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代의 書藝家
권영순ㆍ김향선ㆍ허영조
Ⅰ. 들어가는 말 Ⅱ. 淸代 書藝家 Ⅲ. 마치는 말 Ⅳ. 부록 : 청나라 황제와 연호 |
Ⅰ. 들어가는 말
저서 『서법지식천제』 중에서 ‘청나라 서예가’ 부분을 한국서학연구소 금요반에서 공동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모두 서학 연구에 뜻을 두고 정진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미흡한 점이 많이 있을 줄 알고 있으나 오로지 서학 발전에 작으나마 보탬이 되고, 공동 작업을 통해 회원 유대감을 드높이며, 학습의 성취감을 얻고자 하는 취지에서 번역한 것을 발표하게 되었다.
지면상 모두 다 실을 수 없는 형편이므로, 나름대로 요약하고 간추렸다. 요약의 기준으로는, 관향과 자·호·벼슬·작품 등은 각 항목의 아래에 작고 간단하게 요약하여 달았으며, 각 서예가의 고유한 일화나 학서과정, 서예의 특징, 그리고 서예에 대한 견해와 논지 등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원저에 수록된 서예가는 모두 실었다.
청나라는 서예의 발전사에서 비교적 특수한 시기이다. 강희와 건륭황제 때에는 동기창과 조맹부의 서예를 추대하고 숭상해서, 결과적으로 서예는 가면 갈수록 더욱 세속적인 것이 되어갔다. 첩학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고, 당시 과거고시는 필수적으로 일종의 ‘館閣?’라고 부르는 글씨로 답안을 쓰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만약 ‘관각체’로 쓸 수 없으면 설령 문장이 아주 좋아도 답안작성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관각체’는 ‘烏, 먹색이 일률적으로 검은 것’?‘方, 結字가 가지런하고 章法의 배열이 주판알 같은 것’?‘光, 점과 획이 빛나고 매끄러워 운필을 일으키고 떨어뜨린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쓰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완전히 서예의 자연스러운 정취를 잃어버렸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완원 등 유명한 학자와 서예에 인식이 있는 선비들이 북위비의 글씨를 학습할 것을 제창함과 동시에 진ㆍ한 석각 서예를 추대하고 숭상하여 저 웅장하고 강하고 질박하고 무성한[雄强朴茂] 것으로 쇄미한 서풍을 만회해서 매우 높은 성취를 얻었다.
Ⅱ. 淸代 書藝家
1. 王鐸
명과 청나라 사이에, 북방의 서예에서 王鐸과 傅山이 가장 유명하다. 왕탁( 1592-1652)은 ‘神筆’이라고 불렸으며, 당시에 거의 단절된 학문인 六書古文字學과 鐘鼎款識, 그리고 진ㆍ한시대의 碑牌 및 불경의 문자를 자세히 연구했다. 그는 옛것을 배워야만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글씨를 배울 때 처음에는 법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힘들고, 나중에는 법첩에서 나오는 것이 힘들다면서, 이러한 ‘入’?‘出’이 글씨를 배우는 관건이라고 했다. 그는 해서?행서?초서?전서?예서 등 모든 서체를 잘 썼다. 해서는 종요를 배웠고 전서와 예서의 필법을 띠어 험절하고 굳세면서 침착했다. 굳세나 사납지 않고 풍요로우나 살찌지 않았으며 매우 서권기가 있었다. 행서와 초서의 성취가 가장 높았고, 왕희지 부자와 미불을 법으로 삼았으며, 필력은 굳세고 여유가 있으며 능히 방종하면서 정돈되었다. 체세는 이어지면서 얽히고 들쑥날쑥 질탕하다. 포백은 마치 진눈깨비와 같고 호탕하며 시원스럽고 유창하며 표일하다.
* 孟津(지금의 河南省 孟津縣) 사람. 자는覺斯?覺之. 호는 石樵?十樵?嵩樵?痴庵?痴仙道人?雪山道人?煙潭漁?. 벼슬은 翰林院庶吉士?東閣大學士?禮部尙書. 시호는 文安. 작품은 <擬山園帖>?<琅華館帖>?<龜龍館帖>?<弘月館帖>.
2. 傅山
傅山은 (1605-1690, 一作1607-1684, 一作1609-1690)은 명말청초의 서예가로서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개탄하여 항청운동에 개입하여 체포당했고, 출감 후 청나라 조정에서 수차례 그를 회유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므로 그는 서예를 논함에 또한 특별히 사람의 절개와 품격을 중시했다. ‘글씨를 씀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作字先作人].’라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의 소리이다.
부산의 서예는 또한 그 사람됨과 같이 매우 개성이 있다. 전서ㆍ예서ㆍ해서ㆍ초서 각 서체에 능했으며 행초서에 특히 뛰어났다. 그의 초서는 용필이 둥글고 굳세면서 유창하며, 필묵이 무르익고 뜻이 족하며, 웅장하고 표일하면서 기이하고 위대한 정취를 깊이 얻었다. 소해 또한 맑고 뛰어나며 예스럽고 그윽한 것이 위?진에서 나왔다. 부산의 서론은 더욱 독특한 면이 있는데, 바로 “차라리 졸할지언정 교묘하지 말고, 차라리 추할지언정 아리땁게 하지 말고, 차라리 지리할지언정 가볍고 매끄럽게 하지 말고, 차라리 진솔할지언정 안배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부산 자신의 서예작품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체현했다.
부산은 서예를 논함에 또한 ‘正入變出’을 강조했다. 이른바 ‘正入’은 고법을 따르는 것이고, 옛사람을 공부함에 견실한 기초가 이루어 졌을 때 비로소 ‘變出’을 할 수 있으니 이를 버리고 다른 첩경은 없다는 것이다.
* 산서성 陽曲 사람. 자는 靑主?公宅. 호는 朱衣道人?丹崖子?丹崖翁?眞山?濁翁?石道人. 작품은 『傅靑主詩畵題錄冊』?『霜紅龕集』 등에 있다.
3. 鄭?
鄭?(1622-1694)는 명나라 말 송각의 기이하고 특이한 서풍에 매료되어 그의 예서를 모방했다. 20년간 꾸준히 배웠으나 나중에는 결국 송각의 예서를 배우는 것이 근본을 버리고 말류를 따르는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추구하여 마땅히 漢碑로부터 들어가야 비로소 바른 길임을 알았다. 이에 그는 泰山?華山?曲阜 등에서 碑版을 수집했고, 산 속 바위에 남은 글자, 오래된 벽에 남아 있는 문자를 지나치지 않고 정성스레 탁본을 하여 4개의 궤짝이 가득 찼다. 그는 항상 한비를 임모했고, 30년이 지나자 <乙瑛>?<?閣>?<張遷>?<尹宙>?<衡方> 등 동한의 명비 모두를 거의 임모했다. 그 중 <曹全>ㆍ<史晨> 두 비의 공력이 가장 깊었다. 또한 朱?尊 등과 함께 필법을 토론하여 소박해야 저절로 예스러워지고 졸해야 스스로 기이해짐을 인식했으며, 한비로부터 융회관통해야 고졸하고 진기한 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보는 한비를 배우는 과정에서 자신의 운필방법을 창조했다. 그는 “글씨를 쓸 때 가장 조심할 것은 가볍고 쉽게 하는 것이다. 필관이 손에 이름은 마치 천균의 활을 당기듯 하는데,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면 힘은 곧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임모할 때 형체에 주의했을 뿐 아니라 성정 또한 중시했다.
정보의 만년 서예 풍격에 두드러진 변화가 있었는데, 예서에 초서의 필법을 섞어서 고졸한 가운데에 표일하고 춤추는 듯한 운치와 멋을 겸해 마침내 동 시대의 예서 명가를 초월하여 당대의 名手가 되었다. 예서의 점과 획은 변화가 많고 결체는 새롭고 기이하면서 과장됐으며, 용필은 방종하고 운치는 순박하고 예스러워 그는 朱彛尊에게 ‘古今第一’이란 칭찬을 받았다.
* 上元(지금의 江蘇省 南京市) 사람. 자는 汝器. 호는 谷口. 작품은 <?雅三章>?<唐詩七絶詩卷>?<王建春閨詞>?<(楊巨源?于駙馬詩>.
4. 馮班
馮班(1602-1671)은 시문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소해에 뛰어났다. 그는 서예이론에 대해 주도면밀한 견해가 있었다. 『鈍吟書要』에서 그는 글씨를 배움에 우선 짜임새와 결구를 배워야하고, 짜임새와 결구가 단정하고 가지런하면 다시 용필을 배워야 하며, 짜임새를 배움에는 비문과 석각을 임서해야 하고, 용필을 배움에는 반드시 이전 사람들의 묵적과 탁본을 봐야한다고 했다. “진나라 사람은 이치를 운용하고 당나라 사람은 법을 운용했으며 송나라 사람은 뜻을 운용했다[晉人用理, 唐人用法, 宋人用意].”라는 것은 그가 제일 먼저 제시한 것이다.
* 강소성 常熟사람. 자는 定遠. 호는 鈍吟.
5. ?重光
?重光(1623-1692년). 그의 저서인 「書筏」은 29조항으로 되어있고 그의 저작 중에서 출중한 작품이다. 王文治가 이 글의 제발에서 칭찬하기를 “이 책은 달중광 글에서 최고의 묘품이며 서예를 논함은 깊이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 곧바로 손과정과 앞뒤를 다툴만하니 「筆陣圖」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달중광은 글씨도 매우 잘 썼다. 필세가 방종하고 표일하며 장초와 행서를 최고로 삼는다. 그의 소해 역시 법도가 근엄하다. 또한 당나라의 법도로 위·진 체세를 써서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 강소성 丹徒 사람. 자는 在辛. 호는 君宜ㆍ?光ㆍ江上外史ㆍ鬱崗掃葉道人.
6. 歸莊
歸莊(1614-1674)은 명나라 말 곤산의 抗淸운동에 참가했었고 숨어 지내다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귀장은 시와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해서?초서?전서?예서?행서 등 각종 서체를 잘 썼다. 그는 서예를 창작할 때 종종 먼저 술을 마시고나서 거나해지고 뜻이 만족해질 때 붓을 잡고 글씨를 썼다. 심지어 그는 經生考試에 참가했을 때에도 주변에 마시고 난 빈 술병이 쌓였을 정도이다. 만약 그에게 글씨를 청하려고 하면 단지 술만 가져오면 승낙하지 않음이 없었다. 청나라 朱?尊은 『竹?詩話』에서 “귀장은 기이함을 좋아하여 세상에서 미치광이라 했으며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라고 했다.
* 昆山(江蘇省 昆山) 사람. 처음 이름은 祚明. 자는 爾禮?玄慕?元功?懸弓. 호는 恒軒?歸妹?歸藏?普明頭陀.
* 이른바 ‘歸奇顧怪’라는 것은 歸莊과 顧炎武의 세속과 상반된 말과 행동 그리고 문예창작을 가리킨다.
7. 顧炎武
顧炎武(1613-1682)는 명나라 말 유명한 抗淸 지사로 귀장과 한 고향 사람으로 귀장과 막역한 사이였고, 성정이 강직하고 세속을 끊어 보통 사람과 달랐으며 청나라 초의 유명한 경학대사였다.
* 원래 이름은 繹. 자는 寧人. 스스로 蔣山俑. 亭林鎭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亭林先生’이라 불렀다.
8. 沈?
沈?(1624-1684)은 청나라 초 강희황제가 매우 칭찬했던 서예가이다. 그가 詹事府詹事겸 翰林院侍讀學士로 있었을 때, 강희황제는 그를 어전으로 불러 고금의 서예를 담론했으며, 어제의 碑版과 궁전의 병풍?御座?箴銘 등은 대부분 심전에게 쓰도록 명했다.
