 된다. 쌓인 연습이 오래 되면 비로소 팔꿈치와 팔이 허하고 영활할 수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니 억지로 힘쓸 필요가 없다. 만약 오른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어 착실함이 지나치면 단지 팔 힘만 이르게 될 뿐이다. 붓대를 잡음에 이르러서는 처음 배울 때 또한 적중함을 위주로 해야지 지나치게 높으면 형세를 잃기 쉽다.

 

그는 또한 서예 학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예를 학습함에 어리석게 판에 박힌 듯하거나 솔직하게 할 수 없으니, 서예의 묘함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제 막 임모를 시작했을 때는 단지 원래 법첩 형식에서 서로 닮은 형상을 추구해야 한다. 마치 담장을 따라 길을 걸어가는 것 같이 길이 있어 좇을 수 있다. 이때에는 마땅히 힘닿는 데까지 법첩에 따라 임모하는 연습을 함에 힘써 평평하고 곧으면서 방정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후에 다시 점과 획 그리고 결구와 동태의 천변만화에 주의하여 한 번 깨달으면 곧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 강소성 金壇 사람. 자는 赤?. 호는 勉齋. 서론 저작은 『續書法論』ㆍ『傳神秘要』.

 

36. 揚守敬

揚守敬(1839-1915)은 금석?비첩?훈고?목록 등에 매우 뛰어났다. 그의 집에는 장서 수십만 권이 있어 그의 고증을 거쳐 제발해서 인쇄한 고서와 비첩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광범위하고도 노력하여 서예 비첩을 수집하는데 50년에 달했고, 소장한 비첩은 당시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는 4체 서예에 대해 모두 매우 정통했는데 금석기식이 농후하고, 고박하고 자연스러우며 종횡으로 질탕했고 종정문의 임서는 특히 절묘했다. 행서는 대략 종세를 띠고 있으며 의취가 생동감이 있었다. 그의 서예는 중국과 일본에서 모두 명성이 자자했고 일본 친구들이 중국에 와서 그와 서예를 토론하고 학습함이 끊이지 않았다. 유명한 서예 저작인 『學書邇言』은 그가 73세가 되던 해에 상해에서 일본학생 水野元直을 위해 써준 강의원고이다. 이 글은 말이 간단하고 뜻이 족하며 객관적으로 역대 비첩의 진위와 우열을 평하여 기술했다. 또한 중국과 일본 서예가들의 성취와 득실을 평가함에 논리를 세움이 공정하고 정확하여 학술계의 중시를 받았다. 그는 서예를 잘 배우려면 ‘天分?多見?多寫’ 이외에 또한 필수적으로 인품이 높고 학식이 풍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틀림없이 서예의 본질에 이른 것이다.

* 호북성 宜都 사람. 자는 惺吾. 호는 隣蘇.

 

37. 吳昌碩

吳昌碩(1844-1927)은 근대의 유파를 연 유명한 서화가로, 서예?전각?시문의 성취도 매우 탁월했다. 일찍이 유명한 학자인 愈??楊峴에게 辭章?訓??書藝를 배웠고, 평생 교제한 사람은 대부분 이름난 수장가 또는 서화가였다. 역대 명적을 널리 보고 귀와 눈에 익숙해졌음으로 그의 서화와 전각은 모두 탁월하였다.

중국화는 평소 서예와 서로 잘 융합한다. 중국화 구성의 중요 요소는 행필과 용묵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곧 서예이다. 오창석이 서예의 기초가 없었다면 그의 그림과 인장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서예는 <석고문>에서 득력했으며, 능히 <석고문> 글씨의 깊은 뜻을 탐구할 수 있었고 아울러 초서의 필법을 섞어서 공부하여 그것을 변화시켰다. 용필은 험준하고 날카롭지만 澁勢를 취할 수 있어 필력은 크나 미친 듯 사납지 않았고, 선은 혼후하나 무겁고 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응집하면서 굳세고 기운과 도량이 넓고 컸으며, 먹색은 무겁고 착실하면서도 성글고 생동감이 있으며, 점과 획의 넓고 아득하여 마치 석각과 같아 평론가들이 ‘금석기’가 풍부하다고 말했다. 해서 필법은 안진경으로부터 들어가 종요에서 법을 취해 예스럽고 질박함을 얻었다. 예서 필법은 한나라 <祀三公山碑>를 종주로 삼아 두루 한나라 비를 익혔다. 행서는 처음에 왕탁을 배운 후에 구양순과 미불을 한 용광로에 녹여 질탕하면서도 변화가 많아 자못 畵意가 풍부했다. 만년에는 전서와 예서의 필법으로 광초를 써서 창경하고 웅혼하여 사람과 글씨가 함께 늙어갔다.

* 절강성 安吉縣 사람. 이름은 俊?俊卿. 자는 香補?昌碩?倉碩?蒼石. 호는 缶廬?老缶?老蒼?苦鐵?大聾?石尊者?破荷亭長?五湖印?.

 

38. 康有爲

『廣藝舟雙楫』은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서학이론 저서이다. 이는 청나라 후기의 ‘비학’에 관한 이론과 실천을 총결한 것으로, 비학의 발전과정에서 완원과 포세신의 저서를 계승한 이후의 세 번째 중요한 논저이다.

康有爲(1858-1927)는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이다. 1889년 강유위는 변법에 대한 글을 올렸으나 좌절당하자 학문 연구로 전향했다. 그는 북경에서 수장품이 풍부한 수장가와 상점에서 구매하는 편리한 방법을 이용하여 널리 碑版을 모아서 계통적으로 정밀하게 서예를 연구했다. 이런 기초에서 강유위는 『광예주쌍즙』을 써냈다.

『광예주쌍즙』은 6권, 27장, 敍目 1편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書鏡』이라 하고 일본판은 『六朝書道論』이라고 했다. 포세신의 『예주쌍즙』이 있었고 강유위는 이보다 널리 모았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책 전체에 섭렵한 면모가 매우 광범위했으니, 書體源流ㆍ品評碑帖ㆍ用筆技巧ㆍ學書經驗 등이 모두 언급되어 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방면에서 독자가 유의할 가치가 있다. 첫째, 전체의 자료가 풍부하고, 청대 금석학 고증 방면의 성과를 광범위하게 흡수했으며, 북비에 대한 수집이 특히 전면적이다. 둘째, 완원과 포세신의 비학 이론에 대해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빠진 것은 보충했다. 셋째, ‘變’으로 사물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을 강조했으니, 이는 당시에 대한 영향이 특히 컸고 이전 사람에 비교해서 크게 진보한 것이다. 넷째, 당시에 가장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서학이론 전문 저서이다. 전체의 체례는 근엄하고 자료의 고증은 상세하며 체계는 분명하고 명백하다. 이전에 이렇게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서학이론 전문 저서는 아직 없었다.

* 광동성 南海 사람. 원래 이름은 祖治. 자는 廣厦, 혹은 廣夏. 호는 長素ㆍ更生. 벼슬은 工部主事.

 

39. 于右任

于右任(1877-1972)은 어려서 經史를 깊이 읽었고, 곁으로는 제자백가의 학문에 이르러 매우 심후한 국학의 기초가 있었다. 그는 서예를 매우 좋아했고 또한 높은 성취를 얻었기 때문에 서예 명성이 문학의 명성을 가렸다.

우우임이 서예를 연구한 길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북위 비에 빠지고 아울러 개인의 풍격을 형성한 전기와, 다른 하나는 표준초서를 창립한 후기이다. 우우임은 젊었을 때 일찍이 조맹부의 서예를 배웠고, 후에는 북위 서예를 추앙하였다. 북위의 비각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그는 여러 해 동안 눈서리와 비바람도 불사하고 북위의 묘지와 조상제기를 찾아 탁본하여 80-90여 종을 얻었다. 그가 수장한 북위의 묘지에서 7쌍의 부부 묘지가 있었으므로 스스로 서재의 이름을 ‘鴛鴦七誌齋’라고 불렀다.

우우임은 서예를 학습함에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넓은 시각으로 널리 채집하고 수렴하여 북위 서예의 정수를 얻어 매우 질박한 점과 획 그리고 결체를 통해 북위 서예의 특징을 개괄했다. 해서ㆍ행서ㆍ초서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의 면모를 형성할 수 있어서 대가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그의 서예는 필력이 강건하고, 결체는 펼쳤고, 기세는 크고, 격조가 높다. 특히 擘?書의 큰 글자 및 대련의 신채는 더욱 사람을 놀라게 했다.

1927년 전후에 우우임은 초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32년에 그가 발기하여 ‘草書社’를 결성하자 사방의 식자들이 그의 휘하에 구름같이 모였다. 그는 수집할 수 있는 데까지 수집하여 역대 비각과 묵적의 초서 <천자문> 100여 종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易識’ㆍ‘易寫’ㆍ‘準確’ㆍ‘美觀’의 원칙에 근본해서 전통 초서 필법의 가닥과 이치를 분석하여 잡된 것은 버리고 참된 것만 남겼다. 다시 초서 결체 정형을 유형별로 귀속시키고 집자하여 표준초서 <천자문>을 만들어 1936년에 처음으로 쌍구본을 간행하여 세상에 발표했다. 원래 ‘초서사’ 일원이었던 劉延濤는 『표준초서』를 평가하면서 “표준초서는 천년동안 전하지 않은 비법을 밝히고 과거의 초서를 하나로 총결하여 장래 문자의 새 길을 열었다.”라고 했다.

* 본관은 섬서성 涇陽이나 후에 三原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三原魯橋人이라 함. 원래 이름은 伯循. 자는 右任. 호는 騷心.

 

40. 鄭文?

鄭文?(1856-1918)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다. 그는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의술에 통했고 음률에 밝았으며, 특히 문자학에 정통했다. 아울러 금석서화를 매우 좋아했으며, 대량의 금석 비판과 명가의 글씨와 그림을 수장했다. 강유위는 정문작이 쓴 북비는 한나라 예서와 위나라 비를 체세로 삼고, 첩학과 묵적으로 기운을 구했다고 했으며 『광예주쌍즙』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문작의 문장?그림?글씨ㆍ의학은 뛰어난 기예로 당시의 으뜸이었으나, 오직 그의 서예를 아는 이가 적었다. 지금 그가 스스로 베낀 시고를 보니, 굳세고 표일하며 깊고 예스럽다. 묘한 아름다움이 부드럽게 조화하여 북비의 장점이 있는 것을 가렸으니, 높고 혼후함을 취했으나 사납고 거칠음은 버렸다. 대개 <장맹룡비> 비음으로부터 들어갔고, 겸하여 <이중선>?<경사군>?<가사백>?<용장사>비 및 <예학명>을 취했다. 무릇 원필이라는 것은 모두 그 정화를 뽑았다. 그러므로 碑意의 두터움을 얻어 엉기고 막힌 흔적이 없었다.

 

馬宗?도 『?岳樓筆談』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정문작의 글씨는 결체는 순전히 남첩을 취했으나 파책은 빼어나게 펴냈다. 다시 겸하여 북비의 묘함이 있어 훨훨 날고 큰 기미는 곧바로 육조에 이르렀다. 간찰과 시고는 손을 벗어난 탄환처럼 이를 대하면 유달리 준걸스런 풍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정문작이 금석 탁본에 제발한 묵적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필법이 가늘기가 마치 유사와 같았으며, 맑고 수려하며 무성하게 어지러운 것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었다.

 

* 산동성 高密 사람. 자는 叔問?俊臣. 호는 小坡?瘦碧?大鶴山人. 서예이론서는 『漢魏六朝書體考』?『書隸辯』?『大鶴山房談碑記』?『?宇訪碑錄續補遺』.

 

 

41. 曾熙

曾熙(1861-1930)는 ‘石鼓書院’에서 강의를 맡았고, 스스로 南宗이라 칭하며 이서청의 北宗과 더불어 어깨를 겨루었다. 앞서 소개한 서예가 완원 때에 이미 전적으로 남북서파를 논했다. 이른바 ‘남종’이란, 즉 첩학을 위주로 삼고 풍격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말하며, ‘북종’이란 비학을 몸으로 삼고 풍격은 웅장하고 굳센 면모를 나타냄을 말한다. 증희는 비록 ‘남종’이라 칭했지만 실제로는 남북의 장점을 겸해서 융회했고, 아울러 모나고 둥근 자태를 자기의 글씨에서 취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서와 해서 등 각종 서체는 모두 형체가 험준하고 정신이 표일한 묘함이 있었다. 그의 장초서도 위로는 예서ㆍ팔분의 연원을 좇고, 아래로는 위ㆍ진 금초의 법도를 취해 초탈하고 호매하면서 자연스럽게 써서 각기 한 시대를 떨쳤다.

* 호남성 衡陽 사람. 자는 子緝ㆍ季田子. 호는 俟園?農髥.

* 청나라 말에서 민국 초기의 서단에서 ‘北李’는 李瑞淸을, ‘南曾’은 曾熙를 가리킨다.

 

42. 李瑞淸

‘北李’인 李瑞淸(1867-1920)은 북비를 배웠는데, <정문공비>에 가장 힘을 쏟았다. 그는 젊었을 때 북비를 연습했고 大篆에 뛰어났으며, 한나라 예서ㆍ팔분ㆍ비갈 등에 대해서도 마음으로 임모하고 손으로 추구했다. 아울러 전서ㆍ주문의 필법을 그 안에 녹였고 마지막에는 위비의 서사에 운용했다. 그러므로 그의 서예는 필력이 굳세고 단단하며 기세가 크고 넓어서 스스로 면목을 이루었으니, 이는 魏를 배워 홀로 하나의 풍격을 갖춘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행필에서는 지나치게 금석 비각에서의 구불거림과 잔결의 맛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리석게 딱딱하고 조작됨이 나타나 아직 자연스럽게 혼합되는 묘함을 얻지 못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석한 논술을 했다.

 

나는 어려서 훈고학을 배웠고 육서를 깊이 연구하고, 鼎과 彛를 고찰하고 살폈으며, 그 훌륭함을 좋아하여 드디어 대전을 익혔다. 붓을 따라 구불거렸으나 아직 예쁘게 두루 미칠 수 없었다. 성장하여 양한의 비갈을 배워 거의 평평하고 곧음을 이해했다. 26세에 금예를 배웠고 널리 육조를 종합하여 이미 사승을 다했으나, 뜻에 의지하여 본뜸에 필성은 가라앉고 부어서 마음과 손이 서로 어긋났다. 하나의 비를 임모할 때마다 걸음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법도에 속박되며 모포와 먹에 묶여 손가락과 손톱이 꺾이고 부러져도 그 피로함을 잊었다. 광서 갑진년(1904)에 황산의 구름을 보고 창해의 물결을 보아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으나, 아직 정미하고 첨예한 생각을 이를 수 없어서 배운 바를 다투니 매번 스스로 탄식한다.

 

어떤 사람은 “이서청이 스스로 전서를 잘 썼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서청이 유명한 서예가가 된 주요 원인은 사람들이 그가 쓴 위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현재에 서예를 배우는 사람, 특히 석각 서체를 공부하는 사람은 서예 용필의 본래 태세를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고, 이서청처럼 고의적으로 떨어 결과적으로 모필 서예에 내포된 뜻을 잃어버린다면 오히려 발전에 저해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서청에게 남긴 훈계는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 강서성 臨川 사람. 자는 梅庵. 호는 淸道人.

 

43. 李叔同

李叔同(1880-1942)은 어려서부터 趙幼梅에게 詞를 배웠고, 唐敬嚴에게 전각과 금석학을 배웠으며, 약관의 나이에 매우 조예가 있었다. 전각ㆍ塡詞ㆍ가곡을 잘 했으며, 특히 서예에 정통했다. 그의 서예는 육조에서 법을 취해, 순박하고 자연스러우며, 火氣를 모두 벗어났다. 그가 浙江兩級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기간에 학생들이 서예작품을 구하러 오면 거부하지 않았다. 출가 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글씨를 구하였다. 이숙동은 이미 출가를 했기 때문에 다시 서예를 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항상 망설였으며, 이에 대해 范古農은 “만일 불가의 말씀을 서사하여서 깨끗한 인연을 심는 것 또한 옳다.”라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후에 보이는 이숙동의 서예작품은 대부분 불가의 말씀이다.

* 절강성 平湖 사람. 이름은 文濤?廣候?哀. 불가의 이름을 演音ㆍ弘一. 법명은 弘一法師. 자는 哀公?息霜??. 호는 晩晴老人. 서예작품은 <臨古法書>?<李息庵法書>. 저서는 『李爐印譜』?『李廬詩錄』.

 

44. 葉恭綽

葉恭綽(1881-1968)은 서화가 집안 출신으로 조부 葉衍蘭은 금석ㆍ서화ㆍ문예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고, 부친 葉??의 자는 仲鸞으로 시문과 전서와 예서에 대해 모두 많은 연구가 있었다. 엽공작은 학술문화와 서화 고고학 등의 일에 힘을 다했고, 서화와 전적 및 기타 문물의 수장에 대한 수량이 매우 볼만했다. 이에 대해 『紅樹寶?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술운동에 힘을 쏟은 지 50년, 늙음에 이르러도 게으르지 않았다. 전국의 미술전람회 및 서화 단체에 참가하지 않음이 없었고, 문자개혁에 특히 힘을 합했다. 문헌과 고적은 그의 정리를 거쳐 보존된 것이 매우 많았다. 나이 80세가 되자 소장한 서화?전적?문물?중요한 기물 등을 모두 북경?상해?광주?소주?성도 등 도시의 관계된 기관에 헌납하여서 영원히 후세에 전했다.

 

글씨에 있어서 그는 해서ㆍ행서ㆍ초서 3체에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저수량의 아름다움, 안진경의 강건함, 조맹부의 빼어난 정취를 겸했고, 곁들여 북비의 고박함과 <曹娥婢>의 운치를 섞었다. 그는 서예를 논함에 운필?결구?골력?기세?운치의 5가지를 중점으로 삼았다. 또한 글씨를 배움에 출토된 죽목간독, 한ㆍ위ㆍ육조의 석각, 수ㆍ당의 사경을 종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외에 그는 또한 서예창작에 대해 큰 글씨는 마치 작은 글씨처럼 정련되게 쓰고, 작은 글자는 큰 글자처럼 당당하게 쓰며, 글자마다 기세가 있도록 쓸 것을 제시했다. 엽공작은 일생동안 매우 많은 저술을 했다. 그의 아들 葉公超는 그의 서화에서 정품을 선별한 『葉恭綽書畵選集』을 출판했다.

* 광동성 番? 사람. 자는 裕甫?譽虎?玉甫. 호는 遐庵?遐翁?矩園. 저서는 『遐庵談藝錄』.

 

45. 羅振玉

羅振玉(1865-1940)은 마지막 황제 溥義를 보좌하며 일본인을 위해 목숨 걸고 일하여 중국근대사에 악명이 높은 대 간신으로 중국인의 죄인이었다. 다만 학술에서 그는 힘을 다해 학문을 하여 저술이 가득 쌓였다. 그는 <석고문> 비각을 고증했고, 옛 기물의 문자를 식별했으며, 한나라의 간찰 글씨, 특히 갑골문 방면의 고증 등 고문화 연구에 유익한 일을 했다. 나진옥은 어렸을 때 안진경의 서예를 학습하기 시작하여 근면 성실하게 공부했으며, 나중에는 고문자학의 연구에 힘을 쏟아 대량의 鼎?ㆍ碑版을 수장함으로써 식견이 넓고 안목이 높았다. 서예에서 그의 갑골문ㆍ금문ㆍ소전ㆍ예서ㆍ해서ㆍ행서 등은 모두 전아하고 운치가 있으며 고박하고 순후하게 썼다.

