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들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尙書⌉“堯典”에서 舜이 말하길 시는 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요. 노래는 음성을 길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1) 이것으로 보아 시와 노래는 당시에도 구분하여 썼다고 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後世 사람들이 漢詩를 말함에 있어서는 大部分 五文字 或은 七文字로 構成된 것을 이른다. 漢詩도 다른 種類의 詩와 같이 그 本質은 各自의 性品과 感情을 基調로 하고 辭句格調를 정연하며 各自의 環境과 時代性을 發揮함이 重要한 條件이 됨은 勿論이다.



2. 中  國  詩


  중국의 전통적인 시가 양식으로는 周代의 詩經詩, 南方의 楚辭, 漢代의 樂府(21), 漢․魏․六朝의 古詩, 唐代의 近體詩, 唐․宋의 詞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우리 나라가 創作上에 採用한 것으로는 근체시가 絶對 優位를 차지하고 古詩가 그 다음이며 詩經詩에서 淵源된 四言體 2)와 樂府․詞에서와 같은 長短句의 양식은 훨씬 낮은 정도에 그쳤다. 당대에 완성된 근체시는 1수의 句數, 매구의 語數․押韻, 平仄의 안배, 對句 등에 있어 매우 복잡하고 엄격한 규칙성을 가진 定型詩로서 律詩․絶句․排律의 구별이 있고, 또 각각 五言과 七言으로 나뉘는데 그 基準的인 樣式은 律詩에서 볼 수 있다. 3)

 1) 古    詩

 

  古體詩라고도 한다. 五言古詩․七言古詩 등이 있다. 고시라는 말은 六朝時代에, 그 시대 이전의 고대의 시라는 뜻으로, 주로 漢代의 시를 가리켰다. 唐代에 이르러 近體詩가 일어난 이후부터는 근체시에 대한 고대의 시, 즉 태고 때부터 隋代에 이르는 모든 시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체시 성립 이전의 시라도 《樂府體》(주21)의 것은 고시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또 근체시 성립 이후의 것이라도 근체시의 법식에 따르지 않고 그 이전의 시의 體式에 따라서 지은 것은 고시라고 한다. 고시가 근체시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① 한 편의 句數에 제한이 없다.

 ② 각 구의 平仄의 구성에 일정한 규칙이 없다.

 ③ 押韻은 每句의 끝에 하는 경우가 있고, 隔句의 끝에 하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④ 한 편을 통하여 같은 종류의 운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도중에서 운을     바꾸기도 한다. 이렇게 운을 바꾸는 것을 換韻이라 한다.

 ⑤ 仄韻이 사용되기도 한다.

  古體詩는 近體詩에 비해 대체로 자유로운 表現을 하기 쉽기 때문에 詩題에 따라서는 이 體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근체시가 발달한 이후에도 고체시가 쇠퇴하지 않은 것이다.

  韓國의 五言古詩는 新羅 眞德女王이 唐나라 高宗에게 和親策의 一環으로 보낸 《太平頌》이 最初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高句麗 僧侶 定法師의 《詠孤石》이나 高句麗의 將軍 乙支文德이 隋나라 將帥 于仲文에게 戰略的으로 지어 보낸 《遺隋將于仲文)》도 五言古詩인데, 이詩는 우리 나라 最初의 漢詩라는 것이 學者들의 通說이다. 新羅 末의 崔致遠과 高麗 初의 金富軾․崔惟淸 等의 古詩도 名篇으로 꼽힌다.

  七言古詩는 원효의 시라든지 수로부인의 說話에 나오는 《海歌》 등에서 그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高麗時代의 金克己와 李奎報․洪侃․李崇仁 등의 칠언고시와 韓末의 黃玹의 作品도 大作으로 꼽힌다. 4)

2) 唐   詩(近體詩)


  古體詩에 맞서는 개념의 詩體로서 今體詩라고도 한다. 음절의 억양에 따른 배열 법이나 對句 등 구성 법에 일정한 규칙이 있는 시체이다. 五言(1구가 5자)과 七言(1구가 7자)의 絶句와 律詩의 2종이 있다.

  唐나라 때 근체시가 확립되었고 齊․梁나라 때에 일어난 ?��四聲․八病說(주17)?��로 대표되는 중국어 음운의 특징에 대한 자각이 근체시의 성립을 촉구하였다. 종래에는 다만 무의식적으로 청각의 아름다움에 호소할 뿐이었던 것이, 일정한 규칙을 지향하게 되었다.