한번은 그가 강희황제 앞에서 미불의 글자첩을 임서했는데, 황제는 그의 붓이 닳은 것을 보았다. 이에 황제는 필관에 봉황이 새겨진 좋은 붓 한 자루를 취해 입안에 넣고 붓털을 잘 빨아서 심전에게 건네주었다. 매번 심전은 강희가 글씨 쓰는 것을 받들어 모실 때마다, 항상 즉석에서 용필과 결체의 결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아울러 이러한 병폐가 생기는 원인을 분석했다. 그러므로 강희는 종종 그에게 진귀한 붓?먹?의복과 기물?식품 등을 하사했으니, 그에 대한 존중의 뜻을 가히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명나라의 沈度?沈粲과 더불어 三沈이다.”라고 했다.
* 강소성 華亭(지금의 上海市 華亭縣) 사람. 자는 貞?. 호는 繹堂?充齋. 시호는 文恪.
9. 倪燦
예찬(1625-1687)은 『明史』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서예와 시사는 당시 최고였다. 특히 그는 『倪氏雜記筆法』에서 글씨를 배우는 과정을 매우 투철하고 주도면밀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서예를 배우는 사람은 3단계로 나누어 연습할 수 있다. 제1단계는 한 가지에 전념하는 것이고, 제2단계는 넓게 공부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변화하여 창신하는 것이다. 단계마다 모두 3-5년의 공부를 필요로 하며, 비로소 공력이 충분해지면 노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름 있는 서예가의 서체를 깊이 파고 들어가 기초를 확실히 하면서 날마다 임서하여 점점 그 안에 들어가면 바로 형태와 정신을 겸비하게 된다. 제1단계의 마지막에 때때로 가장 큰 곤란함을 만나 마치 막다른 길에 이른 것과 같음을 느끼게 된다. 이때 최대의 항심과 의지력을 견지하며 노력해야 비로소 통과할 수 있다. 제2단계에서는 역대의 법서 정수를 두루 임서함에 혹은 형태와 정신에 법을 겸하고 혹은 정신을 취하여 모양을 남기지만, 때때로 뒤돌아서 배운 것의 닮음과 닮지 않음을 보아야 한다. 마지막 변화하고 창신하는 단계에서는 한 사람을 주요 체세로 삼아 의지하고, 그런 연후에 광범위하게 역대 명가의 장점을 흡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의지하고 흡수하는 것은 반드시 무의식적으로 융회하고 관통하는 것이지 의식적으로 섞는 것이 아니다. 즉, ‘옛것도 없고 지금도 없으며, 다른 사람도 없고 나도 없다.’라는 것으로, 끊임없이 써 내려가다가 익숙함에 이를 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됨을 철저하게 깨닫는다. 갑자기 깨달음의 문이 크게 열리고 단계마다 철저히 들어가서 옛사람의 심오함을 꿰뚫어 보면, 나의 글씨 밑바닥에서 자연의 이치를 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곧 자기의 독특한 서예작품을 창조할 수 있다.
서예를 배움에 이러한 3단계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사실 여기서의 관건은 생각과 방법의 문제인데, 공부가 모자라서는 안 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참신한 탐색의식과 강렬한 창조정신이다.
* 강소성 上元(지금의 南京市) 사람. 자는 暗公. 호는 雁園.
10. 八大山人
명나라 寧王의 후예인 청나라 八大山人(1626-1705)은 청나라 초기의 유명한 문인화가이다. 그의 서예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형세가 괴이하고 기운이 소산하며 격이 독특하여 서예사에서 독특하고 빼어난 한 줄기이다.
서화의 題款에 그는 매번 의도적으로 ‘八大’와 ‘山人’을 각각 이어 썼는데 마치 ‘哭’ 과 ‘笑’ 같았으나 ‘哭’자도 ‘笑’자도 아니었다. 그의 필법은 왕헌지와 안진경으로부터 나왔고, 또한 스스로 일가라 일컬었다. 성격이 거만하고 거칠면서 급하여,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글씨와 그림을 보배롭게 여겨 힘들게 구했으나 조각 종이의 몇 글자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팔대산인이 술을 매우 좋아하는 것을 알고서 술과 안주를 마련해두고는 은근히 초대했고 아울러 사전에 좋은 붓과 먹 그리고 종이와 벼루를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는 그가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문방사보를 그의 앞에 펼치면 그는 붓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거침없이 한 번에 수십 폭을 써내곤 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이 맑을 때는 백 냥의 황금을 주어도 한 글자도 쓰지 않았다. 관리와 귀족은 비단을 가지고 가서 그에게 글씨와 그림을 청하여도 쓰거나 그려주지 않자, 종종 산승과 마을 사람에게 큰돈을 내주거나 혹은 술집주인에게 작품을 사오도록 했다.
* 강서성 南昌 사람. 성은 朱, 이름은 ?. 자는 雪個. 호는 八大山人. 족보 이름은 統?.
11. 王士禎
왕사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났고, 9세에 초서를 쓸 수 있었으며, 그 글씨는 멀리 진나라 사람에 가까웠다. 친척인 王雅宜의 법을 배웠으며 행필은 대부분 外拓의 필세로 활기찬 정취가 있었다.
청나라 陳奕禧는 『隱綠軒題跋』에서 그의 글씨는 비록 좋지만 왕사정 자신은 오히려 서예는 문인의 小道라고 여기고, 서예로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글씨를 청하면 때때로 그의 제자에게 대필을 시켰다고 한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글씨를 얻으려고, 의문이 나는 문제를 배우겠다는 명목으로 써서 아뢰어, 그에게 지시문을 쓰도록 했다. 그는 곧 상주문과 초고지 위에 뜻에 따라 비평했으며, 학생들은 이를 받은 후에 매우 진귀하게 표구하여 비밀리에 수장하였고 그는 오히려 기쁘게 여겼다.
* 산동성 新城 사람. 자는 子眞?貽上. 호는 阮亭?漁洋山人. 후세사람들은 항상 王漁洋이라 불렀다. 벼슬은 戶部郞中?刑部尙書. 시호는 文簡.
12. 張衡
蔣衡(1672-1743)은 유람을 좋아하여 널리 발자취를 남겼고, 도처에 비와 첩을 찾아가 적지 않은 진ㆍ당 이래의 유명한 법첩을 얻었다. 아울러 300여 종을 임모하여 『拙存堂臨古帖』으로 모아 기록하였다. 그는 12년간 은거하며 80여만 자의 『十三經』을 썼고, 후에 청나라 내부에 소장되었다. 또한 『蔣氏遊藝秘錄』을 저술했으며 서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첩을 임모함에 모름지기 나의 뜻을 운용해서 옛사람의 각기 다름을 참고하여 그 같음을 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러 명가들이 각기 임서한 <난정서>는 절대로 같은 것이 없다. 그 다른 곳은 각각의 천성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그 같은 곳은 왕희지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이로써 구하면 생각이 반은 지난 것이다. 또한 정서는 행초의 필의를 운용하고 행초는 정서법을 운용한다. 저수량을 배워 그 무성하고 굳셈을 구하고, 구양순을 배워 원만하고 윤택함을 구한다. 성내고 베풀고 근본하고 강한 것을 구양순으로 삼고, 아름답고 쓰러지고 연약하고 약한 것을 저수량으로 삼는 것은 모두 잘못이다. 무릇 말이라는 것은 마음의 소리이며, 서예 또한 그렇다.
여기에서 그는 다름을 참고하여 같음을 구하는 것과 서로 대립되면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했고, 서예 창작은 자기의 진실한 감정 등을 반영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 강소성 金壇사람. 자는 湘帆?拙存. 振生으로 개명했으며, 호는 拙老人ㆍ江南拙??函澤布衣.
13. 高鳳翰
高鳳翰(1683-1768)은 산수화와 화조로 후세에 이름이 높았으며, 서예는 초서와 예서가 모두 뛰어났다. 전각 또한 豪邁하고 방종하면서 표일했다. 모든 풍격이 법에 구속되지 않았으며 굳세고 힘이 있었다. 고봉한은 揚州八怪에서 鄭板橋ㆍ金農ㆍ羅聘 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고봉한은 또 벼루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는데, 많았을 때는 천여 점에 이르렀고, 아울러 친히 모난 벼루에 일일이 題銘을 조탁하고 새겨 남겼다.
* 산동성 膠州 사람. 자는 西園. 호는 南村?老阜?南阜老人?尙左生ㆍ丁巳殘人. 저서로는 『硯史』ㆍ『高鳳翰硯譜』.
14. 汪士?
汪士?(1688-1762)은 서화사에서 유명한 ‘揚州八怪’의 한 사람이다. 화훼를 잘하고 전각에 정통했으며 예서를 잘 썼는데, 필묵이 생동하고 맑고 굳센 운치가 있었다. 만년에 두 눈이 실명했으나 공력은 심후했기 때문에 여전히 광초를 쓰고 매화를 그릴 수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는 눈이 멀었지만 마음은 멀지 않았다.”라고 했다. 마음에 헤아림이 있었기에 눈이 먼 뒤의 그림과 글씨가 오히려 더욱 깊고 오묘한 이치가 있었다.
* 안휘성 ?縣(一說 休寧縣) 사람. 자는 近人. 호는 巢林?溪東外史.
15. 金農
‘漆書’는 청나라 康熙(1662-1722) 연간의 서예가 金農(1687-1764)의 글씨이다. 금농의 용필은 모나고 넓적하여 마치 솔과 같으며, 또한 먹의 진함이 漆과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칠서’라고 불렀다.
金農은 일찍이 博學鴻詞로 천거되었지만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는 何羲門에게 배웠는데, 학문을 좋아하고 옛것을 즐겼으며 감상에도 정통했다. 사람됨이 바르고 곧았으며 권세와 부귀에 굽히지 않았고 ‘揚州八怪’의 한 사람이 되었다.
청나라는 강희가 동기창을 좋아하고, 건륭이 趙孟?를 좋아하여, 동기창과 조맹부의 서체가 당시를 풍미했다. 이러한 조류에서도 그는 한나라 비를 법으로 삼아 탐색한 것을 보면 홀로 혜안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농은 예서로 이름이 났으며, 그의 예서 원류는 한나라 비로부터 근원했으며, 또한 위나라 서체인 해서를 예서에 섞어 독창적인 풍격을 개발했다. 그의 글씨 필획은 가로가 굵고 세로는 가늘며, 배합이 합리적이고 대비가 강렬하다. 파세는 안으로 함유했고 강하고 굳세며 날카롭다. 포백의 조밀함은 바늘도 허용치 않으며, 성글음은 말이 달릴만하니 측봉의 운용이 적절하다.
금농의 서예 성취는 매우 높은데, 이와 같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悟性’과 ‘靭性’에 있다. 그는 화가이자 시인이며 또한 음률에 능통했고 선의 기미를 참고했으며 학식이 깊고 넓어 예술적 소양이 심후했으므로 서예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았다.
* 자는 壽門?司農?吉金. 호는 冬心?稽留山民?曲江外史?龍梭仙客?百二硯田富翁.
16. 鄭板橋
鄭板橋의 이른바 ‘六分半書’는 행초서에 한나라의 팔분서를 섞어 넣음으로써 팔분의 뜻이 부족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예서필법을 행초서에 들인 것이다.
청나라의 유명한 서화가인 鄭燮?金農?黃愼?李??李方膺?高翔?汪士愼?羅聘 등 여덟 사람은 옛날 법도에 구속되지 않고 홀로 풍격을 창조하여 스스로의 면목을 이루었으므로 당시 ‘揚州八怪’라고 불렸다. 일설에는 閔貞과 高鳳翰이 있고 李方膺?高翔은 없다고도 한다.