* 절강성 上虞 사람. 자는 叔蘊ㆍ叔言. 호는 雪堂ㆍ貞松. 저술로는 『殷墟書契考釋』ㆍ『流沙墜簡考釋)』ㆍ『石鼓文考釋』ㆍ『殷商貞卜文字考』ㆍ『再續?宇訪碑錄』ㆍ『鏡話』ㆍ『貞松堂名人法書』ㆍ『百爵齋名人法書』.

 

46. 沈尹?

沈尹?(1883-1971)은 현대 서단에 영향이 지대한 서예가이며, 또한 학양이 깊었던 저명한 학자이다. 그는 젊었을 때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유학했고 ‘五四’신문화운동을 주장한 사람의 하나이며 일찍이 『新靑年』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新詩를 쓸 것을 제창하여 지은 것이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四體詩에도 조예가 깊었다. 북경대학과 중법대학의 교수를 역임했고 北平大學의 교장을 맡았다. 심윤묵은 초기에 부친의 영향과 지도를 받고 서예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초당의 저수량과 구양순의 근엄한 해서 필법으로 입수하여 위로는 ‘二王’ 서예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옛날 누습을 씻어냈다. 그의 해서는 결체가 적절하고 근엄하며, 용필은 비록 가늘기가 실과 같아도 전혀 구차하지 않았다. 점과 획은 필획마다 호응하며 기를 꿰뚫고 신운이 종이에 가득 찼다. 심윤묵은 마음을 따라 하고자 하는 대로 해서ㆍ행서ㆍ초서 관계의 변증법을 부릴 수 있었고, 해서는 행초서의 흐름을 통했으며 행초서는 해서의 정돈됨을 갖추어 자연스럽게 일가를 이루었다.

심윤묵은 필법에 정통했다. 그는 역대의 채옹과 ‘이왕’ 등과 같은 사람의 용필 이론을 실제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총결했다. 그는 고대 서예에 대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섭렵했고, 많은 서예가의 장점이 있는 요지를 섭렵했다. 그는 각종 위비를 임모하고 학습하여 해서의 고졸함과 필력을 길렀다. 진ㆍ당ㆍ송ㆍ원ㆍ명의 각 대서예가, 예를 들면 왕희지ㆍ지영ㆍ안진경ㆍ소식ㆍ황정견ㆍ문징명 등의 글씨를 정밀하게 임서했으며, 넓고 맑은 예술의 원천수를 더하여 자기 서예의 풍채를 첨가했다. 심윤묵은 반세기가 넘도록 쉬지 않고 글씨를 썼으며 형체의 포착과 팔 운용의 체험에 대해 그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유기적인 조합을 완전히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의 만년 글씨는 설령 시력이 미치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구슬을 꿰듯 써 내려가서 전체가 구슬과 같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 절강성 吳興 사람. 원래의 이름은 君?. 자는 中. 호는 秋明ㆍ瓠瓜.

 

47. 袁克文

袁克文(1890-1932)은 중국을 훔친 대도 袁世凱의 차남이다. 그는 비록 원세개의 아들이었지만, 원세개를 황제라고 칭하는 일에 대해 매우 반대했으며, 집안에서 또한 뜻을 얻지 못해 항상 조조의 차남인 陳思王 曹植을 자신에 비유했다. 그는 평소에 문예계의 인사들과 왕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원극문의 글씨는 뜻이 저수량과 안진경 사이에 있었고, 안진경 체의 필법으로 저수량 글씨의 풍운을 구했으며, 굳세고 연미하면서 조금 졸한 필의가 있어 별도로 하나의 풍격을 갖추었다. 특히 그는 대련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전적으로 신문에 올려 값싸게 글씨를 팔았는데, 하루에 40폭의 대련을 써서 전부 팔았고, 그는 이 수입으로 오래된 먹을 구매하여 대련 100여 폭을 써서 친한 벗과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사했다. 또한 ‘五九紀念扇’ 40개를 써서 ‘五月九日放歌’를 기록했다. 그 문장과 글씨에 애국의 정이 충만하니 나라를 팔아버린 부친 원세개와는 선명한 대조를 보인다.

원극문은 글씨를 씀에 또한 특수한 재능이 있었는데, 시중드는 자가 양쪽에서 종이를 잡아당겨 책상에서 떨어져 공중에 매달게 한 연후에 그는 다시 붓을 들어 먹을 묻혀 공중에 매단 종이에 뜻대로 글씨를 썼다. 쓴 글씨는 힘이 종이의 뒷면까지 침투했으나 종이는 상하지 않았으니, 용필과 필력의 파악이 적합했다. 그가 쓴 작은 글씨의 자세는 더욱 기이하고 특별했다. 그는 아편 피우는 것을 즐겨 반듯하게 누워 한 손으로는 붓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종이를 잡고 허공에 의지해 우러러 글씨를 썼다. 그의 소해는 연미하고 수려하면서 굳세며 조금도 비뚤어지거나 평범하고 연약한 병폐가 없었다.

* 하남성 項城 사람. 자는 豹岑?抱存. 호는 寒雲.

 

48. 郁錫璜

『餐霞書話』는 서예학습의 많은 경험담을 기록한 한 권의 저작이다. 그 작가인 郁錫璜(1881-1941)은 시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일찍이 용필ㆍ집필에 각고의 공부를 했다. 그는 처음에 안진경을 배웠고, 후에 또한 구양순ㆍ동기창ㆍ왕희지 등을 섭렵했다. 매번 필력이 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50세 이후에 또한 가짜 붓을 한 자루 만들어 온종일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한가할 때면 가짜 붓을 꺼내어 허공에 썼다. 2년이 지난 후 마침내 서서 팔을 들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이로부터 글씨가 크게 진보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뱀이 사람을 물때는 항상 먼저 머리를 구부리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먼저 허리를 활처럼 구부리는 것을 보았다. 이는 행동하기 전에 기세를 모으는 것이며 역량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서예가가 글씨를 쓸 때도 붓에 먹을 가득 묻혀 정신을 집중하고 기운을 조용히 하며 허리를 구부려 기세를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글씨를 쓰면 삼협의 물에 배가 순풍에 돛단 것처럼 순식간에 천리를 가는 것 같아 신의 도움이 있는 것 같다.

 

* 상해시 사람. 자는 ?菁. 서명은 餐霞散人.

 

49. 胡小石

胡小石(1888-1962)은 남경중앙대학, 광주중산대학, 남경대학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李瑞淸에게 서예를 배워 頓挫와 遲澁의 운필법에 뛰어났다. 아울러 위비의 가로로 넙적한 형세를 변화시켜 세로로 긴 형세로 만들어 고박하고 파리하면서 굳세며, 정기는 안으로 수렴하고 흐르듯 날카로우면서 막힘이 없어 별도의 풍격을 이루었다. 전서ㆍ예서ㆍ해서ㆍ행서ㆍ초서 모두 자기의 독특한 면목이 있었고, 고문자학과 서예이론 모두에 비교적 높은 조예가 있었다. 일찍이 『中國書學史』를 강의했다.

* 절강성 紹興 사람. 이름은 光煇. 호는 債伊?夏序?沙公. 논저는『書藝略論』.

 

 

50. 鄧鐵

鄧鐵(1896-1963)은 蕭?庵에게 글씨를 배웠고, 전각은 趙古泥에게 배웠으며, 1930년대 강남에서 이름을 떨쳤다.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 모두 잘 썼으며, 특히 전각과 전서는 독특한 풍격이 있었다. 광초는 장욱과 회소를 배워 그의 평화롭고 간결하면서 조용한 해서와 선명한 대조를 형성했다.

* 상해 사람. 원래의 이름은 菊初?鈍鐵. 자는 散木이며, 호는 蘆中人?無羌?虛木?糞翁?郁靑?一足??. 저서는 『書法學習必讀』?『續書譜圖解』?『草書寫法』ㆍ『歐陽結體三十六法全注釋』?『篆刻學』.

 

51. 陸維釗

陸維釗(1898-1980)는 절강미술학원 교수로서 해서ㆍ초서ㆍ전서ㆍ예서ㆍ행서의 5체에 모두 연구가 있었고,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그의 서예, 특히 전서와 예서는 예서에 전서가 있고 전서에 예서가 있으며, 아울러 漢簡의 필의를 섞었다. 동시에 과감하고 대담하게 ‘破體’를 만들었는데, 납작하고 모난 형태의 전서와 예서 각 부수를 흩어 놓고 따로 떼어 멀리 가장자리에 포치했다. 처음 보면, 한 글자의 2개 혹은 3개의 부수가 이쪽저쪽으로 흩어져,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다른 행 글자의 어떤 부수와 함께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점과 획의 포치 형세가 돌아보고 분명하며, 글자는 흩어졌어도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결체는 펼쳤고, 필세는 굳세고 험절하면서 심후하고 웅장하다. 서예이론에 있어서 그는 비와 첩이 서로 통해야함을 주장했다

* 절강성 平湖 사람. 자는 微昭. 호는 昭翁. 저서는 『中國書法』.

 

 

Ⅲ. 마치는 말

 

원 저서의 말미에 청나라의 서예가의 특징과 풍모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이 있다. 이에 대한 번역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마치는 말을 갈음하고자 한다.

 

청나라는 명나라에 비해 서예에 비교적 큰 발전이 있었고, 개성과 특색 있는 서예가를 많이 배출했다. 여기에는 사상의 근원과 사회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며, 아래와 같다.

첫째, 북방 소수 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와 청나라를 세운 이후, 漢文化의 정수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것을 중시했으나, 동시에 많은 방면에서 한족에게 만주족 통치자의 풍속과 관습 및 문화 의식을 좇도록 압박했다. 이 자체는 곧 새로운 문화융합의 조류를 일으켰고, 아울러 문화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통치자가 이단의 정신문화 계통을 진압하고자 예술의 하나인 서예로써, 비교적 큰 형식의 개혁을 더욱 용이하게 진행하였고 이는 만주족이 한족을 정치적으로 통치하는데 위험 요소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민족 문화와 서로 대립적인 각도에서 서예라는 한자예술을 대하는 것은, 청나라 소수민족이 통치하는 한족의 반항의식으로 나타나는 자아도취ㆍ자아마비ㆍ자아안위의 작용을 기묘하게 해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런 통치자의 의식적인 융합은 피통치자가 부지불식간의 융합과 함께 서예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둘째, 명나라 이래로부터 서양의 신문화와 신사상은 필연적으로 전형적인 중국문화인 서예에 대해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따라서 서예의 관념이 변하여 ‘館閣體’라는 천편일률적으로 글씨를 쓰는 공부와 서예의 심미관에 대해 회의를 일으켰다. 그러므로 청나라 중기와 말기의 서예가들은 금석고고학과 문자학 연구의 부산품인 상고시대의 종정ㆍ갑골ㆍ석각 서예의 형식, 즉 대전ㆍ소전ㆍ漢隸ㆍ魏碑 등을 빌려 서예 개성의 자유 창조정신을 그 안에 주입했다. 왕탁ㆍ부산ㆍ완원ㆍ포세신ㆍ정판교ㆍ금농ㆍ강유위 등 식견이 탁월한 서예이론가들은 “차라리 졸할지언정 공교하지 말며, 차라기 미울지언정 예쁘게 하지 말라[寧拙勿巧, 寧醜勿媚].”라는 것을 주장하여, 개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주장하고 중용적인 평화로움을 부정했으며, 천진한 자연스러움을 주장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 조작하는 것을 부정했다. 완원의 『南北書派論』, 포세신의 『藝舟雙楫』, 강유위의『廣藝舟雙楫』, 그리고 石濤의 『畵語錄』 및 정판교ㆍ왕탁ㆍ부산 등 이름난 서예가와 화가 모두는 이러한 새로운 서화 심미이론의 열렬한 선동자이자 실천자들이며, 서예 심미평론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들은 실천에서 과감하고 대담한 돌파를 하여, 평범한 것과 다른 행과 열이 없는 ‘亂石鋪街’체를 썼으며, 굵고 가는 변화가 극렬하고 모서리를 뾰쪽하고 예리하게 필봉을 드러낸 ‘漆書’라는 金農體 등을 썼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천여 년 간 서단을 지배해온 거의 획일적인 ‘담담함이 평화로운[淡如平和]’ 것과 ‘윤택함을 쌓아 함유하고 까는[蘊潤含藉]’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는 전통 심미 관념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에 따라 미치고 괴이한 것[狂怪]과 졸하고 추한 것[拙醜]을 서예의 심미 범주에 들여 다양하면서 통일된 더욱 광활한 심미 공간을 펼쳤다. 동시에 서예를 예술로 만들고 단지 공구로 삼지 않는 문화예술의 가치 및 지위를 향상시켰다. 이러한 진보는 위ㆍ진ㆍ남북조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청나라 서예가 비교적 큰 발전이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셋째, 서예기법의 각도에서 말하면, 청나라는 점점 더 부패하고 몰락한 과거제도와 잘 모르면서 고상한 척 하기 위해 문화 활동을 한 황제?왕?공?귀족들이 圓ㆍ光ㆍ齊ㆍ亮의 ‘관각체’를 최대한 고취시켰었다. 이는 지식이 있는 선비들의 반감을 더욱 야기시켰고, 더욱 강렬하게 엽기적인 새로운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글을 쓰고 이론을 세워 새로운 의론을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도 유가의 도통을 저버리고 일반적인 규범과는 판이한 서예의 형식을 찾고 탐색하여, 가면 갈수록 심각한 자신의 인식과 풍부한 감정을 표현했다. 이렇게 크고 풍부한 서예의 표현 형식은 서예가의 예술 창조를 위한 참신한 영역을 열었고, 아울러 이러한 새로운 영역에서 크게 이채로움을 펼쳤다. 앞에서 말한 정판교ㆍ금농 이외에, 또한 하소기?이병수?조지겸?강유위 등도 서예의 풍격과 형식에서 모두 ‘관각체’의 양식 형태에 반대하여 홀로 한 지류를 표방해서 영원히 천추에 세웠다. 그리고 당시의 황제들이 크게 치켜세워 ‘우리나라의 왕희지[我朝王羲之]’?'지금 조정에서 제일[今朝第一]'?‘종요와 왕희지를 뛰어넘음[超邁鍾王]’이라고 받들었던 서예가들은 마침내 奴書의 면목으로 역사발전의 조류에 삼켜지자, 정판교?금농?하소기?조지겸?강유위 등의 보배롭고 귀한 창조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므로 비록 청나라에 기재되어 있는 서예가의 총 인원수가 명나라에 비해 적어 1,100명에 미치지 못하지만, 오히려 가히 종요ㆍ왕희지?구양순?안진경?소식?황정견?미불?채양과 서로 아름다움을 다툴만한 서예의 대가가 몇 명 출현했다.

넷째, 서예가 구성에 대한 내재적인 요소를 보면, 청나라의 봉건통치가 날로 부패하고 몰락함으로 말미암아 재능이 출중하고 좋은 학문적 소양과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서 펼칠 바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비록 펼치더라도 오히려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쳤다. 단지 번뜩이는 재능과 충만한 추구 정신의 내재적 창조성 기질을 전환하여 서학과 금석고고학의 애호에 들여놓게 되었다. 강유위의 『광예주쌍즙』은 바로 그가 정치에서 처음 실패한 후에 전환하여 분발한 결과이다. 이는 곧 청나라의 서예가와 서예이론가들이 조건이 불리한 상황에서 자기의 분투 목표를 조정하여 각종 방식으로 자기의 독특한 인식과 감정을 표현하고 발설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곧 평범하지 않은 서예이론과 서예작품을 탄생시켰고, 그들이 서예가와 서예이론가가 되는 독특한 토대가 된 것이다. 이로부터 역대 서예 대가들의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아울러 역사 속에 빛을 발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칭찬을 받았다.

 

 

 

Ⅳ. 부록 : 중국 청대 황제와 연호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후금 건국 전까지)

대 수

묘 호

시 호

성 명

재위기간

-

청 시조(淸始祖)(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포고리옹순(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청 조조(淸肇祖)(청 태조 추숭)

원황제(原皇帝)

애신각라맹특목(愛新覺羅孟特穆)

1405-1433

-

-

순황제(純皇帝)(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충선(愛新覺羅充善)

1433-1467

-

-

흥황제(興皇帝)(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탈라(愛新覺羅脫羅)

1467-1481

-

-

정황제(正皇帝)(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석보제편고(愛新覺羅錫寶齊篇古)

1481-1522

-

청 흥조(淸興祖)(청 태조 추숭)

직황제(直皇帝)

애신각라복만(愛新覺羅福滿)

1522-1542

-

청 경조(淸景祖)(청 태조 추숭)

익황제(翼皇帝)

애신각라각창안(愛新覺羅覺昌安)

1542-1571

-

청 현조(淸顯祖)(청 태조 추숭)

선황제(宣皇帝)

애신각라탑극세(愛新覺羅塔克世)

1571-1583

제1대

청 태조(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愛新覺羅努爾哈赤)(누르하치)

1583-1616

 

후금 황제와 연호 후금(後金, 1616-1636)

대 수

묘 호

시 호

성 명

연 호

재위기간

제1대

청 태조 (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愛新覺羅努爾哈赤)(누르하치)

천명

(天命)

1616-1626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愛新覺羅皇太極)(홍타이지)

천총

(天聰)

1626-1636

 

청나라 황제와 연호 청(淸, 1636-1912)

대 수

묘 호

시 호

성 명

연 호

재위기간

제2대

청 태종

(淸太宗)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애신각라황태극(愛新覺羅皇太極)(홍타이지)

숭덕

(崇德)

1636-1643

-

청 성종

(淸成宗)(청세조추승)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

애신각라도이곤(愛新覺羅多爾袞)(도르곤)

-

-

제3대

청 세조

(淸世祖)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애신각라복림(愛新覺羅福臨)

순치

(順治)

1643-1661

제4대

청 성조

(淸聖祖)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애신각라현엽(愛新覺羅玄燁)

강희

(康熙)

1661-1722

제5대

청 세종

(淸世宗)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애신각라윤진(愛新覺羅胤?)

옹정

(雍正)

1722-1735

제6대

청 고종

(淸高宗)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

건륭

(乾隆)

1735-1795

제7대

청 인종

(淸仁宗)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애신각라옹염(愛新覺羅?琰)

가경

(嘉慶)

1795-1820

제8대

청 선종

(淸宣宗)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애신각라민녕(愛新覺羅旻寧)

도광

(道光)

1820-1850

제9대

청 문종

(淸文宗)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애신각라혁저(愛新覺羅奕?)

함풍

(咸豊)

1850-1861

제10대

청 목종

(淸穆宗)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애신각라재순(愛新覺羅載淳)

동치

(同治)

1861-1875

제11대

청 덕종

(淸德宗)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애신각라재첨(愛新覺羅載?)

