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리(未死里)
와석리 골 어구와 와석 주유소를 지나 와석분교로 들어가는 골짜기이다. 조선말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난리를 피할 수 있고, 흉년이 들지 않아 능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십승지(十勝地)중의 한 곳인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미사리(未死里, 죽지않는 곳)라 하였다.
십승지는 풍기 차암 금계촌, 봉화 동쪽인 청양현, 충북 보은 속리산, 운봉의 행촌, 예천 금당실,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부안의 금바위, 합천 가야산 만수동 등이다. 특히 조선시대 한양 조씨들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집안을 이끌고 미사리에 은거하였는데 그곳은 지금도 조촌(趙村)이라 하고 그 윗동네를 명생동(命生洞)이라고 한다. 조촌의 입향 시조인 조홍필의 무덤은 지금도 진별리 베리골의 양주터에 있다. 그 당시는 주로 경상도 사람들의 십승지 가운데 『七日 寧越正東上流 可藏亂踪 無髮者先入則否, 일곱 째의 승지는 영월 정동쪽 상류이니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한 곳이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오면 틀릴 것이다.』라는 말을 믿고서 명당인 이곳을 찾아와서 자리를 잡았다. 그 후에도 나라가 어지러울 때 평안도 함경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찾아든 곳이다. 이곳 십승지는 1993년 11월에 방영한 K.B.S 1T.V『향토기행』이란 프로에서 필자가 소개하기도 하였다.
노루목
싸리골에서 곡골, 대밭나드리를 지나 와석리와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풍리(義豊里)와 경계가 되는 마을이다. 지금도 노루목에 사는 아이들은 매일 40분 이상씩 걸어서 충북 땅인 의풍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널 노루목에서 의풍 노루목으로 넘어가는 산마루 정상에 바위 두 개가 노루뿔처럼 솟아 있으므로 이 마을의 이름을 '노루목'이라고 한다. 경치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산촌(山村)으로 어둔 입구에 있는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의 묘는 박용국 선생(영월 향토사 연구가)이 찾아내 성역화 하였다.
김삿갓 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 마대산 줄기가 버드나무 가지처럼 흘러내리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이어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마대산 자락인 어둔과 선락동에서 흐르는 냇물을 경계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널노루목의 풍요로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선(詩仙) 난고(蘭皐) 김삿갓의 묘는 버드나무 가지에 지은 꾀꼬리집 형상의 명당으로 안동 김씨(安東 金氏) 대종회 휴암공파 회장인 김천한(金天漢)씨가 비석을 세우고 매년 10월 1일 후손들이 찾아와 시제를 지내고 있다.
어둔(於屯)
김삿갓의 묘가 있는 노루목 성황당에서 서북쪽으로 30분쯤 들어가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가 있었던 곳이다. 어둔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대산에서 흐르는 계곡 사이로 좁은 돌길이 나 있는데, 그 우측은 선락동(仙樂洞)이고 좌측으로 가면 김삿갓이 살던 집터가 나온다. 어둔에는 지금 산(山)공부를 하는 젊은 여자가 혼자 살고 있다. 이곳은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의 양백간(兩白間)으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의 3도 접경 지역이다.
조선 명종 때 풍수(風水), 천문(天文)에 도통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도 의풍(儀豊)을 가리켜 피장처(避藏處)로서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좁은 골짜기로 해가 일찍 지고 어두운 곳이므로 '어둔'이라 불렀다고 한다.
퐁퐁소
미사리에서 조촌으로 가는 열재 입구에 있는 소(沼)이다. '퐁퐁소' 위에는 2m 높이의 작은 폭포가 있는데 물 떨어지는 소리가 퐁퐁거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둑바위
미사리 입구에서 실개천을 따라 약 1.5km쯤 올라가다가 도로 우측에 있는 큰 바위이다. 길이 험하고 바위 밑으로 맑고 찬 계곡이 흘러 여름 한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예전에 이 바위 밑에서 도적이 길 가는 행인의 물건을 빼앗았으므로 '도둑바위'라 불렀다. 그 뒤에는 현재 작은 절을 짓고 있다.