鄭燮(1693-1765)은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으며 후에 친구의 도움을 얻어 비로소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어서 44세에 진사에 올랐다. 일찍이 벼슬은 산동성 ?縣의 현령이었으나, 지방유지와의 불화로 관직을 사임하고 양주에서 글씨와 그림을 팔아 생활했다.
정판교는 시?서?화 모두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에 ‘三絶’이라고 불렸다. 그는 「五十八歲自敍」에서 스스로 육분반서라고 불렀으며, 사람들 또한 이를 ‘板橋體’라고 일컬었다. 당시 사대부계층의 많은 사람들이 ‘圓?光?齊?亮’의 ‘館閣體’에 심취하여 벼슬길을 구했으나 정판교는 이것을 따르지 않고 용감히 탐색하여 ‘육분반서’를 창조했고, 종횡으로 펼치며 천변만화의 기이한 정취가 물씬거리게 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였고 당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스스로 ‘육분반서’라고 한 것은 아마도 정판교의 익살스러운 뜻이 있었을 것이다.
* 강소성 興化 사람. 자는 克柔. 호는 板橋.
17. 梁?
梁?(1710-1785)을 ‘北梁’이라고 한다. 그는 청대 乾隆(1736-1795) 연간에 중요한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王澍ㆍ劉墉ㆍ王文治ㆍ梁同書 등 유명한 서예가와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했다.
양헌의 해서는 진ㆍ당을 종주로 했고, 초서는 ‘이왕’을 법으로 삼았으며, 李邕ㆍ張從申을 특히 오랫동안 모방하여 정신을 거의 닮았다. 만년에는 서예의 모든 경지에 완전히 심취했고 매우 높은 성취를 얻었다. 양헌의 서예는 수려하고 윤택하며 서권기가 있어 ‘館閣?’의 풍속을 일소했다. 그의 서예는 비각에 매우 적합하고, 작품이 거의 이옹과 유사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즐겨 그에게 ‘書丹’을 청했기 때문에 그의 碑版이 세상에 두루 펼쳤다. 그가 쓴 행서와 초서는 동기창의 신운을 얻었으나 기백은 앞섰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사람들이 오히려 보물로 여겼다.
양헌은 서예이론에 정통하여 서예를 논함에 근거가 있고 내용이 충실하며 핵심을 찌르고 있다. 비첩을 임서의 이로움과 폐단, 그리고 임모의 절차와 보완의 방법 등을 제시했다.
* 안휘성 ?縣 사람. 자는 聞山. 호는 松齋. 서론저작으로는 『評書帖』 1권. 그의 서론을 집대성한 것은 『承晉齋積聞錄』.
18. 劉墉
劉墉(1719-1804)은 소해를 잘 썼으며, 그의 글씨는 혼후하고 고졸하며 모양은 풍요롭고 골력이 굳세어 당시에 독보적이었다. 특히 당시 서예의 미약한 풍조와는 서로 큰 차이가 났다. 물론 유용 글씨의 ‘모양은 풍요롭고 골력은 굳센[貌豊骨勁]’ 풍격에 대해 어떤 사람은 ‘癡肥’ㆍ‘墨猪’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사실상 유용은 젊었을 때 조맹부ㆍ동기창을 배웠고, 후에 또한 소식ㆍ미불을 배웠으며, 계속해서 안진경ㆍ종요로 올라가, 홀로 뛰어나서 ‘모양은 풍요롭고 골력은 굳센[貌豊骨勁]’과 ‘솜으로 쇠를 싼 것 같은 [如綿裏鐵]’ 예술적 효과를 얻었다.
유용은 또한 결자를 강구하여 그의 글씨는 확실히 ‘흰 공간을 계산하여 검은 필획을 마땅하게 함[計白當黑]’에 주의하여서 필획의 굵고 가늠을 적절히 했고, 빠르고 더딤을 교체했으며, 성글고 조밀함을 변화시켜 착락의 운치가 있게 하여, 자연스럽고 유창하면서 기운이 생동하게 했다. 유용은 濃墨으로써 글씨 쓰기로 유명했는데, 먹물이 빽빽하고 두터우며 빛이 밝기는 옻칠과 같았다. 의미가 함축되고 깊이 예스럽고 담담함을 만들어 졸한 것으로 아름다움을 얻은 것도 유용 서예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다. 평론가들이 유용의 글씨를 ‘黃鐘?大呂’의 음으로 비유하여 평한 것은 바로 이에 기초한 것이다.
* 산동성 諸城 사람. 자는 崇如. 호는 石庵?靑原?香岩?日觀峰道人. 벼슬은 編修?吏部尙書?體仁閣大學士?太子太保. 시호는 文淸.
19. 梁同書
梁同書(1723-1815)의 부친 梁詩正은 서예를 잘해서 양동서는 가학을 이어 받아 12세에는 큰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안진경ㆍ유공권을 배웠고, 중년에는 미불의 법을 본받았으며, 만년에는 붓에 맡겨 스스로 운용함에 자연스럽고 표일하여 옛사람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큰 글씨를 잘 썼고 글자가 클수록 결구가 더욱 엄정해졌다. 91세에 無錫의 손씨를 위해 가묘에 ‘忠孝傳家’라는 4글자의 편액을 써주었는데, 글자가 사방 3척이고 기백과 힘이 침착하고 두터워 보는 사람들이 그 뛰어남을 감탄했다. 당시에 논자들은 그의 서예가 동시대의 劉墉ㆍ王文治ㆍ翁方綱ㆍ汪士? 등의 장점을 겸했고 필력은 종횡으로 마치 천마가 하늘을 달리는 듯하며, 소식과 미불의 사이를 넘나들었다고 했다.
양동서는 정력이 남보다 뛰어나, 만년에도 여전히 파리머리만한 소해를 쓸 수 있었다. 사람들이 국내외에서 그의 작품을 구하고자 하여 그는 매일 몇십 장의 종이에 글씨를 썼으며 팔십여 세 때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위하여 비문과 묘지를 쓰느라 종일 쉬지 않았다.
서예 이외에 그는 또한 인물과 화훼를 잘 그렸고 또한 감상에도 뛰어났다. 옛사람의 서화에 대해 눈길이 가면 곧 진위를 판별 할 수 있었다. 죽기 며칠 전에 그는 스스로 부고문을 썼는데 필법이 창경하기가 평상시와 같았다.
* 절강성 錢塘(지금의 浙江省 杭州市) 사람. 자는 元穎. 호는 山舟先生?不翁?新吾長翁. 저작은 『頻羅庵論書』ㆍ『直語補正』ㆍ『頻羅庵書畵跋』. 작품은 제자가 새긴 『瓣香樓帖』과 『靑霞館帖』.
20. 王文治
청나라 梁紹壬은 『兩般秋雨庵隨筆』에서 “청나라의 유용은 오로지 기백과 힘을 강구했고, 왕문치는 전적으로 풍신을 취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농묵재상, 담묵심화’라는 말이 있다.”라고 했다. 왕문치는 장봉인 양호와 검푸른 담묵을 즐겨 써서 자연스럽고 표일한 서풍과 함께 겉과 속이 서로 잘 어울리는 묘함을 이루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이같이 말한 것이다.
王文治(1730-1802)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 때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청년 시절에 시로 이름이 있었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동기창을 배웠고 후에 ‘이왕’을 전공했으며, 곁으로는 저수량?이옹?장즉지 등에 이르러 자신의 깨끗하고 성글면서 수려하고 연미한 독특한 서풍을 형성했다.
후세 사람은 비학을 법으로 삼았기에 그의 글씨와 그림을 가볍고 천박하다고 평했다. 객관적으로 논하면, 그의 글씨는 안온하고 표일하면서 온아하며 골격이 맑고 부드러우나, 약간 연미함에 치우친 단점이 있다.
* 丹徒(지금의 江蘇省 鎭江市) 사람. 자는 禹卿. 호는 夢樓. 벼슬은 翰林侍讀?운남성 臨安知府.
21. 翁方綱
翁方綱(1733-1818)은 장서가 매우 풍부했고 견문이 넓고 해박했으며 금석고증에 뛰어났고 감상에 정통했다. 일생동안 유명한 비첩을 고증하여 제발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는 비학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다. 처음에 안진경을 배웠고 나중에 우세남과 구양순 및 기타 당나라 비를 공부했으며, 예서는 『사신비』ㆍ『예기비』 등 한나라 비를 법으로 삼았다. 그는 비첩에서 숨은 지식을 두루 수집했고 글씨를 쓸 때 더욱 체세를 갖추었으며, 또한 옛날 첩을 雙鉤摹勒한 것이 수십 본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북방에서 쓰는 碑版의 대부분은 그에게 부탁했다.
당시 북경의 서예는 劉墉과 옹방강 두 사람이 가장 뛰어났다. 옹방강은 해서?전서?예서의 모든 서체를 잘했는데, 특히 소해는 질박하고 차분하면서 두텁고 착실하여 경지가 자못 높았다. 이외에 옹방강은 미세한 글씨에 재주가 뛰어나서 매년 초하루에 반드시 수박씨 속살에다 해서 네 글자를 썼는데, 50세 이후에는‘聖壽無疆’, 60세 이후에는 ‘天子萬年’, 70세 이후에는‘天下泰平’이라고 썼다. 또한 사방 1촌이 되지 않는 종이에 <난정서>를 전부 썼는데 필획의 끝이 모든 운치를 다했고, 깨알 하나에 ‘一片氷心在玉壺’라는 7글자를 쓸 수 있었다.
* 順天大興(지금의 北京市) 사람. 자는 正三?忠敍. 호는 覃谿?彛齋?蘇齋. 벼슬은 內閣學士. 저서는 『兩漢金石記』?『漢石經殘字考』?『碑別字』.
22. 桂馥
桂馥(1736-1805)은 많은 책을 두루 읽었고 금석 비문과 조판에 대해 연구가 매우 깊었으며, 고증과 감상에 뛰어났다.
그의 예서는 한나라 비를 법으로 삼았고 <孔宙>?<衡方>?<張遷>비에 대한 공력이 특히 깊었다. 그의 젊은 시절 예서는 단정하고 두터우면서 평온했으며 수려하고 굳세어 능히 한나라 비를 축소시킬 수 있었는데 작아질수록 더욱 뛰어났다. 만년에는 강경하고 침착하며 혼후하고 웅장했으며, 결체는 모나게 채워 밖은 조밀하고 가운데는 펼쳐서 최고의 무르익은 경지에 도달했다. 계복은 또한 『國朝隸品』을 지어 청나라 서예가들의 예서 작품을 전문적으로 평가했다.
그의 행서와 해서도 파리하고 수려하며 표일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또한 指書에도 뛰어났다. 일찍이 제남의 五龍潭에서 한 그루의 고목을 하나를 둘로 쪼개 손가락에 먹을 묻혀서 한 폭의 전서 대련을 썼는데, 예스럽고 무성하며 기이한 정취가 있었다.
이외에 그는 詩文과 遊記도 잘 써서 완원은 그를 칭찬하여 “시를 짓는 재능과 예서 글씨는 동시대에 짝이 없다.”라고 칭찬했다.
* 산동성 曲阜 사람. 자는 冬卉. 호는 未穀?雩門?老苔?瀆井復民?肅然山外史. 서적과 서론으로는 『霖雨橋記』?『墨龍潭詩刻』?『續三十五擧』?『繆篆分韻』.
23. 錢?
청나라 강희ㆍ건륭 연간에는 조맹부와 동기창을 법으로 삼아 딱딱하고 판에 박은 것을 형성하여 ‘館閣體’가 풍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錢?(1740-1795)은 시대 조류의 움직임을 거슬러 새로운 표준인 기이함을 세우고, 시속이 좋아하지 않는 안진경의 모든 비를 전공하고, 형체와 정신을 갖춘 것 같은 변화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서예계의 억압된 시대의 답답한 국면을 타파했다.
