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아들 왕헌지(王獻之)
왕헌지(王獻之, 344-386)는 왕희지의 일곱째 아들이다. 자는 자경(子敬)이고, 어렸을 때의 자는 관노(官奴)였다. 중서령(中書令)이란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왕대령(王大令)’이라 불렸고 왕희지와 함께 ‘이왕(二王)’ 혹은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기록에 의하면 왕헌지 형제 7명중 서예로 이름난 사람은 6명이다. 그러나 제대로 글씨를 썼던 사람은 왕헌지 한 사람 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헌지가 처음 글씨 연습을 할 때 진보가 더뎌 급한 마음에 왕희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언제쯤이면 연습을 다하여 서예가가 될 수 있나요?” 왕희지는 정원 안에 있는 18개의 큰 항아리 물을 가리키며, “네가 매일 물로 먹을 갈아 글씨를 쓰는데, 이 18개의 큰 항아리 물을 다 썼을 때 너의 글씨는 연습을 벗어난다.” 왕헌지는 그제야 안심하고 돌아가 각고의 노력을 했다.
왕희지는 조용한 것을 좋아해 항상 방문을 닫아걸고 글씨를 연습했다. 왕헌지는 부친의 글씨 쓰는 기교를 엿보려고 몰래 누각 마루에 구멍을 뚫어 아버지가 글씨 쓰시는 것을 훔쳐보고 동작을 배웠다. 그는 누각 마루에서 손으로 획을 이리저리 그어 부친이 쓴 글씨를 모두 마음속에 암기한 후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와 연습을 해서 마침내 각종 글자체를 모두 잘 쓰게 되었다. 그의 행서는 아버지의 내엽(內擫)의 필법을 고쳐 스스로 외탁법(外拓法)을 창조해서 글자의 넓은 기세를 증가시켰다. 그는 소해(小楷)도 매우 빼어나게 써서 성인의 경지에 들었으니 왕희지보다 못하지 않다.
왕헌지는 천부적으로 총명하고 영특했으며 서예 명문가의 훈도와 부친 왕희지의 정성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서예를 매우 좋아했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대담한 창신을 했다. 일찍이 진흙을 빗자루에 묻혀 벽에 사방 한 길이나 되는 큰 글자를 썼다. 이로 인해 그는 두각을 나타내며 매우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당나라 장회관은 『서단(書斷)』에서 그의 해서․행서․초서․비백서를 신품에 나열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려서 부친에게 배웠고 다음에는 장지를 배웠으며 후에 양식을 개변하여
별도로 그의 법칙을 창조했다. 진솔한 개인의 마음은 암암리 자연의 법칙에
합하고 그의 초일한 뜻을 보면 그와 비교할 사람이 없다.
幼學于父, 次習于張, 後改變制度, 別創其法, 率爾私心, 冥合天矩, 觀其逸志,
莫之與京.
장회관은 또한 『서의(書議)』에서 왕헌지가 행초서 외에 새로운 서체를 만든 것에 대해 이렇게 평론했다.
행서도 아니요 초서도 아닌 것이, 흐름은 문득 초서와 같고 열어 펼침은
행서와 같으니 초서와 그 중간이다. 옛날 인습에 의지함도 없고 차라리
법칙에 구속되어 더욱 빼어나게 하였고 간단하고 쉬움에 힘썼다. 뜻은
달리고 정신은 방종하여 초일함이 더욱 유유자적하니 일에 임하여 마땅함을
만들고 뜻에 따라 적절히 편해짐이 마치 바람이 불어 비가 흩날리고 윤기
나는 색의 꽃이 핀 것 같다. 필법과 체세에서 가장 풍류가 있는 사람이다.
非草非行, 流便于草, 開張于行, 草又處其中間. 无藉因循, 寧狗制則, 挺然秀
出, 務于簡易. 情馳神縱, 超逸優游, 臨事制宜, 從意適便有若風行雨散, 潤色
開花. 筆法體勢之中, 最爲風流者也.
이를 보면 서예사에서 왕희지와 더불어 ‘이왕(二王)’․‘희헌(羲獻)’이라 일컬음에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왕헌지의 서예 성취가 그의 부친을 넘어섰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송나라 미불은 그의 『서사(書史)』에서 평하길 “왕헌지의 천진하고 초일함을 어찌 부친과 비교할 수 있으랴[子敬天眞超逸, 岂父可比].”라고 했다. 장회관도 왕헌지는 “소해에 매우 능해 가히 미묘함을 다해 성인의 경지의 들어갔으니 근골의 긴밀함은 부친보다 못하지 않다[能極小眞書, 可謂窮微入聖, 筋骨緊密, 不減于父].”라고 했다. 그러면서 또한 칭찬하길 “정신의 용맹함은 세상을 덮을 만하니 하물며 그 아버지에 대해서도 오히려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 종요와 장지에 비하면 비록 강한 상대이나 여전히 사로잡고 누를 수 있는 기세가 있다[神勇蓋世, 況之于父, 猶拟抗行, 比之鍾張, 雖勍敵, 仍有擒蓋之勢].”라고 했다. 황정견은 왕희지․왕헌지 부자의 초서가 각기 특징이 있어 문장으로 비유한다면 왕희지의 초서는 『좌전(左傳)』, 왕헌지의 초서는 『장자(莊子)』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왕헌지의 서예가 그의 부친만 못하다고 했는데 당 태종인 이세민이 가장 대표적이다.
왕헌지는 비록 아버지의 풍모가 있으나 특별히 새롭고 교묘한 것은 아니다.
그 글자의 필세를 보면 성글고 파리하여 마치 엄동의 마른 나무와 같다. 그
붓의 자취를 보면 구속되어 마치 엄한 집안의 굶주린 노예 같다.……이 두
가지를 겸했으므로 서예의 병폐로다.
獻之雖有父風, 殊非新巧, 觀其字勢疏瘦, 如隆冬之枯樹, 覽其筆蹤拘束, 若嚴
家之餓隸……斯兼二者, 因翰墨之病歟.
당 태종은 그의 글씨가 마르고 파리하며 필치는 구속되었다고 했다. 남조 양나라 원앙(袁昻)은 『고금서평(古今書評)』에서 왕헌지의 글씨는 질질 끌어 “특히 견딜 수 없다[殊不可耐].”라고 했다. 객관적으로 논하면 왕헌지가 남긴 진적을 살펴볼 때 이러한 폄하는 적절치 않다. 그 필의는 밖으로 펼쳤으며 소쇄하고 뜻이 크다. 왕희지의 서예에 비해 더욱 자유롭고 표일한 아름다움이 있으니 그의 성취는 설령 왕희지의 높은 성취에 비교할 수 없지만 또한 감히 그의 아버지와 어깨를 견줄 만하다. 세상에 전하는 진적은 소해인 <낙신부십삼행(洛神賦十三行)>를 비롯해서 행초서인 <중추첩(中秋帖)>․<압두환첩(鴨頭丸帖)>․<보모전지(保母 )>․<입구일첩(卄九日帖)>․<지황탕첩(地黃湯帖)>․<사중령첩(辭中令帖)>․<아군첩(鵝群帖)>․<수의첩(授衣帖)>․<사내첩(舍內帖)>․<동산첩(東山帖)> 등이 가장 유명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헌지는 또한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한번은 환온(桓溫)이 그에게 부채에 글씨를 써줄 것을 부탁했는데 그는 실수로 부채 위에 붓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즉시 붓이 떨어져 더러워진 부분을 이용하여 한 마리의 소 그림을 완성했는데 매우 정묘하여 환온이 매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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