절골
조촌 동남쪽인 주석분교 건너편에 있다. 옛날 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절터에는 기왓장과 아름드리의 은행나무 뿌리가 발견된다. 예전에 큰 절집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이 생겨 스님들이 불태워버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골말
조촌의 와석분교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한 때는 대여섯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조씨성을 가진 1가구가 살고 있다.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므로 '골마을→골말'이라고 하며, 이곳의 물은 조촌의 식수로 이용된다. 마을 어귀에 큰 너래반석과 돌서덕이 많이 널려 있다.
젖동개(檜洞)
명생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있는 강원, 충북, 경북 삼도의 경계인 어래산(御來山, 1,063.6m)을 넘으면 충북 의풍리의 어은과 경북 부석면 남대리로 갈 수 있다. 즉 강원, 충청, 경상도의 접경으로 전나무(檜木)가 많았으므로 '전동개→젖동개(檜洞)'라고 한다. 일설에는 경계 지역의 마을이므로 '저쪽동네→저동네→젖동개'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잘못된 주장이다.
의풍에서 고치골을 지나 10리쯤 가면 경북과 경계인 영풍군 단산면 마락리 섶밭 마을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만나는 곳이다 이곳 고치령 마루턱에 있는 당집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는 금성대군의 영정을 함께 모시고 있다. 태백산 자락에 지리한 중동면 녹전 서낭당의 단종 영정 앞에는 매년 주민들이 소 한 마리를 바쳐서 당고사를 지냈듯이, 소백산 두레골(경북 영풍군 단산면 단곡리)에는 산신당(山神堂)이 있고 그 위에는 금성대군(錦城大君)을 모시는 上堂이 있다.
상당에는 순흥에서 유배생활 중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꾸몄던 단종 복위계획이 탄로 나자 죽음을 당한 금성대군의 피묻은 신석(神石)을 모시고 있다. 원래 이 신석은 순흥면 죽동 서낭당에 모시고 순흥사람들이 소를 잡아 당고사를 올렸으나, 구한말 소백산을 중심으로 의병들의 활동이 격렬해지자 일본 헌병들이 순흥에 주둔하면서 마을과 서낭당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면서 이곳 두레골로 옮겼다.
지금도 두레골 사람들은 당고사를 며칠 앞두고 풍기 우시장으로 가서 제물로 바치는 황소를 사서 『謹封』이라 쓴 한지를 머리에 씌우고 양반님(소)을 모시고 온다. 두레골로 옮겨진 소는 제관으로 뽑힌 사람으로부터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큰절)를 받으며 며칠간 호강을 누린다. 정월 열 나흘에는 산신당에 새앙(솔째로 바치는 메)을 올리고 황소의 지레, 간, 염통 등은 上堂인 금성대군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산신당으로 옮겨서 당고사를 지낸다.
이튿날 정월 대보름에는 子時를 기해 본고사를 올린다. 지금도 당고사에 쓰인 고기와 음식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초헌관집에 모여 화합의 큰 잔치가 벌어질 때 쓰인다.
삼도봉(三道峯)
해발 1,063.6m의 어래산(御來山) 줄기로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의 삼도가 접하는 접경 지역이므로 '삼도봉'이라 한다. 이곳 삼도봉 밑에 있는 충북 단양군 의풍면의 의풍초등학교는 지금도 강원도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사는 학생과 경북 부석면 남대리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며 가을 운동회 때는 삼도(三道) 주민들이 함께 어울린다.
조촌(趙村)
와석분교가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이후에 한양 조씨 후손들이 그 집안을 이끌고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이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했으므로 '조촌'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입향 시조인 조흥필(1707∼1777년)은 진별리 베리골에 부인 인동 장씨와 함께 묻혔는데 그 묘를 가리켜 '양주터'라 부르고 있다. 이곳은 대다수가 한양 조씨로 한때는 4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여덟 가구가 살고 있다
출처 : 김천고2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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