광서

(光緖)

1875-1908

비정통

-

-

애신각라부준(愛新覺羅溥儁)

보경

(保慶)

1899

제12대

청 공종

(淸恭宗)

민황제 (愍皇帝)(말대황제<末代皇帝>,손황제<遜皇帝>)

애신각라부의(愛新覺羅溥儀)(푸이)

선통

(宣統)

1908-1912

 

 

 

출처 : 한국서학연구소
글쓴이 : 해연 김영희 원글보기
메모 :

소동파 [, 1036~1101]

 

출생. 자 자첨(), 호 동파거사(), 애칭() 파공() ·파선(), 이름 식(). 소순()의 아들이며 소철()의 형으로 대소()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앙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미움을 받고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은 읽지 않는다”고 한 말이 재앙을 불러 서울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 등의 대관()을 역임하였다.

황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그는 중국 최남단의 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주변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은 새로운 시경()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는 그의 불후의 명작이다.

 

黃庭堅(1045~1105), 米?(1051~1107), 蔡襄(1012~1067) 과 함께 송 4대가 로 불리는 명필이며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받아 공부하였다. 시 서 화 에 모두 능했고 해서와 행서를 특히 잘 썼다. 황주한식시권은 서예사에서 세번째로 우수한 행서작품으로 손꼽힌다. 황주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 세번째로 맞은 한식절의 우울한 심정을 짓고 썼다.

 

 

 

               

                                                                                                              淳化閣帖의 일부

 

 

 

 

 

赤壁賦

 

 

 

 

 

赤壁賦

 

 

 

 

64세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상해 박물관 소장

 

 

 

 

黃州 寒食詩卷  46세 때 작품 대만 박물관 소장

 

초입부는 가는다란 목소리로 호소하기 시작하여 마음을 다잡고 나가다가 春江에 이르러 다소 톤을 높이고 破?조에 이르러서는 격앙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시의 내용과 필체의 시각적효과가 맞아 떨어지니 명작중의 명작이라고 꼽히는 이유다.

 

 

 

이백의 시 58세 때 작품

[출처] 소동파의 서예세계|작성자 림호

출처 : 서각사랑 : 송계
글쓴이 : 송계 원글보기
메모 :
문화재청은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 김정희 예서대련 호고연경 등 26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새롭게 지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한 서예 26건은 문화재청이 2010년에 추진한 「‘우리나라의 옛글씨(조선후기)’ 일괄공모를 통한 조사·지정」 사업의 성과물이다.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동산문화재 일괄 공모 조사·지정’은 문화재 지정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높이고 소외 분야 문화재를 재조명하여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같은 유형의 문화재를 일괄 조사하고 비교·검토를 거쳐 국가문화재로 지정하는 사업으로 2005년도에는 백자대호(보물 지정 5건), 2006년도에는 초상화(보물 지정 33건), 2007년도와 2008년도에는 옛지도(보물 지정 35건), 그리고 작년에는 조선왕실의 어필 11건과 조선전기 명필의 서예작품 9건을 지정한 바 있다.

▲김정희 예서대련 호고연경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
▲김정희 예서대련 호고연경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
 
올해는 지난 2월 부터 두 달간 조선 후기(17-19세기)의 명필을 대상으로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을 위한 일괄공모를 하여 조사, 검토, 심의를 실시했다. 그 결과,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을 비롯한 26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보물 제1667호)은 조선의 고승 승병장인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이 송대 선문(禪門)을 대표하는 마조(馬祖)ㆍ백장(百丈)ㆍ황벽(黃蘗)ㆍ임제(臨濟)의 법문을 초록한 서첩으로 조선전기 고승의 필적이 매우 드문 조선시대 서예사에서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17세기를 대표하는 유학자ㆍ전서명필인 미수 허목(1595-1682)의 ‘허목 전서 함취당’ (보물 제592-2호), ‘허목 전서 애민우국’(보물 제592-3호)은 허목의 대자(大字) 전서풍을 대표하는 편액으로 허목의 인장까지 찍혀 있어 서예사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되었다.

▲허목 전서 함취당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
▲허목 전서 함취당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
 
18세기 대중적 명필이던 원교 이광사(1705-77)가 쓴 ‘이광사 필적 원교법첩’(보물 제1677-2호)은 옥색ㆍ담옥색ㆍ검은색 비단에 먹과 금니를 사용하여 작고 큰 글자를 전예해행초 오체로 정성스럽게 쓴 서첩으로 현존하는 이광사의 수많은 서첩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작첩(作帖) 방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광사의 서론적(書論的) 입장을 잘 대변해주는 중요한 서예사 자료로 평가되었다.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적 2건을 보물로 지정하였는데, 특히 19세기 전반에 쓴 ‘김정희 예서대련 호고연경’(보물 제1685-2호)은 내용에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평소 금석(金石)과 경서(經書) 연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또 협서에서 그가 지향했던 예서관(隸書觀)을 간명하게 피력한 점이 돋보이는 중요한 서예사 자료라고 평가되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26건의 서예작품에 대한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문의: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042-481-4686/7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三道軒정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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疆勉(강면) : 부지런히 굳세게 삼

健康(건강) : 신체적 ·정신적으로 병이 없는 상태

儉德(검덕) : 검소한 마음가짐

儉素(검소) : 치레하지 않고 수수함. 꾸밈이 없이 무던함

儉約(검약) : 검소하며 절약함

謙德(겸덕) : 겸손한 덕

謙遜(겸손) :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춤

兼愛(겸애) :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두루 사랑함

恭敬(공경) :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존경함

公正(공정) : 공평하고 올바름

寬沖(관충) :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임

龜壽(귀수) : 거북처럼 오래살기를 기원함

克己(극기) : 자기의 욕망이나 충동·감정 따위를 의지로 눌러 이김

勤儉(근검) : 부지런하고 검소함

勤勉(근면) : 부지런히 힘씀

寬以居(관이거) : 너그럽고 도량이 큼

窮則通(궁칙통) : 세상의 모든 이치는 궁하면 통함

刻骨難忘(각골난망) : 입은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뼈에 깊이 사무치어 결코 잊히지 않게 함

竭力盡忠(갈력진충) : 힘과 능력을 다함

開卷有益(개권유익) : 책을 열면 이로움이 있음

居利思義(거리사의) : 이득을 보고 옳음을 생각함

居安思危(거안사위) :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함

健康家族(건강가족) : 몸과 마음이 건강한 가족

格物致知(격물치지) : 사물의 이치를 잘 연구하여 아는 것을 확실하게 함

見利思義(견리사의) :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함

敬天愛人(경천애인) :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함

苦盡甘來(고진감래) : 고생 끝에 낙이 옴

公平無私(공평무사) :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음

過猶不及(과유불급) :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 중용(中庸)이 중함 - 論語

觀物察己(관물찰기) : 천지의 만물을 보고 자기자신을 살핌

寬仁厚德(관인후덕) : 너그럽고 어질며 온후하고 덕망있게

君子務本(군자무본) : 기초를 튼튼히 닦음

克己復禮(극기복례) : 자기의 욕망을 버리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면 복이 옴

勤爲至寶(근위지보) : 부지런함은 지극히 보배가 됨

勤者必成(근자필성) : 부지런한 자는 반드시 성공함

金石之交(금석지교) : 쇠나 돌과 같이 항상 바뀜없이 굳건한 친구 사이

金玉滿堂(금옥만당) : 금옥관자가 방 안에 가득하다는 뜻. 좋은 일이 항상 집에 있게 함

氣山深海(기산심해) : 기운은 산처럼, 마음은 바다처럼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 : 집안이 평안하고 가족들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쉽게 극복될 수 있음 - 明心寶鑑

經書滿腹中(경서만복중) : 넓은 학문을 가진 사람이 됨

過則勿憚改(과칙물탄개) : 자신의 허물이 있으면 주저없이 고침

 

努力(노력) : 힘을 다하여 애씀

樂善不倦(낙선불권) :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있으며 권태로움은 있을 수 없음

樂在人和(낙재인화) : 집안의 즐거움은 화합에 있음

樂天知命(낙천지명) :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천명을 깨달아 즐김

訥言敏行(눌언민행) :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함

 

道(도) :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깊이 깨달은 지경

多情(다정) : 매우 정다움. 사귐이 두터움

挑戰(도전) : 어려운 일에 맞섬

丹心(단심) : 정성스러운 마음

端正(단정) : 바르고 얌전함

達成(달성) : 뜻한 바를 이룸

大志(대지) : 큰 뜻

惇惠(돈혜) : 인정을 베풀고 남과 사이 좋게 지냄

德不孤(덕불고) : 덕 있는 사람은 항상 외롭지 않음

多言數窮(다언수궁) : 말을 조심함

多情佛心(다정불심) : 정이 많고 자비스러운 마음

膽大心小(담대심소) : 도량은 크게 생각은 세밀하게

大器晩成(대기만성) : 남달리 뛰어난 큰 인물은 보통 사람보다 늦게 대성한다는 말 - 老子

大道無門(대도무문) : 높고 넓은 뜻을 품고 만인이 따를 수 있는 옳은 길을 택함

德無常師(덕무상사) : 덕을 닦음에 정해진 스승은 없음

德必有隣(덕필유린) : 덕은 반드시 이웃이 있음

篤學力行(독학역행) : 학문에 정진함

登高自卑(등고자비) : 자신의 위치가 높아질수록 몸가짐을 겸손하게 함

多欲則傷生(다욕칙상생) : 욕심을 부리지 않음

 

無所有(무소유) : 소유에 집착하지 않음

萬事亨通(만사형통) : 모든 일이 뜻한 바대로 잘 이루어짐

明鏡止水(명경지수) : 맑고 깨끗한 마음

名實相符(명실상부) : 이름과 실상이 서로 꼭 맞음

無念無想(무념무상) :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

無信不立(무신불입) : 믿음을 가짐

務實力行(무실역행) : 거짓없이 진실에 힘쓰고 옳은 일에 힘써 실행함

無言實踐(무언실천) : 모든 일은 말없이 실천함

無忍不勝(무인불승) : 인내하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음

無爲自然(무위자연) : 있는 그대로의 자연 - 老子

無汗不成(무한불성) : 땀을 흘리지 않으면 이루지 못함

萬古爲世程(만고위세정) : 후손에게 모범적인 사람이 됨

 

博愛(박애) : 널리 사랑함

反省(반성) : 자기의 언행·생각 따위의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을 깨닫기 위해 스스로를 돌이켜 살핌

寶儉(보검) : 검소한 것이 보배

輔德(보덕) : 남의 은덕을 갚음

佛心(불심) : 부처의 자비한 마음

博文約禮(박문약례) : 널리 배우고 간추려 실천함

百練千摩(백련천마) : 백번 연습하고 천번 닦음

百事大吉(백사대길) :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짐

百忍萬和(백인만화) : 백번 참으면 만사가 화목

百忍三思(백인삼사) : 백번을 참고 세 번을 생각함

報本之心(보본지심) : 근본에 보답하는 마음가짐

父慈子孝(부자자효) : 어버이는 인자하고 자식은 효도함

不愧屋漏(불괴옥루) : 어떠한 곳에 있어도 행동을 신중히 함

不言實行(불언실행) : 착한 일은 말 보다 행함을 우선함

不撓不屈(불요불굴) : 어떠한 일에도 굽히지 않음

不遺餘力(불유여력) : 최선을 다함

鵬蒙蟻生(붕몽의생) : 꿈은 원대하게 생활은 부지런하게

氷淸玉潤(빙청옥윤) : 인품이 맑고 아름다운 사람

百忍克百難(백인극백난) : 백번 참는 것이 백가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卑己而尊人(비기이존인) :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임

 

成德(성덕) : 덕을 닦아 큰 인격을 이룸.

誠明(성명) : 성실하고 밝음

誠信(성신) : 믿음을 참되게

誠實(성실) : 정성스럽고 참됨. 착하고 거짓이 없음

洗心(세심) : 맑은 물과 같이 마음을 깨끗하게 함

淑德(숙덕) : 좋은 행실과 착한 덕을 가짐

順德(순덕) : 착함을 따라가자

順理(순리) : 도리에 순종함. 마땅한 도리나 이치

愼獨(신독) : 홀로 있을때도 도리에 한치도 어긋나지 않도록 삼감 - 中庸

信義(신의) : 믿음과 의리

實踐(실천) : 실제로 행함

心淸(심청) : 마음은 물과 같이 깨끗함

心和(심화) : 평화로운 마음

思無邪(사무사) : 사사로움이 없이 공정한 생각을 함

誠敬信(성경신) : 성실 공경 믿음

誠敬直(성경직) : 성실 공경 정직

歲寒操(세한조) : 권세와 이득에 치우치지 않음

信望愛(신망애) : 믿음 소망 사랑

事必歸正(사필귀정) : 일은 반드시 바름으로 돌아감

山高水長(산고수장) : 군자의 덕은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음

殺身成仁(살신성인) : 자기 자신을 희생하여 옳은 일을 함

三思一言(삼사일언) : 세 번 생각한 후 말함

三省五辛(삼성오신) : 매일 세 번 내 자신의 몸가짐을 반성함

相待如賓(상대여빈) :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위하고 살아야 함

上善若水(상선약수) :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이 막힘이 없음 - 道德經

尙賢貴德(상현귀덕) : 어진 사람을 높이 여기고 도덕을 중히 여김

善德公理(선덕공이) : 착함과 덕은 같음

善意行樂(선의행락) : 착한 일 하기를 즐거워함

先人後己(선인후기) :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를 뒤에 생각하는 겸손한 덕

誠勤是寶(성근시보) : 성실과 근면이 보배

成實在勤(성실재근) : 성공은 부지런함에 있음

誠愛敬信(성애경신) : 성실과 사랑, 공경과 믿음있는 생활

修己治人(수기치인) :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림

修德立義(수덕입의) : 덕을 닦고 항상 의를 세움

修德砥行(수덕지행) : 바른 마음으로 행실을 닦음

手不釋卷(수불석권) :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음. 즉, 늘 책을 가까이 하며 읽음 - 三國志

壽山福海(수산복해) : 산처럼 오래살며 바다처럼 복을 많이 받음

修身齊家(수신제가) :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야 가정도 편안해짐

水滴石穿(수적석천) : 물방울이 돌을 뚫듯이 계속 노력하면 이루어짐

熟廬斷行(숙려단행) :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고 결단을 내린 뒤에 실행함

是非之心(시비지심) : 선악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을 가짐

施人布德(시인포덕) : 사랑과 덕을 베풀고 사는 삶

始終一貫(시종일관) :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방침이나 태도로 나감

信心直行(신심직행) : 마음에 옳다는 믿음이 있으면 곧바로 행동함

信愛忍和(신애인화) : 믿고 사랑하며 인내하며 화합함

信義守禮(신의수례) : 신의로써 예를 지킴

神淸智明(신청지명) : 정신이 맑으면 지혜도 맑음

實事求是(실사구시) :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함

失信不立(실신부립) : 신용을 지킴

心德勝命(심덕승명) : 심덕을 닦으면 운명도 개척할 수 있음

深思敏行(심사민행) : 깊이 생각하고 빠르게 행동함

心身修鍊(심신수련) : 몸과 마음을 닦고 익힘

深造自得(심조자득) : 학문을 깊이 닦으면 마음에 깨달음을 얻음

心淸事達(심청사달) : 마음이 밝아야 모든 일이 이루어짐

歲月不待人(세월부대인) :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음

笑門萬福來(소문만복래) : 웃으면 만가지 복이 들어옴

 

熱誠(열성) : 뜨거운 정성. 즉, 어떠한 일에 대한 대단한 정성

友愛(우애) : 형제간이나 친구 사이의 도타운 정과 사랑

育德(육덕) : 덕을 쌓음

陰德(음덕) : 남 앞에 드러내지 않고 베푼 덕행

忍思(인사) : 모든 일을 잘 참고 생각함

忍耐(인내) : 참고 견디어 냄

仁靜(인정) : 마음이 어질고 조용한 인품

人和(인화) : 여러 사람의 마음이 서로 화합함

日新(일신) : 날로 새롭게

一心(일심) : 한마음

立身(입신) : 몸을 바르게 세움

愛信同(애신동) : 사랑 믿음 협동

染常淨(염상정) : 어느 곳에 있더라도 마음을 청결히 함

溜穿石(유천석) : 끈질기게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함

人乃天(인내천) : 사람이 곧 하늘 - 天道敎

仁智勇(인지용) : 인자 슬기 용기

安居危思(안거위사) : 편안하고 무사한 때일수록 어려운 일이 닥칠 때를 생각하여 미리 대비함

安不忘危(안불망위) : 편안한 때에도 마음을 놓지 않고 늘 스스로 경계함

安貧樂道(안빈낙도) :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김

愛人以德(애인이덕) : 사람을 덕으로써 사랑함

愛之實踐(애지실천) : 사랑의 실천

養德遠害(양덕원해) : 덕을 쌓고 해를 경계함

量力而動(양력이동) : 자기 힘에 맞게 일을 하면 실패가 없음

言行一致(언행일치) :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남 없이 일치함

易地思之(역지사지) :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바꾸어 놓고 생각해봄

念成執一(염성집일) : 한가지 일에 집중하여 생각하면 성공함

吾唯知足(오유지족) :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음

溫故知新(온고지신) : 옛것을 연구하여 거기서 새로운 지식이나 도리를 찾아냄 - 論語

溫柔敦厚(온유돈후) : 따뜻하고 부드럽고 알뜰하고 착함

外柔內剛(외유내강) :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 마음속은 단단하고 굳셈

欲尊先謙(욕존선겸) : 남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면 자신부터 먼저 겸손하여야 함

勇猛精進(용맹정진) : 용맹하게 정진함

愚公移山(우공이산) : 쉬지않고 열심히 하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

元亨利貞(원형이정) : 크고 형통하고 이롭고 곧게 - 周易

有備無患(유비무환) :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음 - 書經

有始有終(유시유종) : 시작한 일을 끝까지 마무리 함

柔和善順(유화선순) : 부드럽고 평화롭고 착하고 순수한 마음

殷鑑不遠(은감불원) : 남의 실패를 보고 자신의 경계함

意志堅固(의지견고) : 뜻이 굳셈

以德服人(이덕복인) :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킴

因果應報(인과응보) :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서 뒷날 길흉화복의 갚음을 받게 됨- 佛敎

仁德萬里(인덕만리) : 인과 덕은 만리를 비춤

仁道善行(인도선행) : 어진 도리로 착하게 행함

仁愛恭儉(인애공검) : 인자하고 우애하고 겸손하고 검약함

仁義禮智(인의예지) : 어질고 의롭고 예의바르고 지혜로움

人一己百(인일기백) : 남들이 한번 할 때 자기는 백번을 함

仁者無憂(인자무우) : 어진 사람에게는 근심이 없음

仁者無敵(인자무적) :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음

忍中有和(인중유화) : 인내속에 화목이 있음

仁智明達(인지명달) : 인과 지를 분명히 통달함

忍之爲德(인지위덕) : 참는 것이 덕이 됨

因敗成勝(인패성승)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一家和親(일가화친) : 온 집안이 화목하고 친함

一刻千金(일각천금) : 매우 짧은 시간도 천금과 같이 귀중함

一諾千金(일낙천금) : 한 번 승낙한 일은 천금같이 귀중함

一念通天(일념통천) : 한결같은 마음으로 노력하면 하늘도 감동시켜 무슨 일이든 이룰 수 있음

一絲不亂(일사불란) : 질서나 체계 따위가 정연하여 조금도 흐트러진 데나 어지러운 데가 없음

一心萬能(일심만능) : 무슨 일이든 한마음이 되어 하게 되면 안 될 일이 없음

一心正念(일심정념) : 한마음 바른 생각

一言千金(일언천금) : 한마디의 말이 천금

一日一善(일일일선) : 하루에 한가지 선행

一之爲甚(일지위심) : 한번 저지른 실수는 두 번하지 않음

日進月步(일진월보) : 날로 달로 끊임없이 진보함

日就月將(일취월장) : 날로 달로 자라거나 진보함

立身揚名(입신양명) : 몸을 세워서 이름을 날림

立志爲先(입지위선) : 뜻을 세우는 것을 우선으로 삼음

志在千里(입재천리) : 뜻을 원대하게 둠

業精勤荒嬉(업정근황희) : 학문에 힘씀

爲善無近名(위선무근명) : 선생을 베풀더라도 소문이 나지 않게 함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 : 어질고 의롭고 예의바르고 지혜롭고 믿음이 있는 사람

日新又日新(일신우일신) : 날마다 새로워짐

一日難再晨(일일난재신) : 지난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음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냄

 

自强(자강) : 스스로 가다듬어 힘씀

自立(자립) : 남에게 의지하거나, 남의 지배를 받거나 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해 나감

慈悲(자비) : 남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김

自助(자조) : 스스로 자기를 도움

自主(자주) :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일

積善(적선) : 착한 일을 많이 함

正道(정도) : 올바른 길. 바른 도리

精誠(정성) : 온갖 성의를 다하려는 참되고 거짓이 없는 마음

正心(정심) : 마음을 바르게 함

正義(정의) :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正直(정직) : 마음이 바르고 곧음

精進(정진) : 정성을 다하여 노력함.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음

種德(종덕) : 남에게 은덕이 될 일을 행함

中庸(중용) : 어느 쪽으로나 치우침이 없이 온당한 일, 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알맞은 일- 四書

中正(중정) :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곧고 바름

至誠(지성) : 지극한 정성. 더없이 성실함

直己(직기) : 몸을 바르게 가짐

執念(집념) : 마음에 깊이 새겨 뗄 수 없는 생각. 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쏟음.