그는 젊었을 때 널리 왕희지ㆍ저수량ㆍ구양순ㆍ미불 등을 취했고, 30세 이후 안진경을 전공했으며 무릇 안진경의 비첩이면 해서ㆍ행서ㆍ초고를 막론하지 않았다. 백 번 이상을 임모했고, 필의와 신운에 착안했지 근근이 필획의 간격을 따지지 않았다. 법을 지켰지만 법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그의 서예 형체와 정신은 ‘안체’를 닮았으나 또한 자기의 너그럽고 유창함 등의 특유한 풍격을 형성했다. 이외에 그는 또한 화조를 잘 그렸는데, 정신과 성정이 뛰어나고 표일했으며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 그의 서예 명성은 생전에 결코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후 몇 년 뒤에 何紹基ㆍ翁同和ㆍ包世臣 등이 힘써 추앙하자 전풍의 글씨는 비로소 중시받기 시작했다.
* 운남성 昆明 사람. 자는 東注ㆍ約甫. 호는 南園. 벼슬은 通政副使ㆍ湖南學政ㆍ湖廣道監察御史. 작품으로는 <施芳谷壽序>ㆍ<正氣歌>ㆍ<杜甫詩冊>ㆍ<蘇軾詩冊>. 저서는 『南園集』.
24. 登石如
“평화롭고 간략하면서 온화하며, 굳센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라는 말은 청나라 학자인 포세신이 등석여의 전서에 대해 평가한 말이다. 아울러 『藝舟雙楫?國朝書品』에 그를 신품에 나열했다.
鄧石如(1743-1805)가 전각을 배우게 된 것은 梁聞山의 소개로 梅?와 함께 8년간 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매유는 江寧의 대수장가였는데, 그는 금석서화의 수장품이 매우 많아 등석여가 서예를 깊이 연구할 수 있게 매우 좋은 학습조건을 제공했다. 이때부터 등석여의 서예와 전각이 크게 진전되어, 당시의 명사 金枋 등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서예로 명성을 크게 떨쳤는데, 특히 전서로 유명했다. 등석여의 전서는 초기에 ‘二李(李斯ㆍ李陽?)’를 종주로 삼았으나, 그것을 한계로 삼지 않고 예서의 필법으로 전서를 써서 행필의 提按頓挫 변화를 강화하여 전서의 용필을 풍부하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획마다 圓轉하는 玉箸篆을 타파하고 곳곳마다 둥글게 꺾는 울타리에서 침착하고 웅장하면서 혼후하며 뜻과 기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예술효과를 얻었다. 이것이 이른바 “필획은 둥근 곳에서 다시 곧음을 구하고, 필의는 둥글게 들어갈 때 다시 모남을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등석여 전서의 필획은 응결되고 단련되어 굳세며, 긴밀하고 중후하여 일종의 금석의 운치를 갖추고 있다. 등석여는 산수 유람을 즐겨 그의 서예에 일종의 변화무쌍하고 표일하며 성글고 질탕하면서 전아하며 영활한 산수의 기질을 주었다. 이외에 등석여는 전서를 쓰는데 ‘굳셈[?]’과 ‘영활함[靈]’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의 글씨의 선은 부드러운 가운데 강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 안휘성 懷寧 사람. 호는 頑伯?完白山人ㆍ?游道人?古浣子.
25. 錢?
錢?(1744-1806)의 집안 숙부인 錢大昕과 錢大昭, 그리고 형인 錢塘은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이다. 전점은 가학을 계승하여 文字訓??經史?輿地?音韻?金石 등의 학문에 정통했다.
전점은 집에 있을 때 전서를 배우지 않았는데, 후에 북경으로 가서 전대흔을 방문했을 때 그가 전점에게 당나라 이양빙의 <城隍墓碑>를 쓰라고 하여 전점은 각고의 노력으로 연습하여 글씨가 크게 발전했다.
전점은 만년에 오른쪽이 반신불수가 되어 왼손을 사용해서 글씨를 썼기 때문에 단순한 小篆의 굴림과 전환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에 鐘鼎文?石鼓文?晉漢銅器款識?漢碑題額 등 모든 서체를 전서 가운데 섞어서 서체가 둥글면서 모나고 전서 같으면서 예서 같고 필력이 굳세고 두터워 또 다른 맛이 있었다.
* 嘉定縣 사람. 자는 憲之. 호는 十蘭?篆秋. 벼슬은 乾州州判?署武功縣.
26. 伊秉綬
청나라 서예가 伊秉綬(1754-1815)는 전서와 해서를 잘 썼고, 특히 예서에 뛰어났다. 이병수는 퇴임 후에 남은 시간을 서예와 전각 그리고 시문과 회화에 힘썼다. 한나라 비에서 <衡方碑>ㆍ<張遷碑>ㆍ<孔宙碑>ㆍ<韓仁碑>ㆍ<禮器碑> 등은 모두 그가 매우 정밀히 연구한 것이다.
이병수는 예서에서 파책과 도필로 燕尾를 만드는 것, 즉 반드시 붓을 들어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만 뜻을 이르게 할 뿐이니, 스스로 높고 예스러우며 넓고 커서 굳센 운치와 맛이 있었다. 결체의 모습은 마치 방정한 것 같으면서도 변화가 풍부하여, 엄정하고 단아하며 또한 기세가 드높았으니, 특히 편액이나 주련을 쓰기에 적합하다. 그는 작은 예서 또한 매우 뛰어나서 당시에 王文端과 紀文達 등은 늘 그의 작은 예서로 상소를 써서 건륭황제의 칭찬을 크게 받았다. 당시 이병수의 예서와 등석여의 전서는 이름을 나란히 하였으므로 ‘南伊北鄧’이란 칭찬이 있었다. 이병수의 행서는 전서의 필법을 섞어서 파리하면서도 굳세고 강건하며 종횡으로 전환하며 자유자재로 글씨를 썼다.
* 복건성 汀州 사람. 자는 組似. 호는 墨卿??庵. 저서는 『留春草堂詩?』. 작품은 대부분 『?庵集錦』에 남아 있다.
27. 包世臣
嘉慶(1796-1820)?道光(1821-1850) 연간에 碑學이 점차 일어나 서예의 신천지를 열었다. 包世臣(1775-1855)은 비학운동의 기수이면서 이론의 권위자이다.
포세신은 중년에 안진경과 구양순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시 소식과 동기창을 거친 뒤에 북비에 힘을 다했고 만년에는 왕희지 부자를 배웠다. 그는 스스로 말하길, 南唐의 『畵贊』 棗板閣本을 얻어 10년을 애써 연습해도 필법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후에 다시 漢ㆍ魏의 여러 비를 배우고서야 비로소 필법을 깨달았다고 했다. 포세신은 서예에 40여 년간 힘을 다하고서야 비로소 옛사람들의 집필법?운필?결체?포백의 비결을 얻어 雙鉤懸腕ㆍ實指虛掌ㆍ逆入平出로 총결하여 자기의 학설체계를 형성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서예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그의 집필법도 결코 매우 정확하지 않다고 여겼으며, 서예 평가도 극단적인 면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서예사의 지위와 적극적인 작용에 대한 것은 또한 긍정했다. 특히 그가 쓴 『藝舟雙楫』이 비록 이론에서 아직 완전히 갖추어진 것은 아니지만 비학운동의 창시에 지도적 작용을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안휘성 涇縣 사람. 자는 愼伯?愼齋. 호는 倦翁?小倦游閣外史.
28. 吳熙載
吳熙載(1799-1870년)는 諸生으로 박학하고 재능이 많았으며, 포세신의 입문제자가 되었다. 포세신은 서예이론가이며 비록 전서와 예서를 매우 좋아했으나, 본인은 오히려 이 두 서체에 공력이 비교적 얕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서와 예서의 공부가 심후했던 오희재는 곧 스승 이론의 이상적 실천자가 되었다.
오희재는 서예에서 스승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秦ㆍ漢과 남북조에 치력했으며, 특히 북위의 비에 특히 힘을 다했다. 전서 필법은 직접 포세신의 선생 등석여를 계승하여 필획이 둥글고 단정하면서 조화로움과 평온함이 등석여를 꼭 닮았다.
그는 여러 분야에 능했으니,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인장 새기는 것이 첫째, 화훼도가 둘째, 산수화가 셋째, 전서가 넷째, 예서가 다섯째, 마지막으로 해서라고 평했다.
* 강소성 儀徵 사람. 본명은 廷?. 자는 熙載?讓之?攘之. 호는 讓翁?晩學居士.
29. 阮元
阮元(1764-1849)은 청나라 중ㆍ만기의 금석고고학 제창자의 한 사람이며, 또한 ‘南北書派論’을 제일 먼저 제창한 사람이다. 완원은 학식이 깊고 넓어서 저작이 자못 영향력이 있었으며 당시 명망이 매우 높았다.
그는 서론저작인 『南北書派論』에서 서예의 南宗과 北宗의 설을 제일 먼저 제시했다. 또한 후세의 帖學과 碑學 양파의 서예 원류와 풍격의 차이점을 상세히 분석한 그는 중국지역문화설의 옹호자이다. 그의 『小滄浪筆談』이란 글은 서예의 기초이론에 대해 또한 독창적인 견해가 있다.
완원의 서예는 비학에서 힘을 얻었으니, 〈석문송〉ㆍ〈천발신참비〉 등에 많은 연구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큰 기운이 물씬거리며 에워싸면서 방종하고 표일하여 날아 움직이는 것 같으니, 이 두 비의 정신과 뜻이 매우 많이 있다. 아울러 항상 이러한 종류의 글자로 쓴 擘?의 큰 글씨와 편액의 글씨가 사람들에게 많은 숭배와 존경을 받았다.
* 강소성 儀徵 사람. 자는 伯元. 호는 芸臺ㆍ怡性老人ㆍ?經老人. 관직은 體仁閣大學士. 시호는 文達.
30. 何紹基
何紹基(1799-1873). 유명한 서예가 하소기는 청나라 비학파의 정신과 실천을 확실하게 탐색하고 성공한 실천자의 한 사람이다.
하소기는 많은 책을 넓게 섭렵해서 經ㆍ史ㆍ子에 모두 저술이 있었다. 특히, 소학에 정통했고, 곁으로는 金石碑版 문자에 이르렀으며, 서예에 심취해 수십 년 동안 쉬지 않았다. 아울러 또한 옛것을 배워 변화할 수 있어 스스로 면모를 이루었다. 하소기의 서예는 처음에 안진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결구를 개척해서 점과 획이 웅장하고 강했다. 글씨를 쓸 때 回腕法을 사용하고 온몸의 힘으로 逆勢行筆을 하여 북위서예의 신운을 잘 얻었다.
하소기는 북위서예를 배움에 있어 마음으로 임모하고 손으로 추구하며 위로 거슬러 올라가 주ㆍ진ㆍ양한의 옛날 주문ㆍ전서ㆍ예서에 이르렀다. 아울러 이로부터 서예 변천의 연속성을 탐색할 수 있었다. 그는 한나라 예서를 배워 그 활달함을 얻었고, 歐暘通을 배워 그 험준함을 취했다. 또한 비를 임서하는 법으로 행서와 초서를 썼고, 첩을 임서하는 법으로 북비를 써서, 풍격과 광채를 드러냈으며 판에 박히지 않았다. 그는 안진경의 <爭座位帖>?<裴將軍帖>에 깊이 빠져 이를 행서와 초서에 융화시켰다. 확실히 그는 비와 첩의 장점을 융화해서 스스로의 풍격과 법도를 이룬 서예의 대가이다.