  絶句는 四句로 되어 있다. 五言四句의 體는 六朝의 民歌에서 發生하였다. 처음에는 卑俗한 편이었으나 六朝 末(3~6세기)에는 내용과 체제가 정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七言은 五言의 체가 整理된 뒤에 일어나 初唐(7세기) 末境에 자리를 잡는다. 절구는 短詩形이기 때문에 刹那的 感情을 凝縮시키는 데 적절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표현으로 오랫동안 餘韻을 남긴다.

  律詩는 八句인데, 2구를 1연으로 하고 4연으로 되어 있다. 중간 2연은 對句를 쓰는 규칙이다. 平仄의 配列法은 絶句와 같다. 이미 齊․梁時代부터 八句의 五言詩는 자주 만들어졌고 초당 때 律詩로서 자리를 굳혔다.

  七言은 發生이 늦었고 또 五言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卑俗한 가락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는데, 初唐 末期에 詩人의 本格的인 作品이 나타나 急激하게 發達하였다. 오언과 칠언이 다같이 應酬의 시로서 발달하였는데, 여기에 內面的인 깊이를 가하여 一層 高級文學으로 完成시킨 사람은 李白과 杜甫였다. 律詩는 絶句와 같이 刹那的 感情을 凝集的으로 노래하나 중간의 對句의 妙味, 緻密한 構成美 등으로 보다 복잡한 맛을 지닌다.

  율시와 같은 詩體에 排律이라는 것이 있다. 律詩의 中間 對句의 部分이 늘어난 것인데, 長律이라고도 한다. 儀禮的 應酬에 맞는 重厚한 詩體이다. 五言이 正格이며, 七言은 수도 적고 通常 詩體의 分類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5)






3. 韓國의 漢詩


 1) 詩    歌


  韓國人이 漢詩를 짓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最初의 古詩歌로 전해지는 노래 중에는 晉나라 惠帝때 崔豹가 편찬한 「古今注」 卷中 音樂 第三에 실려있는 것으로, 늙은 狂夫의 처가 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은 남편을 원망하며, 공후를 타면서 부른 노래로 남편의 죽음을 애처로워하는 심경을 노래로 남긴 고인의 감정 넘치는 생활 모습과, 남편을 따라 스스럼없이 죽음의 길을 택하는 옛 여인의 숭고한 정신을 엿 볼 수 있는 것으로, 조선의 津卒 霍里子高의 妻 麗玉이 지은 公無渡河歌가 있다. 6)

  또한 고구려 제2대 유리왕 3년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가 죽고 왕이 다시 중국 漢나라 여인 稚姬와 鶻川여인 禾姬를 얻어 두여인이 모두 총애를 받다가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동안 왕의 총애를 독점하려 싸우다가 마침내 치희가 한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듣고 말을 달려 쫓아 갔으나 화가 난 치희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홀로 돌아오던 왕이 쌍쌍이 사이 좋게 날아다니는 꾀꼬리를 보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자신의 처지가 더욱 외로움을 읊은 노래로서 黃鳥歌가 三國史記에 수록되어 있다.7)

  가락국의 아홉 추장들이 백성들을 통솔하고 지내던 중 龜旨峰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데 임금이 되려고 내려온 자기를 맞이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라고 가르쳐 주었다는 노래인데. 이 노래가 바로 迎神君歌(龜旨歌)이다.8)


 2) 鄕    歌


  鄕歌는 漢字의 音과 訓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른바 吏讀式 표기법으로 記寫된 新羅의 노래다. <三國遺事>에 14首, <均如傳>에 11首, 도합 25首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향가의 형식에는 四句體․八句體․十句體가 있으며, 내용은 신라 귀족들의 생활감정이나 불교적인 것이 많으며, 작자는 승려나 화랑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 뽑은 薯童謠는 百濟 武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 신라 진평왕의 딸 善花公主를 자기 아내로 삼기 위하여 지어 퍼뜨린 노래로 童謠의 성격을 띠고 있는 四句體의 향가이며,9) 獻花歌는 純貞公이 江陵太守로 부임하러 가던 도중, 그의 부인 水路가 절벽 위에 피어 있는 철쭉꽃을 갖고 싶어하자,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꽃을 꺾고 이 노래를 지어 함께 바쳤다는 四句體의 향가다.10)




 3) 漢    詩


  한국 최초의 漢詩로는 서기 623년 고구려 영양왕때의 명장으로 乙支文德의 與隋將于仲文詩가 널리 알려진 바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고구려 군사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음을 알고, 시를 지어 보냄으로서 스스로 물러가게 했다는 명시이다.11)


 가) 高麗時代의 漢詩

   

  고려 전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朴寅亮․金富軾․鄭知常이 있는데, 김부식을 위시한 당시 귀족시인들의 귀족적 여유에서 나온 豊厚한 시풍이 이 시대 한시의 특징을 이루었다. 특히 西京 출신 정지상은 서경 특유의 情調를 바탕으로 하여 화사한 시어와 활기찬 율동으로 노래했다.