智德體(지덕체) : 지육(智育), 德育(덕육), 體育(체육)

智仁勇(지인용) : 슬기 인자 용기

眞善美(진선미) : 인간이 이상으로 삼는 참다움, 착함, 아름다움을 일컫는 말

自彊不息(자강불식) : 스스로 힘쓰며 쉬지 아니함. 즉, 열심히 노력함

自利利他(자리이타) : 남도 이롭고 나도 이롭게 함

慈悲無敵(자비무적) : 자비로우면 적이 없음

自勝自强(자승자강) : 자신을 이기는 자가 강한 자임

自我反省(자아반성) : 나 자신의 일이 바른지 그른지 항상 반성함

積德爲福(적덕위복) : 덕을 쌓으면 복이됨

積善成德(적선성덕) : 선을 쌓아 덕을 이룸

積小成大(적소성대) : 작은 것도 많이 쌓이면 큰 것을 이룸

積土成山(적토성산) : 티끌모아 태산

轉敗爲功(전패위공) : 실패가 바뀌어 오히려 공이 됨

切磋琢磨(절차탁마) : 학문이나 덕행 등을 배우고 닦음 - 詩經, 論語

正道善行(정도선행) : 바르고 착함을 행함

正道正行(정도정행) : 올바른 도리 올바른 행실

正善如流(정선여류) : 바르고 착함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음

正心誠意(정심성의) :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참되게 함

正心修德(정심수덕) :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을 닦음

朝過夕改(조과석개) : 잘못이 있으면 고치는 것이 바른 것임

尊聞行知(존문행지) : 폭넓게 듣고 실천하는 것을 귀중하게 앎

晝耕夜讀(주경야독) :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한다. ⇒ 틈틈이 열심히 공부한다는 의미

知德能努(지덕능노) : 옳게 알고 행실을 바르게 하고 모든 일에 힘씀

知道不惑(지도불혹) :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헤매지 아니함

至誠感天(지성감천) :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함

知足不辱(지족불욕) : 만족함을 알고, 욕심없이 삼

知足常樂(지족상락) : 자기자신에 만족하면 항상 즐거움

知止不殆(지지불태) : 분수를 지킴

知彼知己(지피지기)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孫子兵法

知行合一(지행합일) : 참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설- 陽明學

進德修業(진덕수업) : 선행 선덕으로 업이 이루어지는 것

眞如孝行(진여효행) : 진실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효도함

塵積爲山(진적위산) : 티끌이 모아 태산

 

創意(창의) : 새로운 생각(착상)이나 의견을 생각하여 냄

淸德(청덕) :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

淸樂(청락) : 맑은 것은 곧 즐거움

靑眞(청진) : 항상 푸르고 참다운 마음을 가짐

初心(초심) : 처음에 먹는 마음

最善(최선) : 온 정성과 능력. 가장 좋거나 훌륭한 것

忠恕(충서) : 스스로 정성을 다하며 남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앎 - 論語

忠勇(충용) : 충성과 용맹

忠孝(충효) : 충성과 효도

天地人(천지인) : 하늘, 땅, 사람

忠義順(충의순) : 참되고 의롭고 순하게

處染常靜(처염상정) :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깨끗함

天長地久(천장지구) : 하늘과 땅은 영원함. [흔히 장수하기를 빌 때 하는 말]

淸福相傳(청복상전) : 청렴하고 결백한 삶을 행복한 교훈으로 자손에게 전함

淸貧正直(청빈정직) : 성정이 청렴하여 가난해도 마음을 바르고 곧게 가짐

淸廉潔白(청렴결백) :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재물 욕심이 없음

淸心正行(청심정행) : 맑은 마음 바른 행동

靑雲之志(청운지지) : 높은 이상

淸正廉潔(청정염결) : 맑고 바르고 청렴 결백함

初志不變(초지불변) : 처음의 계획한 뜻이 끝까지 바뀌지 않음

初志一貫(초지일관) : 처음에 세운 뜻을 이루려고 끝까지 밀고 나감

忠誠孝道(충성효도) :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함

忠孝傳家(충효전가) : 충성과 효도를 가풍으로 전함

忠孝悌信(충효제신) : 충성 효도 우애 신의

七顚八起(칠전팔기) : 몇번 실패해도 굽히지 않고 일어서서 분투함을 이르는 말

初心則至心(초심즉지심) : 처음 마음이 곧 지극한 마음

 

他山之石(타산지석) :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도 자기의 지덕(智德)을 닦는데 도움이 됨 - 詩經

 

抱負(포부) : 앞날에 대한 희망, 계획 등을 마음속에 안고 품음

 

賢德(현덕) : 어진 덕행

和睦(화목) : 뜻이 맞고 정다움

孝道(효도) : 어버이를 잘 섬김

希望(희망) : 이루거나 얻고자 기대하고 바람. 기망(冀望). 소망. 희원(希願).

學如不及(학여불급) : 학문은 완성이 없으니 더욱 힘써야 함 - 論語

學原於思(학원어사) : 학문은 생각하고 궁리하는 것이 근원임

行不無得(행불무득) : 행하지 아니하면 얻는 것이 없음

香遠益淸(향원익청) : 향기는 멀리갈수록 맑음을 더함

向學立志(향학입지) : 학문에 뜻을 세움

螢雪之功(형설지공) : 반딧불과 눈을 통해 열심히 공부하여 성공함

浩然之氣(호연지기) :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정기 - 孟子

和氣滿堂(화기만당) : 집안에 온화함이 가득함

和信家樂(화신가락) : 화목하고 믿음이 있으면 집안이 즐거음

弘益人間(홍익인간) : 사람을 널리 돕자

孝悌忠信(효제충신) : 효도 우애 충성 신의

孝行正禮(효행정례) : 부모를 섬기듯 다른 사람에게 하면 모든 예절이 바름

孝百行之源(효백행지원) : 효는 백가지 행실의 근원임

孝子卽忠臣(효자즉충신) :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나라에도 충성함

출처 : 영월김삿갓카페
글쓴이 : 백월초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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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聖最爲難 초성최위난

초성 되기가 가장 어려우니

龍蛇競筆端 용사경필단

용과 뱀이 붓끝에서 다툰다.  

毫釐雖欲辨 호리수욕변

아주 적은 차이일지라도 분별되어야 하니

體勢更須完 체세갱수완

그래야 글씨 형체가 더욱 완전해 진다.

毫釐: 자와 저울의 단위인 호와 리.

‘매우 적은 분량’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有點方爲水 유점방위수

점이 있으면 마침내 水 자가 되고

空挑却是言 공도각시언

그냥 휘어 쓰면 도리어 言 자가 된다.  

宀頭無左畔 면두무좌반

宀(집 면) 자 머리에서 왼쪽 점은 없애고

辵遶闕東邊 착요궐동변

辵(쉬엄쉬엄 갈 착) 자는 동쪽(왼쪽) 가를 두른다.

長短分知去 장단분지거

획의 길고 짧음으로 知와 去를 區分하고

微茫視每安 미망시매안

微細하거나 길게 이어짐으로 每와 安의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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步觀牛引足 보관우인족

步는 牛의 다리를 당기는듯 하고 

羞見羊踏田 수견양답전

羞는 羊이 밭 위에 있는 것 같다 

六年宜爲稟 육년의위품

六과 年을 이어 쓰면 마땅히 稟이 되고

七紅卽是袁 칠홍즉시원

七에 紅을 이어 쓰면 곧 袁이 된다.  

十朱知奉已 십주지봉이

十과 朱는 奉이 됨을 알고

三口代言宣 삼구대언선

三과 口는 言을 대신한다.  

左阜貝丁反 좌부패정반

좌부방 阜(阝, 언덕 부)와 貝는 丁과 反文이고

右刀寸點彎 우도촌점만

오른쪽에 붙는 刀와 寸은 點과 갈고리로 씌어진다.  

曾差頭不異 증차두불이

曾과 差의 머리 모습은 다르지 않고

歸浸軆同觀 귀침체동관

歸와 浸의 몸도 같아 보인다.  

孤殆通相似 고태통상사

孤와 殆는 서로 비슷하고

矛柔摠一般 모유총일반

矛와 柔도 매 一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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采夆身近取 채봉신근취

采와 夆은 몸 가까이에서 (차이점을) 취하고

熙照眼前看 희조안전간

思惠魚如畫 사혜어여화

思,惠,魚는 畵와 같고

禾乎手似年 화수호사년

禾, 手, 乎, 年은 서로 닮았고

既防吉作古 기방길작고

更慎達為連 경신달위련

寧乃繁於叔 녕내번어숙

侯兮不減詹 후혜불감첨

稱攝將屬倚 칭섭장속의

稱과 攝은 마땅히 屬을 의지해야 하고

某棗借來旋 모조차래선

某와 棗는 來를 빌어서 돌려야 한다.

慰賦眞難別 위부진난별

慰와 賦는 참으로 구별하기 어렵고

朔邦豈易參 삭방기역삼

朔과 邦은 어찌 參을 바꾼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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掃搊休得混 소추휴득혼

掃와 搊는 혼동하지 말고

彭赴可相侵 팽부가상침

彭과 赴는 가히 서로 침노한다.

搊(탈 추; 手-총13획; chōu) 악기를 손가락으로 타다.

世老偏多少 세로편다소

世와 老는 불완전하게나마 어느 정도 (닮았고)

謝衡正淺深 사형정천심

謝과 衡은 正히 淺深이 있으나 (닮았다).

酒花分水草 주화분수초

酒와 花는 三水邊과 草頭로 區分되고

枝放認支文 지방인지문

枝와 放은 支傍과 文傍으로 認識한다.

可愛郊鄰鄒 가애교린추

가히 사랑할만한 일은 郊가 鄒를 이웃함이요

偏宜諶友湛 편의심우담

오로지 화목한 것은 諶이 湛를 벗함이다.

  諶(참 심; 言-총16획; chén) 진실로

  湛(즐길 담; 水-총12획; zhꐃn) 빠지다.

習觀羲獻跡 습관희헌적

免使墨池混 면사묵지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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常收無用直 상수무용직

常과 收는 直線을 사용하지 않고

密上不須宀 밀상불수면

密의 위에 반드시 宀을 사용하지 않는다.

才畔詳牋牒 재반상전첩

才의 경계는 牋과 牒에 자세하고

水元看永泉 수원간영천

水는 원래 永과 泉에 보인다.

  牋(장계 전; 片-총12획; jiꐀn) 편지, 문서, 종이 

柬同東且異 간동동차이

柬은 東과 같은 듯하나 다르고

府象辱還偏 부상욕환편

府는 辱을 닮은 듯하나 도리어 偏差가 있다.

才傍干成卉 재방간성훼

勾盤柬作闌 구반간작란  

鄕卿隨口得 향경수구득

鄕과 卿은 口를 따라 얻어지고

愛鑿與奎聯 애착여규련

愛와 鑿은 奎와 더불어 이어진다.

玉出頭為武 옥출두위무

干銜點是丹 간함점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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蹄號應有法 제호응유법

雲虐豈無傳 운학기무전

盜意腳同適 도의각동적

熊絃身似然 웅현신사연

矣其頭少變 의기두소변

兵共足雙聯 병공족쌍련

莫寫包庸守 막사포용수

勿書綠是緣 물서록시연

謾將繩當臘 만장승당랍

休認寡為寛 휴인과위관

卽脚猶如恐 즉각유여공

卽 자의 다리는 恐 자와 같고

還身附近遷 환신부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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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容審有象 한용심유상

憲害寘相牽 헌해치상견

滿外仍知備 만외잉지비

醫初尚類堅 의초상류견

直須明謹解 직수명근해

亦合別荊前 역합별형전

顙向戈牛始 상향과우시

顙은 戈, 牛로 시작하고

雞須下子先 계수하자선

雞는 마땅히 下, 子를 먼저 쓴다.

  顙(이마 상; 頁-총19획; sꐀng, sꐂng)

摗之非是乏 수지비시핍

之를 취하나 乏이 아니요

句木可成村 구목가성촌

木의 끝을 구부리면 가히 村을 이룬다.

  摗(취할 수; 手-총14획; sǒng, sōu)  

蕭簫頭先辯 소소두선변

蕭와 簫는 머리를 먼저 분변하고

寅賓腹裏推 인빈복리추

寅과 賓은 속 부분이 변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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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加心上惡 지가심상악

之를 心 위에 더하면 惡이 되고

兆載免頭龜 조재면두구

兆를 免에 얹으면 龜가 된다.

點至堪成急 점지감성급

勾干認是卑 구간인시비

壽宜圭與可 수의규여가

齒記止加司 치기지가사

右邑月何異 우읍월하이

우부방(고을읍; 邑)과 月이 어찌 다르리오

左方才亦爲 좌방재역위

좌변의 方과 才 또한 같다.

擧身爲乙未 거신위을미

擧의 몸은 乙과 未로 이루어지고

登軆用北之 등체용북지

登의 몸은 北과 乙을 사용한다.

路左言如借 로좌언여차

路의 왼쪽은 言을 빌린 것과 같고

時邊寸莫違 시변촌막위

時의 가장자리는 寸과 어긋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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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勾添反慶 초구첨반경

草와 勾에 反을 더하면 慶이 되고

乙九貼人飛 을구첩인비

乙과 九에 人을 붙이면 飛가 된다.

惟末分憂夏 유말분우하

오직 마지막 한 획으로 憂와 夏를 구분하고

就中識弟夷 취중식제이

가운데 한 획으로 弟와 夷를 판별한다.

齋齊曾不較 재제증불교

流染却相依 류염각상의  

或戒戈先設 혹계과선설

皐華腳預施 고화각예시

睿虞元彷彿 예우원방불

拒捉自依稀 거착자의희

頂上哀衾別 정상애금별

글자 꼭대기로 哀와 衾은 구별되고

胸中器谷非 흉중기곡비

글자 속으로 器와 谷이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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止知民倚氏 지지민의씨

民이 氏에 依支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不道樹多枝 불도수다지

慮逼都來近 려핍도래근

慮와 逼은 모두 비근하고

論臨勿妄窺 론임물망규

論과 臨은 (차이가 있을까 하고) 허망하게 엿보지 말라

起旁合用短 기방합용단

遣上也同迷 견상야동미

欲識高齊馬 욕식고제마

高와 齊와 馬를 판별하도록 하고

須知兕旣兒 수지시기아

兕와 旣와 兒를 모름지기 분별하라.

  兕(외뿔들소 시; 儿-총8획; sì) 무소의 암컷

寺專無失錯 사전무실착

巢筆在思維 소필재사유

丈畔微彎使 장반미만사

丈의 경계를 조금 굽히면 使가 되고

孫邊不緖絲 손변불서사

孫의 邊에 시초가 없으면 絲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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莫敎凡作願 막교범작원

凡은 願이 되게 하지 말고

勿使雍爲離 물사옹위리

雍은 離가 되지 않게 하라.

醉碎方行處 취쇄방행처

醉와 碎가 바야흐로 행필하는 곳이 (같고)

麗琴初起時 려금초기시

麗와 琴이 처음 일어날 때는 (같다). 

栽裁當自記 재재당자기

栽와 裁는 (차이에 따라) 마땅히 스스로 기억하고

友發更須知 우발갱수지

友와 發은 (차이점을) 다시 꼭 분별하라.

忽訝劉如對 홀아유여대

문득 劉는 對와 같은가 하고 의심되고

從來缶似垂 종래부사수

종래는 缶와 垂도 닮았다.

訝(맞을 아; 言-총11획; yꐃ) 놀라다. 의심하다.

含貪眞不偶 함탐진불우

含과 貪은 진실로 짝이 되지 않으나

退邑尙參差 퇴읍상참차

退와 邑은 오히려 차이가 난다.  

憾滅何曾誤 감멸하증오

憾과 滅에 어찌 착오가 있으며

黨堂未易追 당당미이추

黨과 堂을 쉬이 따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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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懷丹是母 여회단시모

女가 丹을 품으면 母가 되고

叟棄點成皮 수기점성피

叟가 點을 버리면 皮가 된다.

若謂涉同淺 약위섭동천

만약 涉을 말하면 淺과 같고

須敎賤作師 수교천작사

모름지기 賤을 가르친다면 師가 된다.

黿鼉鼂一類 원타조일류

黿, 鼉, 鼂은 한 무리요

茶菊榮更親 다국영갱친

茶, 菊, 榮도 재차 사리를 밝혀라. 

非作渾如化 비작혼여화

非와 作은 흐릿하게 化와 같고

功勞摠若身 공로총약신

功과 勞는 모두 身과 같다.

示衣尤可惑 시의우가혹

示, 衣, 尤는 헷갈릴 만하고

奄宅建相隣 엄택건상린

奄, 宅, 建은 서로 이웃한다.

道器吳難測 도기오난측

道와 器와 吳는 헤아리기 어렵고

竟充克有倫 경충극유윤

竟과 充과 克은 순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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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於增一點 시어증일점

市와 於의 차이는 一點을 더한 것이고

倉欲可同人 창욕가동인

倉과 欲은 가히 人과 함께 하였다.

數叚情何密 수가정하밀

數와 叚는 情이 어찌 깊은가

曰甘勢則勻 왈감세즉균

曰과 甘은 기세가 곧 고르다.

  叚(빌 가; 又-총9획; jiꐂ, xiꐁ) 빌리다.

  勻(적을 균; 勹-총4획; yún) 두루 미치다.

固雖防夢蘭 고수방몽란

오로지 비록 夢과 蘭의 (헷갈림을) 막더라도

自合定浮淳 자합정부순

스스로 합당하게 浮와 淳을 (구분하여) 정하라.