* 호남성 道州縣 사람. 자는 子貞. 호는 東洲ㆍ??. 벼슬은 編修.
31. 張裕釗
張裕釗(1823-1894)의 글씨와 그림은 위ㆍ진ㆍ남북조 제가를 겸하고 취하여 스스로 하나의 서체를 이루었다. 결체는 굳세고 명랑하며, 파리하고 길며, 겉은 모나고 안은 둥글다. 정신과 기운은 안으로 함축하여 엄정하면서 맑고 굳세며, 용필은 굳세고 험준하며 깎아지른 듯하다.
강유위는 그를 극진히 여겨 그의 글씨를 “해서는 능히 晉을 빚어 魏를 구워내었고, 宋ㆍ梁을 잉태하여 齊ㆍ隋를 배양했으니, 천년 이래 더불어 비교할 사람이 없다.”라고 칭찬했다. 또한 말하기를 필법은 당나라로부터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장유쇠는 등석여를 계승하여 일어나서 “용력이 특히 깊고 고금을 이겨서 혼후하고 넓으면서 깊고 예스러워 바로 위?진의 전함을 이었다. 특히 필법을 중흥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후에 서예를 평론자하는 사람이 강유위의 말을 따른 자는 많지 않다. 일반적으로 장유쇠의 해서는 청대 비학에서 가히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지만, 다른 서체는 동시대의 다른 서예가의 수준을 아직 뛰어넘지 못했다고 보았다.
* 호북성 武昌 사람. 자는 廉卿. 호는 濂亭.
32. 翁同和
翁同和(1830-1904)는 광서황제의 스승이고, 서예는 주로 안진경과 미불을 배웠다. 관직을 사양하고 집에 돌아간 후에 여러 북비를 공부하여, 서예 기백이 순후하고 하나의 격식에 구속되지 않았다. 초탈하고 표일하며 너그러워 안진경 글씨의 온화함과 북비의 혼후하고 그윽한 기운이 있었다. 청나라 徐珂는 『淸稗類?』라는 책에서 “옹동화의 서예는 하나의 격식에 구속되지 않아 건륭ㆍ가경 이후의 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평했다.
* 강소성 常熟 사람. 자는 叔平. 호는 松禪?甁庵居士. 벼슬은 工部尙書?軍機大臣. 시호가 文恭.
33. 趙之謙
趙之謙(1829-1884)은 박학다재하여 금석?고증?목록?서화?전각 등에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솔직하고 거만하여 세상에 분개하고 속세를 미워하여 시대조류를 따르지 않았다. 설령 시문과 서화에서라도 모두 독창적인 새로운 뜻을 펼쳐도 세상에서 용납 받지 못했다.
그의 서예는 제일 처음 안진경을 배웠고, 뒤에는 포세신의 비학이론의 영향을 받아 북비를 다시 공부했으며, <정문공비>?<장맹룡비> 등의 비와 북위의 조상기를 임모했다. 또한 등석여에게 전서와 예서를 배우기도 했다.
실제로 조지겸의 해서?예서?전서의 모든 체에는 자신의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는 포세신의 ‘갈고리와 파임은 거슬리고 보내며 모든 붓털은 힘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鉤捺抵送, 萬毫齊力].’라는 필법을 각종 서체에 운용해서 썼다. 예서에 전서 필의를 운용했고, 해서에 전서와 예서 필의를 운용했으며, 또한 안진경의 필법을 운용하여 북비를 썼다. 그러므로 그의 전서와 예서는 등석여를 배웠으나 등석여와 같지 않고, 해서는 위비를 배웠으나 결과는 ‘안진경을 바닥으로 하고 위나라의 면모[顔底魏面]’를 이루었다. 이외에 그는 또한 위비의 필법을 끌어다가 행초서에 넣어 뭇사람과 다른 예술 풍격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의 서예필력은 견실하고 기운과 기미가 유창하고 질탕하며, 의태가 다양하여 비학에서 수려하고 우아하면서 영활하고 아름다운 문파를 열었다.
* 會稽(지금의 浙江省 紹興市) 사람. 자는 益甫??叔. 호는 悲庵?梅庵?冷君?無悶?鐵三??寮. 벼슬은 강서성 奉新?南城 현령.
34. 梅調鼎
청나라 말의 梅調鼎(1839-1906)은 서예에서 매우 높은 조예가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젊었을 때 일찍이 補博士弟子賢을 지냈으나, 후에 글씨가 안 좋아서 쫓겨나 省試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타격을 통해 더욱 서예학습에 분발했으며 아울러 벼슬길에 나갈 뜻을 끊었다.
매조정은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문득 현완법과 중봉으로 아주 높게 필관의 끝을 잡고 긴 붓털의 양호로 글씨를 연습을 했고 일정한 양에 이른 뒤에 아침을 먹었다. 이렇게 쉬지 않고 몇 십 년을 공부했다. 그의 젊었을 때의 글씨는 예쁘면서도 또한 소박하고 착실하여 마치 젊은 시골처녀를 닮았다. 이는 鄧散木의 말처럼 “분과 연지를 바르지 않은 자연미가 좋다.”라는 것이다. 그는 왕희지 부자를 종주로 삼았고, 곁으로는 여러 서예가를 섭렵했다. 중년이후 구양순 필법을 섞어 쓰기 시작하여 원필을 변화시켜 방필로 만드니 필력이 굳세어졌다. 만년에는 또한 북비에 뜻을 두었으며, 특히 <장맹룡비> 및 <용문이십품>에서 득력하여 필세가 침착하고 웅장하며 사나와졌다.
* 절강성 慈谿 사람. 자는 友竹. 호는 ?翁.
35. 蔣驥
蔣驥는 乾隆(1736-1795) 연간의 사람으로, 생졸연대가 자세치 않으며 蔣衡의 아들이다. 그의 서예는 그다지 이름이 나지 않았지만, 논서 방면에서 특히 懸?執筆의 방법에 관해 주도면밀한 논술이 있었다.
소해를 쓸 때 팔꿈치를 들고 할 수 있으면 이미 하수가 아니다. 오직 팔을 들 수 있어야 정신과 기운이 더욱 평정해질 수 있으며 단정하게 앉지 아니하면 이렇게 될 수 없다. 처음 배울 때 오른 팔은 책상과 가로 놓으나 착실하지 않아서 그 가운데를 허하게 한즉 전체의 힘이 붓 끝에 이르게 된다. 쌓인 연습이 오래 되면 비로소 팔꿈치와 팔이 허하고 영활할 수 있어서 자연스럽게 나오니 억지로 힘쓸 필요가 없다. 만약 오른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어 착실함이 지나치면 단지 팔 힘만 이르게 될 뿐이다. 붓대를 잡음에 이르러서는 처음 배울 때 또한 적중함을 위주로 해야지 지나치게 높으면 형세를 잃기 쉽다.
그는 또한 서예 학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예를 학습함에 어리석게 판에 박힌 듯하거나 솔직하게 할 수 없으니, 서예의 묘함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제 막 임모를 시작했을 때는 단지 원래 법첩 형식에서 서로 닮은 형상을 추구해야 한다. 마치 담장을 따라 길을 걸어가는 것 같이 길이 있어 좇을 수 있다. 이때에는 마땅히 힘닿는 데까지 법첩에 따라 임모하는 연습을 함에 힘써 평평하고 곧으면서 방정함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 후에 다시 점과 획 그리고 결구와 동태의 천변만화에 주의하여 한 번 깨달으면 곧 확실히 이해할 수 있다.
* 강소성 金壇 사람. 자는 赤?. 호는 勉齋. 서론 저작은 『續書法論』ㆍ『傳神秘要』.
36. 揚守敬
揚守敬(1839-1915)은 금석?비첩?훈고?목록 등에 매우 뛰어났다. 그의 집에는 장서 수십만 권이 있어 그의 고증을 거쳐 제발해서 인쇄한 고서와 비첩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광범위하고도 노력하여 서예 비첩을 수집하는데 50년에 달했고, 소장한 비첩은 당시 제일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는 4체 서예에 대해 모두 매우 정통했는데 금석기식이 농후하고, 고박하고 자연스러우며 종횡으로 질탕했고 종정문의 임서는 특히 절묘했다. 행서는 대략 종세를 띠고 있으며 의취가 생동감이 있었다. 그의 서예는 중국과 일본에서 모두 명성이 자자했고 일본 친구들이 중국에 와서 그와 서예를 토론하고 학습함이 끊이지 않았다. 유명한 서예 저작인 『學書邇言』은 그가 73세가 되던 해에 상해에서 일본학생 水野元直을 위해 써준 강의원고이다. 이 글은 말이 간단하고 뜻이 족하며 객관적으로 역대 비첩의 진위와 우열을 평하여 기술했다. 또한 중국과 일본 서예가들의 성취와 득실을 평가함에 논리를 세움이 공정하고 정확하여 학술계의 중시를 받았다. 그는 서예를 잘 배우려면 ‘天分?多見?多寫’ 이외에 또한 필수적으로 인품이 높고 학식이 풍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틀림없이 서예의 본질에 이른 것이다.
* 호북성 宜都 사람. 자는 惺吾. 호는 隣蘇.
37. 吳昌碩
吳昌碩(1844-1927)은 근대의 유파를 연 유명한 서화가로, 서예?전각?시문의 성취도 매우 탁월했다. 일찍이 유명한 학자인 愈??楊峴에게 辭章?訓??書藝를 배웠고, 평생 교제한 사람은 대부분 이름난 수장가 또는 서화가였다. 역대 명적을 널리 보고 귀와 눈에 익숙해졌음으로 그의 서화와 전각은 모두 탁월하였다.
중국화는 평소 서예와 서로 잘 융합한다. 중국화 구성의 중요 요소는 행필과 용묵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곧 서예이다. 오창석이 서예의 기초가 없었다면 그의 그림과 인장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서예는 <석고문>에서 득력했으며, 능히 <석고문> 글씨의 깊은 뜻을 탐구할 수 있었고 아울러 초서의 필법을 섞어서 공부하여 그것을 변화시켰다. 용필은 험준하고 날카롭지만 澁勢를 취할 수 있어 필력은 크나 미친 듯 사납지 않았고, 선은 혼후하나 무겁고 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글씨는 응집하면서 굳세고 기운과 도량이 넓고 컸으며, 먹색은 무겁고 착실하면서도 성글고 생동감이 있으며, 점과 획의 넓고 아득하여 마치 석각과 같아 평론가들이 ‘금석기’가 풍부하다고 말했다. 해서 필법은 안진경으로부터 들어가 종요에서 법을 취해 예스럽고 질박함을 얻었다. 예서 필법은 한나라 <祀三公山碑>를 종주로 삼아 두루 한나라 비를 익혔다. 행서는 처음에 왕탁을 배운 후에 구양순과 미불을 한 용광로에 녹여 질탕하면서도 변화가 많아 자못 畵意가 풍부했다. 만년에는 전서와 예서의 필법으로 광초를 써서 창경하고 웅혼하여 사람과 글씨가 함께 늙어갔다.
* 절강성 安吉縣 사람. 이름은 俊?俊卿. 자는 香補?昌碩?倉碩?蒼石. 호는 缶廬?老缶?老蒼?苦鐵?大聾?石尊者?破荷亭長?五湖印?.
38. 康有爲
『廣藝舟雙楫』은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서학이론 저서이다. 이는 청나라 후기의 ‘비학’에 관한 이론과 실천을 총결한 것으로, 비학의 발전과정에서 완원과 포세신의 저서를 계승한 이후의 세 번째 중요한 논저이다.
