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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역사(요약)

고구려(高句麗, 기원전 37년경~668년)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장수왕 이후 국호를 고려(高麗)로도 불렀으나, 대체로 고구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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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고구려는 일찍이 부족 국가로 압록강 중류 동가강(佟佳江) 유역을 중심으로 흥기한 예맥계통의 고구려인이 기원전 3세기경부터 부족 연맹 국가의 기틀을 다진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 고구려는 부여 및 한군현(漢郡縣)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세기 초부터 이미 왕호를 제정하고 예(濊)와 한(漢)의 창해군(滄海郡)을 없애고, 기원전 75년 한의 속현인 현도군을 압록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등 부족 연맹체를 굳혔다.

고구려는 이후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서 건국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했다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3년에는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2. 성장

53년에 즉위한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옥저(沃沮)를 복속시키는 등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왕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 옥저·동예(東濊)를 공격하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미치고,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태조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한군현에 대한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4년 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故國川王) 때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는 194년에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위(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구련성(九連城) 지방을 공략했다. 그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난 간 일이 있다.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고구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는데, 미천왕(美川王)은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서안평을 점령하고 뒤이어 낙랑군(樂浪郡) 및 대방군(帶方郡)을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지방의 흩어져있는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그 다음 왕인 고국원왕 치세인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으로 인해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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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융성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게 되고,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시기는 바로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했던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로,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과 장수왕(長壽王) 대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서쪽으로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이어서 등장한 북연(北燕)과도 친선관계를 수립하였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비려(碑麗)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왜(倭)와 가야(伽倻)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왜를 섬멸했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대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성(平壤城)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동맹을 맺어 고구려 세력에 대항코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였고,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파일:Three Kingdoms of Korea Kor.png

494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4. 쇠퇴와 멸망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헸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와 백제 간 동맹을 깨트리는 한편, 돌궐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돌궐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수는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각각 침공하기에 이른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도 떨어졌으며, 수군도 풀랑을 만나 본토로 퇴각하였다.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대장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 군사들과 백성들의 끈임없는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침공했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그 때마다 연개소문이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고구려는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평양성을 공격한 나·당 연합군을 고구려 군민이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6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淵男生)·연남건(淵男健)·연남산(淵男産) 형제는 막리지(莫離支) 자리를 둘러싸고 서로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劍牟岑), 안승(安勝)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복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 옛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大祚榮)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東牟山) 일대에서 발해(渤海)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계승되었다.

한편 10세기에 들어서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고려(高麗)가 각각 고구려의 계승국 임을 자처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때에도 남아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자료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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