添一車牛幸 첨일거우행

一을 더하여 車, 牛, 幸이 되고

點三上下心 점삼상하심

세 點을 찍어 上, 下, 心이 된다.

參差全不別 참차전불별

參과 差는 완전히 구별이 안되니

鬨巽豈曾分 홍손기증분

鬨과 巽은 어찌 구분할 수 있으리오.

  鬨(싸울 홍; 鬥-총16획; hōng, hòng)

  巽(손괘 손; 己-총12획; xùn)

奪舊元無異 탈구원무이

奪과 舊는 원래 차이가 없고

嬴羸自有因 영리자유인

嬴와 贏의 차이는 자연히 그 원인이 있다.

  嬴(찰 영; 女-총16획; yíng)

  羸(여윌 리{이}; 羊-총19획; lé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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勢頭宗掣絜 세두종체혈

勢의 머리는 본래 에서 따왔고 

章體效平辛 장체효평신

章의 몸은 平과 辛을 본 받았네 

合戒哉依歲 합계재의세

寧容拳近秦 녕용권근진

邪聽行復止 사청행부지

即斷屈仍伸 즉단굴잉신

田月土成野 전월토성야

田, 月, 土가 野를 만들고 

七九了收聲 칠구료수성

七,九,了로 성을 얻었네 

最迫艱難歎 최박간난탄

尤疑事予爭 우의사여쟁

葛尊草上得 갈존초상득

廊廟與綠緣 랑묘여록연

廊, 廟, 그리고 綠과 緣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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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力斯成曼 리력사성만

里와 力이 이에 曼을 이루고

圭心可是春 규심가시춘

圭와 心은 가히 春이 된다.

出書觀項轉 출서관항전

出과 書는 목을 보고 

別列看頭平 별렬간두평

別과 列은 머리가 평평한 것으로 구별한다 

我家曾不遠 아가증불원

我와 家는 서로 닮았고 

君畏自相仍 군외자상잉

君과 畏는 스스로 인연한다

甚乂犬傍獲 심예견방획

甚과 乂에 犬방을 하면 獲이요 

么交玉伴瓊 요교옥반경

밑에 交를 하고 玉으로 邊을 하면 瓊이다 

膝勝中委曲 슬승중위곡

膝과 勝 中에는 委曲이 있고

次以兩分明 차이양분명

次와 以이 두 글자는 分明히 하라.

  委曲: 찬찬하고 자상함. 허리를 굽히고 쫓음.

二下客為亂 이하객위란

二아래 客은 亂이 되고

宀藏了則寧 면장료칙녕

아래 了를 하면 寧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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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由門上點 이유문상점

而는 門 위에 點을 찍음을 본으로 하고

早得幸頭門 조득행두문

早는 幸 머리에 門을 씀으로 얻어진다.

死休想犯 치사휴상범

耻와 死는 침범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豛朝喜共臨 역조희공임

豛과 朝는 함께 임함을 기뻐하라.

  耻(恥의 俗字; 耳-총10획; chǐ)

  豛(돼지 역; 豕-총11획; yì)

鹿頭眞戴草 록두진대초

鹿의 머리는 진실로 초두를 올려놓고

狐足乃疑心 호족내의심

狐의 발은 心인가 의심하라.

勿使微成漸 물사미성점

微를 漸으로 이루지 말고

奚容悶作昆 해용민작곤

悶을 昆으로 씀을 어찌 용납하리오.

作南觀兩甫 작남관양보

南을 쓸 때는 兩과 甫를 관찰하고

求鼎見棘林 구정견극림

鼎에서 필요할 것을 구할 때에는 棘과 林을 보아라.

休助一居下 휴조일거하

休와 助는 一이 아래에 있게 하고

棄奔七尙尊 기분칠상존

棄와 奔은 七을 위에 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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隸頭眞似繫 예두진사계

隸의 머리는 진정코 繫(의 머리)와 같고

帛下卽如禽 백하즉여금

帛의 아래는 곧 禽(의 아래)과 같다.

溝滯皆從戈 구체개종과

溝와 滯는 다 戈를 좇고

紙箋竝用巾 지전병용건

紙와 箋은 巾을 아울러 쓰라.

懼懷容易失 구회용이실

懼와 懷는 실수하기 쉽고

會念等間幷 회념등간병

會와 念은 같은 간격으로 나란히 쓴다.

近息追微異 근식추미이

近, 息, 追는 조금 차이가 있고

喬商矞不羣 교상율불군

喬, 商, 矞은 무리짓지 않는다.

矞(송곳질 할 율; 矛-총12획; jué, yù)

款頻終別白 관빈종별백

款과 頻은 끝까지 明白하게 區別하고

所取豈容昏 소취기용혼

所와 取는 어찌 昏迷함(헷갈림)을 용납하리오.

慼感威相等 척감위상등

慼, 感, 威는 서로 같은 점이 있고

馭敦毁可親 어돈훼가친

馭, 敦, 毁는 가히 친한 면이 있다.

慼(근심할 척; 心-총15획; qī)

馭(말 부릴 어; 馬-총12획; y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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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名依召立 태명의소립

台와 名은 召에 依據하여 確立되고

敝類逐嚴分 폐류축엄분

敝와 類는 嚴을 쫓아 區分된다.

鄒歇歌難見 추헐가난견

鄒, 歇, 歌는 변별하기 어렵지만

成幾賦易聞 성기부이문

成, 幾, 賦는 알아보기 容易하다.

傅傳相競點 부전상경점

傅와 傳은 서로 점을 다투고

留辯首從心 유변수종심

留와 辯은 머리가 心으로부터 시작된다.

昌曲終如魯 창곡종여로

昌과 曲의 끝은 魯와 같고

食良末若呑 식량말약탄

食과 良의 끝도 呑과 같다.

改頭聊近體 개두료근체

改와 頭는 애오라지 체가 가깝고

曺甚不同根 조심부동근

曺와 甚은 根本이 같지 않다.

舊說唐同鴈 구설당동안

嘗思學似存 상사학사존

일찍이 學은 存과 닮았다는 것을 생각하라.

 

출처 : 전국한시백일장
글쓴이 : 麟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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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藝 美學의 意義


書藝 美學은 각 시대의 서예 창작과 그의 경험을 개괄하고 총결한 藝術 美學이다.

또한 書藝術의 독립과 自足의 系統이고, 當 時代와 그 이후의 書藝術 實踐에 영향과 방향을 提示해 줄 뿐만 아니라, 자기의 독특한 結構와 體裁를 갖추고  發展하는 동아시아 문화권 특유의 學問 분야이다.

그러므로 書藝 美學을 이해하지 않으면, 동아시아 美學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동아시아 藝術 精神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書藝 美學은 西歐에는 없는 독특한 藝術 美學이다.

書藝 美學은 실용적으로 사용하는 文字를 변화시켜, 情感 의식을 표현하는 부호 형식으로 만들어진 藝術이다. 西洋 文字는 단지 뜻만 表現하여 개념을 전달하는 작용을 하는 文字이지만, 書藝는 문자의 형체를 자유롭게 창조하여 영활하게 情感을 전달하는 藝術의 부호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세계의 藝術 마당에서 아마도 그 위치를 대신할 수 있는 藝術은  없을 것이다.

文字가 藝術의 情感 부호의 형식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중요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文字는 象形에서 비롯되었는데, 書藝의 美는 이런 象形을 기초로 하여 변화된 線과 結構, 그리고 章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각종의 象形的 圖畵는 모방과 변화를 가져오면서 순수하게 추상적인 線과 結構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이 독자적인 藝術의 표현 형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書藝는 書寫 공구인 毛筆을 사용하여, 線을 가볍고, 무겁고, 더디고, 급하게 표현하면서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서로 섞고, 굵고 가는 것을 조화시켜 자유로운 藝術의 의미를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바로 蔡邕이 말한 “붓이 부드럽기 때문에 奇怪함이 여기서 생기게 된다.”1)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宗白華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許愼은《說文解字≫序文에서 文字의 정의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倉頡이 처음 글자를 만듦에 대개 形象의 형태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이를 文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형태와 소리가 서로 더해지면서 이를 字라고 하였는데, 字라는 뜻은 불어나서 점차로 많아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文과 字는 서로 상대적인 것이다. 書라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글씨의 임무는 바로 같게 하는 것이므로, 쓰여져 나온 글씨는 모름지기 같아야 하는데, 이는 우리의 心中에서 사물의 형상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點과 劃으로 사물 형상의 근본을 표현하는데, 이것은 또한 사물의 형상에 있는 文으로 하나의 사물 안에서, 또는 物象과 물상이 서로 관계를 갖는 속에서 이루어진 조리로, 즉 長短ㆍ大小ㆍ疏密ㆍ虛實ㆍ應接ㆍ向背 등의 규율과 결구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文을 파악할 수 있는 동시에, 또한 사람에게 그들 정감의 반응을 반영할 수 있다.

이렇게 정감에서 文이 생기고, 文에서 정감이 생기는 文字는 곧 예술의 경지를 승화할 수 있으며, 또한 藝術의 가치를 갖추고 美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2)

하나의 글자가 하나의 몸체를 이루면서, 변화가 풍부한 공간 단위를 이루며 표현력이 매우 강한 藝術의 매개체가 되었다.


書藝의 美란 형체를 초월하여 묘사하는 筆劃을 자유롭게 전개하고, 그것을 하나씩 서로 섞어서 하나의 형체인 文字를 구성하여 紙面上에서 펴낸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음악이나 무용과 마찬가지로 정감을 펴내고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形式美는 항상 정지되어 있고 정식화 규격화되어 현실적인 생명감이 있어서 풍부한 생명의 암시와 표현력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線을 위주로 하는 書藝는 이러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藝術이다. 그래서 書藝는 획일적이고 일률적으로 대칭을 이루는 형식미가 아니고, 매우 다양하고 유동적인 자유로운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書藝의 한 글자 또는 한 행 나아가서는 한 폭의 작품은 모두 창조와 변혁이 있으며, 더욱이 개성이 있는 것으로 기계적인 중복과 법도에만 얽매여서 쓴 것이 아니다. 또한 書藝는 흑백을 서로 사이에 두고 線의 결구로 자아 인격을 완성되게 표현하면서, 文人의 정신 문화를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藝術인 것이다.


                  2. 書藝 美學의 對待 關係


書藝術의 휘황한 발전 道程은 깊은 역사적 論理를 반영하여 나온 것이며, 또한 그 역사적 論理의 일부분은 書藝術의 思惟 체계에서 나타낸 것이다.

곧 이러한 書藝 思惟의 논리상에서 서예의 藝術 哲學이 생산되었으며, 서예의 美學이 구성되어졌다. 그래서 이런 관점에서 여기에서는 서예 미학상의 對待 關係에 대하여 논하여 보고자 한다. 對待 關係라 함은 서로 相對를 대립ㆍ견제하는 개념이 아니라, 相互 竝立ㆍ補完하여 相生하는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1)  方  과  圓


書藝에서 方筆은 折로써 運筆하는 것으로, 行筆은 끊어진 듯 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고, 圓筆은 轉으로써 운필하는 것으로 行筆은 계속하여 끊어짐이 없는 것을 말한다.

方筆은 方正하고 雄峻한 美가 나타나고, 圓筆은 宛轉ㆍ渾穆한 美가 나타난다. 漢碑중에서 《張遷》《景君》이 方筆이고, 《石門頌》《楊淮表》가 圓筆이 된다.

先秦 書藝를 보면, 甲骨文은 方折이 많고 金文ㆍ秦篆은 圓轉이 많다. 해ㆍ행ㆍ초에서 楷書는 方筆이 많고, 行草는 圓筆이 많으며, 歐書는 方筆, 顔ㆍ虞書는 圓筆이며, 褚書는 大字가 方을 이용하고, 小字는 圓을 이용했다.3) 이외에 形體는 方과 같으나 圓筆을 사용한 것은 《鄭文公》《爨龍顔》등이 있다.

그러나, 方과 圓의 서예 법칙은 깊은 對待性이 나타난다. 그 하나는, “圓筆은 神采가 원만해야지 정체되어서는 안되고, 方筆은 통쾌하고 方正해야지 뭉쳐 있어서는 안된다.”4)고 하지만, 方ㆍ圓을 막론하고 모두 실제적으로 서로 소통되고, 정체되지 않으며 뭉치지 않아서 그 神采가 교류하고 오묘함이 통해야 한다.  두 번째는, 서예에서 方과 圓은 응당 서로 교류되고 이용되어져야 하며, 神采가 변화하고 對待性이 있어야 한다. 

“方筆은 해서를 쓸 때 사용하고, 圓筆은 행서를 쓸 때 사용한다.”5) 이 말은 대략적으로, 해서는 圓筆이 없어서 아늑한 운치가 없으며, 行草는 方筆이 없어서 雄剛한 神采가 없으니, 서로 그것들을 이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妙함은 方圓을 竝用함에 있으니, 方體에 圓筆을 사용하거나 圓體에 方筆을 사용한다거나, 혹은 필법은 方으로 하고 章法은 圓으로 한다든지 해야, 神采가 밝아져서 사람들에게 존중되어진다. 이것은 높은 경지에서만이 方과 圓의 對待關係를 장악할 수 있고, 서예의 神妙한 정취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康有爲는 “서예의 妙는 전적으로 運筆에 있는데, 方圓을 다하여 능숙함을 조절해야 스스로 巧妙함이 있다.”6)고 하였다.     

 

    (2)  曲  과  直


서예의 曲과 直은 對待性이 있으며, 方과 圓의 對待 關係가 진일보 발전되고 보충된 것이다.

金文ㆍ小篆을 볼 때, 완곡하게 통하는 曲線美를 볼 수 있고, 曲線과 直線이 상호 보완하여 이루어진 美感을 느낄 수 있다. 역사의 변화에 따라 象形性이 풍부한 曲線은 平直한 필획으로 분해되고 變換되었는데, 예를 들면 ‘日’字는 원래 둥근 해를 상징하는 曲線이었으나, 후에 四획으로 분해되여 이루어졌다. 또 ‘女’字는 원래 앉아 있는 女體의 곡선으로 나타났으나, 후에 直筆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곡선이 직선으로 변했을 망정  그 획 가운데에 곡선을 함유하고 있다.

隸書는 곡선의 美가 波磔의 美로 변화되었는데, 蠶頭燕尾式의 波磔 중에는 曲折된 波로 전해져 온다.

楷書의 출현은 또 한 차례 대 변혁이 있었는데, 形體는 더욱 方正하게 되었으며 필획은 平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서의 平直한 필획 중에는 여전히 곡선의 美를 구비하고 있으며, 隸書 波磔의 그러한 곡선미를 담지 않고 一波 三折의 정체로 변화되어졌고, ‘無垂不縮, 無往不收’, ‘堅劃橫下, 橫劃堅下’, ‘藏頭護尾’등의 내함의 美로 변화되었다. 즉 “해서의 필획에는 직선중에 곡선의 미가 포함되어 있다”7)고 姜白石은 말한다.

그러나, 章草에서 今草ㆍ狂草까지의 전개 과정을 보면, 篆書적 요소의 선획은 더욱 더 彎曲해졌고, 곡선의 강도는 더욱 증가하였으며, 전ㆍ예ㆍ해서의 거리를 타파하고 圓筆化된 평형방식으로 고도의 자유스러움과 무궁한 美感으로 전개되었다.

劉熙載는 “書에서 곡선은 그 형체에 직선이 있어야 하고, 직선은 그 이치에 곡선이 있어야 한다.”8)고 하여, 서예의 曲과 直의 對待 關係를 강조하고 美妙한 서예의 審美 정취를 나타내었다.


    (3)  遲  와  速


遲는 ‘緩’, ‘遲澁’이라고도 칭하고, 速은 ‘急’, ‘疾’, ‘捷速’등으로도 칭한다.

運筆에서 느림(遲)에는 穩重ㆍ沈着ㆍ端莊함에 힘있는 것을 취한다. 그러나 遲重한 맛이 있으려면 遲澁에 전념해야 하며, 神氣ㆍ風采를 잃을 수 있으므로 반드시 速과 상호 보완하여 행해야 한다.       

운필에서 빠름(速)에는 勁利ㆍ飛動ㆍ風神의 현란함을 취한다. 그러나 捷速한 맛이 있게 하려면 急疾에 전념해야 하고, 失勢ㆍ失態할 수 있으므로 遲와 상호 보완하여 실행해야 한다.

단지 遲速의 對待 關係는 각각 똑같이 절반씩으로 한다거나, 엇비슷하게 기계적 배합이어서는 안되며, 가일층한 풍부한 내함이 있어야 한다. 王羲之는 遲와 速의 對待性의 원칙을 제시하였는데, “매 글자마다 十遲五急이 필요하다.”9)고 하여, 遲를 위주로 하고 急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무릇 書는 沈靜함을 귀하게 여기고, 뜻이 筆前에 있어야 하며, 글자의 자취는 마음 뒤에 놓아야 하고, 작품을 하기 전에 생각을 결정해야 잘 이루어진다. 下筆은 急하게 하지 말고 모름지기 느려야 한다.”10)고 하였다.

또, 康有爲는 “행필하는 법은 十遲五急, 十曲五直, 十藏五起, 十起五伏인데 이렇게 하면 그 오묘함이 곡진하다.”11)하였으며, 蔡邕도 “빠른 필세와 澁한 붓을 귀하게 여긴다.”12)고 하였다.

만약 운필중에 疾勢와 澁筆의 관계를 대대적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遲急의 오묘함일 것이다. 그러나 단지 행필에는 緩과 疾이 있을 뿐만 아니라, 澁과 滑로 나누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緩과 滑은 쉽지만 疾과 澁은 익히기가 쉽지 않으므로, 얼마간의 수련이 있고 난 후에 라야 사용할 수 있다.


    (4)  輕  과  重


서예는 부드러운 毛筆로 輕運重行하는 가운데, 輕重用筆의 大比ㆍ錯綜하므로써 무한하고 풍부한 韻律이 형성되며, 신묘한 기량이 많이 출현되고 변화가 무궁한 境界가 나타난다.

輕과 重의 용필에서의 다름은 작품의 질감상에서도 다르게 나타난다. 가볍게 용필하면 紙面과의 접촉이 적어서 필획이 가늘면서 민첩하고, 무겁게 용필하면 지면과 닿는 면이 많아서 필획이 굵고 무겁다. 輕은 가늘고 강해서 빼어나게 아름답고 풍모가 초탈하며, 重은 풍성하고 살쪄 있어서 침착하고 온후하다.

金文에서 그 예를 든다면, 《齊仲姜鎛》《王孫鐘》의 銘文은 一분의 붓으로 빼어나게 표현해낸 것으로, 물이 흐르는 것과 새가 가볍고 경쾌하게 나르는 美感이 있으며, 그리고 《散氏盤》《兮甲盤》은 三분의 붓으로 엄숙하고도 뚜렷하여 푸른 산이 찬란히 빛나 보이고, 웅장기이하여 소박하고 두터운 미감이 있다.

南齊의 王僧虔은 “組하되 重하지 않고 細하되 輕하지 않아야 한다.”13)고 하여, 운필은 경중하고 변화를 추구하여, 風采가 시원 대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예의 輕重을 구사함에도 풍채가 생기 활발하고 서로 조화로워야 한다. 즉 “一切의 서예는 輕함을 숭상한다.”14)하는데, 이것은 重이 없는 것이 아니라, 重이 변화하여 輕이 된다는 것이며 輕중에 重을 포함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은 서예의 輕重 관계를 높은 기량으로 파악했을 때 가능하다고 본다.