康有爲(1858-1927)는 ‘戊戌變法’을 주도한 인물이다. 1889년 강유위는 변법에 대한 글을 올렸으나 좌절당하자 학문 연구로 전향했다. 그는 북경에서 수장품이 풍부한 수장가와 상점에서 구매하는 편리한 방법을 이용하여 널리 碑版을 모아서 계통적으로 정밀하게 서예를 연구했다. 이런 기초에서 강유위는 『광예주쌍즙』을 써냈다.
『광예주쌍즙』은 6권, 27장, 敍目 1편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書鏡』이라 하고 일본판은 『六朝書道論』이라고 했다. 포세신의 『예주쌍즙』이 있었고 강유위는 이보다 널리 모았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책 전체에 섭렵한 면모가 매우 광범위했으니, 書體源流ㆍ品評碑帖ㆍ用筆技巧ㆍ學書經驗 등이 모두 언급되어 있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방면에서 독자가 유의할 가치가 있다. 첫째, 전체의 자료가 풍부하고, 청대 금석학 고증 방면의 성과를 광범위하게 흡수했으며, 북비에 대한 수집이 특히 전면적이다. 둘째, 완원과 포세신의 비학 이론에 대해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빠진 것은 보충했다. 셋째, ‘變’으로 사물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을 강조했으니, 이는 당시에 대한 영향이 특히 컸고 이전 사람에 비교해서 크게 진보한 것이다. 넷째, 당시에 가장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서학이론 전문 저서이다. 전체의 체례는 근엄하고 자료의 고증은 상세하며 체계는 분명하고 명백하다. 이전에 이렇게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서학이론 전문 저서는 아직 없었다.
* 광동성 南海 사람. 원래 이름은 祖治. 자는 廣厦, 혹은 廣夏. 호는 長素ㆍ更生. 벼슬은 工部主事.
39. 于右任
于右任(1877-1972)은 어려서 經史를 깊이 읽었고, 곁으로는 제자백가의 학문에 이르러 매우 심후한 국학의 기초가 있었다. 그는 서예를 매우 좋아했고 또한 높은 성취를 얻었기 때문에 서예 명성이 문학의 명성을 가렸다.
우우임이 서예를 연구한 길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북위 비에 빠지고 아울러 개인의 풍격을 형성한 전기와, 다른 하나는 표준초서를 창립한 후기이다. 우우임은 젊었을 때 일찍이 조맹부의 서예를 배웠고, 후에는 북위 서예를 추앙하였다. 북위의 비각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위하여, 그는 여러 해 동안 눈서리와 비바람도 불사하고 북위의 묘지와 조상제기를 찾아 탁본하여 80-90여 종을 얻었다. 그가 수장한 북위의 묘지에서 7쌍의 부부 묘지가 있었으므로 스스로 서재의 이름을 ‘鴛鴦七誌齋’라고 불렀다.
우우임은 서예를 학습함에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넓은 시각으로 널리 채집하고 수렴하여 북위 서예의 정수를 얻어 매우 질박한 점과 획 그리고 결체를 통해 북위 서예의 특징을 개괄했다. 해서ㆍ행서ㆍ초서를 막론하고 모두 자기의 면모를 형성할 수 있어서 대가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그의 서예는 필력이 강건하고, 결체는 펼쳤고, 기세는 크고, 격조가 높다. 특히 擘?書의 큰 글자 및 대련의 신채는 더욱 사람을 놀라게 했다.
1927년 전후에 우우임은 초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32년에 그가 발기하여 ‘草書社’를 결성하자 사방의 식자들이 그의 휘하에 구름같이 모였다. 그는 수집할 수 있는 데까지 수집하여 역대 비각과 묵적의 초서 <천자문> 100여 종을 얻었다. 그리고 이를 ‘易識’ㆍ‘易寫’ㆍ‘準確’ㆍ‘美觀’의 원칙에 근본해서 전통 초서 필법의 가닥과 이치를 분석하여 잡된 것은 버리고 참된 것만 남겼다. 다시 초서 결체 정형을 유형별로 귀속시키고 집자하여 표준초서 <천자문>을 만들어 1936년에 처음으로 쌍구본을 간행하여 세상에 발표했다. 원래 ‘초서사’ 일원이었던 劉延濤는 『표준초서』를 평가하면서 “표준초서는 천년동안 전하지 않은 비법을 밝히고 과거의 초서를 하나로 총결하여 장래 문자의 새 길을 열었다.”라고 했다.
* 본관은 섬서성 涇陽이나 후에 三原에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三原魯橋人이라 함. 원래 이름은 伯循. 자는 右任. 호는 騷心.
40. 鄭文?
鄭文?(1856-1918)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 집안이었다. 그는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의술에 통했고 음률에 밝았으며, 특히 문자학에 정통했다. 아울러 금석서화를 매우 좋아했으며, 대량의 금석 비판과 명가의 글씨와 그림을 수장했다. 강유위는 정문작이 쓴 북비는 한나라 예서와 위나라 비를 체세로 삼고, 첩학과 묵적으로 기운을 구했다고 했으며 『광예주쌍즙』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문작의 문장?그림?글씨ㆍ의학은 뛰어난 기예로 당시의 으뜸이었으나, 오직 그의 서예를 아는 이가 적었다. 지금 그가 스스로 베낀 시고를 보니, 굳세고 표일하며 깊고 예스럽다. 묘한 아름다움이 부드럽게 조화하여 북비의 장점이 있는 것을 가렸으니, 높고 혼후함을 취했으나 사납고 거칠음은 버렸다. 대개 <장맹룡비> 비음으로부터 들어갔고, 겸하여 <이중선>?<경사군>?<가사백>?<용장사>비 및 <예학명>을 취했다. 무릇 원필이라는 것은 모두 그 정화를 뽑았다. 그러므로 碑意의 두터움을 얻어 엉기고 막힌 흔적이 없었다.
馬宗?도 『?岳樓筆談』에서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정문작의 글씨는 결체는 순전히 남첩을 취했으나 파책은 빼어나게 펴냈다. 다시 겸하여 북비의 묘함이 있어 훨훨 날고 큰 기미는 곧바로 육조에 이르렀다. 간찰과 시고는 손을 벗어난 탄환처럼 이를 대하면 유달리 준걸스런 풍이 있었다. 내가 일찍이 정문작이 금석 탁본에 제발한 묵적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필법이 가늘기가 마치 유사와 같았으며, 맑고 수려하며 무성하게 어지러운 것이 특히 뛰어난 작품이었다.
* 산동성 高密 사람. 자는 叔問?俊臣. 호는 小坡?瘦碧?大鶴山人. 서예이론서는 『漢魏六朝書體考』?『書隸辯』?『大鶴山房談碑記』?『?宇訪碑錄續補遺』.
41. 曾熙
曾熙(1861-1930)는 ‘石鼓書院’에서 강의를 맡았고, 스스로 南宗이라 칭하며 이서청의 北宗과 더불어 어깨를 겨루었다. 앞서 소개한 서예가 완원 때에 이미 전적으로 남북서파를 논했다. 이른바 ‘남종’이란, 즉 첩학을 위주로 삼고 풍격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말하며, ‘북종’이란 비학을 몸으로 삼고 풍격은 웅장하고 굳센 면모를 나타냄을 말한다. 증희는 비록 ‘남종’이라 칭했지만 실제로는 남북의 장점을 겸해서 융회했고, 아울러 모나고 둥근 자태를 자기의 글씨에서 취했다. 그러므로 그의 행서와 해서 등 각종 서체는 모두 형체가 험준하고 정신이 표일한 묘함이 있었다. 그의 장초서도 위로는 예서ㆍ팔분의 연원을 좇고, 아래로는 위ㆍ진 금초의 법도를 취해 초탈하고 호매하면서 자연스럽게 써서 각기 한 시대를 떨쳤다.
* 호남성 衡陽 사람. 자는 子緝ㆍ季田子. 호는 俟園?農髥.
* 청나라 말에서 민국 초기의 서단에서 ‘北李’는 李瑞淸을, ‘南曾’은 曾熙를 가리킨다.
42. 李瑞淸
‘北李’인 李瑞淸(1867-1920)은 북비를 배웠는데, <정문공비>에 가장 힘을 쏟았다. 그는 젊었을 때 북비를 연습했고 大篆에 뛰어났으며, 한나라 예서ㆍ팔분ㆍ비갈 등에 대해서도 마음으로 임모하고 손으로 추구했다. 아울러 전서ㆍ주문의 필법을 그 안에 녹였고 마지막에는 위비의 서사에 운용했다. 그러므로 그의 서예는 필력이 굳세고 단단하며 기세가 크고 넓어서 스스로 면목을 이루었으니, 이는 魏를 배워 홀로 하나의 풍격을 갖춘 뛰어난 사람이다. 그러나 행필에서는 지나치게 금석 비각에서의 구불거림과 잔결의 맛을 추구했기 때문에 어리석게 딱딱하고 조작됨이 나타나 아직 자연스럽게 혼합되는 묘함을 얻지 못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석한 논술을 했다.
나는 어려서 훈고학을 배웠고 육서를 깊이 연구하고, 鼎과 彛를 고찰하고 살폈으며, 그 훌륭함을 좋아하여 드디어 대전을 익혔다. 붓을 따라 구불거렸으나 아직 예쁘게 두루 미칠 수 없었다. 성장하여 양한의 비갈을 배워 거의 평평하고 곧음을 이해했다. 26세에 금예를 배웠고 널리 육조를 종합하여 이미 사승을 다했으나, 뜻에 의지하여 본뜸에 필성은 가라앉고 부어서 마음과 손이 서로 어긋났다. 하나의 비를 임모할 때마다 걸음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법도에 속박되며 모포와 먹에 묶여 손가락과 손톱이 꺾이고 부러져도 그 피로함을 잊었다. 광서 갑진년(1904)에 황산의 구름을 보고 창해의 물결을 보아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으나, 아직 정미하고 첨예한 생각을 이를 수 없어서 배운 바를 다투니 매번 스스로 탄식한다.
어떤 사람은 “이서청이 스스로 전서를 잘 썼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서청이 유명한 서예가가 된 주요 원인은 사람들이 그가 쓴 위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현재에 서예를 배우는 사람, 특히 석각 서체를 공부하는 사람은 서예 용필의 본래 태세를 진지하게 추구하지 않고, 이서청처럼 고의적으로 떨어 결과적으로 모필 서예에 내포된 뜻을 잃어버린다면 오히려 발전에 저해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따라서 이서청에게 남긴 훈계는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 강서성 臨川 사람. 자는 梅庵. 호는 淸道人.
43. 李叔同
李叔同(1880-1942)은 어려서부터 趙幼梅에게 詞를 배웠고, 唐敬嚴에게 전각과 금석학을 배웠으며, 약관의 나이에 매우 조예가 있었다. 전각ㆍ塡詞ㆍ가곡을 잘 했으며, 특히 서예에 정통했다. 그의 서예는 육조에서 법을 취해, 순박하고 자연스러우며, 火氣를 모두 벗어났다. 그가 浙江兩級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기간에 학생들이 서예작품을 구하러 오면 거부하지 않았다. 출가 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글씨를 구하였다. 이숙동은 이미 출가를 했기 때문에 다시 서예를 해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 항상 망설였으며, 이에 대해 范古農은 “만일 불가의 말씀을 서사하여서 깨끗한 인연을 심는 것 또한 옳다.”라고 건의했다. 그리하여 후에 보이는 이숙동의 서예작품은 대부분 불가의 말씀이다.
* 절강성 平湖 사람. 이름은 文濤?廣候?哀. 불가의 이름을 演音ㆍ弘一. 법명은 弘一法師. 자는 哀公?息霜??. 호는 晩晴老人. 서예작품은 <臨古法書>?<李息庵法書>. 저서는 『李爐印譜』?『李廬詩錄』.