  고려 중기 무신집권시대의 한시는 구귀족 세력의 후예인 李仁老, 林椿을 위시한 竹林高會 그룹과 신진 士人을 대표하는 李奎報 사이의 대조적인 시세계로 나뉜다. 이인로는 무신정권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식과 구귀족사회에 대한 회고적 정서 속에서 시에 대한 藝道的 인식으로 기교가 빼어난 시를 썼고, 임춘은 불우한 처지에서 자기 의식에 집착된 산문 성이 강한 시풍을 드러내었다. 이에 대해 이규보는 독창성을 강조하는 진취적인 창작 자세로 다양한 소재를 다루어 豪逸․동탕, 변환 자재한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어 고려 일대의 詩豪로 인정되며, 우리 나라 漢文學을 中國과 對等한 水準에 올려놓은 學者로 매김 된다. 특히 그의 長篇 敍事詩 《東明王篇》은 民族的 ․民衆的 傳承인 東明王神話를 高次元的으로 認識, 情熱的으로 詩化한 것으로서, 그 뒤 元나라 君臨期로 접어들면서 나온 李承休의 《帝王韻紀》와 함께 민족서사시의 雄篇이다.

  高麗 後期는 僧侶들의 詩作 활동과 性理學 수용을 지향하는 新進 士大夫 層의 새로운 文化的 意慾에 依해 詩史는 보다 精神的으로 深化되면서 다채롭게 展開되었다.  

  慧諶․景閑․普愚 등의 禪詩는 인생의 의미를 불교적으로 심화시키면서 自然에 새로운 象徵 기능을 부여했고, 圓鑑은 元나라 군림하의 고려 민중의 고난을 위시하여 세속의 일들을 매우 청신한 시풍으로 표출하였다. 성리학적 사유에 접한 신진사대부층은 外飾的 기교를 극복한 가운데 李齊賢의 老健, 李崇仁의 蘊藉, 鄭夢周의 純粹한 시풍과 李穡의 집대성적 浩大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앞 시대의 이규보에게서 그 端初가 열린 농민현실 고발과 같은 社會詩의 전통이 이 시대의 安軸 ․李穀 등에게도 이어졌으며, 이색은 또 일련의 民俗詩를 남기기도 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鄭道傳의 밝고 역동적인 리듬을 가진 詩 世界는 그의 革命的 進就性의 詩的 發現이다.

  한편 이제현과 閔思平에 의한 고려 俗謠의 漢譯이 《小樂府》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한시의 自國 민간가요 세계에의 접촉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시사적 축적으로 이 시기에 조운흘의 《三韓詩龜鑑》 등 두세 가지 選集이 나오기도 했다.





나) 朝鮮時代의 漢詩


  조선 전기의 詩史는 사대부 층의 自己分化에 의한 상이한 성격과 체질을 가진 그룹들의 존재를 배경으로 다양한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조선 왕조 체제를 수립하고 15세기 역사의 주역이 되었던 勳舊官僚系는 대체로 문학의 표현이나 장식적인 기능을 존중하는 태도로 창작에 임했는데, 이 계열의 전형적인 존재인 徐居正은 다분히 遊閑的인 기분으로 감각적인 이미지와 교묘한 시어를 구사하여 華美․富艶의 미학을 지어내었고, 같은 시기의 姜希孟은 그의 田園 생활의 체험에서 민요의 세계를 작품화하기도 했으나 귀족적인 閑雅의 詩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뒤의 成俔의 시는 主情性․낭만성을 띠면서도 불우한 서민생활을 그려 보이는 등 작품세계의 폭을 넓혀나갔다.

  한편 체제에서 일탈된 세력이라 할 수 있는 方外人界의 대표적 인물인 金時習의 시세계는 超逸한 심회와 고원한 포부가 읊어지기도 하였으며, 在野 세력으로 남아 있다가 士林系의 선두로 중앙에 진출한 金宗直은 중후하고도 역동적인 시풍으로 유명했는데, 서거정. 김시습. 김종직은 각기 길을 달리해 조선시단의 밑거름을 이룬 대 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시에는 중국 宋詩의 영향이 현저했던 편이었는데 이런 경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시인은 李荇과 朴誾으로, 이들을 '海東江西詩派'라고 불렀다.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官奴 출신 魚無迹이 지배층에의 강렬한 저항 시편을 남겨 이 시기의 시사상 특이한 존재로 떠올랐다.

  官撰으로 성종 때 이루어진 《東文選》과 중종 때 이루어진 《續東文選》의 시 부분과 김종직의 《靑邱風雅》는 이 시대의 주요 시선집이다.