    (5)  肥  와  瘦


肥와 瘦는 일반적으로 자획의 肥瘦를 가리킨다.

살찐 것은 肉이 많다는 것이고, 마르다는 것은 骨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肥와 瘦와 骨과 肉은 서로 상관 관계가 있다. 骨을 사용하여 體로 하고 肉을 사용하여 用으로 하여, 骨과 肉이 고르게 균형을 잡아서 氣脈이 관통하고, 드물고 평평한 곳은 肥로써 채우고, 빽빽하고 기운 곳은 瘦로써 제어한다.

肉이 많고 骨이 적으면 이를 ‘墨猪’라 하고, 骨이 많고 肉이 적으면 ‘枯藤’이라 한다. 그래서 肉은 많고 骨이 적다거나 骨이 많고 肉이 적은 것은 모두 서예의 病이다. 骨法은 엄숙해야 하고, 肉法은 경건해야 좋은 서예라고 할 수 있다.

骨과 肉에서 骨을 主로 하고 肉을 次로 삼아야 한다. 서예에서는 瘦硬함을 귀하게 여겨야 神采가 통한다 하니, 서예 창작과 감상에서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다.

黃庭堅은 살찐 글자에는 모름지기 骨이 있어야 하고, 마른 글자에는 반드시 肉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치 人體의 肥瘦의 美에 풍부한 예술 언어가 있듯이, 서예 미학의 肥瘦美도 外在하는 形質과 內在하는 정신이 겉과 속에 존재하는 무궁한 美로 빛날 수 있을 것이다.


      (6)  大  와  小


大字, 즉 필획이 많은 글자는 쓸 때 자연히 크게 된다. 따라서 반드시 小字를 비교하여 적정한 크기로 써야 한다. 小字, 즉 필획이 적은 글자를 쓸 때에는 자연히 작게 쓰여지게 된다. 그러므로 쓸 때에는 大字를 생각해서 균형있게 써야 한다. 그래야만 上下 각각의 글자가 서로 어울리게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은 서예 미학 중에서 大와 小의 예술적 처리의 一面이며, 大小 관계의 對待性의 관계이다.

行草書의 관계에서는 大小의 관계가 가지런하지 않고 서로 들쑥 날쑥하는 이치를 귀하게 여기고 있는데, 徐浩는 “大小가 균정하면 俗에 가까워지고, 逸氣가 적다.”15)고 하여, 大小가 서로 대칭되지 않아야 하고 서로의 字體가 원만하게 조화로움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예의 結體는 大小의 오묘함이 있는 것으로, 각각의 字形에 따라 크거나 작거나 혹은 굵거나 가늘게 하여, 생기가 활발하고 정취가 자연스러워서 일맥 상통하게 美妙함을 갖추어야 한다.


    (7)  疏  와  密


疏와 密은 서예에서 結體 時에 안배의 성김과 긴밀함을 가리킨다.

서예에서 빽빽하게 하려고 할 때에는 너무 핍박하고 막히게 하여 우아한 자태를 잃게 해서는 안되며, 성기게 할 때에는 엉성하고 쓸쓸하게 되지 않도록 하여 정신과 風采가 유지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성긴 곳에도 빽빽한 풍채가 있어야 하며, 빽빽한 곳에도 성긴 맛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성긴 곳에서도 공허하고 한산한 느낌이 들지 않으며, 빽빽한 곳에서도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게 된다.

또한 姜蘷는 “글씨는 성긴 것으로 풍채를 삼고, 빽빽한 것으로 원숙한 경지를 이룬다.”16)하였다. 성기어야 할 때 성기게 하지 않는다면 초라하고 답답하게 되며, 빽빽하여야 할 때 빽빽하지 않으면 엉성하게 된다.

鄧石如는 이것을 비유하여 말하길, “획의 성긴 곳은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고, 빽빽한 곳은 바람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17)라고 하였다. 만일 疏와 密이 조화를 이루고, 멀고 가까움이 어울리고, 높고 낮음이 정취를 이루며, 虛와 實이 호응을 이루게 하려면, 古人의 墨跡과 法帖을 관찰하여 익숙하게 한 후에 그 妙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


       (8)  虛  와  實


老子 哲學 중에서 ‘有’와 ‘無’는 하나의 範疇이어서, ‘有’와 ‘無’를 설명할 때 有ㆍ無를 서로 의존하여 이용한다. 무형의 물건도 큰 작용을 낳을 수 있지만 일반인은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老子는 ‘無’의 작용을 특별하게 드러내어 이를 설명하였다. 서예에서도 마찬가지로, ‘有와 無’는 ‘虛와 實’과 ‘黑과 白’의 예술적 처리와 통하고 있다. 왕희지는 “實한 곳은 法을 드러내고, 虛한 곳은 神을 감춘다.”18)하여 虛와 實이 相生하는 妙理를 도출하고 있고, 虛한 곳의 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또 등석여의 “항상 黑으로써 白을 계산한다.”19)라는 논리는 서예 미학에서의 虛白의 중요 작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虛實의 운필 과정의 對待 관계는 곧 指掌ㆍ腕肘ㆍ필획의 관계와 상호 부합한다.

운필에는 虛實이 필요한데, 특히 行草를 쓸 때의 허실은 특별히 귀하게 여긴다. 운필이 虛하지 않으면 원만하고 일탈됨이 부족하고, 운필이 實하지 않으면 沈着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서체의 필획에도 虛實이 있다. 篆劃은 實에 충실하고 八分劃은 虛에 충실하며, 왕희지는 實에 가까우며 헌지는 虛에 가깝다.                  

實하게 운필함은 虛를 위한 것이며, 實한 곳은 모두 영활하고 虛함으로써 實하게 되는 것이니, 끊긴 곳은 계속 이어짐을 구비하고 있다. 古人의 書를 볼 때, 字外에 필획이 있고 筆意가 있으며 筆力이 있어서, 章法의 妙를 다하고 있다.        


    (9)  主  와  客


主筆과 客筆은 서로 대립하는 듯 하면서 통일되어 있다. 즉 서예의 對待 關係에 있는 것이다. 楷書로 예를 들면, 姚孟起는 “楷書를 쓸 때 主客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20)고 하였다.

‘日’字를 분석하여 설명하면, 左竪는 客으로 가볍고 짧아야 하고, 右竪는 主로 무겁고 길어야 하며, 中劃은 客으로 虛하고 완만하며, 下劃은 主로써 實하고 굳세어야 한다. 또 草書를 예로 들면, 먼저 쓰는 것은 主가 되고, 나중에 쓰는 것은 客이 되어, 반드시 主客이 바라보며 起伏이 서로 이어져서, 성긴 곳은 변화를 취하고 빽빽한 곳은 고아하고 힘차야 한다.

이와 같이 書體 중에는 각기 다른 특색의 主客이 있지만, 主筆을 확립하는 작용은 일치한다. 古人은 “글자를 쓸 때에는 主筆이 있어야 기강이 흩어지지 않는다.”21)하여, 매 글자마다 主劃을 세워서 布局ㆍ결구ㆍ조직 등을 主劃의 좌우에서 조화롭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써 四面의 호흡이 상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예 미학의 원리는 山水畵 美學과 통하는 면이 있다. 산수화에서 만학 천봉을 紙面 가득 채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主峰을 정해서 세우고 그 나머지는 客峰들을 그려 넣어야 전체에 혈맥이 유통되고 호흡이 상통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것이 어찌 산수화 미학뿐이겠는가? 기타의 예술에서도 이것은 第一의 哲理가 아니겠는가!     

 

 

    (10) 離  와  合


古代 書家가 말하기를, 서예의 요체는 “妙는 合할 수 있는 데 있고, 神은 떨어질 수 있는데 있다.”22)고 하였다. 離와 合은 바로 서예의 神妙한 경지에 있는 것이며, 서예의 要訣이 되는 것이고, 서예의 중요한 對待 關係가 된다.

離ㆍ合의 法은 古代 書論 중에서 간혹 結字나 章法을 가리키기도 한다.

結體ㆍ章法은 두 가지 병폐가 왕왕 있는데, ‘散에서 오는 염려’와 ‘結에서 오는 病’으로 散(離)은 집중되지 못하는 것이며, 結(合)은 벗어 버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古人은 서예의 연결되는 곳에서 章法을 볼 수 있고, 떨어지는 곳에서 意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특히 왕희지는 “左로 돌고 右로 기울면 변화가 몽롱하여, 모양이 끊어진 것 같다가 다시 이어지고, 勢가 기운 것 같으나 바로 서 있는 것은 妙手가 離合하기 때문이다.”23)고 하였다. 그리고 歐陽詢의 結字 三十六法이 있는데, 그 중 몇 가지24)는 이 離合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이것들은 모두 이 離合의 美妙함을 연구한 것이며, 이것은 字形의 완전한 美의 예술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고, 문자의 部首 偏旁에도 이 離合의 법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離合의 法은 고대 서론에서 虛實의 말과 종종 가깝게 쓰인다.

즉, 서예의 秘法은 이 離合사이의 神妙함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이것은 離하면서 虛하고 虛하면서 離하며, 合하면서 實하고 實하면서 沈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離合을 겸비하고 虛實을 같이 하면 여기에 서예의 神妙함이 있다는 것이다. 

   

 

    (11) 奇  와  正


正은 서예의 단아 엄숙하고 침착 견실하며 소박하고 질박함을 말하고, 奇는 서예의 교묘하고 미려하며 기복이 많고 변화무쌍함을 가리킨다.

書藝家는 왕왕 正으로 奇에 들어가고, 奇에서 다시 正으로 돌아오는, 하나의 대대 관계의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즉 平正을 구하다가 平正을 알면 險絶을 추구하고, 그것을 장악하면 다시 平正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맨 나중의 平正과 시작할 때의 平正은 다른 것이며, 시작할 때의 平正은 ‘結構가 죽은 法’이고 마지막의 平正은 ‘變通을 융합하여 나오는 것’으로 ‘높은 수준의 기묘함에 복귀하는 과정을 거친 平正’을 말하는 것이다.

明의 項穆은 奇와 正의 관계를 중시하여, “서예의 要旨는 正ㆍ奇에 있다.”25)하면서, “奇는 正의 내부에 이어지는 것이며, 正은 奇 가운데 벌려있는 것이다. 正하면서 奇가 없으면, 비록 장엄하고 沈實하다 할지라도, 소박함이 지나쳐서 그것은 少文일 뿐이다. 奇하고 正하지 않으면, 비록 웅장하여 시원스럽고 미려하다 할지라도, 기교함이 너무 많고 단아함이 부족하다.”26)고 논하였다.


    (12) 雅  와  俗


雅의 뜻은 規範ㆍ文明ㆍ좋은 것을 가리키며, 俗은 속세ㆍ범속ㆍ유행하는 풍습 등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俗은 결국 싫어하고 참을 수 없게 하며, 雅는 사랑 받고 동경하게 한다.

서예에서는 士氣(선비의 기개)를 으뜸으로 삼고 그 高雅함을 구하려고 한다.

作家는 언제나 俗氣가 없이 고상하고 고아함을 추구하고, 書卷氣를 추구하며, 高士의 韻致를 추구한다.

黃庭堅은 蘇東坡의 서예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東坡의 簡札은 字形이 온화하여, 俗氣가 한 점도 없다.”27)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雅는 脫俗한 것이며, 字形이 온화 돈독한 가운데 書卷氣가 가득차 있고, 성정이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다.

書家는 晉人 서예의 雅韻을 최고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晉人의 초탈 신묘한 흉금과, 風雨가 흩어지고 꽃이 피어나는 듯한 藝術 境界와, 희석되어 한산한 듯한 神韻 등이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후세의 서예가로 하여금 최고의 典範으로 받들어 추구하게 한다.

서예의 발전 과정에서, 처음에는 俗氣가 있었으나 후에 高雅하게 되어, 俗에서 雅로 되는 경우가 있다. 民間 藝術은 민간 서민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나, 서예가는 항상 그 민간 세속의 서예에서 영양을 흡수하고, 다듬고 공력을 더하여 자기만의 書藝 風格을 형성하면서 서예 발전을 촉진시킨다.

또 隸書도 세속 민간에서 생산된 것으로 後에 서예가가 다듬고 숙련시켜서 마침내 雅의 境界에 달한 것이다.

이렇듯, 어떤 사람도 처음에 시작하는 서예부터 고아함을 이룰 수는 없다. 단지 평범하고 범속한 것에서 시작하여 고난과 시련의 과정 속에서 초탈한 고아의 美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즉 俗氣가 있는 것에서부터 古雅美가 있는 것이며, 雅는 俗에서 나오고, 또 俗은 雅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13) 陰  과  陽


陰陽이라는 것은 서예의 점과 획을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가로 획에 있어서 윗획을 陽이라 하고, 아래 획을 陰이라 한다. 세로 획에 있어서도 왼쪽 획을 陽이라 하고, 오른쪽의 획을 陰이라 한다.

이와 같이 설명한 것은 단지 陰陽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에 있어서는 이런 것들만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劉熙載는 “글씨를 쓸 때에는 陰陽의 두 가지 법칙을 겸비해야 한다. 무릇 가라앉아 있으면서 굴복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을 陰이라 하고, 기발하고 호탕하여 활달한 것을 陽이라 한다.”고 하였다.28) 이것은 陰陽의 뜻을 서예의 풍격과 특징에까지 확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글씨를 쓸 때에는 두 가지 氣韻을 겸해야 한다.

하나는 고상한 풍격과 정신이 담겨 있어서 글씨에 힘이 着實하고 氣韻에 여지가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여지는 반드시 着實함에서 구해야지 지면을 떠나서는 안된다.

두 번째는 바탕이 견실하면서 호탕한 기운이 있어야 하며, 생각과 마음은 정미한 곳까지 이르러야 박력이 커질 것이다. 정미하다는 것은 글자의 안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것을 말하며, 박력이 크다는 것은 글자의 밖에서 기세가 드높은 것을 말한다.

만약 陰陽 중에서 하나만을 추구하여 쓴다면, 절대로 훌륭한 글씨를 이루지 못하니, 이 두가지 특색을 조화시켜야만 비로소 좋은 서예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3. 書藝 美學의 範疇


    (1)  品     格


書藝 美學에서 品格은 書藝家의 人品ㆍ흥취ㆍ포부ㆍ氣槪 등을 가리킨다. 이외에 品格은 전통 書論 중에서는 왕왕 서예의 品第ㆍ格調 등을 가리키기도 하다.

미학은 논리학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政治學》에서 “美는 일종의 善이며, 그 때문에 快感이 일어나는 것이며, 그래서 그것이 善이다.”라고 말했다. 美는 필수적으로 善과 상관한다. 善하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다. 그래서 文章의 아름다움은 반드시 도덕의 고상함과 관련이 있으며, 그래서 ‘道德 文章’이라 칭한다.

서예 미학은 品格을 특히 소중히 여기고 人品을 중시한다. 서예 작품이 비록 아름답다할지라도 그 인물이  천박하면 그의 작품도 홀시한다. 반면에 品格이 고결하고 서예도 탁월하면 人品을 그 서예보다 더 중요시한다. 서예의 美醜․ 高下는 작가 인품의 美醜․高下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서예 미학의 특징이며, 수 천년의 전통도 서예 미학의 일종의 심리 정세로 형성되었다. “書는 사람이 중요하다.”29) 董其昌이 말하기를 蔡京은 “서예는 米南宮과 비슷하나, 그 사람이 書를 가리었다.”30)하였다. 宋四家는 본래 蘇軾ㆍ.黃庭堅ㆍ米芾ㆍ蔡京을 가리키나, 단지 蔡京의 品格이 낮아서, 후대인은 蔡襄으로 그를 대신하였다. 이렇듯 전통 서예 미학 중에서 人品을 중요한 審美 標準으로 삼았다.

  品格과 서예의 관계는 선인들이 십분 풍부하게 논술하였고, ‘혹은 사람으로써 書를 중히 여긴다, 혹은 사람 때문에 書를 경시한다’는 것이 심미의 기준이었다.

또 書法의 특징에서 출발하는 것도 있다. 揚雄은 “書는 心畵이다.”31)라고 제기하였다. 이런 관점은 後代 서예가의 찬동과 호응을 얻었는데, 최후에는 ‘書如其人’의 말로 발전하였다. 劉熙載는《藝槪》에서 “書는 같은 것이다. 그 학문과 같고, 그 재능과 같고, 그 뜻과 같아서 그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32)고 하였다. 朱長文은 이미 이런 각도에서 顔眞卿을 평가하였다. “魯公은 忠烈之臣이라 말할 수 있다.”33), “그가 일으킨 筆翰에서는 강건하고 웅특함이 나타나고 서체는 엄중하여 법을 구비하였으며, 忠信義士와 같아서 바른 빛을 조정에 세웠으며, 대인으로 임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揚子가 말한 ‘書는 心畵가 된다’는 것은 魯公에 대한 말이다.”34)고 하였다. 柳公權이 “心正則筆正”35)하듯이, 心正―人正―筆正―書正이다. 다시 말하면 ‘品格’은 일종의 內涵의 審美 範疇라고 할 수 있다.

品格은 전통적인 서예 감상 중에서는 왕왕 品第ㆍ等級ㆍ格調를 가리킨다. 張懷瓘은《書議》에서 “오늘 비로소 그 品格을 기록한다.”36) 淸 陣介祺는 “書畵는 품격으로 나누어지는데, 전부 그 筆에 있다.”37) 項穆은 《書法雅言》에서 “품격은 5등급으로 나누는데, 正宗ㆍ大家ㆍ名家ㆍ正源ㆍ傍流이다.”고 하였다. 唐 李嗣眞《書後品》에서 나누었는데, 그 중 ‘逸品’은 李嗣眞이 창작한 것이 되었다. 이외에 여러 서론가들은 제각각의 등급을 정했었는데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2)  筆     力


書藝 美學에서의 筆力은 글자의 점획의 형태 중에서 체현해낸 ‘力’의 체득을 가리킨 것이다.

南齊의 王僧虔《答竟陵王書》에서 “張芝․索靖․韋誕․鐘會․二圍는 전대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옛날과 지금은 다르다. 그 우열을 판별할 수 없지만, 단지 筆力의 절륜만을 보았다.”38)고 하여, 王僧虔은 여기에서 일단의 書藝 審美의 비밀을 도출하였는데, 즉 서예 미학의 표준이 古今이 다르다는 것이고, 사람에 따라 선호도가 같지 않아서 다르다는 것이며, 단지 그 筆力이 어떠한가를 보았다는 것이지만, 당연히 優劣을 가리는 하나의 공통 표준이라는 것이다. 筆力이 약한 것은 결코 좋은 서예 작품이 아니다. 筆力이 강건하면 그 미묘함이 나타나고, 筆力이 絶倫하면 서예 수준의 높음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 소위 ‘力透紙背’, ‘入木三分’등이 모두 필력이 강건함을 칭찬한 것이다 

劉熙載《藝槪》에서 “右軍 서예를 두 마디로 평한다면, 힘은 만 명의 장부를 굴복시키고, 韻은 千古까지 높다.”39)고 하였다. 그가 ‘力’과 ‘韻’ 二字로 집어내어 평가한 것을 의미 심장하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筆力은 萬 사람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것은, 곧 왕희지에게 書聖이 된 까닭을 말한 것이겠고, 그의 서예는 大洋이 넘치는 힘의 미감이 충만하며, 필력은 웅장하고 강건하여, 千 세대를 넘어서 萬 사람을 굴복시킬 만하다는 것이다. 필력이 웅건하면 글자에 골격을 갖추는 것이니, 형세의 미묘함이 살아나게 된다.