44. 葉恭綽
葉恭綽(1881-1968)은 서화가 집안 출신으로 조부 葉衍蘭은 금석ㆍ서화ㆍ문예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고, 부친 葉??의 자는 仲鸞으로 시문과 전서와 예서에 대해 모두 많은 연구가 있었다. 엽공작은 학술문화와 서화 고고학 등의 일에 힘을 다했고, 서화와 전적 및 기타 문물의 수장에 대한 수량이 매우 볼만했다. 이에 대해 『紅樹寶?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예술운동에 힘을 쏟은 지 50년, 늙음에 이르러도 게으르지 않았다. 전국의 미술전람회 및 서화 단체에 참가하지 않음이 없었고, 문자개혁에 특히 힘을 합했다. 문헌과 고적은 그의 정리를 거쳐 보존된 것이 매우 많았다. 나이 80세가 되자 소장한 서화?전적?문물?중요한 기물 등을 모두 북경?상해?광주?소주?성도 등 도시의 관계된 기관에 헌납하여서 영원히 후세에 전했다.
글씨에 있어서 그는 해서ㆍ행서ㆍ초서 3체에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저수량의 아름다움, 안진경의 강건함, 조맹부의 빼어난 정취를 겸했고, 곁들여 북비의 고박함과 <曹娥婢>의 운치를 섞었다. 그는 서예를 논함에 운필?결구?골력?기세?운치의 5가지를 중점으로 삼았다. 또한 글씨를 배움에 출토된 죽목간독, 한ㆍ위ㆍ육조의 석각, 수ㆍ당의 사경을 종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외에 그는 또한 서예창작에 대해 큰 글씨는 마치 작은 글씨처럼 정련되게 쓰고, 작은 글자는 큰 글자처럼 당당하게 쓰며, 글자마다 기세가 있도록 쓸 것을 제시했다. 엽공작은 일생동안 매우 많은 저술을 했다. 그의 아들 葉公超는 그의 서화에서 정품을 선별한 『葉恭綽書畵選集』을 출판했다.
* 광동성 番? 사람. 자는 裕甫?譽虎?玉甫. 호는 遐庵?遐翁?矩園. 저서는 『遐庵談藝錄』.
45. 羅振玉
羅振玉(1865-1940)은 마지막 황제 溥義를 보좌하며 일본인을 위해 목숨 걸고 일하여 중국근대사에 악명이 높은 대 간신으로 중국인의 죄인이었다. 다만 학술에서 그는 힘을 다해 학문을 하여 저술이 가득 쌓였다. 그는 <석고문> 비각을 고증했고, 옛 기물의 문자를 식별했으며, 한나라의 간찰 글씨, 특히 갑골문 방면의 고증 등 고문화 연구에 유익한 일을 했다. 나진옥은 어렸을 때 안진경의 서예를 학습하기 시작하여 근면 성실하게 공부했으며, 나중에는 고문자학의 연구에 힘을 쏟아 대량의 鼎?ㆍ碑版을 수장함으로써 식견이 넓고 안목이 높았다. 서예에서 그의 갑골문ㆍ금문ㆍ소전ㆍ예서ㆍ해서ㆍ행서 등은 모두 전아하고 운치가 있으며 고박하고 순후하게 썼다.
* 절강성 上虞 사람. 자는 叔蘊ㆍ叔言. 호는 雪堂ㆍ貞松. 저술로는 『殷墟書契考釋』ㆍ『流沙墜簡考釋)』ㆍ『石鼓文考釋』ㆍ『殷商貞卜文字考』ㆍ『再續?宇訪碑錄』ㆍ『鏡話』ㆍ『貞松堂名人法書』ㆍ『百爵齋名人法書』.
46. 沈尹?
沈尹?(1883-1971)은 현대 서단에 영향이 지대한 서예가이며, 또한 학양이 깊었던 저명한 학자이다. 그는 젊었을 때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유학했고 ‘五四’신문화운동을 주장한 사람의 하나이며 일찍이 『新靑年』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新詩를 쓸 것을 제창하여 지은 것이 광범위하게 퍼졌으며, 四體詩에도 조예가 깊었다. 북경대학과 중법대학의 교수를 역임했고 北平大學의 교장을 맡았다. 심윤묵은 초기에 부친의 영향과 지도를 받고 서예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초당의 저수량과 구양순의 근엄한 해서 필법으로 입수하여 위로는 ‘二王’ 서예의 원류로 거슬러 올라가 옛날 누습을 씻어냈다. 그의 해서는 결체가 적절하고 근엄하며, 용필은 비록 가늘기가 실과 같아도 전혀 구차하지 않았다. 점과 획은 필획마다 호응하며 기를 꿰뚫고 신운이 종이에 가득 찼다. 심윤묵은 마음을 따라 하고자 하는 대로 해서ㆍ행서ㆍ초서 관계의 변증법을 부릴 수 있었고, 해서는 행초서의 흐름을 통했으며 행초서는 해서의 정돈됨을 갖추어 자연스럽게 일가를 이루었다.
심윤묵은 필법에 정통했다. 그는 역대의 채옹과 ‘이왕’ 등과 같은 사람의 용필 이론을 실제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총결했다. 그는 고대 서예에 대하여 매우 광범위하게 섭렵했고, 많은 서예가의 장점이 있는 요지를 섭렵했다. 그는 각종 위비를 임모하고 학습하여 해서의 고졸함과 필력을 길렀다. 진ㆍ당ㆍ송ㆍ원ㆍ명의 각 대서예가, 예를 들면 왕희지ㆍ지영ㆍ안진경ㆍ소식ㆍ황정견ㆍ문징명 등의 글씨를 정밀하게 임서했으며, 넓고 맑은 예술의 원천수를 더하여 자기 서예의 풍채를 첨가했다. 심윤묵은 반세기가 넘도록 쉬지 않고 글씨를 썼으며 형체의 포착과 팔 운용의 체험에 대해 그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유기적인 조합을 완전히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의 만년 글씨는 설령 시력이 미치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구슬을 꿰듯 써 내려가서 전체가 구슬과 같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 절강성 吳興 사람. 원래의 이름은 君?. 자는 中. 호는 秋明ㆍ瓠瓜.
47. 袁克文
袁克文(1890-1932)은 중국을 훔친 대도 袁世凱의 차남이다. 그는 비록 원세개의 아들이었지만, 원세개를 황제라고 칭하는 일에 대해 매우 반대했으며, 집안에서 또한 뜻을 얻지 못해 항상 조조의 차남인 陳思王 曹植을 자신에 비유했다. 그는 평소에 문예계의 인사들과 왕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원극문의 글씨는 뜻이 저수량과 안진경 사이에 있었고, 안진경 체의 필법으로 저수량 글씨의 풍운을 구했으며, 굳세고 연미하면서 조금 졸한 필의가 있어 별도로 하나의 풍격을 갖추었다. 특히 그는 대련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한번은 전적으로 신문에 올려 값싸게 글씨를 팔았는데, 하루에 40폭의 대련을 써서 전부 팔았고, 그는 이 수입으로 오래된 먹을 구매하여 대련 100여 폭을 써서 친한 벗과 좋아하는 친구에게 선사했다. 또한 ‘五九紀念扇’ 40개를 써서 ‘五月九日放歌’를 기록했다. 그 문장과 글씨에 애국의 정이 충만하니 나라를 팔아버린 부친 원세개와는 선명한 대조를 보인다.
원극문은 글씨를 씀에 또한 특수한 재능이 있었는데, 시중드는 자가 양쪽에서 종이를 잡아당겨 책상에서 떨어져 공중에 매달게 한 연후에 그는 다시 붓을 들어 먹을 묻혀 공중에 매단 종이에 뜻대로 글씨를 썼다. 쓴 글씨는 힘이 종이의 뒷면까지 침투했으나 종이는 상하지 않았으니, 용필과 필력의 파악이 적합했다. 그가 쓴 작은 글씨의 자세는 더욱 기이하고 특별했다. 그는 아편 피우는 것을 즐겨 반듯하게 누워 한 손으로는 붓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종이를 잡고 허공에 의지해 우러러 글씨를 썼다. 그의 소해는 연미하고 수려하면서 굳세며 조금도 비뚤어지거나 평범하고 연약한 병폐가 없었다.
* 하남성 項城 사람. 자는 豹岑?抱存. 호는 寒雲.
48. 郁錫璜
『餐霞書話』는 서예학습의 많은 경험담을 기록한 한 권의 저작이다. 그 작가인 郁錫璜(1881-1941)은 시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일찍이 용필ㆍ집필에 각고의 공부를 했다. 그는 처음에 안진경을 배웠고, 후에 또한 구양순ㆍ동기창ㆍ왕희지 등을 섭렵했다. 매번 필력이 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50세 이후에 또한 가짜 붓을 한 자루 만들어 온종일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한가할 때면 가짜 붓을 꺼내어 허공에 썼다. 2년이 지난 후 마침내 서서 팔을 들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이로부터 글씨가 크게 진보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일찍이 뱀이 사람을 물때는 항상 먼저 머리를 구부리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먼저 허리를 활처럼 구부리는 것을 보았다. 이는 행동하기 전에 기세를 모으는 것이며 역량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서예가가 글씨를 쓸 때도 붓에 먹을 가득 묻혀 정신을 집중하고 기운을 조용히 하며 허리를 구부려 기세를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 글씨를 쓰면 삼협의 물에 배가 순풍에 돛단 것처럼 순식간에 천리를 가는 것 같아 신의 도움이 있는 것 같다.
* 상해시 사람. 자는 ?菁. 서명은 餐霞散人.
49. 胡小石
胡小石(1888-1962)은 남경중앙대학, 광주중산대학, 남경대학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李瑞淸에게 서예를 배워 頓挫와 遲澁의 운필법에 뛰어났다. 아울러 위비의 가로로 넙적한 형세를 변화시켜 세로로 긴 형세로 만들어 고박하고 파리하면서 굳세며, 정기는 안으로 수렴하고 흐르듯 날카로우면서 막힘이 없어 별도의 풍격을 이루었다. 전서ㆍ예서ㆍ해서ㆍ행서ㆍ초서 모두 자기의 독특한 면목이 있었고, 고문자학과 서예이론 모두에 비교적 높은 조예가 있었다. 일찍이 『中國書學史』를 강의했다.
* 절강성 紹興 사람. 이름은 光煇. 호는 債伊?夏序?沙公. 논저는『書藝略論』.
50. 鄧鐵
鄧鐵(1896-1963)은 蕭?庵에게 글씨를 배웠고, 전각은 趙古泥에게 배웠으며, 1930년대 강남에서 이름을 떨쳤다. 해서?행서?초서?예서?전서 모두 잘 썼으며, 특히 전각과 전서는 독특한 풍격이 있었다. 광초는 장욱과 회소를 배워 그의 평화롭고 간결하면서 조용한 해서와 선명한 대조를 형성했다.
* 상해 사람. 원래의 이름은 菊初?鈍鐵. 자는 散木이며, 호는 蘆中人?無羌?虛木?糞翁?郁靑?一足??. 저서는 『書法學習必讀』?『續書譜圖解』?『草書寫法』ㆍ『歐陽結體三十六法全注釋』?『篆刻學』.