  16세기에 들어와 사림파의 정치적 역할이 증대되고 道學의 학문적 탐구와 실천적 지향이 보다 본격화되면서 시사에도 새로운 조류가 대두되었다. 徐敬德․李彦迪․李滉․李珥 등이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며, 宋翼弼은 미천한 신분 출신이면서도 도학파와의 연계에서 달관의 인생관을 시로 표출하였고, 鄭澈은 그의 국문시가와의 대비에서 한시가 떨어지는 편이어서 한국 한시의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宋詩의 思辨性․技巧性과 도학파시의 도덕적 制御性에 반발하여 이를 극복하려 唐詩를 배워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지향하는 운동이 白光勳․崔慶昌․李達에 의해 주도되어 이들을 “三唐詩人”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삼당의 시풍은 林悌에게 이르러 한층 분방하게 나타났으며 許筠에게로 이어졌다.

  시에 대한 감식안에 뛰어났던 허균은 자기 시대까지 조선왕조 한시의 선집인 《國朝詩刪》을 내어놓기도 하였다. 허균과 막역한 사이였던 권필은 淸麗한 시풍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는데 불우한 생애로 강한 현실부정의식을 지니고 있어 光海君의 亂政을 풍자한 시로 筆禍를 당해 죽었다.

  이 시대 시사에서 특기할 만한 다른 한 가지는 黃眞伊․李梅窓․李玉峰․申師任堂․許蘭雪軒 등 여류 한시인 들의 작품활동이다. 이들은 모두 천부적인 시재를 타고난 출중한 규수시인이었으며 여성만이 표현할 수 있는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조선 후기의 시사적 특징은 주자학적 관념문화의 해체에 따른 상대 현상으로 시에서도 경험과 감각이 강조되어, 종래의 시가 대체로 豊雄․高華의 취향이었던 데 대하여 奇詭․尖新의 미학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민족주체의식의 점증으로 朴趾源의 '朝鮮風'이나 丁若鏞의 '朝鮮詩'라고 부를만한 작품군의 출현이 있었으니 그 첫째는 종래의 일반적인 고․근체(古近體) 형식에 따르면서 지극히 조선 적인 풍토․현실을 寫實風으로 다룬 작품 군으로서 申光洙․李德懋․朴齊家․柳得恭․정약용․李學逵 등의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한국의 역사․풍물․민속 등에서 취재한 다분히 서사적인 내용을 주로 長短句의 형식으로 표출한 〈樂府類〉로서 沈光世의 《海東樂府》를 위시하여 李瀷의 《樂府》 등 왕조 말기 李裕元의 《嘉梧樂府》에 이르기까지 많은 악부가 출현하였다.

  셋째는 한국 고유시가의 漢譯詩로서 洪良浩의 《靑邱短曲》, 申緯의 《小樂府》, 權用正의 《東謳》 등 한국의 時調와 민간가요의 한역시가 상당량 출현하였다. 

  넷째는 민요취향의 창작 시인데 신광수의 《金馬別歌》, 李鈺의 《俚諺》, 李安中․정약용의 일련의 작품들로서 한국 민요 중의 특히 婦謠․情謠의 세계와 氣息을 통하고 민중의 삶의 현장을 표출함으로써 한국 한시 가운데 한국적 情調를 가장 짙게 표출해낸 것이 특색이다.

  다섯째는 '金笠詩'류의 戱作 한시들로서 한시 본래의 형식과 품격을 대폭 파괴하고 삶을 해학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작품 군이 조선 후기 시사의 전개 양상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나 그렇다고 이것들이 전부는 아니다. 방대한 작품을 남긴 신위의 다채로운 작품 세계, 性靈論的 시관에 입각한 金正喜의 시세계 등도 있다.

  한편 서울의 中人層이 중심이 된 委巷詩人들의 詩社의 결성을 통한 작품활동도 이 시대의 두드러진 漢詩史의 한 現狀이다. 洪世泰․千壽慶․張混․趙秀三 등을 그 주역으로 들 수 있다.

  왕조 말에 金澤榮․黃玹등이 나와 한시사의 마지막을 장식했고 일제강점기 8․15광복 전까지는 이민족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정황에 대응하는 憂國 情意를 표출하였다.

  비평․이론을 위시하여 한시에 관련된 이야기를 기술한 詩話로는 고려시대 이인로의 《破閑集》을 필두로 이규보의 그 방면의 저술을 후대에 모아 엮은 《白雲小說》, 崔滋의 《補閑集》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서거정의 《東人詩話》, 역대 제가의 시화 중에서 단행본이 될 수 없는 것들을 모아 만든 洪萬宗의 《詩話叢林》, 홍만종의 저술인 《小華詩評》, 이덕무의 《淸脾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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