또 唐 太宗도 《論書》에서 筆力을 제창하였다. 그는 “나는 古人의 書를 임하는데 있어서, 단지 그 形體만을 배우지 않고 오직 그의 骨力을 구하려고 한다. 形勢는 자연히 생기는 것이다.”40)라고 하였다. 이는 서예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터득한 것이다. 劉熙載는 李世民의 이 말에 십분 찬동하여 말하기를, 骨力과 형세는 서예가가 당연히 중시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筆力이 웅건하면, 字形에 입체감이 있어서 形勢美를 갖추고, 또 字形에 생명력을 갖추어서 살아있는 生命美가 나타난다. 그러나 병든 態勢는 창백하여 생기가 없다. 일찌기 漢代 蔡邕은《九勢》에서 “下筆할 때 힘을 이용하면 筋骨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다.”41)고 하였다.

자연의 美는 陰陽적 역량의 작용에 있고, 사람의 筋肉美는 생명의 활력이 있으며, 서예술의 美 역시 한 점의 획、 하나의 線條에 집중하는 힘에 있다. 글자마다 힘의 집중이 있다면, 작품 전체에 웅건한 힘이 넘쳐날 것이다. 筆力의 審美는 많은 기교의 美感을 가져다 줄 것이며, 用筆 방법의 미묘함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밖에 좋은 면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褚書를 예로 든다면, 그의 草書의 筆力은 제압하기가 매우 어렵고 기교는 풍부하였는데, 그것은 모름지기 大力이 있어서 運筆力을 좋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서예 미학 범주의 ‘筆力’의 ‘力’은, 전통 서예 중에서 왕왕 骨과 연관해서 骨力을 말하고, 筋과 연결해서 筋力을 말한다. 이것은 筆力과 서예의 骨體ㆍ筋肉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위부인은《筆陳圖》에서 “筆力이 좋으면 骨이 많고, 筆力이 좋지 않으면 肉이 많다. 骨이 많고 肉이 적으면 ‘筋書’라 하고, 肉이 많고 골이 적으면 ‘墨猪’라 한다. 힘이 있고 筋이 풍부하면 聖的이고, 힘이 없고 筋도 없으면 病的이다.”42)라고 하였다. 이 말은 筆力과 骨力에 대한 설명으로, 글씨에는 筆力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부인은 “点은 돌이 떨어지는 것처럼 해야 한다.”43)고 하여, 하나의 점도 운동의 역량을 응축시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역량은 예술가의 內心적인 표현이며, 이미 내면에 있는 강한 힘이고, 뛰어난 氣韻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骨이라 한다.

骨은 곧 筆墨이 지면에 힘있게 突出되어 표현되는 것이며, 내면으로부터 발휘되는 力量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沈尹黙은,“관건은 執筆의 요령에 있다.”말한다. 古人은 이를 위하여 노력하고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것이 指實․掌虛․腕平․肘起 등이다. 나아가서는, 어깨를 풀고 전신의 氣力을 이용하여야 그 작용을 발휘할 수 있으며, 붓과 손이 서로 호응하여 뜻에 따라 輕重을 구사하며, 전신의 氣를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글자 중에 筆力이 표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3)  意     象


意象은 현실의 형상에 대하여 관찰과 기억을 통하여, 독자적인 경영․정련․가공을 거쳐서, 작품 중에 새로운 형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상은 현실을 관찰한 미학을 표현하는 것이며, 작가의 叡智를 통한 선택과 정감을 모아서 내보이는 것이다.

蔡邕은《九勢》에서“書는 自然에서 시작한다.”44)

고 하였다. 서예는 본시 文字를 쓰는 藝術이며, 文字의 창조는 자연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하늘을 우러러 象을 관찰하고, 땅을 굽어보아 法을 관찰하며,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文字를 창조하였다. 서예 또한 자연 속의 만물에 대한 形象과 그 형상의 美를 조리 정연하게 作品에 용해시키는 것이다.

古人은 대자연의 美는 사람이 심신을 통하여 느낀 것이며, 직접적인 것이고 가장 보편적인것이며 가장 풍부하고 위대한 美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자연 만물의 형상미에서 書藝美를 창조하고, 또 거기에서 書藝美를 비교하였다.

그래서 作家는 천지 만물 중에서 審美 意象을 구하여 작품을 창작한다. 張旭은 妙手를 體得한 작가이다. 그는 公主와 擔夫가 길을 다투는 것을 보고서, 孤蓬驚沙함을 보고, 公孫 大郞의 劒舞를 관찰하고서, 거기에서 서예의 妙理를 터득했으며 意象을 얻었다고 한다.

  懷素 또한 독특한 慧眼을 갖춘 사람인데, 그는 夏雲寄峰과 飛鳥出林、 驚蛇入草를 관찰하여 서예의 意象을 구할 수 있었고, 조맹부는 ‘子’字、 ‘不’字를 쓸 때 새가 날아가는 것을 생각하고, ‘爲’字、 ‘女’字는 쥐가 장난치는 상황을 떠올렸다 한다. 이렇듯 서예가는 자연 만물의 意象을 살펴서 풍부한 서예적 內涵을 구비해야 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書藝 意象을 살피고 自然美처럼 다양성과 변화를 표현해내야 한다. 자연에서 서예 意象을 찾을 때, 또 하나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인 人體중에서 靈感을 섭취해야 한다. 인체 형태는 남성의 陽剛美와 여성의 陰柔美가 나타나고, 각종 자태의 變化美와 和諧와 협조의 美가 나타나며, 얼굴 표정의 풍부함、 내심 감정 표현의 다양성、 사상적 지혜와 心靈의 미묘함과, 사람의 풍부한 美와 깊은 內涵의 美를 표현해야 한다. 자연에서 書藝 意象을 구할 때는, 여러 만물에는 자연스럽고 엄정한 질서가 있는 데 그것을 찾아야 한다.

서예술의 意象美는 천지가 잉태한 것, 예컨대 雨露의 부드러움에서 생성된 것 등을 찾아야 하고, 비록 작가가 높은 뜻을 구축했다 하더라도 자연의 天趣를 표현해내야 한다.

천지가 만물을 기르고, 낳고, 가꾸어내듯이 계절과 기후가 다르고, 기운이 다르며, 사물의 아름다움이 제 각각이나 그의 질서는 정연하다. 서예 중의 意象은 억지로 긁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연 만물의 形象美처럼 일정한 秩序性을 표출해내야 한다.

자연에서 書藝 意象을 찾으려면, 그 자연의 표면 현상을 취하지 말고 그 배후의 깊이 감추어진 것을 찾아서 자연의 정신을 체득하고, 그 내면의 정신을 반영해야 한다. 자연은 生生不息의 운동 가운데 존재하므로 자연 만물의 美 또한 그러한 生生不息의 運動중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萬物美 배후에 內藏된 精神이다. 서예 중의 힘ㆍ勢 또한 필획의 운동 중에 생명을 표현하고 정신을 묘사한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서예는 筆力을 중히 여기면 근육의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다 하였듯이, 서예가 勢를 중히 여기듯이 運動도 중히 해야 한다.

書論이 시작된 이후 줄곧 이 勢의 개념을 이용하였는데,《草書勢》《篆勢》《九勢》등, 모두 意象 중에서 필수적으로 勢를 얻어야 한다고 제시하였고, 구속되지 않는 생기발랄한 精神을 표현해냈다. 그리고 모두 충만한 서예중의 운동에 대하여 기술하였으니, 이는 ‘動’은 세계의 진정한 정신이며, 만상이 하나같이 운동 중에 있기 때문이다. 陰陽의 두 가지 힘의 작용과 勢의 왕래는 제지할 수 없으며, 乾坤 陰陽 運動을 체현하고 있다.

서예가는 意象을 구할 때, 우주의 ‘動’의 정신을 본받아야할 뿐 아니라, 動의 節奏와 韻律까지도 체득하여야 한다. 동시에 節奏美와 韻律의 자연스러움을 파악해야 하며, 이를 서예작품에 표출해야한다. 

 

 


    (4)  形     質

 

形質은 서예의 形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점획의 長短ㆍ高下ㆍ多寡ㆍ結構에서 이루어진 字形이며, 또 分行ㆍ布白 등으로 이루어진다.

  서예 미학은 形質의 美를 중히 여기며, 형질의 美는 서예 外在의 美이다.

書藝學史上 수많은 서예가는 이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왔으며 形質美의 규율을 찾아왔다. 갑골문의 方折 契刻하고 懸針 垂露한 필치、 龜甲上의 疏密 調和적인 布白은 고대인의 서예미이다. 西周 金文의 肥筆波磔하고 錯落 自然한 결체와 渾然 天成한 포백은 周代人의 서예미이다.  그리고 秦代의 균일한 玉筋、 엄밀 정제된 결체、 綜橫 균칭한 포백은 秦代人의 서예미이며, 그 후의 漢代에는 蠶頭燕尾한 紛飜波操함과, 晉人의 행운유수한 線條과 唐人의 장중한 結體, 宋人의 寫意한 자태, 明人의 求趣한 자형, 淸人의 尙朴한 結字 등은 오직 하나만을 위한 形質美이며, 서예가 창조한 形質美이다.

서예가마다 각자 자기만의 독창적인 형질미를 추구한다. 王羲之 父子의 서예는 不同한 형질미가 있으며, 顔眞卿、 柳公權의 서예 역시 각자의 형질미가 있으며, 宋四家 蘇ㆍ黃ㆍ米ㆍ蔡도 서로 같지 않은 形質과 美妙함을 갖췄다.

黃庭堅은 結構美에 취하게 하는 형체로써, 그는 스스로 찬양한《瘞鶴銘》중에서 美妙한 構形을 보고 放射式의 결자방법을 창출하였다. 이렇게 古人은 꽃에서 꿀을 모으듯이 前人의 형질미를 자세히 감상하고 자기만의 美의 형질을 창조해냈다.

서학사상에서 무수한 서예가는 유유히 그리고 깊이 있게 탐구하는 道程上에서, 부단히 美를 창조하는 방법 및 비결을 창출해내었다.

明代 項穆은《書法雅言》에서 形質에 대해서 상술하였다.

그는“사람들은 書에서 마음의 形質을 얻으면 손이 호응하여 千形萬狀을 이루니, 中和를 언급하고 肥를 말하며 瘦를 설명한다.”45)하여 形質을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는 “形質이 마른 것은 淸勁을 숭상하여 마른 것에 편중하는 것이다. 마른 것은 骨氣가 강건하고 字體에 많은 형태를 포함한다. 形質이 살찐 것은 독특한 공교함이 풍부하여 살찐 것에 편중하는 것이다. 살찐 것은 字體가 美硏한 형태이나 骨氣가 약하다.”46) 또 형질이 中和한 것은 “부족함을 수련하여 法度에 합당하고 輕重이 조화로우며, 陰陽의 뜻을 얻어 剛柔가 균제한다. 不肥 不瘦하고 不長 不短하니, 단아한 美가 되었다. 이것이 中行의 書이다.”47)라고 하였다.

그는 肥瘦에서 形質을 분석 해부하는 시각이었고, 書藝 形質을 人體의 형질로 비유하려 하여, 그러한 것이 사람들에게 하나의 계시가 되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古人은 우리에게 풍부한 유산을 물려주어서 연구 감상할 수 있게 하였으며, 거기로부터 새로운 美의 形質을 창조하게 하였다.

물론, 서예 중의 形質美는 外在的이니만큼,  반드시 神采美와 상호 융합되어야 보다 나은 창조물이 나올 것이다.

 


    (5)  神     采     

  

神采는 작품 중에 표출해 내는 精神ㆍ風采를 가리키며, 서예 미학 범위중의 하나이다.

古代의 書論에서는 神采를 ‘精氣神’ 또는 ‘風神’이라 칭하고 있다.

서예의 神采는 초목과 같이 생기가 있고, 금수와 같이 생기 활발하며, 사람의 정신과 같이 초연하고 대범하여 시원스럽다. 또 초목의 생기는 울울창창 무성한 나무처럼 나타나고, 향기 방창한 꽃처럼 만발함이다. 금수의 생기 발랄함은 솟구치듯 뛰어 오르는 호랑이의 위용과 용의 풍채같이 보이는 것이며, 사람의 정신ㆍ풍채는 心靈이 언어에서, 意態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서예가는 비록 한 폭의 文字를 쓰지만, 文字는 이미 개념을 표현하는 부호가 아니고 물상의 結構와 생기 활발한 勢態를 표현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비약하는 정신의 血肉이 있는 생명이다.

그러면 서예가는 어떻게 하면 ‘神采’를 획득할 수 있는가?

古人은 “글씨를 쓸 때 精ㆍ氣ㆍ神으로 主를 삼는다. 落筆處는 力量이 있어야 하며, 橫勒處는 波折이 필요하며, 轉捩處는 圓勁이 요구되며, 直下處는 提頓이 필요하며, 挑趯處는 挺拔해야 하며, 承接處는 沈着해야 하며, 映帶處는 含蓄해야 하고, 結局處는 回顧해야 한다. 이것들을 장악하여 따르면 여러 어려운 것들이 손안에 들어 와서, 옷을 벗듯 기개가 드높을 것이며, 기뻐 춤추듯 활달할 것이다.”48)고 하여 筆法을 장악해야 볼 수 있고, 힘을 들여 글씨를 써야 생명력을 가질 수 있으며, 최후에는 처연한 마음으로 落筆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자에 生命을 부여해야 하고, 生命은 形象을 부여해야 하며, 形象은 動作과 情感을 부여 해야 한다고 한다. 서예는 사람처럼 骨筋血肉이 필요하며, 形體가 건실하고 온전해야 한다. 그리고 난 후 氣韻이 충족하고 神氣가 온전해야 하며, 動靜의 상태를 구비해야 하고, 剛柔의 정감을 표해야 한다.

또한, 자연을 길게 한 것은 수려한 선비와 같고, 짧게 한 것은 날쌔게 달리는 사람 같으며, 마른 것은 산 연못의 수척함 같고, 살찐 것은 떠돌아다니는 사람처럼, 기울어진 것은 술 취한 신선처럼, 강한 것은 武士처럼, 아름다운 것은 美女와 같이, 단아한 楷書는 賢士처럼 해야 한다.  따라서 각각 形象을 구비하면 각각 같지 않은 風神이 나타나며, 또한 각각의 不同한 神采가 나타나는 것이다.

 

 

    (6)  氣     韻

氣韻은 서예 미학 범주의 하나이며, 서예중의 生起ㆍ氣勢ㆍ韻味ㆍ韻致 등을 가리킨다.

서예가는 節奏化ㆍ韻律化된 意象을 뽑아내야 하고, 또 그 변화가 스스로  自我에 들어야 하고, 線條의 律動을 통하여 나타난 節奏를 전달하여야 하고, 감상자로 하여금 音樂感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美趣가 무궁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美感이 있어야 한다.

中國畵論 중에 謝赫의 “六法”에는 첫머리에 ‘氣韻生動’이 있는데, 서예 미학도 氣韻의 有無ㆍ高下ㆍ厚薄으로 분류하여 판단한다. 서예 작품은 氣韻을 얻어서 氣韻 生動ㆍ氣韻 高逸한 것을 최고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劉熙載가《藝槪》에서 王右軍의 書藝을 평하는데 있어서 ‘力’을 기준하는 외에, ‘韻’으로도 品評하여 ‘韻高千古(기운이 천고에 드높다)’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타 다른 예술중의 氣韻을 이해하려면, 먼저 서예의 氣韻을 장악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康有爲도 “무릇 藝術에서 오로지 氣韻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렵다.”49)고 하였다.   

그러면, 現代의 美學家나 藝術家는 ‘氣韻’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宗白華는 “氣韻은 宇宙에서 고동치는 만물이 지닌 氣의 節奏이며 和諧이다. 繪畫는 氣韻이 있으면 감상자에게 音樂感을 줄 수 있다.”50)고 했으며, 氣韻의 해석을 “氣라는 것은 마음에 따라 운필하는 것이며, 의혹이 없이 象을 취하는 것이다. 韻은 자취를 감추고 形을 세워야 하며, 俗됨이 없는 遺를 구비해야 한다.”51)고 하였다. 이것은 예술가는 對象의 정신 실체를 파악해야 하며, 對象의 요점을 취해야 하며, 동시에 形象을 창작할 때 자기의 筆跡을 숨겨야 하며, 감상자로 하여금 자기의 技巧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形象은 감상자로 하여금 풍부한 상상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서예 작품의 氣韻은 일종의 節奏요 韻律로서, 서예가는 자기의 지혜을 통하여 節奏化ㆍ韻律化의 자연을 통찰 장악하여, 서예 작품 중에 표현해야 한다. 한 점 한 획에 節奏가 있고, 한 자의 結構에 節奏가 있고, 行間에 節奏가 있고, 한 폭의 작품에 節奏가 있으면, 節奏ㆍ韻律化한 ‘小自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節奏와 韻律중에 나타낸 生氣ㆍ氣勢ㆍ韻味ㆍ韻致가 있으면 감상자는 일종의 音樂感을 얻을 수 있으며, 풍부한 聯想과 무궁한 字體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張旭은 북소리를 듣고서, 춤추는 자태를 보고서, 마치 行筆의 輕重 遲速의 境界를 통할 수 있었으며, 이렇게 나타나는 절주와 운률미에서 서예의 氣韻을 체득하였다 한다.

확실히 서예와 춤사위와의 相似点은 無聲의 樂이요 有形의 춤이다.

서예의 上下로 구부러졌다 그치고 계속하여 늘어나는 線條도 旋律ㆍ和聲ㆍ節奏등과 같은 音響 結構와 같이 美感을 환기시키고 감정을 표출시킨다. 또 書藝 線條 중 경쾌한 波磔과 파동치는 韻律은  변화하는 춤사위 동작과 같이 감정을 풀어내는 것이다.

古代 서예 미학에서는 ‘氣’를 ‘內氣’와 ‘外氣’로 나눈다.

內氣는 한 글자에 氣勢가 있고 韻味가 있다는 말이며, 外氣는 글자와 글자、 行과 行 나아가서 한 폭의 작품에도 서로 연관되는 氣勢ㆍ韻味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內氣는 매 글자마다 氣勢ㆍ韻味가 있어야 하므로 점획간에 정미하고 美妙함이 있어야 하고, 그 疏密ㆍ輕重ㆍ肥瘦등으로 和諧을 조정하고, 균일하지 않게 하여 韻致가 있어야 하다. 外氣는 작품에 氣勢ㆍ韻味가 있어야 하고, 아주 높은 예술 수완이 있어야 하고, 서예의 對待 關係를 순렬하게 운용해야 하며, 그의 虛實ㆍ疏密ㆍ管束ㆍ承接ㆍ錯綜 등을 안배해야 한다.

古代 書家는 ‘氣’를 설명하면서 왕왕 ‘精氣神’과 연관하여 말한다.