51. 陸維釗
陸維釗(1898-1980)는 절강미술학원 교수로서 해서ㆍ초서ㆍ전서ㆍ예서ㆍ행서의 5체에 모두 연구가 있었고, 특히 전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그의 서예, 특히 전서와 예서는 예서에 전서가 있고 전서에 예서가 있으며, 아울러 漢簡의 필의를 섞었다. 동시에 과감하고 대담하게 ‘破體’를 만들었는데, 납작하고 모난 형태의 전서와 예서 각 부수를 흩어 놓고 따로 떼어 멀리 가장자리에 포치했다. 처음 보면, 한 글자의 2개 혹은 3개의 부수가 이쪽저쪽으로 흩어져, 함께 있지 않고 오히려 다른 행 글자의 어떤 부수와 함께 붙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점과 획의 포치 형세가 돌아보고 분명하며, 글자는 흩어졌어도 기운이 흩어지지 않았다. 아울러 결체는 펼쳤고, 필세는 굳세고 험절하면서 심후하고 웅장하다. 서예이론에 있어서 그는 비와 첩이 서로 통해야함을 주장했다
* 절강성 平湖 사람. 자는 微昭. 호는 昭翁. 저서는 『中國書法』.
Ⅲ. 마치는 말
원 저서의 말미에 청나라의 서예가의 특징과 풍모에 대한 종합적인 서술이 있다. 이에 대한 번역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마치는 말을 갈음하고자 한다.
청나라는 명나라에 비해 서예에 비교적 큰 발전이 있었고, 개성과 특색 있는 서예가를 많이 배출했다. 여기에는 사상의 근원과 사회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며, 아래와 같다.
첫째, 북방 소수 민족인 만주족이 중원에 들어와 청나라를 세운 이후, 漢文化의 정수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것을 중시했으나, 동시에 많은 방면에서 한족에게 만주족 통치자의 풍속과 관습 및 문화 의식을 좇도록 압박했다. 이 자체는 곧 새로운 문화융합의 조류를 일으켰고, 아울러 문화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은 통치자가 이단의 정신문화 계통을 진압하고자 예술의 하나인 서예로써, 비교적 큰 형식의 개혁을 더욱 용이하게 진행하였고 이는 만주족이 한족을 정치적으로 통치하는데 위험 요소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민족 문화와 서로 대립적인 각도에서 서예라는 한자예술을 대하는 것은, 청나라 소수민족이 통치하는 한족의 반항의식으로 나타나는 자아도취ㆍ자아마비ㆍ자아안위의 작용을 기묘하게 해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런 통치자의 의식적인 융합은 피통치자가 부지불식간의 융합과 함께 서예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둘째, 명나라 이래로부터 서양의 신문화와 신사상은 필연적으로 전형적인 중국문화인 서예에 대해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따라서 서예의 관념이 변하여 ‘館閣體’라는 천편일률적으로 글씨를 쓰는 공부와 서예의 심미관에 대해 회의를 일으켰다. 그러므로 청나라 중기와 말기의 서예가들은 금석고고학과 문자학 연구의 부산품인 상고시대의 종정ㆍ갑골ㆍ석각 서예의 형식, 즉 대전ㆍ소전ㆍ漢隸ㆍ魏碑 등을 빌려 서예 개성의 자유 창조정신을 그 안에 주입했다. 왕탁ㆍ부산ㆍ완원ㆍ포세신ㆍ정판교ㆍ금농ㆍ강유위 등 식견이 탁월한 서예이론가들은 “차라리 졸할지언정 공교하지 말며, 차라기 미울지언정 예쁘게 하지 말라[寧拙勿巧, 寧醜勿媚].”라는 것을 주장하여, 개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주장하고 중용적인 평화로움을 부정했으며, 천진한 자연스러움을 주장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 조작하는 것을 부정했다. 완원의 『南北書派論』, 포세신의 『藝舟雙楫』, 강유위의『廣藝舟雙楫』, 그리고 石濤의 『畵語錄』 및 정판교ㆍ왕탁ㆍ부산 등 이름난 서예가와 화가 모두는 이러한 새로운 서화 심미이론의 열렬한 선동자이자 실천자들이며, 서예 심미평론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들은 실천에서 과감하고 대담한 돌파를 하여, 평범한 것과 다른 행과 열이 없는 ‘亂石鋪街’체를 썼으며, 굵고 가는 변화가 극렬하고 모서리를 뾰쪽하고 예리하게 필봉을 드러낸 ‘漆書’라는 金農體 등을 썼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천여 년 간 서단을 지배해온 거의 획일적인 ‘담담함이 평화로운[淡如平和]’ 것과 ‘윤택함을 쌓아 함유하고 까는[蘊潤含藉]’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는 전통 심미 관념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에 따라 미치고 괴이한 것[狂怪]과 졸하고 추한 것[拙醜]을 서예의 심미 범주에 들여 다양하면서 통일된 더욱 광활한 심미 공간을 펼쳤다. 동시에 서예를 예술로 만들고 단지 공구로 삼지 않는 문화예술의 가치 및 지위를 향상시켰다. 이러한 진보는 위ㆍ진ㆍ남북조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청나라 서예가 비교적 큰 발전이 있었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다.
셋째, 서예기법의 각도에서 말하면, 청나라는 점점 더 부패하고 몰락한 과거제도와 잘 모르면서 고상한 척 하기 위해 문화 활동을 한 황제?왕?공?귀족들이 圓ㆍ光ㆍ齊ㆍ亮의 ‘관각체’를 최대한 고취시켰었다. 이는 지식이 있는 선비들의 반감을 더욱 야기시켰고, 더욱 강렬하게 엽기적인 새로운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글을 쓰고 이론을 세워 새로운 의론을 탐구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도 유가의 도통을 저버리고 일반적인 규범과는 판이한 서예의 형식을 찾고 탐색하여, 가면 갈수록 심각한 자신의 인식과 풍부한 감정을 표현했다. 이렇게 크고 풍부한 서예의 표현 형식은 서예가의 예술 창조를 위한 참신한 영역을 열었고, 아울러 이러한 새로운 영역에서 크게 이채로움을 펼쳤다. 앞에서 말한 정판교ㆍ금농 이외에, 또한 하소기?이병수?조지겸?강유위 등도 서예의 풍격과 형식에서 모두 ‘관각체’의 양식 형태에 반대하여 홀로 한 지류를 표방해서 영원히 천추에 세웠다. 그리고 당시의 황제들이 크게 치켜세워 ‘우리나라의 왕희지[我朝王羲之]’?'지금 조정에서 제일[今朝第一]'?‘종요와 왕희지를 뛰어넘음[超邁鍾王]’이라고 받들었던 서예가들은 마침내 奴書의 면목으로 역사발전의 조류에 삼켜지자, 정판교?금농?하소기?조지겸?강유위 등의 보배롭고 귀한 창조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러므로 비록 청나라에 기재되어 있는 서예가의 총 인원수가 명나라에 비해 적어 1,100명에 미치지 못하지만, 오히려 가히 종요ㆍ왕희지?구양순?안진경?소식?황정견?미불?채양과 서로 아름다움을 다툴만한 서예의 대가가 몇 명 출현했다.
넷째, 서예가 구성에 대한 내재적인 요소를 보면, 청나라의 봉건통치가 날로 부패하고 몰락함으로 말미암아 재능이 출중하고 좋은 학문적 소양과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서 펼칠 바가 불가능하거나 혹은 비록 펼치더라도 오히려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쳤다. 단지 번뜩이는 재능과 충만한 추구 정신의 내재적 창조성 기질을 전환하여 서학과 금석고고학의 애호에 들여놓게 되었다. 강유위의 『광예주쌍즙』은 바로 그가 정치에서 처음 실패한 후에 전환하여 분발한 결과이다. 이는 곧 청나라의 서예가와 서예이론가들이 조건이 불리한 상황에서 자기의 분투 목표를 조정하여 각종 방식으로 자기의 독특한 인식과 감정을 표현하고 발설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곧 평범하지 않은 서예이론과 서예작품을 탄생시켰고, 그들이 서예가와 서예이론가가 되는 독특한 토대가 된 것이다. 이로부터 역대 서예 대가들의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아울러 역사 속에 빛을 발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우러름과 칭찬을 받았다.
Ⅳ. 부록 : 중국 청대 황제와 연호
건주 여진(建州 女眞) 추장 (후금 건국 전까지)
대 수 묘 호 시 호 성 명 재위기간 - 청 시조(淸始祖)(청 태조 추숭) - 애신각라포고리옹순(愛新覺羅布庫里雍順) - - 청 조조(淸肇祖)(청 태조 추숭) 원황제(原皇帝) 애신각라맹특목(愛新覺羅孟特穆) 1405-1433 - - 순황제(純皇帝)(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충선(愛新覺羅充善) 1433-1467 - - 흥황제(興皇帝)(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탈라(愛新覺羅脫羅) 1467-1481 - - 정황제(正皇帝)(청 태조 추숭) 애신각라석보제편고(愛新覺羅錫寶齊篇古) 1481-1522 - 청 흥조(淸興祖)(청 태조 추숭) 직황제(直皇帝) 애신각라복만(愛新覺羅福滿) 1522-1542 - 청 경조(淸景祖)(청 태조 추숭) 익황제(翼皇帝) 애신각라각창안(愛新覺羅覺昌安) 1542-1571 - 청 현조(淸顯祖)(청 태조 추숭) 선황제(宣皇帝) 애신각라탑극세(愛新覺羅塔克世) 1571-1583 제1대 청 태조(淸太祖)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애신각라노이합적(愛新覺羅努爾哈赤)(누르하치) 1583-1616
후금 황제와 연호 후금(後金, 1616-1636)
대 수 |
묘 호 |
시 호 |
성 명 |
연 호 |
재위기간 |
제1대 |
청 태조 (淸太祖) |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애신각라노이합적(愛新覺羅努爾哈赤)(누르하치) |
천명 (天命) |
1616-1626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愛新覺羅皇太極)(홍타이지) |
천총 (天聰) |
1626-1636 |
청나라 황제와 연호 청(淸, 1636-1912)
대 수 |
묘 호 |
시 호 |
성 명 |
연 호 |
재위기간 |
제2대 |
청 태종 (淸太宗) |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애신각라황태극(愛新覺羅皇太極)(홍타이지) |
숭덕 (崇德) |
1636-1643 |
- |
청 성종 (淸成宗)(청세조추승) |
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 |
애신각라도이곤(愛新覺羅多爾袞)(도르곤) |
- |
- |
제3대 |
청 세조 (淸世祖) |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애신각라복림(愛新覺羅福臨) |
순치 (順治) |
1643-1661 |
제4대 |
청 성조 (淸聖祖)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애신각라현엽(愛新覺羅玄燁) |
강희 (康熙) |
1661-1722 |
제5대 |
청 세종 (淸世宗) |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애신각라윤진(愛新覺羅胤?) |
옹정 (雍正) |
1722-1735 |
제6대 |
청 고종 (淸高宗) |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애신각라홍력(愛新覺羅弘曆) |
건륭 (乾隆) |
1735-1795 |
제7대 |
청 인종 (淸仁宗) |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 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애신각라옹염(愛新覺羅?琰) |
가경 (嘉慶) |
1795-1820 |
제8대 |
청 선종 (淸宣宗) |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 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애신각라민녕(愛新覺羅旻寧) |
도광 (道光) |
1820-1850 |
제9대 |
청 문종 (淸文宗) |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 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애신각라혁저(愛新覺羅奕?) |
함풍 (咸豊) |
1850-1861 |
제10대 |
청 목종 (淸穆宗) |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애신각라재순(愛新覺羅載淳) |
동치 (同治) |
1861-1875 |
제11대 |
청 덕종 (淸德宗) |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애신각라재첨(愛新覺羅載?) |
광서 (光緖) |
1875-1908 |
비정통 |
- |
- |
애신각라부준(愛新覺羅溥儁) |
보경 (保慶) |
1899 |
제12대 |
청 공종 (淸恭宗) |
민황제 (愍皇帝)(말대황제<末代皇帝>,손황제<遜皇帝>) |
애신각라부의(愛新覺羅溥儀)(푸이) |
선통 (宣統) |
1908-1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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