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 [, 1036~1101]

 

출생. 자 자첨(), 호 동파거사(), 애칭() 파공() ·파선(), 이름 식(). 소순()의 아들이며 소철()의 형으로 대소()라고도 불리었다. 송나라 제1의 시인이며, 의 한 사람이다. 22세 때 진사에 급제하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 수()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왕앙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미움을 받고  지방관으로 전출되었다.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은 읽지 않는다”고 한 말이 재앙을 불러 서울로 호송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 등의 대관()을 역임하였다.

황태후()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그는 중국 최남단의 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사망하였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주변에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은 새로운 시경()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는 그의 불후의 명작이다.

 

黃庭堅(1045~1105), 米?(1051~1107), 蔡襄(1012~1067) 과 함께 송 4대가 로 불리는 명필이며 왕희지와 안진경의 필법을 받아 공부하였다. 시 서 화 에 모두 능했고 해서와 행서를 특히 잘 썼다. 황주한식시권은 서예사에서 세번째로 우수한 행서작품으로 손꼽힌다. 황주에서 귀양살이 하던 중 세번째로 맞은 한식절의 우울한 심정을 짓고 썼다.

 

 

 

               

                                                                                                              淳化閣帖의 일부

 

 

 

 

 

赤壁賦

 

 

 

 

 

赤壁賦

 

 

 

 

64세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상해 박물관 소장

 

 

 

 

黃州 寒食詩卷  46세 때 작품 대만 박물관 소장

 

초입부는 가는다란 목소리로 호소하기 시작하여 마음을 다잡고 나가다가 春江에 이르러 다소 톤을 높이고 破?조에 이르러서는 격앙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시의 내용과 필체의 시각적효과가 맞아 떨어지니 명작중의 명작이라고 꼽히는 이유다.

 

 

 

이백의 시 58세 때 작품

[출처] 소동파의 서예세계|작성자 림호

출처 : 서각사랑 : 송계
글쓴이 : 송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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