蔡襄은 “學書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神ㆍ氣만을 취하면 佳作밖에 되지 않는다. 만약 형상만 모사하는 體勢는 비록 그 형상은 비슷할지라도 精神이 없으니, 이는 書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고 하였다. 또 淸 朱和羹은 “글씨를 쓸 때 精ㆍ氣ㆍ神을 主로 삼아야 한다.”52)하였는데, 이것은 서예의 風采 神韻의 因素이며, 반드시 서예에는 生氣가 드러나고, 생명의 율동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예 미학 중의 ‘氣’는 ‘骨氣’와 상관 관련이 있다.

劉熙載는“書의 요지는 ‘骨氣’ 二字로 총괄할 수 있다. 骨氣를 洞達(통달)이라 말할 수 있는데, 가운데를 통하면 이를 ‘洞(통)’이라 하고 邊를 통과하면 ‘達’이라 한다. 洞達은 字의 疏密 肥瘦가 모두 좋아야 한다.”53)라고 하였는데, 이는 서예 범주의 하나인 ‘神采’와 같이 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서예에서 ‘墨韻’을 설명하는데, 墨의 神采ㆍ韻味를 가리킨다. 濃墨을 사용하면 묵의 색채가 진하게 일어나고 氣韻이 깊고 두터우며, 淡墨을 사용하면 화려하고 神采가 빛나게 일어나고 원기가 충만하다. 이것 역시 높은 기법이 필요하며 對待的 처리가 요구된다.         

 

 


    (7)  情     性


情性은 서예 미학 범주의 하나로써, 서예에서 드러난 精神ㆍ意趣 등을 전달하는 것을 가리키며, 作家 情性이 작품상에서 드러나 표현되는 것이다. 서예는 形質뿐 만 아니라, 筆情墨性도 마찬가지로 중하게 여겨야 美妙함을 지닐 수 있다.

揚雄은 “書는 心畵이다.”54)라고 하였다. 이 말은 역사가 이어지면서 파란을 야기시켰고, 각 시대의 서예 무대상에서 모두 이 말이 맴돌 듯이 회자되어, 서로 共鳴하고 있다.

또한 蔡邕은 “書는 흩어 놓는 것이다. 書를 하려면 먼저 회포를 풀고, 情感으로 임하여 그 性情에 맡긴 연후에 書를 한다.”55)고 하였으며, 劉熙載는 《藝槪》에서 “書는 心學”, “글씨를 씀은 마음의 뜻을 쓰는 것”에 대하여 긍정할 뿐만 아니라, “筆性墨情은 사람의 性情을 근본으로 한다. 이는 性情을 다스리는 것이고 書의 첫째 임무임”56)을 큰 소리로 외쳐, 많은 공감을 얻었다. 또, 康有爲는 《廣藝舟雙楫》에서 “사람의 情을 옮길 수 있다면, 그것이 書의 최고가 된다.”57)고 하였다.

서예가는 情性으로 本을 삼으면 볼 수 있으며, 용해되어 書에 들어가면 筆性墨情을 이룰 것이며, 진정한 서예가의 진정한 창작이 될 것이며, 작품 중에서 능히 筆性墨情을 감상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서예가의 情性을 반추시킬 줄 아는 것이 진정한 감상자의 진실한 감상을 아는 것이리라. 孫過庭은 서예가의 慧眼으로 王羲之의 서예 중에는 筆墨情性의 美妙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韓愈는 그 문장가의 叡智로써 張旭의 草書 중의 美妙한 筆墨情性을 깨달았던 것이다. 書의 노예의 書作은 形質이 없을뿐더러, 本家 面目도 없다. 즉, 그의 筆墨情性에는 ‘自我’가 존재치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예가는 자기의 性靈을 발휘하고 形質을 통하여 書를 표현해 내야 한다. 서예가는 가치있는 形質로 情性을 서술하고, 뜻을 쓰며, 회포를 남기고, 자기의 情性을 장악하여 점획 또는 선획 중에 그것을 용해시켜야 한다.

서예가의 筆墨性情이야말로 千變萬化하고 巧妙가 무궁한 것이다.

元代의 陳繹曾은 《翰林要訣》에서 지적하기를 “喜怒哀樂은 각기 分數가 있다. 喜는 氣가 화창하고 字體는 부드러우며, 怒는 氣가 굵고 소홀하며 字勢는 험악하고, 哀는 氣가 우울하고 답답하며 字는 수축되고 제한적이고, 樂은 氣勢가 평온하고 字는 미려하다. 情은 重輕에 있으며, 字의 斂舒 險麗 역시 淺深에 있으며, 변화가 무궁하다.”58)라고 하였다. 소위 이것은 情性의 喜怒哀樂과 字의 斂舒險麗는 일정한 관련이 있고, 무궁한 변화가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筆墨情性은 千變萬化하고 靈活多變하여 그 妙함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서예술의 精髓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  神     化


神化는 ‘出神入化’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서예 技藝의 성숙한 초월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행동해도 거리낄 바 없고, 불꽃의 순청색처럼 造詣가 깊은 境界에 다다름을 말한 것이다.

서예 미학은 變化를 소중히 여긴다. 世間 萬物은 고르게 변화하고, 日月星辰도 변화하며 運行하고, 寒暑晝夜는 서로 帶를 옮기면서 지속되며, 風雷雲雨는 모였다 흩어지며, 山岳河海는 솟으며 흐르니, 이것이 천지간의 變化이다.

또 高士는 휘파람을 불며 지나고, 美人이 춤추며 소매사이로 흘겨보고, 혹은 기쁨이고 혹은 슬픔이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니, 이것이 人情의 變化이다.

서예는 天地萬物間에서 그 意象을 찾고 變態가 무궁함을 귀하게 여기니, 變化가 막급한 것이다. 서예는 필히 변화로움을 좋아하고 만유의 妙象을 다 할 수 있으며, 조화의 神工을 얻을 수 있다. 孫過庭은 《書譜》에서 말하기를, “數劃을 함께 그어도 그 모습이 각각 다르기 마련이고, 여러 점을 찍어서 가지런히 늘어놓아도 그 形勢는 서로 틀리는 법이다. 하나의 점획은 한 字의 規格을 이루고, 한 字는 한 폭의 書를 이루는 規準이 된다. 그리하여 違背하고 있어도 서로 犯域을 안해야 하고, 의좋게 있어도 똑같지 않으며, 淹留한다고 해서 언제나 느린 것이 아니고, 보낸 것이라 하여 언제나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燥한 맛을 띠었다가 금방 潤하고, 濃했다가 다시 枯해지니, 規矩를 方圓에서 묻히게 하고 鉤와 繩을 曲直에 숨게 하여, 금방 나타났는가 하면 금방 숨어 버리고, 나선 듯 하다가도 들어 앉은 듯하여, 붓끝에서 變態를 다하고 感情의 조화를 紙上에서 맞춘다.”59)고 하였다. 서예는 필법상 점획상에서, 結體ㆍ布白上 모두 變化가 좋은 것을 중히 여긴다. 붓끝에서 형태가 변하고 지면상에서 情感의 조화를 함유하고 있으니, 이는 서예가의 造詣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서예의 神化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해도 장애되는 것이 없으며, ‘變化를 구하는 것’과 ‘法度를 합하는 것’과는 서로 對待 關係가 있다. 變化는 法度를 합할 뿐 만 아니라 法度를 정밀히 숙련하는 것이다. 만일 필법에 익숙하지 못하면 心手를 믿지 못할 것이니, 더욱 어떻게 神化를 말하겠는가? 필법이 숙련되고 법도에 장애가 없다면, 능히 心手雙暢하는 神化의 境界에 이를 것이다. 당연히 法度의 거리가 없다는 것은 有法에서 無法으로, 다시 無法에서 有法에 이르는 것이니, 이런 높은 차원에 다다름을 가리키는 것이며, 法度에서 變化로,다시 變化에서 法度에 이르는 높은 차원의 理致에 다다름을 의미한다.

서예가 神化에 이르는 것은 각고의 수련을 통해야 하며 고난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9)  意     境


意境은 생활 形象의 객관적인 묘사와 情感 이상의 주관적인 吐露는 대대적 예술의 境界이다. 서예 미학 범위의 하나로 되어진 意境은 서예 작품 중의 形質과 神采의 유기적 融合을 가리키며, 情感과 理趣는 對待的 結合이며, 서예의 독특 무궁하고 매력적인 境界이다.

서예는 서예가가 감상한 천지자연의 物象ㆍ秩序ㆍ韻律과, 신묘한 깨달음과 현묘한 理致로 인생을 參通하고, 자신의 叡智로 천지산천 또는 만물 중에서 意象을 찾는 것이며, 또 자기의 용해된 情感에서, 点劃 線條의 節奏를 통하여, 墨采의 운률에서 자아 생명의 情調적인 율동에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造化와 心靈의 응결이며, 形質과 神采의 융합이며, 감정과 理趣의 종합이다. 이러함이 서예 意境의 創構이다.

意境은 美學家가 계속하여 반복해서 토론할 하나의 문제이며, 藝術 審美를 연구하는 자도 명쾌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서예적 意境의 연구는 더욱 박약한 환경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晉人의 行草書 중에서 意境을 분석한다거나, 혹은 모종의 사고체계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晉人의 행초서는 보옥같은 美的 意境을 창조하였다. 歐陽修는 “나는 항상 魏晉이후의 筆墨遺跡을 즐겁게 감상하는데, 그들의 思考는 아주 높다란 봉우리였고 그들이 지닌 意態는 무궁무진하다”60)고 찬탄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意境인가?

宗白華는 “宇宙에 살아있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色相ㆍ질서ㆍ절주ㆍ和諧를 관찰하고, 그것을 빌어서 자신의 가장 깊은 心靈에 반추하여 본다. 實景이 변해서 虛境이 되고, 形象으로 시작하여 상징으로 되며, 인류 최고의 心靈을 具體化하고 肉身化하는 것, 이것이 바로 ‘藝術 境界’이다. 또한 예술 경계는 美의 주인이다.”61)라고 하였다. 서예의 意境도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意境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宗白華는 藝術 意境의 특징은 ‘道’‘無’‘白’의 세가지 면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의 道는 형이상의 원리로서 ‘藝’와 능히 合할 수 있다. 道의 생명은 氣로 나아가고 氣의 표현은 道를 시사한다. 예술 의경을 작품으로 표현하려면 질서의 網을 통과해야 하고 몽롱한 理致에서 섬광처럼 빛을 발해야 한다. 이 질서의 망은 각자의 뜻이 組織되어진 선ㆍ점ㆍ光ㆍ색ㆍ형체ㆍ음성이며, 혹은 文字가 형성한 和合의 예술 형식이다. 이것으로써 意境을 표출하여야 한다.

둘째의 無는 일체 예술의 境界적인 典型이다. 書法 또는 畵法 모두는 마치 춤을 추며 날아가려는 형상이다. 無는 최고의 운률ㆍ절주ㆍ질서ㆍ이성이며, 동시에 최고의 생명ㆍ행동ㆍ力量ㆍ熱情이다. 이것은 모든 예술 표현의 窮究의 상태일 뿐 아니라 우주 창조 과정의 상징이다. 이러한 無를 통하여 현묘한 理致의 境界를 具象化ㆍ肉身化하여야 한다. 서예는 곧 無聲 有形의 즐거운 춤이다.

세 번째로 서예는 虛空의 餘白을 신묘하게 처리하여 動蕩적인 意境을 잘 전달할 수 있다. 神明속의 깊은 내면을 투영, 形象외의 초월함을 餘白에 표현되게 하여, 虛實은 서로 相生하며 無劃處에 妙境이 이루어져서, 글씨는 餘裕 峻秀하며 공간은 調和 生動하게 한다.

그리하면, 창작 중에 진정한 藝術 意境이 솟아난다. 意境은 자연주의적인 현실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며 추상적인 空想의 구조도 아니다. 그것은 생활 속의 깊은 思惟와 풍부한 體驗중의 짙은 情感ㆍ思想의 創造性이 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10) 書     風


書風은 서예 작품의 風格을 가리킨다.

書風은 일종의 표현 형태이며 작품상에서 표출해 나오는 대표적인 특징을 말한다. 작가의 주관적인 특징과 작품의 내용 및 筆墨의 기교를 통하여 形質ㆍ神采등이 융화되어 나타나는 독특한 풍모이다.

서예에서는 자기의 面目과 精神ㆍ風采가 있는 것을 최고로 여기며, 남의 것을 따라 하는 ‘奴書’를 가장 배척한다. 왜냐하면 作家는 前人을 융합하고 변화를 연구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風格을 표현해 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명한 예술적 개성을 갖추어야 하고, 독창적인 風格을 갖추어야만 진정한 作家라 말할 수 있다. 서예사상 서예가들은 각기 다른 경지를 열었으며, 깊이 연구하여 스스로 터득해서 각종 風格을 형성하였으니, 마치 기묘한 꽃들이 그 풍모를 다투는 듯하고 서로 다른 산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상이다. 蕭衍은 《古今書人優劣評》에서 이러한 비유방법을 통하여 三十여명의 서로 다른 風格을 갖춘 서예가를 논평하였는데, 鐘繇의 書는 백조가 구름속에서 노니는 것 같고, 기러기들이 바다에서 희롱하듯, 行間의 빽빽하며 무성하고 實한 곳은 지나기 어렵다 하였고, 王羲之의 書는 字勢가 雄逸하여 龍이 天門에 뛰어 오르듯, 범이 風闕에 누워있는 듯하여 歷代의 보물이니 영원히 교훈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였으며, 蔡邕의 書는 骨氣가 통달하여 상쾌한 것이 神力이 있는 듯하다고 하였다.

비록 정밀한 분석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서예가들의 書風의 특징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鐘繇의 書風은 농익어 부드럽게 펼쳐지고, 疏密이 분명하여 안개가 퍼지고 구름이 뭉치듯 하고, 구름에 백조가 노밀며 群鴻이 바다에서 희롱하는 듯 하다.

王羲之는 鐘繇를 배우고 蔡邕ㆍ梁鵠ㆍ張旭 등의 장점을 취하여 體勢를 精硏하고, 古法에서 보완하는 한편 漢魏의 朴質한 서풍으로 姸美하고 流便한 書體를 창출하여 神妙함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書聖’에 이름하였다. 이밖에 數千年의 書學史上 서예가는 각종 風格을 창안하였으니 그것을 이루 헤아릴 수 없다.

書風은 시대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시대가 다르게 형성된 書風은 각기 그 특징이 있다.

漢代의 서예는 氣勢의 雄厚함을 표현해 냈고, 魏晉 南北朝의 서예는 소쇄한 神韻을 표현했으며, 隋唐서예는 法度를 숭상하고 높였으며, 宋人의 서예는 寫意를 推尊하였으며, 明人의 서예는 雅趣를 중히 여겼으며, 淸代는 또 소박하고 질박함을 숭상하였다.

또 古人들은 唐代를 경계로 해서, 서예를 兩大부분으로 나누려 하였는데, 거기에는 각기 다른 특색이 나타난다.  王澍는 “唐以前의 書는 風骨이 안으로 모아지고, 宋以後의 書는 精神을 밖으로 확장시켰다.”62)하였으며, 康有爲는 이를 典型으로 하여 논하기를, 서예는 “唐을 경계로 하여, 唐以前의 書는 密하고 唐以後의 書는 疏하며, 唐以前의 書는 茂하고 唐以後의 書는 凋하며, 唐以前 書는 舒하고 唐以後의 書는 迫하며, 唐以前 書는 厚하고 唐以後 書는 薄하다. 唐以前 書는 和하고 唐以後 書는 爭, 唐以前 書는 澁하고 唐以後 書는 滑, 唐以前 書는 曲하고 唐以後 書는 直, 唐以前 書는 縱하고 唐以後 書는 斂하다.”63)고 분류하였다. 서풍은 시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한 시대에는 한 시대의 書家가 있고 한 시대의 書風이 있다.

또 書風은 지역이 다름에 따라 다른 특색이 나타난다.

東周때는 열국의 분쟁으로 제후들은 패권을 다툼으로써 文字의 形이 다르고 書風 또한 다른 유파들이 점점 드러났다. 예를 들면 齊國의 金文書風은 대부분 엄정하고 강직한 美, 楚國의 金文書格은 變動流利의 美가 있다.  魏晉이후 南北의 書風도 다른 특징이 있다. 南宋 趙孟堅은《論書》에서, 晉宋이후는 서풍이 남북으로 갈렸는데, “北은 方이 많고 소박하며, 隸體가 있어 晉의 高雅함이 없다.”64)고 하였다. 淸代의 阮元은 《南北書派論》에서 “東晉ㆍ宋ㆍ齊ㆍ梁ㆍ陳은 南派이며, 趙ㆍ燕ㆍ魏ㆍ齊ㆍ周ㆍ隋는 北派이다. 南派는 鐘繇로부터 圍瓘과 王羲之ㆍ獻之 등 智永ㆍ虞世南까지이며, 北派는 鐘繇로부터 圍瓘ㆍ索靖 등 歐陽詢ㆍ褚遂良까지이다.”65)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阮元 등이 분류하여 논한 書風은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라 할 수 없으며, 단순히 지리적 위치 때문에 다르다고 극단적으로 논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書風은 본시 모두 각각 다른 모습이어야 하고, 다른 面目을 갖추지 못하면 오래 存在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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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春用例(입춘쓰는법)

1. 立春大吉 建陽多慶-입춘대길 건양다경

2. 國泰民安 家給人足-국태민안 가급인족

3. 福如東海 壽比南山-복여동해 수비남산

4. 開門萬福來 掃地黃金出-개문만복래 소지황금출

5. 災逐歸雁消 福從燕子來-재축귀안소 복종연자래

6. 鶴算千年壽 松齡萬古春-학산천년수 송령만고춘

7. 堂上鶴髮千年壽 膝下子孫萬世榮-당상학발천년수 슬하자손만세영

8. 人道平和從萬世 天道不絶來和氣-인도평화종만세 천도부절래화기

9. 松鶴千年壽 子孫萬代長-송학천년수 자손만대장

10. 和氣自生君子宅 春光先到吉人家-화기자생군자댁 춘광선도길인가

11. 門迎春夏秋冬福 戶納東西南北財-문영춘하추동복 호납동서남북재

12. 事不三思終有悔 人能百忍自無憂-사불삼사종무회 인능백인자무우

13. 與人不競心常靜 爲國無私夢亦閑-여인불경심상정 위국무사몽역한

14. 道心靜似山藏玉 書味淸於水養魚-도심정사산장옥 서미청어수양옥

15. 心中好友林間鳥 世外淸音石上流-심중호우임간조 세외청음석상류

16. 明月石灘喧浣女 桃花流水亂漁童-명월석탄훤완녀 도화유수란어동

17. 竹密不妨流水過 山高豈礙白雲飛-죽밀불방류수과 산고기애백운비

18. 江山如畵知豪傑 風月無私慰寂寥-강산여화지호걸 풍월무시위적요

19. 萬事莫如花下醉 百年渾似夢中狂-만사막여화하취 백년혼사몽중광

20. 擧世無知心自得 衆人皆醉我何醒-거세무지심자득 중인개취아하성

21. 靜中見得天機妙 閑裏回觀世路難-정중현득천기묘 한리회관세로난

22.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춘풍대아능용물 추수문장불염진

23. 天增歲月人增壽 春滿乾坤福滿家-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

24. 歲在庚寅萬事如意亨通-세재경인만사여의형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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